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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2회 아키타·야마가타①
“눈보라에 가슴 펴고 자 나가자”
학회가 ‘인간혁명의 노래’의 한 구절이다.
아키타와 야마가타의 동지에게는
가슴에 만감이 밀려드는 가사다.
어떠한 고난의 눈보라도 숙명의 폭풍우도
장마(障魔)의 거센 파도도 별 것 아니다!
사명의 천지에서 분투하는 아키타와 야마가타의
벗의 가슴에는 고난의 봉우리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혼이 불타고 있다.
도호쿠의 산하를
행복의 빛으로 감싸자
야마가타지부 결성대회
올해는 야마가타지부를 결성한 지 60주년을 맞는다.
1960년 11월 22일,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야마가타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이때의 진심이 소설 《신·인간혁명》 제2권 ‘민중의 깃발’에 이렇게 씌어 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과묵하고 인내심 강한 도호쿠의 벗을 사랑했다. 그 순박한 마음이 무엇보다도 좋았다. 신이치는 이 도호쿠의 산하(山河)를 행복의 황금빛으로 감싸 ‘민중개가(民衆凱歌)의 선율’을 연주하겠다는 마음으로 야마가타의 대지에 섰다.”
결성대회는 동지 7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현립체육관에서 개최했다. 신이치는 니치렌불법(日蓮佛法)이야말로 진실한 민중의 편이라고 언급하고, ‘부처’에 관해 강조했다.
“불법에서는 우리의 흉중에 본래 ‘부처’라는 생명이 갖추어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어떤 환경에도 지지 않는 최고의 생명력이며 가치를 창조하는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인간 완성을 향한 자신의 강인한 의지력이라 해도 좋다.
이러한 부처의 생명을 용현(涌現)시켜 가는 것이 성불이며, 그것을 위해 대성인은 어본존을 도현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 어본존을 믿고 창제해 갈 때, 죽은 다음이 아닌 현실 사회에서 가치를 창조하고 행복의 길을 열어 갈 수 있다. 그것이 신심즉생활(信心卽生活)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가공의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묘법을 넓히며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하루하루 정진(精進)을 거듭해 가는 존귀한 동지들이야말로, 즉 여러분이야말로 존극한 ‘부처’인 것입니다.”
당시 여자부 부대장 사명을 맡은 오야마다 교코 씨(야마가타총현 부인부 주사)는 감동한 얼굴로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결성대회가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장내는 긴장에 감싸여 모두 경직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사회자가 ‘지금부터 야마가타지부 결성대회 폐회사가 있겠습니다’라고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케다 선생님은 ‘이것으로 회합이 끝났군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내는 폭소에 감싸여 순식간에 참석자들의 긴장이 풀려 모두 웃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결의와 기쁨이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결성대회가 끝나자 선생님은 장소를 옮겨 청년들과 간담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오야마다 씨가 이렇게 질문했다. “저는 ‘유사시’에 갑자기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실은 그때로부터 3년 전, 신심에 힘쓰던 아버지를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슬픔에 지지 않고 학회활동에 힘썼지만 확신이 없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더 이상은 당신에게 부대장을 맡기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오야마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열등감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일도 있어서 선생님에게 격려를 받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리더로서 ‘어리광’을 부리는 제 모습을 꿰뚫어 보시고 제 약한 생명을 끊어주셨습니다.”
바로 오야마다 씨가 “부탁드립니다. 맡겨주십시오”라고 결의를 말하자 선생님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사시를 위해 신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시가 되어도 신심이 있으면 걱정없습니다. 분발하세요.”
그리고 이튿날 23일, 배웅하러 나온 오야마다 씨에게 선생님은 “어쨌든 교학을 공부하세요. 내가 아버지를 대신하겠습니다.” 하고 말을 건넸다.
오야마다 씨는 웃음 띤 얼굴로 “선생님의 자애가 생명에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힘차게 꿋꿋이 살아가자고 서원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민중을 위해 힘쓰는 리더
23일, 신이치는 아키타에 있는 오마가리시에서 개최한 미나미아키타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했다(제2권 ‘민중의 깃발’).
신이치는 이 자리에서 학회는 ‘회원제일’ ‘민중 근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 창가학회의 정신, 또 간부의 자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회원을 위한’ ‘민중을 위한’ 학회이며 간부다.” 하고 강조했다.
