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정 출판기념회에 갔던 이야기]
꼭 오프닝에 가려고 했지만 너무나 심신이 피곤해서 이틀이 지난 어제서야 이대 ECC 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겸 전시회를 찾았다.
택시가 파업하고 그 여파가 교통 전반에 미칠 것이라고 해서 오프닝의 다음날은 피하였다.
나는 버스로 양재까지 택시로 이대까지 이동하였다.
지하철이 싸고 편하지만 돌아오는 길을 경험하고서야 택시를 타고 이대 캠퍼스에 진입한 것이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지하철역은 이대와 가깝지 않았고 구절양장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걷는 거리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양재에서 택시를 잡는 것은 아주 용이했다.
긴 줄을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에 올라타니 나도 편하고 운전기사도 좋은 모양이었다.
이대는 옛날에도 가본 일이 있고 본관 석조건물은 오랜만이라도 변하지 않는 옛모습 그대로였다.
다만 그 본관으로 접근하는 새 지하 캠퍼스, ECC 는 놀라운 변화였다.
바로 이런 것을 상전이 벽해를 이루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지도로 캠퍼스 맵을 살피며 나는 ECC가 여늬 학교의 학생회관쯤 되는 줄 알았다.
내가 놀란 건 그 ECC가 바로 이대의 새 캠퍼스이고 대부분의 기능이 이 지하건물로 빨려 들어간듯 했다.
ECC는 저명한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오의 작품이다.
전시실이 지하 3층이라는 안내를 받았지만 실지로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계곡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어딘가 엘리베이터도 있을뻔 했지만 나는 등산을 하듯 전시실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고
그야말로 촌부의 기력마저 지하 캠퍼스로 빨려드는듯 했다.
ECC 안에는 600 석을 자랑하는 공연장, 전시실 그리고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였다.
첨단의 공연장에는 삼성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어느 사람이 삼성이 ECC 지하 교사를 지어서 학교에 헌납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확인할 수 없었고
다만 강당을 짓고 시설을 하는데는 삼성의 기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전시실은 크기도 적당하고 여러 기능도 훌륭하였다.
한순정 화가와 다시 만나는 건 1 년만이다.
그녀는 작년에도 17 년만의 귀국이라고 감개무량해 하며 한국에 왔었다.
그리고 다시 방문한 것이다.
책도 출판하고 여러 장르의 미술품의 전시도 겸하여 착실히 준비하고 한국에 왔다.
작년에는 주로 시가에서 주선한 숙소에서 묵었고 그곳은 주로 강남이었다.
올에는 친정의 외가쪽으로 중심을 옮겨 이모 댁에 묵으며 행사를 준비했다.
이대와 가까운 아현동이 작가의 이모님 댁이고 그곳에는 출판과 전시를 차질없이 준비해 준 동생도 있었다.
출판사를 잘 만나서 책의 모양과 내용은 아주 훌륭하였다.
교보문고 서점에서는 신간 베스트 코너에 한순정의 책을 진열하고 있었다.
좋은 책이 아니면 진열해 주지도 않는 특석, 여기 진열된 책은 대체로 사람들의 눈과 손이 자주 가게 마련이다.
전시장 코너에는 다과도 준비되어 있었다.내
눈을 끈 것은 말린 대추에 잣을 박은 접시였다.
전통 혼례에서 폐백에 쓰는 그런 대추가 왜일까 내 손을 끄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점심은 구내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오신 손님을 초대하고 불초 이광수가 초대인이 되었다.
놀라운 건 이대 캠퍼스나 전람회만이 아니라 작년에 90 세 잔치를 치르신 둘째 고모와
그보다 세살이나 위인 큰 고모의 건강한 모습이었다.
누가 90을 훌쩍 넘긴 노인들이라 할까.
흠잡을 데 없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육신만이 아니라 정신과 지능도 매우 건강한 상태였다.
벌써 70 년이 훨씬 지난 일제 말, 큰 고모님은 경기도 이천과 양평에서 국민학교 선생님을 하신 일이 있다.
나도 소개령으로 양평옥천국민학교에 아마 반 년은 다녔을 것이다.
고모님은 반에 앉아서 공부하던 일테면 피난민 이광수 어린이를 기억하셨다.
귀가길이 퍽이나 힘들었다.걸어서 골목길로 이대역까지 갔고
지하철을 세 번, 마을버스를 한 번그렇게 집에 돌아온 건 4 시 반이 넘어서였다.
심신은 피곤했지만 큰 숙제를 하나 해냈다.
그런 성취감이 피로를 푸는데 큰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