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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견회 안동지역 탐사기행 2013.6.6
보견회 6월 유적지 탐방지역은 안동이다. 당초 안동의 하회마을,병산서원,봉정사,도산서원,그리고 용수사까지 욕심이 나서 모두 탐사할 계획이었으나 마침 현충일 휴일이고 더구나 금요일만 쉬면 4일간 연휴가 되어 대부분의 회사 학교가 쉬는 바람에 이날 고속도로는 아침 일찍 나들이,여행가는 차량행렬로 마치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정체현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대구팀과 영천의 김용자여사(조원대동문의 부인)까지 병산서원에 모이기로 했는데-- 아침 7시정각에 떠나 일행을 싣고 버스는 죽전전류장에서 마지막 4명을 태우니 서울인원이 19명, 대구의 5명 영천의 1명까지 모두 25명이다.
서울팀이 예정보다 1시간 이상 늦게 도착한 관계로 시간이 바빴다.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이미 영천에서 온 김여사는 약속시간 이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고 대구팀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서울팀만 늦게 도착하여 미안,미안 만땅 미안이다. 김용자여사는 부군인 조원대회원과 같이 오기로 했으나 일을 하다 허리를 삐어 조동문은 같이 오지 못하고 혼자 왔는데 부인들도 같이 오는 줄 알았단다. 수필가로 이미 우리 동문들 한테는 알려져 있어 모두들 반갑게 맞아주었다.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예약한 문화해설사를 만났다. 논어에 나오는 극기복례에서 따온 복례문을 지나 입교당에서 해설사의 설명이 계속된다.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 양쪽에 있는 기숙사 동재와 서재를 보면서 당시 한학을 공부하던 학생의 신분이 되어본다. 예전엔 만대루에 올라 병산을 감상하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만대루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가장 뒤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인 존덕사는 서애선생과 아들 류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존덕사 양 입구에는 380년 수령의 목백일홍(배롱나무)이 세월을 세고 서 있다. 여름철이면 빨간 백일홍꽃이 장관인데--복례문 앞으로 모여 단체사진을 남겼다.
병산서원(倂山書院)-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건축,한국건축사의 백미 병산서원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적 건축물로서,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셋째아들
류진(柳袗)을 배향한 서원이다.류성룡(柳成龍)선생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 되어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제자들과 유림이 뜻을 같이 하여, 서원 안에 사당(존덕사)을
세우고 위패를 모셔서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고 추모하며 향사(제사)를 올리던 서원이다. 이 제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고려 때, 안동의 풍산현에 풍악서당이 있어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후 고려말,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무렵,
그곳 풍악서당에서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
였다고 한다. 이때,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호패와 땅)을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
문에 열중하도록 격려 하였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
끄러워 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것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서애 류
성룡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였기에 유림들은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였다고 한다.
서애선생께선 그 문의를 듣고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당"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1572). 임진왜란으로 불에탄 서당을 다시 중건하였고(1607), 사당 '존덕사'를 건립하면
서 서원이 되었다.(1610)
그후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고
종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사라지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빼어난 자연경관이 병풍을 둘러친 듯하여 '병산'이라 불기기 시작하였다. 화산을 등지
고 앞으로 낙동강이 백사장과 함께 굽이쳐 흘러가고 그 투명한 푸름은 소나무의 짙푸
름과 서로 다투는 듯 조화롭다.
만대루에서는 주변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입교당에서는 자연과 조화된 병산
서원의 미(美)를 더욱 느낄 수 있다.
복례문(復禮門) 논어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에서 따온 것으로 자기를 극복하고 예를 갖추는 것
이 인(仁)이다 라는 것으로 병산서원의 첫 대문에서 선비정신을 찾게 한다.
입교당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강학당(講學堂), 한마디로 수업을 받던 '교실' 이다.
입교당은 중앙은 강학당, 동쪽으로 명성제 서쪽으로 경의제로 모두 세칸을 나누어
져 있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 라는 뜻의 입교당은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병산서원의 중심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재와 서재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에 위치.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워져 있는 이 건물은 당
시 학문에 열중하던 유생들의 기숙사였다.
만대루(晩對樓)
유생들의 행사때의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 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이다. 전면 7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앞 강 건너편으로 병풍처럼 늘어선 병산이 아름답다. 이곳에서 시연도 열리고 강연
도이루어졌다. 건축을 배우는 건축학도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존덕사
서원 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서애 류성룡선생과 셋째아들인 류진의 위패 가 모션진 사당이다. 前學後祀 앞에는 강연장이 뒤에는 사당이 위치한다.