소설에서 거듭 리더의 마음가짐을 언급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이번에 새로이 간부로 등용된 멤버들이 우선 먼저 회원에 대한 봉사 정신을 익혀 주기를 바랐다. ‘민중 위에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민중을 위해 힘쓰는 리더’로 ― 그것은 ‘왕은 백성을 어버이로 하고’(어서 1554쪽)라는 말씀처럼, 니치렌 대성인의 일관된 지도자론이다. 거기에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근본 사상이 있다. 그것은 실로 위대한 사상 혁명이라 해도 좋다.”
도와다지부에서 격려
제4권 ‘춘람’에는 1961년 2월 21일 아키타의 도와다지부가 결성대회를 개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연 마지막에 신이치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활약할 무대는 전 세계입니다. 우리는 부처의 사자(使者)로서 온누리를 당당히 활보하여 행복의 대도(大道)를 열어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희망에 넘치는 신이치의 말은 동지의 가슴을 햇살처럼 비추었다.
나리타 지에코 씨(제2아키타총현 부인부 주사)는 이날의 모습을 그린 소설을 읽고, ‘놀람과 감동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회합 장소 근처에서 이케다 선생님이 타신 차가 움푹 패인 곳에 빠져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차에서 내려 눈이 쌓인 길에서 멤버들과 함께 차를 밀어주셨습니다. 그때 바지가 젖고 구두 속으로 물이 스며들었는데도 선생님은 그대로 결성대회에 참석하신 사실을 소설을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인 나리타 씨는 다섯 살 된 남동생과 함께 회합 장소에 갔다. 아버지가 도와다지부의 지부장이었다. 결성대회가 끝나고 선생님은 지구부장회에 참석하고자 회합 장소로 이동했다. 도중에 다른 건물로 이어지는 복도에서 나리타 씨 일행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선생님은 남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귀엽군요’ 하시고는 사과와 바나나를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존재가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기뻐한 기억이 지금도 떠오릅니다.”
한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진심 어린 격려를 보낸다. 이것이 선생님의 일관된 행동철학이다.
정의의 인권투쟁
벗은 이 산간지역에서 묵묵히 신심에 힘썼다. 구습이 뿌리 깊은 지역에서 홍교도 진전되었다. 그러나 정법(正法)이기에, 박해도 동시에 다투어 일어난다.
1962년 7월, 제6회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공명정치연맹(지금의 공명당)이 추천한 후보 9명이 전원 당선되었다. 이렇게 학회가 대약진하자, 공명정치연맹을 지원한 창가학회를 괴롭히는 일이 각지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아키타의 오사리자와광산 노동조합은 학회원을 조합에서 제명했다. 조합이 추천한 후보가 아닌, 공명정치연맹이 추천한 후보를 응원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학회원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신교의 자유’를 거듭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법원의 중재를 받아 조합과 화해하기에 이른다. 이 ‘인권투쟁’의 역사는 제6권 ‘파랑’에 상세히 나와 있다.
오사리자와광산은 일본 굴지의 역사와 규모를 갖추어 오사리자와마치(현재 가즈노시 오사리자와)의 인구 약1만명 중 7, 80퍼센트를 광산 관계자가 차지했다. 노동조합의 힘이 강하고, 전국 조직에서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 조합의 간부가 학회원의 자원활동을 ‘이대로 두면 노조의 기반이 흔들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있었다.
노조 간부는 ‘조합의 통제를 무너뜨렸다’는 이유로 학회의 지구부장인 야마오 히사야 일행을 처분하려 했다. 오사리자와광산에서는 조합에서 제명되면 회사에서도 해고되는 것을 의미했다.
신이치는 오사리자와 사건을 보고받고 “최대한 힘써주기 바란다.”며 간부에게 실제 상황을 조사하고 대책을 협의하도록 부탁했다.
도와다지부장인 시마즈 다쓰오를 비롯해 학회 본부에서 파견한 간부가 노조 간부와 거듭 협의했다. 처음에는 ‘선거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라고 시치미를 뗐지만 나중에는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조합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공명정치연맹이 추천한 후보를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조합이 어떤 의결을 하더라도 개인의 신앙은 자유이고 정치활동도 자유다.
그것은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다. 조합이 하고자 하는 일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학회 측의 항의도 듣지 않고 야마오 일행을 제명처분하기로 의결했다.
야마오 일행은 곧바로 아키타지방법원 오다테지원에 오사리자와광산 노동조합을 상대로 제명 의결의 효력을 정지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제명과 해고로 발생하는 생활상의 위험과 불안을 방지하고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야마오 일행은 회사에서도 해고되었다. 그 뒤로 조합은 다른 학회원에게도 음험한 압력을 가했다.
