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의 길을 가는 사람은 나와 생각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결혼하면서부터 줄줄이 딸린 가족을 위해 쉼 없이
온 길이 여기까지 왔다. 새삼 놀랄 것도 없는 현실 앞에 내 나이를 보고는 화들짝 기겁을 한다.
벌써 15년 전 쯤의 일로 기억한다. 어느 날 큰딸이 “엄마, 내 컴퓨터 또 만지신 거예요? 여기 있던 파일이 다 날라
갔어요. 힝, 어쩌면 좋아......“ 그야말로 큰딸의 오두방정 섞인 짜증은 내 가슴을 서늘하고 서운하게 한다.
“난 컴퓨터 손도 안 댔는데, 컴퓨터 책상 먼지만 닦아냈는데 이상하구나.” 그 때까지만 해도 컴퓨터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참 이상하다. 내가 컴퓨터 근처에만 가면 뭐가 없어지고 날라 간다는데......’ 날개가 있어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요술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딸의 투정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막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어머니 컴퓨터 교실’을 처음 열었다. 동네 엄마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컴퓨터를 배우러
다녔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큰딸 둘째 딸이 대학에 들어갔을 즈음이다. 밤새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끌려 들어간 내 몸이 순간 놀란다.
두 아이들은 한참 맛있게 잘 시간에 무엇에 홀린 듯이 컴퓨터 화면에 빠져 있었다. 그 딸들의 시커먼 뒷모습이 마치
절여 놓은 파김치처럼 보였다.
“제발 이제 좀 자라. 컴퓨터가 도대체 뭐라고 그리 혼을 다 뺏기는지....쯧쯧.” 이런 상황은 하루 이틀로 끝나지를
않고 내가 지쳐서 더 이상 자식들에게 잔소리조차 하고 싶지 않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내 생각을 뒤집어 엎고 컴퓨터를 기필코 배우고자 마음먹은 것은 내가 본의 아니게 억울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삼문화센터에 컴퓨터 강좌 접수를 하고 온 날, 종일 내 마음도 함께 널을
뛰어댔다. 컴퓨터를 처음 접하던 날, 깜박하는 순간 하나를 놓치면 다음 진도는 설명이 한창 이어지는데도 머리
속에 들어 오기는 커녕 앞에 놓친 생각이 계속 따라 붙어 버벅거리다 나는 손 따로, 마음 따로, 몸 따로, 얼굴빛 따로 ,
모든 것이 만만한 것이 없다고 투덜댔다. 그런 반복된 날들을 인내하며 컴퓨터를 정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나를
버티게 해주었다.
“엄마, 오늘도 집에 안 계셔서 노란색 가방 찾다가 없어서 그냥 나갔어요. 컴퓨터 안배우시면 안돼요? 막내딸은
엄마가 예전처럼 자기만을 봐주기를 바란다.
“운지야, 네가 결혼해서도 엄마가 영화 보러 가자, 외식하자, 여행가자고 오라고 부르면 언제든지 엄마한테 달려
올 수 있으면 그럴게. 그런데 엄마는 이제 너희들에게서 서서히 벗어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언젠가
엄마가 혼자 있을 시간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엄마 너무 믿지 마라”
그 뒤로도 막내딸은 나의 부재를 썩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의 두발은 자식들의 눈치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배울 곳을 찾아 기웃거린다. 내가 부지런하기만 하면 취미생활과 배울 수 있는 곳은 차고 넘칠
정도이다.
컴퓨터를 일 년 넘게 배우다 보니 그 속에서 날라 간다는 의미도 알게 되었고, 자식들에게 억울하게 당할 일이 없어서
좋았다. 그리고 점점 나이가 들어 갈수록 멋지고 당당하게 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몇 년 동안의 배움과 활동을
통해서 유어스테이지 클럽인 궁궐이야기, 웃음치료사 1급, 동화구연 2급, 시인, 시낭송가, 우크렐레, 등산 등 나의
새로움을 발견하는 시간이 된 것 같아서 나름대로 보람을 느낀다. 물론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가야 하겠지만,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오늘도 내 두발은 잰걸음 치며 배움의 문턱을 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