병산서원은 필자가 수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데 역시 여름철 목백일홍(배롱나무)꽃이 붉게 피어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병산전체가 붉은 배롱나무꽃으로 물든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복례문 앞에서 단체사진을 남기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했다.
하회마을을 생략한 것이 좀 아쉬웠으나 시간상 불가능하였다. 하회마을 학예사께 전화로
미안함을 전했다. 봉정사 입구에 우리가 예약한 식당이 있었다. 하회마을을 생략하니 시간이
충분했다. 식당에 와서야 김여사와 대구친구들 충분히 인사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보견회 회장으로서 인사와 건배를 마치고 대구에서 온 동기회 회장과 총무께 건배제의를 부탁
했다.오늘 처음 참여한 전현석동문, 그리고 스폰서인 김문헌회원께도 고맙다는 박수를 보냈다.
입교당에서 해설을 듣다.
만대루에서 바라보면 강건너 병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저 있다.
예쁜 연목 그리고 배롱나무
기둥은 원형 그대로를 쓰되 받침돌과 균형을 잘 이룬다.
명성제
경의제
동직제
정허제
병 산 보호수 배롱나무/사당인 존덕사(尊德祠) 문돌기둥에 그려놓은 팔궤기호는 연못 우뢰 물 하늘 바람 산 붕 땅 을 가리킨다.
통 시
복례문 앞에서
천등산 봉정사(鳳停寺)
요즈음은 어느 곳이나 문화재 해설사가 있다. 유적지 외에도 사찰마다 해설사가 있어 설명을
들으면 해설간판에 없는 내용도 많이 듣게 된다. 천등산과 봉정사에 얽힌 전해오는 얘기가 흥
미롭다.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의상 대사의 제자인 능인 대덕이 창건하였으며
원래는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천녀
가 스님의 수행에 감복하여 굴안을 훤히 비추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산이름을 천등산이라 하
고 스님이 공부하던 바위굴을 천등굴이라 불렀다. 스님께서 수도를 한 후 도력으로 종이 봉을
접어 날렸는데 이 종이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하였다. 그 뒤 6차례에 걸쳐 중수하
였으며 현재 극락전(국보 제15호),대웅전(국보 제311호),화엄강당(보물 제448호),고금당(보물
제449호),후불벽화(보물 제1614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20호),영신회괘불도(보물,제
1642호),아미타설법도(보물 제1643호)가 있고 삼성각,만세루,공덕당,종각,삼층석탑과 부속암
자로 영산암,지조암이 있다.
극락전(국보 제15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으로서,1972년 해체보수 시 발견된 기문장처에 의해서 공민왕 12년(1363)
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중수는 보통 100~120년 후에 시행되므로 추정된 건립년도는
아마도 1200년대 초일 것이라는 학자들 견해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고려 우왕(1376)때 불탄 건물을 새로 지음)으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봉
정사 극락전이 앞100년이상 앞선 건물로 판명되어 정확한 연도를 표기치 못하여 무량수전을 말
할때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 중의 하나로 표기한다. 극락전 건축 양식으로는
신라시대 양식으로 거의 1천년이넘는다.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불로 모신 국보 제311호의
법당이다. 조선초에 지어진 다포식 건물이며 내부는 고풍스런 단청이 아주 잘 남아 있고 외부는
단청이 상당히 퇴색되어 있다. 1997년 탱화를 보수할 시 영산회상도(후불벽탱화)가 발견되었으
며 이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의 후불벽화보다 40여년이 앞선다. 극락전이 워낙 유명하여 세인에
게 가려져 있었으나 건축의 정교함의 아름다움으로 근년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함으로써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영산암
봉정사 부속암자로 주 법당은 응진전(나한전)이며, 법당에는 흙으로 조성된 삼존불이 모셔져 있
고 좌우로 16아라한이 모셔져 있다. 암자구조는 사찰의 전통적인 ㅁ자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아름답게 꾸민 정원을 연상하리만큼 멋진 풍경에 감탄사가 연발된다. 영화촬영 장소로 선
택될 충분한 환경이라고 여겨진다.
봉정사는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영화의 촬영장소로 유명세를 탔고
또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안동을 방문 했을 때 이곳 봉정사를 찾아 더욱 유명해졌다.
다음 코스인 용수사로 달린다.
식당 봉정사 일주문 천등산 봉정사 계단길 대웅전 대웅전 무량해회 화엄강당 만세루 만세루 대청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경청하고 있다.
극락전 앞마당 극락전(국보 제15호) 고금당 범종각 대웅전 내부 대웅전 천정 석조여래좌상 영산암
최문택&박정륭회원 우화루(雨花樓) 우화(雨花)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하였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송암당(松岩堂) 삼성각 단체사진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촬영장소
용두산 용수사(龍頭山 龍壽寺)-국왕의 원찰 유학의 본향
용수사는 필자도 처음 찾는 곳이라 인터넷으로 사전 검색을 해 봤으나 자료가 충분치 않았다.
