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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사회의 양대축, 무엇이 운명 갈랐나
입력 2023.08.10. 19:05업데이트 2023.08.13. 10:27
그래픽=김현국
“평균적인 EU(유럽연합) 국가는 아이다호와 미시시피를 제외한 미국의 모든 주(州)보다 가난합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유럽특파원 톰 페어리스가 최근 팟캐스트에 출연해 “유럽이 미국과 비교해 점점 가난해지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페어리스는 “소득이 나빠져 독일에서 육류와 우유 소비가 30년여 만에 최저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기사를 통해서는 프랑스에서 예전보다 푸아그라를 덜 먹고 와인을 적게 마신다고 했다. 벨기에 브뤼셀 시내에서는 유통기한이 끝나기 직전인 식료품을 반값에 파는 트럭에 교사·간호사들이 줄을 선다고 전했다.
인플레이션 고통도 미국보다 유럽에서 훨씬 강도가 높다. 페어리스가 인터뷰한 런던의 28세 여성 노아 코언은 이직하면서 연봉이 10% 올랐지만 최고 11%대를 기록한 물가 상승률이 임금 상승분을 모두 집어삼켰다고 했다. 코언은 “몇몇 친구는 앞으로 몇 년간은 아이를 낳아 기를 형편이 되지 않는다며 난자를 냉동해 뒀다”고 했다.
미국과 유럽은 2차 대전 이후 서구 사회의 양대 축으로 인류의 번영을 함께 견인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맞수라고 보기 어려워졌다. 미국이 빠른 속도로 국부(國富)를 불리며 앞서 나가는 사이 유럽은 상대적으로 궁핍해지며 대서양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2년 미국이 GDP(국내총생산)로 EU를 추월한 이후 점점 격차가 커져 지난해에는 미국 GDP가 EU보다 8조8000억달러(약 1경1500조원)나 많았다. 2028년에는 11조2000억달러까지 차이가 벌어질 것으로 IMF는 추산하고 있다.
그래픽=김의균
미국이 다수의 세계 정상급 대학이 배출하는 수많은 인재를 앞세워 첨단 기술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과 달리 유럽은 기술 분야에서 이렇다 할 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거대한 자본 시장을 보유한 미국이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며 기업 경쟁력을 키우고 있지만, 유럽은 ‘규모의 경제’에서 밀리며 상대적인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게다가 높은 고용 유연성을 유지하며 새로운 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탄력적으로 공급하는 미국과 반대로 유럽은 경직적인 노동 시장을 고집하고 있어 성장에 제약 요인이 되고 있다.
◇미국 9대주가 유럽 5대국 누른다
최근 브뤼셀에 있는 싱크탱크인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는 2021년 1인당 GDP로 EU와 미국 50주를 비교했다. 결과는 EU가 앞서는 미국의 주가 대도시에서 멀고 낙후된 지역인 아이다호와 미시시피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50주의 1인당 GDP 순위에 유럽 국가를 집어넣는다면 2000년에는 독일 32위, 프랑스 37위였지만 2021년에는 독일 39위, 프랑스 49위로 처졌다. ECIPE는 “지금 추세가 이어진다면 2035년에는 미국과 EU의 1인당 GDP 격차가 지금의 일본(3만9880달러)과 에콰도르(5980달러) 수준까지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권혜인
미국은 핵심 주가 유럽 주요국과 맞먹는 경제력을 자랑한다. 지난해 미국 최대 주 캘리포니아의 GDP는 3조5981억달러였는데, 이는 영국(3조706억달러)보다 컸다. 캘리포니아에 이어 2위인 텍사스와 3위 뉴욕주의 GDP를 합치면 4조4091억달러로 유럽 최대 국가 독일(4조754억달러)을 넘어선다. 약 30년 전인 1992년에는 유럽 5대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의 GDP가 미국 전체 GDP보다 2445억달러 많았지만, 이제는 미국의 GDP 상위 9주만 합쳐도 유럽 5대국을 누른다.
경제 규모 차이는 소득 수준의 차이로 연결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인들의 연평균 임금은 7만7463달러로 독일(5만8940달러), 프랑스(5만2764달러)보다 눈에 띄게 높았다. 미국인의 소득이 독일인보다 31%, 프랑스인보다는 47% 높다는 얘기다. 씀씀이도 차원이 달라졌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1980년에는 EU의 소비 지출(최종 소비)이 2조5700억달러로 미국(2조2000억달러)보다 많았지만, 2021년 기준으로는 미국의 소비 지출이 EU의 1.5배 수준까지 커졌다.
