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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통일 큰 통일
제28회 하계 올림픽은 1896년 제1회 대회가 열린 올림픽 발상지 아테네에서 108년 만에 열렸으며, 202개 전 회원국이 빠짐없이 참가한 뜻깊은 대회였다. 이날 개회식에서 파란색 상의와 베이지색 바지, 오륜기를 상징하는 색동 넥타이 차림의 남북 선수단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이어 다시 손을 맞잡고 84번째로 입장, 지구촌에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7만여 명 관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남북한 선수단 행렬에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제14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떠올리며, 다음 올림픽에는 입장만 함께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일팀을 구성했으면 하고 바랐다.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는 ‘스포츠를 통한 작은 통일’을 이룬 뜻깊은 대회였다. 남북한 선수들이 한반도 기를 앞세우고 동시 입장하였으며,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채화된 성화를 남북한 유도 선수들이 함께 성화로에 점화하였다. 특히 “우리는 하나다.” “조국 통일”을 함께 외친 남북한 응원단은 남북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모아 힘차게 응원했다. 특히 올림픽의 꽃이라고 하는 마라톤에서 남자는 남한의 이봉주 선수가 여자는 북한의 함봉실 선수가 우승하여 ‘남남북녀’란 말이 입에서 자주 나오게 하였다. 그 외에도 우리 마음에 감동을 준 일들이 많았으며, 통일을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1976년에 나는 시골 학교에서 5학년을 담임하며 열심히 글쓰기 지도를 하고 있었다. 기억 너머 가물거리는 한 어린이의 글짓기 작품을 찾아내어 그때를 더듬어 보았다. 먼저 장미혜가 쓴 ‘작은 통일 큰 통일’을 소개해 본다.
나는 엄마 아빠가 안 계십니다. 아버지는 2학년 때 병으로 돌아가셨고, 얼마 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언니와 함께 사는 나는 돌아가신 지 2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갈수록 엄마 아빠가 더 보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던 재일 동포들은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으며, 아빠를 그리워했을까요?
지난해 추석 때와 올해 구정 때 또 어제부터 한식 성묘단이 모국을 방문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보았습니다. 기쁨의 울음바다가 된 공항. 고국을 찾기를 소원하던 돌아가신 아버지의 뼈를 안고 오는 아들. 30년 만에 만난 가족들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재일 동포들. 너무나 감격스럽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이었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통일된 그 날의 아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은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공항에서 가족을 만난 재일 동포들이 저렇게 기뻐하고 있는데 큰 통일인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아침에는 온 동포가 한 덩어리가 되어 기뻐할 것이며, 그 날의 감격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교실 창밖에는 태극기가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 태극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동그란 태극 안에 재일 동포들이 가족들을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이 또렷이 떠오릅니다. 그 모습은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온 동포들이 얼싸안고 기뻐하는 큰 통일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의 함성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 저녁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렵니다. 그리고 보고 싶은 엄마 아빠도 만나 보렵니다.
미혜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있었다. 2학년 때 아버지를, 3학년 봄 소풍 가던 날 어머니를 여읜 미혜는 가난한 언니 집에서 살면서 어렵게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친구들은 즐겁게 소풍을 가고 있는데 슬픔에 겨워 울고 있었을 미혜의 눈물 맺힌 얼굴을 떠올리며, 출석을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을 만큼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 된 까닭과 친구들 틈에서 빠져나와 외톨이가 되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러한 환경 탓인지 미혜는 항상 우울한 표정으로 온종일 말 한마디 않고 얼굴에는 웃음을 잃은 지 오래였다. 미혜 얼굴에 웃음을 찾아 줄 수는 없을까?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혜가 쓴 글짓기 작품을 읽던 나는 예쁜 글씨와 뛰어난 솜씨를 발견하고 글짓기를 통해 이 어린이를 바르게 이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그 때부터 글짓기 지도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다. 먼저 어린이들에게 일기를 쓰도록 하고 하루에 한 분단씩 살펴보고 친절히 지도했으며 잘된 점을 크게 칭찬하였다.