김용자여사의 안내로 용수사에 도착했다. 일주문 옆으로 차를 타고 사찰 내로 들어갔다.
2만평이나 된다는 넓은 사찰 경내에는 지금도 큰 건축물이 불사되고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미륵 돌부처가 우리 일행을 환영한다. 많이 들어서 이미 정감이 가는 부처님이
다. 돌부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통일미륵부처님
북한 함경도에 살다가 2003년 개성 영통사 앞 마을로 이사한 어느 보살님이 먼저 탈북하여 중국
에서 살고 있는 자식들의 무사안일과 상봉을 발원하며 매일 기도를 3년째 하던 중 어느날 꿈속
에서 친정 아버지가 나타나 집 뒤에 묻혀 있으니 꺼내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냥 지나치려했으나
연3일 계속 꿈에 나타나는지라 과연 파보니 돌로 조각된 불상이 나왔다. 이 불상은 분명 친정아
버지의 현신이라고 믿고 지속적인 기도를 100일정도 하였을 때 갑자기 조카가 찾아와 같이 탈북
하자고 하였다. 200kg이상되는 돌부처를 조카와 같이 광목천에 둘둘 감고 중고차에 실었다.
보살님은 자신이 직접 담은 3년 묵은 간장을 유리병에 담아 흔들리는 차 위에다 메달고 가던중
떨어져 광목천에 쏟아져 한여름 마치 시체가 썩는 것 같은 냄새가 진동하였다. 중국쪽으로 가
던 중 경찰차 심문을 받고 차안을 들여다 보던 경찰이 얼굴을 찡그리며 이게 뭐냐고 묻자 아버
지가 썩는 병에 걸려 병원으로 옮기는 중이라고 하면서 간신히 탈북에 성공했다. 그뒤 단동에
도착한 그들은 오매불망 그리던 자식들과 상봉이 이루어지고--마침 그때 사업에 실패 이곳으
로 피신온 어느 사업가가 이 기적같은 얘기를 듣고 자기도 소원을 빌고싶어 자신에게 팔라고
졸라 결국 이 사업가가 전재산을 주고 대신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고 2006년에 한국으로 귀국하
여 여러 곡절을 거쳐 용수사에 봉안케 되었다. 이 이야기를 탈북한 조카가 전함으로써 돌부처의
탈북이 화제가 되었다. 신기한 것은 이 돌부처 앞에서 간절히 기도를 올리던 날 밤이면 칠흙같
은 밤인데도 마치 부처님이 발광을 내는 듯 앉아있는 모습이 여러차례 목격되었다 한다.
오늘도 용수사에는 많은 불자들이 발원을 하고 좋은 인연을 기약코자 돌부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다. 방송에서도 돌부처 이야기를 전함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대웅전내 후불목각탱화
용수사를 찾은 이유 중 가장 큰 몫은 역시 목각탱화이다.
대웅전으로 들어가 삼배를 한 후 법당을 빛내고 있는 석가모니불과 그 뒤에 목각탱화로 조각된
여러 부처님과 보살님들이 화려한 모습에 그저 황홀할 뿐이다. 전국 사찰 중 몇몇 목각탱화를
본 일이 있지만 이토록 화려하고 다양한 목각탱은 처음이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관세음보살,
문수보살,지장보살의 모습도 있고 사대천왕의 모습도 좌우측에 보인다. 구름타고 하강한 시방
세계 일체제불을 그렸고 아래쪽 10대제자상도 있다. 도색한 알료는 수입한 것이라 한다.
1996년 9월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여사의 안내로 성격이 활달한 주지스님을 만나 차
도 한잔 얻어 마셨다.용수사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국왕의 원찰 용수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로 고려 의종(1164년)이 고려의 기운이 쇠하여 국운
과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천하의 길지인 용수사를 중창불사하여 사액을 내린 절로서 명종 때
완성하여 의종과 왕실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사명대사와 같은 큰 스
님들이 주석하시어 선풍을 드날린 곳이기도 하다. 1896년 화재로 소실된 후 회주 원행스님이
1995년에 다시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수사는 조선시대 농암 이현보,퇴계 이황,서애
유성룡 등 도산지역의 영남학파 선비들이의 공부도량으로 유명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던 곳
이다. 용수사 스님들과 선비들이 힘을 합쳐 도산서원을 건립 후학발전에 큰 힘을 기울여 후세에
이를 일컬어 유학의 본향이라 부르게 되었다.