유럽인들의 삶은 작년 이후 세계를 강타한 인플레이션으로 적잖게 초라해졌다. 지난해 독일인은 1인당 52kg의 육류를 섭취했는데, 이는 1989년 조사 시작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반면 미국인들은 지갑을 화끈하게 열고 있다. 최근 지중해 마요르카섬을 방문한 관광객 중 미국인들은 하루 숙박비로 평균 292달러를 지출했는데, 유럽 관광객(202달러)보다 90달러 많았다.
그래픽=김현국
◇시가총액 30대 기업 미국 21곳, 유럽 4곳
기업의 규모와 경쟁력 차이는 비교 불가 수준이 됐다. 경제 전문 매체 포천이 선정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 중 유럽 기업의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포천의 알리슨 숀텔 편집장은 WEEKLY BIZ에 “2008년만 해도 글로벌 500대 기업에 유럽 기업이 190개나 있었는데 지난해에는 128개로 줄어들더니 올해는 119개로 감소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며 “미국 기업들이 유럽 시장에 깊숙하게 침투해 현지 기업들을 압도하고 있다”고 했다.
포천 분석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포천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미국 기업의 유럽 지역 매출은 26% 늘었는데, 함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유럽 기업들의 역내 매출은 17% 증가하는데 그쳤다.
자본 시장에서는 대서양 사이의 간극을 더 크게 실감할 수 있다. 작년 말 기준 미국 증시 시가총액(이하 시총)은 41조610억달러로 영국(2조9110억달러), 프랑스(2조8750억달러), 독일(2조1300억달러)을 압도했다. 시총이 3조달러를 넘나드는 애플 하나가 유럽을 대표하는 나라의 증시 시총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미국 증시 시총이 2000년(15조1110억달러)과 비교해 22년 사이 172% 불어나는 동안 유럽 3대국(영국·독일·프랑스)의 시총 합계는 49% 늘어나는 데 그쳤다.
세계를 리드하는 기술 기업이 별로 없는 유럽은 ‘매그니피센트 세븐’으로 불리는 대표 테크 기업 7곳(마이크로소프트, 애플, 엔비디아, 아마존, 메타(페이스북), 테슬라, 알파벳(구글))이 포진한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증시 분석 업체 컴퍼니스마켓캡에 따르면, 지난 8일 기준 시총 세계 1~30위 기업 중 21곳이 ‘매그니피센트 세븐’을 포함한 미국 기업이다. 30위 이내에 유럽 기업은 4곳이라 아시아(5곳)보다도 적다. 유럽 1위인 프랑스의 LVMH(루이비통모에헤네시)는 16위다. ‘세계 톱10′에 유럽 기업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미국은 자본 시장 규모가 월등히 크다 보니 투자용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금융 풀(pool)’이 유럽을 압도한다. 이런 차이 역시 기업의 역량 차이를 더 벌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수익 발생까지 시간이 필요한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많은 이자를 줘야 하는 은행 대출보다 주식시장·사모펀드 같은 자본시장의 투자를 받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자본시장의 투자 중심, 유럽은 은행 대출 중심으로 산업계에 자금 수혈이 이뤄지고 있다. 김성근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는 “미국은 증시 시가총액이 GDP의 170% 수준이지만 대출은 85% 정도”라며 “반대로 유럽은 (GDP 대비) 증시 시총이 68%, 대출이 300% 수준”이라고 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유럽 테크 기업은 미국 기업에 인수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앞으로 AI(인공지능) 기술 역시 미국과 중국 기업이 주도할 가능성이 지배적”이라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대학 수준 차이가 기술력 차이로
인적 자본의 차이가 미국과 유럽 사이의 기술 격차를 키운다는 분석도 나온다. 기드온 라크만 FT 칼럼니스트는 WEEKLY BIZ에 “최고의 테크 기업 7곳(매그니피센트 세븐)이 미국에 있다는 건 그만큼 미국 대학과 스타트업 사이의 인재 공급 ‘파이프라인’이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라크만 칼럼니스트를 비롯해 미국과 유럽 경제에 밝은 상당수 전문가는 고등교육의 질적 차이가 작지 않다고 본다. THE(타임스 하이어 에듀케이션)의 올해 세계 대학 평가에서 상위 30개 대학 중 19개가 미국 대학이었다. 반면 유럽 대학은 영국 5곳을 포함한 7곳에 그쳤다. EU 27회원국 대학 중 30위 안에 드는 곳은 30위에 턱걸이한 뮌헨공대 하나뿐이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일부 특수한 고등교육기관을 빼면 사실상 대학이 평준화돼 있고 학비가 무료에 가깝다. 고등교육에 복지와 평등 개념을 강조하기 때문에 경쟁력을 키우는 데 뒤처지고 특출난 두뇌를 키우는 데 약점이 있다.