야마오의 아내 미야는 도와다지부 부인부장을 맡고 있었다. 길을 걸으면 “어머나, 저 사람이 창가학회 야마오의 마누라야…” 하며 뒤에서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살던 미야의 어머니가 “오사리자와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미야는 엄연한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당치도 않아요. 우리가 떠나면 남은 동지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모두 가엽어요. 우리는 절대 여기서 떠날 수 없어요.”
자신이 고난의 한복판에 있더라도 동지를 지키기 위해 각오를 다지고 결연히 일어서 회원을 격려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 모습에 벗은 감동했다.
오사리자와 동지들은 신이치의 사자분신(師子奮迅)의 분투로 승리한 ‘유바리탄노사건’의 역사를 모범으로 삼아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전진했다.
그리고 법원이 화해를 권고해, 결국 조합은 임시대회를 열어 학회원의 제명처분을 철회한다고 의결한다.
그 뒤, 오사리자와가 있는 가즈노지역은 광포가 크게 발전한다. 이 ‘정의의 언론투쟁’이 커다란 원점이 되어 제1차, 제2차 종문사건에서는 탈회자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1964년 8월 27일에는 이케다 선생님이 가즈노회관(지금의 가즈노평화회관)을 처음 방문해 부인부를 중심으로 세이쿄신문 구독추진을 멋지게 승리하고, 종문의 박해에도 지지 않은 동지를 칭찬했다.
그리고 “역전(歷戰)의/ 가즈노 벗의/ 장수를/ 기원하고 또 기원하며/ 이 날을 잊지 않으리” 등의 시 세 수를 지어서 보냈다.
이 8월 7일은 훗날 ‘총아키타 여성의 날’로 되었다.
<기고> ‘아키타의 명예’를 가슴에 품고 전진!
후세 시로카즈 총아키타장 / 이시즈카 무쓰코 총아키타 부인부장
아키타에서는 1977년경부터 종문 승려들이 비열하게 학회를 계속 공격했습니다.
1982년, 이케다 선생님은 엄동설한의 1월에 일부러 아키타를 방문해 5박 6일간의 ‘눈 속의 아키타 지도’를 실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불합리한 종문의 처사를 견뎌내고 신앙을 관철한 동지를 최대로 격려하고 “나와 같은 마음으로 나를 대신해 분투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학회는 강합니다. 그것이 이체동심(異體同心)의 모습입니다.”(제30권 <하> ‘승리의 함성’)라고 사자후(師子吼)하셨습니다.
아키타문화회관(지금의 아키타중앙문화회관)에 인접한 공원에서 선생님과 함께 줄기차게 내리는 눈 속에서 ‘인간혁명의 노래’를 대합창하고 만세삼창을 했습니다.
아키타의 하늘에 드높이 울려 퍼진 사제 승리를 알리는 승리의 함성은 ‘반전 공세의 승리선언’이 되었습니다.
소설에는 아키타 청년부에게 “모두 야마모토 신이치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 이렇게 자각하고 일어서면 21세기는 양양하게 펼쳐진 희망의 세기가 됩니다.” 하고 기대를 보내신 내용이 씌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든 않든 여러분은 이케다 문하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뢰합니다.”라며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주셨습니다.
당시 청년부는 ‘2001년 제1기회’로서 아키타 광포의 중핵을 짊어지고 서원을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신시대의 청년부를 선두로 새로운 역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2018년, 제30권 ‘승리의 함성’에 ‘눈 속의 아키타 지도’를 연재해주셨습니다. 이에 보답하기 위해 아키타는 절복의 결과로 도호쿠를 이끌었습니다. 또 지난해 11월에 완공된 ‘세계세이쿄회관’을 장엄하게 장식하고자 모두 ‘사상 최고’의 세이쿄신문 구독 추진을 목표로 도전한 결과, 일본 제일의 확대를 쟁취하여 연속 승리했습니다.
“일서서라/ 아키타의 명예/ 잊지 마라/ 단호히 후회 없이/ 역사를 구축하라”
이것은 아키타문화회관 은사기념실에 걸린 시입니다. ‘아키타의 명예’란 초창기 ‘일본제일’의 확대이고 박해의 폭풍우를 사제공전으로 승리한 영예로운 역사라고 확신합니다.
‘정의’와 ‘단결’에 빛나는 아키타는 지금이야말로 신시대의 사제승리를 알리는 함성을 드높이 울리겠습니다.
가장 힘든 사람의 곁으로!