스님과 환담을 나누며 차를 마시던 중 가문 대지에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더울 때
시원스런 비가 내리니 한결 시원해졌다. 사찰 경내를 둘러본 후 서울로 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용수사 일주문 통일미륵불 미륵불 대웅전 다보탑 대웅전 내부 석가모니불이 주불이다.
주지스님의 해설 마의당 13층석탑 월오관(月午觀) 다보탑 포대화상 두마리의 거북이가 이고 있는 법고 새로 짓고 있는 건물 장독대 단체사진을 남기다 주지스님의 차대접
광산김씨 종택-오천군자리 문화단지
김여사와 작별을 하고 대구팀들은 남쪽 방향으로 떠나고 서울팀은 김여사가 타고가는 승용차
를 따라 오천군자리를 잠간 보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군자마을에 도착한 일행들은 아름다운
오천군자리 단지에 들어오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탈진 언덕구릉에 여러채의 고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오천군자리 유적지 안내판이 입구에 서 있었다. 마침 이곳을 지키며 관리하는 김여사의 동생되
시는 분이 갑작스런 방문의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거실로 안내하여 오천군자리의 사
계절이라는 동영상까지 보여주며 친절하게 설명이 이어진다.
김씨 김용자여사의 친정이기도 한 이곳은 1974년 안동댐 수몰로 20대 600년을 이어온 광산김씨
예안파 집성촌을 옮겨온 것이다. 입향시조는 농수 김효로(金孝盧)로 수몰지역 문화재를 예안면
오천리에 집단 이건(移建)하여 원형을 보존케 하였다.종택과 문화재로 파청정(把淸亭),탁청정
(濯淸亭),낙운정(洛雲亭)과 아름다운 연못이 눈길을 끈다. 여기서 홈스테이도 받고 있는데 필자
는 몇년전 이곳 君子古窩(군자고와)에서 하루를 묵은 일이 있었다. 後彫堂이라는 현판은 퇴계
이황선생의 친필이고 탁청정(濯淸亭) 정자의 현판은 한석봉의 친필이라고 한다. 주말이라서인
지 홈스테이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이 아름다운 문화단지를 보면서
일행들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안내자인 김여사는 물론 필자도 기분이 좋았다.
군자리 마당 군자리 전경 입구 복숭아처럼 생긴 돌과 향나무 예븐 연못 잠시 쉬었다 갑시다 퇴계의 친필 후조당 위에서 내려다 본 마당 인쇄하던 곳 장판각 파청정/사가 정자로는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알려져 있다. 파청정과 연못 탁청정/한석봉의 친필글씨이다
낙운정 연 못 게스트하우스 군자고와/ 민박도 한다. 주말은 손님이 많다. 군자리에 대한 브리핑 군자리 설경 여류수필가 김용자 여사의 차대접 강순중 동문이 차 심부름
비록 서울가는 시간은 좀 늦어졌지만 마지막 오천군자리 문화단지를 본 소감들이 모두 좋았다
고 이구동성이다. 헤어지기가 아쉬운 듯 김여사는 버스에 올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우리와
작별을 고했다. 오늘 김여사 덕분에 용수사의 아름다운 절 구경을 하였고 뜻하지 않게 군자리
마을까지 알뜰한 관광을 하였다. 아마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서울로 오는 길은 전혀 막힘이 없었다. 거의 6시가 다되어 떠난 버스는 3시간만에 서울에 도착
했다. 아마도 연휴휴가로 차들이 많이 빠져나간 탓이라 여겨진다.
예상과는 달라졌지만 그래도 무리함이 없이 6월 유적지탐방은 모두 끝이 났다.
대구의 회장단까지 참가한 이번 여정은 휴일이라 다소 무리함이 있었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잘
진행 되었고 김여사의 역할이 컸다. 모두들 진행에 협조를 잘 해준 점 고맙게 생각한다.
특히 준비에서 진행까지 김민효 사무총장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다음 7월에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참가회원>강순중,고초근,김능태,김문헌,김민효,김상철,김수철,박정륭,박준천,박상보,박호, 서강조,이이춘,장극두,장세원,전현석,최문택,최상탁,허현 /대구 권영길,이상화,박대원,서상호,여충연/영천 김용자
<경비명세> 차량전세,기사,보험료 615,000원 김밥,주류,음료,음료,안주 등 234,000원 중식,석식대 300,500원(중식대 김문헌 200,000원지원 별도) 합 계 1,149,500원
전월이월 2,619,065원 수입이자 4,280원 6월회비(19명) 380,000원 6월경비 1,149,500원 잔 액 1,853,845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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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세원 회원께서 단체사진 등 사진을 보내와 사진추가와 내용 일부 보강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