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탓인가? 10월 하순의 우중충한 하늘과 쌀쌀한 날씨는 사흘 넘게 나를 무기력증에 빠트리고 있다.
되짚어 보자면 마드리드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발발한 하마스 테러 공격은 전 세계에 전운을 드리웠다. 여행 나흘 전이었다. 이미 몇 개월 전 예약을 마치고 돈을 치른 여행을 취소하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보복은 상상외로 강력했고 대부분의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캐나다도 트뤼도 총리, 포드 온타리오주 수상, 차우 토론토 시장을 비롯하여 모두 일제히 이스라엘 지지 성명을 냈다. 양쪽 사상자와 인질까지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가운데 전쟁은 확전되고 토론토 다운타운에서는 양측 지지자들의 시위가 펼쳐졌다.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고 피어슨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평범한 여행자의 행장을 한 표정들에서 전쟁은 다른 세계 이야기처럼 비껴나 있는 듯 보였다. 나 또한 마드리드 여행에서 즐길 계획만 그리며 전쟁 따위는 잠시 잊어버리자고 주문을 외웠다.
토론토보다 6시간 빠른 시간대의 마드리드는 완연한 여름 날씨였다. 태양은 뜨거웠고 도로는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정체되는 곳이 많았다. 마드리드 시내에 숙소를 정해서인지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프랑스, 미국 다음으로 관광객이 많다는 스페인이라는 게 실감 났다. 1주일간 넉넉한 일정으로 왔기에 남편과 나는 걷거나 버스를 타고 관광 명소를 찾아다녔다. 파리와 다른 듯하지만, 비슷한 점이 많아서 처음 파리 여행에서 '와!'하며 감탄하던 느낌은 없었다. 내게 인상적인 장소를 고르라면 마요르 광장, 레티로 공원, 프라도 미술관 정도였다. 고풍 어린 화려한 왕궁과 성당은 내 눈길을 끌지 못했다.
스페인 전통 요리를 하루에 한 가지씩 맛보는 재미는 쏠쏠했다. 토론토보다 대중 음식 값이 싸고 맛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고 고야가 아르바이트했다는 가장 오래 된 음식점 'Botin'에서 아기 통돼지구이를 먹으려던 계획은 취소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기 돼지 전신을 보면서 먹는다는 건 야만스럽게 느껴져서였다. 헤밍웨이와 고야는 마드리드로 내 발길을 이끈 주역들이긴 하지만 그들의 흔적을 쫓고자 식당 안에서 식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여행 중에는 인터넷이 되는 호텔 방에서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가 어찌 되어가는지 뉴스를 검색하지 않았다.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나절에는 스페인 작가, 돌로레스 레돈도의 <테베의 태양>을 읽는 일에 집중했다. 그러나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았던 고야의 검은 그림들과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전시된 <게르니카>가 이따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꿈속까지 쫓아왔다. 그것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뒤섞여 무의식 속에서 나를 힘들게 하고 깊이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림에 조예가 없는 나는, 중고등학교 미술책에 나왔던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 벗은 마야>와 <옷 입은 마야>의 원본을 보러 프라도 미술관을 찾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프랑스의 스페인 침략 당시를 그린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학살>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가 오래 잔상에 남았다. 소위 검은 그림들이라 칭하는 그의 후기 작품에서 묘사된 인간 군상의 모습은 기괴함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만 보기 위해 갔다. 추상적인 그의 그림은 여전히 내게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전체주의 독재를 꿈꾸는 군부 세력의 수장, 프랑코의 묵인하에 나치가 스페인 북부 게르니카 마을에 무기 실험 명목으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여 천여 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때 프랑스에서 고국의 참상을 전해 들은 피카소가 분노하여 탄생시킨 작품이 바로 <게르니카>이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전쟁의 실상을 겪은 후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하였다. 그들은 권위적인 통치와 전쟁의 폭력성을 그림과 글로 고발함으로써 약자의 편에서 비극과 울분을 표출해 냈다.
여행에서 돌아와 시차 적응을 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행 동안만이라도 잊고 싶었던 전쟁의 참상 뉴스였다. 이스라엘은 하마스 척결을 위한 보복의 일환으로 가자 지구에 구호 물품을 제외한 전력과 연료 공급을 일절 중단하고 조만간 지상군 투입을 저울질 중이라고 한다. 아랍 국가와 몇몇 국가 외에는 서방세계를 중심으로 한 대부분의 국가가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오늘 아침, NDP 온타리오주 의원 한 사람이 정치가로서는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선언을 했다. 하지만 그는 발언과 동시에 표결을 거쳐 재빠르게 당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아마도 그래서였나 보다. 공연히 계절 탓을 하며 의욕을 잃고 무기력증에 빠져든 이유가.
최초의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현시점에서 약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들이 잃어버린 자신들의 땅을 찾기 위해 가자 지구로 제한된 지상 감옥에서 벗어날 방법이 테러라는 최후 수단밖에 없었기에 결코 비난만 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마드리드 여행 후유증은 쉬이 사라질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