그것이 진정한 리더입니다
재해지역에서 펼친 격려행
제16권 ‘날갯짓’에는 일본 각지에 큰 피해를 일으킨 ‘1972년 7월 호우’로 피해를 입은 벗을 온 힘을 다해 격려하는 스승의 격투가 씌어 있다.
마침 7월, 도호쿠에서는 기념촬영회를 열 예정이었다. 10일에는 야마가타, 12일에는 아키타 그리고 14일에는 이와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9일에 아키타현 등에서 하천이 범람하는 등 폭우의 피해가 커졌다.
신이치는 9일 저녁 무렵, 센다이에 도착했다. 집중호우에 따른 피해상황을 상세히 조사해 보고하도록 동행한 간부에게 지시했다. 특히 피해가 가장 큰 곳이 아키타였다. 아키타현 북부에서는 요네시로강이 넘쳐 국도가 끊기고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아키타의 간부들은 거듭 협의를 거쳐 기념촬영회를 중지하기로 했다. 이 날을 목표로 분투해 온 동지들에게는 충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우선 시 해야 할 일은 모두의 안전이고 복구작업이다.
중단한다는 의향을 들은 신이치는 즉시 아키타현 간부들에게 전언을 보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이러한 때에 모든 사람이 무리해서도 부담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지금은 모두 마음을 하나로 하여 복구작업에 온 힘을 기울일 때입니다. 간부 여러분은 한시라도 빨리 피해 입은 분들을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이치는 도호쿠문화회관에서 진지하게 기원을 보냈다. 또 각 방면과 현 간부들에게 지원 태세를 갖추어 피해 지역의 멤버를 격려하는 데 온 힘을 쏟도록 철저히 손을 썼다.
아키타에서 개최하려던 기념촬영회는 취소되었다. 신이치는 그만큼의 일정을 어떻게 움직일지 동행한 간부에게 알렸다.
“기념촬영회는 취소됐지만 나는 아키타로 갑니다!”
간부는 “그러나 큰비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듯합니다….” 하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신이치는 의연하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야 합니다! 기념촬영회도 취소돼 모두 침울해졌을 겁니다. 또 큰비로 피해도 큰 만큼 분명 불안에 떨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모든 일을 제쳐 두고 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하 리더입니다.”
스승의 마음은 이미 이튿날에 가기로 한 야마가타와 아키타로 날아가 있었다.
야마가타에서 개최한 기념촬영회
이튿날 10일, 오후 2시가 지나 신이치를 태운 자동차가 야마가타현체육관에 도착했다. 야마가타현에서도 쇼나이와 모가미 지방에서 하천이 범람해 집들이 물에 잠기고 논밭이 유실되거나 물에 잠기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기념촬영회에서 신이치는 힘차게 격려를 보냈다.
“피해를 입은 분도 계시겠지요. 그러나 대성인은 ‘재(災)가 온다 해도 변하여 행(幸)으로 되리라.’(어서 979쪽)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실증을 나타내기 위한 시련입니다.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자(師子)이기 때문입니다.”
신이치는 촬영멤버가 교체할 때에도 야마가타대학회의 결성식을 열어 젊은 벗을 격려했다.
그리고 신이치가 청년시절에 근무한 회사 근처에 있는 ‘이치가야식당’에서 일하던 부인과 약 20년 만에 재회해 따뜻하게 감싸 안듯 대화했다. 또 소년소녀부나 여자부 대표와 함께 체조를 했다. 촬영회가 끝난 뒤에는 야마가타문화회관 기공식에 참석하는 등 잠깐의 시간도 헛되이 쓰지 않고 격려의 빛을 계속 보냈다.
우사미 아키코 씨(야마가타태양현 부인부 주사)는 당시 여자부 행사진행요원 중 한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기념촬영 중간에 대기실로 돌아오면 피곤하실 텐데도 많은 보고를 듣고 잇달아 지시를 하셨습니다. 촬영이 준비되면 선생님은 벌떡 일어나셔서 넘칠 듯한 생명력으로 촬영장소로 가서 혼신을 담아 회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깊이 새긴 우사미 씨는 자신도 동지를 위해 끝까지 힘쓰겠다고 서원하고 벗을 위해 열심히 달렸다.
고뇌는 행복의 꽃을
피우기 위한 씨앗입니다
변독위약의 신심
이튿날 11일, 신이치는 아키타에 갔다. 이날 저녁, 아키타현의 각지에서 기념촬영회에 참석하기로 한 멤버를 격려하는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신이치는 메시지를 써서 동행한 수뇌 간부와 아키타의 최고 간부들에게 맡겨 각 장소로 보냈다.