◇미국인이 유럽인보다 일도 많이 한다
고용 시장에 대한 철학과 정책 차이도 경쟁력을 판가름한다는 분석도 많다. 코로나 사태 이후 미국의 노동 시장은 빠른 회복력을 보여줬다. 코로나가 강타한 직후인 2020년 4월 실업률이 14.7%까지 높아졌지만, 작년 2월 이후에는 쭉 3%대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5월 기준으로 유럽 5대국 가운데 독일(3%)만 미국(3.7%)보다 실업률이 낮을 뿐 영국(4%), 프랑스(7.1%), 이탈리아(7.5%), 스페인(11.9%)은 모두 미국보다 실업자 비율이 높았다.
노동 유연성이 높은 미국에서는 경영이 어려워지면 기업이 비교적 쉽게 근로자를 해고할 수 있다. 유럽보다 고용 안정이 떨어지는 측면은 있지만, 대신 경기가 회복될 때 기업들이 신속하고 과감하게 일자리를 늘린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 전통이 강하고 노동조합의 힘이 센 유럽에서는 쉽게 고용 인원을 줄이지 못한다. 경제 위기에 빠졌을 때 탈출이 더디고, 경기가 좋아져도 기업들이 일자리를 늘리는 데 소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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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부실기업 퇴출 어렵고 고용이 경직적이라 미국보다 뒤처져
노동 문화 차이는 이 뿐만이 아니다. 미국 근로자들이 유럽 근로자들보다 오랫동안 일한다. 지난해 연평균 근로시간을 살펴보면 미국은 1811시간으로 영국(1532시간), 프랑스(1511시간), 독일(1341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유럽에서 노조의 목소리가 높은 만큼 근로자들의 지갑을 얇게 한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더 잘사는 미국인들이 일도 더 많이 하기 때문에 소득 차이는 커질 수밖에 없다. 유럽 근로자들은 더 많은 급여보다 더 많은 휴식 시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에 비해 소비에 투입되는 자금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픽=김현국
◇30대 ‘젊은’ 미국, 40대 ‘늙은’ 유럽
대서양 사이의 경제 격차는 앞으로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인구 구조의 차이로 ‘젊은’ 미국에 비해 ‘늙은’ 유럽이 고용과 복지에서 불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위 연령은 2021년 기준 37.7세였다. 반면 영국은 39.6세로 40세에 근접했고, 프랑스(41.6세), 스페인(43.9세), 독일(44.9세), 이탈리아(46.8세)는 모두 중위 연령이 40세를 넘었다.
생산 가능 인구(15~64세) 비율 역시 미국(64.9%)이 영국(63.5%), 프랑스(61.6%), 독일(64.1%)보다 높다. 일할 사람이 더 많은 미국이 유럽보다 활력 있는 경제 구조를 유지할 수 있다.
고령층에 투입해야 하는 복지 부담도 유럽이 훨씬 무겁다. 미국의 노인 부양비(20~64세 인구 100명당 65세 이상 고령자 수)는 30.4명으로 독일(40.5명), 이탈리아(40.2명), 프랑스(37.8명), 영국(33.6명)보다 눈에 띄게 낮다. GDP 대비 세금·사회보험료 비율을 말하는 국민부담률(2021년)은 미국은 26.6%지만, 프랑스는 45.1%에 달한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의 수준 높은 대학과 기업을 보고 능력과 야망이 있는 젊은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많이 유입된다”며 “고학력의 고령자들이 일하는 비율도 미국이 유럽보다 높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현국
그러나 미국인이 유럽인보다 행복한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달린다.
평균수명으로 이탈리아(82.9세), 프랑스(82.5세) 같은 유럽 주요국 국민이 미국인(79.1세)보다 오래 산다. 또한 미국은 상위 10%가 세전 소득의 45%를 가져가는데, 유럽에서는 이 비율이 36%로 더 낮다. 유럽이 보다 평등한 사회 구조를 갖고 있다는 의미다.
라크만 FT 칼럼니스트는 “유럽은 높은 사회복지 지출과 긴 휴일로 대표되는 모델을 채택해 왔다”며 “이는 미국보다 나은 점도 있지만 적어도 경제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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