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일제가 조선 반도를 강점하자 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길처럼 일어났다. 당시 부산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히 항일운동이 가장 강렬하게 진행된 곳은 동래 지역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성관一誠館이야말로 동래 항일운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민들이 송상현 부사의 뒤를 따라 성을 지키다 장렬하게 순국한 역사에서 보듯, 동래는 항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증표인 동래의총과 더불어 항일정신을 이어받은 청년학생들이 웅거해 최후까지 일제 식민지 정책에 항쟁을 거듭한 일성관 또한 우리 역사의 빛나는 유적이다.
원래 이곳은 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1846년 3월 설립)에서 관장하던 서당 삼락재三樂齊로 중등 과정인 한문‧신학문 등을 통해 항일 민족자주 의식을 가르치던 민족교육 기관이었다. 1919년 동래청년회가 인수해 쓰다가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불길처럼 일어나자 1926년 6월 서당을 헐고 우리 고장의 문화 계몽운동과 청년‧사회 단체의 집회소도 겸할 근대식 회관을 짓기로 뜻을 모았다. 신간회 부산지회(1927년 6월 창립), 근우회, 청년동맹, 소년동맹을 비롯한 입주 단체가 점점 늘어나면서 회관이 비좁아지자 규모가 더 큰 회관의 필요성이 대두됐던 것이다.
일본 경찰의 방해와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신축 공사 진행은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 전국 각지 지방 유지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등의 눈물겨운 모금 활동이 이어졌다. 그 결과 어느 정도의 기금이 확보돼 새로운 회관을 신축하는 발판이 마련되는 데 이른다. 그러나 1933년 10월 일성관 낙성식 날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쳐 일성관 출입과 낙성식을 막은 데 이어 회관 사용 중지 조치를 내렸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이 일제히 봉기한 곳이 일성관 일대다. 일성관에는 이런 사무친 내력과 숭고한 정신이 어려 있는 것이다.
일성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대표적인 단체 결성과 항일운동은 다음과 같다. 1919년 3월 13일 동래고보의 3‧1운동, 1925년 부산청년회 결성, 1927년 6월 28일 신간회 부산지회 창립총회,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때 신간회 동래청년회 소년부 회원인 동래고보 4학년생 문재순 외 7명이 주동한 동래고보 연대 맹휴, 1929년 일제의 신간회 해산을 항의하는 동래고보 4학년생들의 맹휴, 1930년 1월 7일 부산 2상(부산상업고등학교‧현 개성고) 학생운동(문길환‧장남현 등이 동래청년회관 등사기를 이용해 유인물 제작) 등등.
이밖에도 동래 일성관을 중심으로 일어난 항일운동은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로 무수하다. 오늘날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기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동래구 지방자치단체는 그 정신을 기리고자 수많은 독립운동이 일어난 이곳을 ‘동래만세거리’로 지정했다. 하지만 일성관 건물은 광복 후 시립도서관 동래분관으로 사용되다가 1997년 도로 확장 계획에 밀려 철거되고 말았다. 옛터에는 지금 복산동 주민센터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우리를 있게 한 숭고한 역사가 이렇게 사라져도 좋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