이 대회에서 야마모토 신이치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아키타 여러분! 이번 수해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 기념촬영은 현지 분들의 의견도 있고 해서 중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여러분을 응원하고 격려하기 위해 아키타에 왔습니다.
여러분의 노고에 어떻게 해서든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대악(大惡)이 일어나면 대선(大善)이 온다.’(어서 1300쪽)는 금언을 가슴에 품고 학회의 자식답게 희망에 불타 일어서기 바랍니다.”
아키타회관에도 멤버가 100명 정도 모여 있었다. 회합 도중에 신이치가 뒤쪽에서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모두 뒤를 돌아보자 환호성이 일었다. 신이치는 위로의 말을 건넨 뒤, 고난에 지지 않고 인생의 참된 승리를 장식하기 위해서는 ‘변독위약’의 법리를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이 원리는 관점을 바꾸면, 성불과 행복이라는 ‘약’을 얻으려면 고뇌라는 ‘독’을 극복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고뇌는 행복의 꽃을 피우기 위한 종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감연히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부처의 생명을 갖추고, 말법 시대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출현한 지용보살입니다.
그러한 우리이므로 정체할 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궁지에 빠졌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하고 비관하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궁지에 빠져 고뇌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라는 그 깊은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 재해를 입은 동지 여러분이 당당하게 재기한다면 변독위약(變毒爲藥)의 원리를 분명히 밝혀 불법의 위대함을 사회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실은 그렇게 하기 위해 당한 고난입니다.”
신이치는 참석자가 있는 한가운데로 들어가 앉았다. 신이치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간담을 시작했다. 어느 청년이 질문했다.
“이번 수해로 아키타의 기념촬영회가 중지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시 저희의 신심하는 자세에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일까요.”
신이치는 한마디로 잘라 대답했다.
“날씨는 자연현상이기 때문에 큰비가 내릴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신심이 강성한 사람이라도 태풍을 만나기도 하고, 겨울이라면 아키타에는 엄청난 눈도 만나겠지요. 그것을 하나하나 신심에 결부시켜 끙끙대며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일신일념(一身一念)이 법계(法界)에 널리 미침이라.’(어서 247쪽)이기 때문에 기원은 대우주에 통합니다.
그러나 큰비가 내렸다는 결과에 얽매여 힘을 못 낸다면 신심은 의미가 없습니다.
현당이세(現當二世)의 신심입니다. 미래를 향해 우리 지역을 반드시 상적광토(常寂光土)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용기를 내어 힘차게 전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기 위해, 당당하고 자기답게 인생의 승리를 장식하기 위해 신심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전진하는 활력으로 바꾸고 희망으로 연결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예를 들어 수해로 기념촬영을 할 수 없었다면, ‘자, 이 다음에는 반드시 더욱 성공적으로 이뤄내겠다.’는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하면 됩니다. 또 재해를 입었다면 ‘자, 지금이 가장 중요한 국면이다. 절대 지지 않는다. 변독위약하겠다! 신심의 진가를 발휘하겠다!’며 주저앉지 말고 활기차게 도전을 시작해야 합니다.
어떠한 때에도 미래를 향해 희망을 불태워 힘차게 전진한다면 그것 자체가 인생 승리입니다. 신심의 증명입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새롭게 결의했다.
당시 아키타회관의 사무장인 신도 야스노부 씨(총아키타 주사)는 “이케다 선생님이 아키타에 오셨다는 사실만으로 아키타 동지들은 감동을 받고 분발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감사의 마음을 말했다.
“선생님이 회관에 도착하신 순간 그곳은 마치 학회본부와 같은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아키타현과 도호쿠뿐 아니라 피해를 입은 각지에서 상황 등을 알리는 보고가 끊임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보고를 듣고 그 자리에서 바로 격려의 손을 쓰시는 선생님 모습에 감동하고 경탄했습니다.”
또 신도 씨는 아키타회관에서 선생님을 둘러싸고 앉아 개최한 회합도 동지에게 큰 파급이 되었다고 증언했다.
“멤버들은 처음에 긴장한 얼굴로 회관에 들어왔습니다. 실로 ‘엄숙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는 환희와 결의에 넘친 표정으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신심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모두 선생님이 크게 격려해주신 덕분입니다.”
각자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간 참석자가 이번에는 동지를 격려하는 쪽이 되었다.
‘변독위약’은 모두의 슬로건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변독위약하자!’고 서로 격려한다. 고난 속에서 아니, 고난의 와중에 있기에 아름다운 단결도, 견고한 신심도 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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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상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