그동안 신문과 잡지에 실린 어린이들의 글짓기 작품을 모아 오던 나는 그것을 책으로 엮어주어 많은 작품을 마음껏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읽을거리가 부족한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 신문을 매일 볼 수 있도록 구독하였으며, 어린이 잡지와 각종 문집을 학급문고로 마련하여 언제나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교실 뒷면에 ‘이 주일의 글짓기’ 코너를 두고 제목을 주어 일주일 동안 열심히 글을 써내도록 하였으며 잘된 글을 뽑아 금상, 은상, 동상으로 나누어 게시하였다. 뽑힌 작품에는 예쁜 상장과 상품을 준비해 꼭꼭 시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을 받은 잘 된 작품은 학급 신문 ‘무지개’에 실어주고 잘된 점과 고칠 점을 서로 의논하게 하였다. 월요일 시상 때면 미혜는 자주 상을 받곤 했다. 나는 크게 칭찬해 주었고 미혜의 생활에도 작은 변화가 찾아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일 동포 모국 방문에 관한 학생 문예 작품 모집을 알리는 가사가 나왔다. 나는 관련 신문 잡지 기사를 스크랩하고 텔레비전, 방송을 녹음하는 등 자료 수집에 바빴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정성껏 편집하여 어린이들에게 보여준 뒤 느낌을 자유롭게 글로 표현하도록 하였다.
반 어린이들의 글 중에서 미혜의 글이 가장 뛰어났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때 그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미혜의 글은 곧 서울로 보내졌고 전국 수많은 응모작 중에서 최고상인 특상으로 뽑히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살아 계셔서 단 한 번만이라도 내 손으로 만든 이 꽃을 부모님 가슴에 달아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5월 8일 어버이날에 미혜 일기장에 쓰여 있는 소망이 담긴 글이다. 나는 미혜의 글을 읽을 때마다 미혜가 이상한 안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안경, 그것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의 안경이다. 이 마음의 안경을 끼고 재일 동포들이 가족들과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나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리움의 안경 없이 본 아이들보다 더욱 또렷이 보았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 안경이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이런 훌륭한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닐까?
너무나 가난했던 미혜가 시상식에 갈 여비를 마련할 수 없어서 걱정하고 있을 때 군위 남부학교 어린이회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 영광된 자리에 미혜가 갈 수 있도록 우리가 돕자는 미혜 돕기 운동을 전개해서 단 하루 만에 여비가 모였으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학부형 박은현 씨가 학교에 찾아와 여비에 보태라며 성금을 놓고 가기도 했다. 아름다운 도움에 힘입어 미혜는 5월 5일 시상식장에 참석하여 전 수상자를 대표하여 또렷하게 답사까지 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큰 변화인가. 커다란 트로피와 함께 손목시계, 동화집 등 푸짐한 상품을 받은 미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웃음을 되찾고 있었다. 그 날 심사위원장인 아동문학가 고 윤석중 선생은 다음과 같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래 헤어져 있던 동포끼리 우선 만남은 작은 통일이요, 이 작은 통일이 쌓이고 쌓이면 큰 통일이 올 것이 아니냐는 이 어린이의 깜찍한 생각은 어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미혜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선경합섬 선녀회에서 보내준 많은 학용품을 받게 된 것이다. 이 학용품은 아름다운 마음씨로 미혜 돕기 운동을 벌여 도와준 친구들에게 미혜가 줄 수 있는 귀한 선물이 되기도 했다.
5월 9일 시상식 장면과 ‘작은 통일 큰 통일’ 전문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을 때 눈물을 글썽이며 화면을 바라보던 전 학구민들의 하나 된 마음. 몇 주일 동안 말다툼을 하고 난 뒤부터 계속 토라져 말을 않고 지냈다는 여학생이 미혜의 글을 읽고 똑같이 부끄러워하면서 다시 말을 하게 된 일. 그 어린이들의 일기장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내일 내가 먼저 잘못 했다는 말을 하고 다정하게 지내야겠다.’라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작은 통일의 물결은 전국에 번졌다. 수많은 어린이와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던 어른들까지 미혜에게 격려의 편지를 수없이 보내 주었다. 특히 서울 대광교 김남일 군은 이 글을 읽고 감동하여 ‘작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 ‘작은 봉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실천하였다. 이 실천기는 ‘작은 봉사 작은 통일’이란 제목으로 통일 글짓기 대회에 으뜸글로 뽑혀 국토 통일원 장관상을 받았다. 시상식에 참석한 미혜의 딱한 사정을 알고 소년조선일보 사에서는 뜻밖에 장학금을 마련해 주었고, 미혜의 3학년 때 담임이셨던 양갑수 선생께서도 학용품을 보내주셨다. 동화책을 보내준 서울의 허병화 씨, 그리고 격려의 편지를 보내준 많은 어린이.
10월 30일에는 조선일보사에서 성금을 보내왔다. 서울 시내 여러 학교에서 장미혜 돕기 성금을 소년조선일보에 맡겼기 때문이다. 그 날은 마침 운동회 날이기도 했다. 뜻밖의 경사가 겹친 군위 남부교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은 크게 기뻐하였으며 성금을 받아든 미혜 눈에는 어느 사이엔가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서울에 다녀온 미혜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지하던 형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슬픔을 맞게 되었다. 그래서 미혜는 언니와 함께 더욱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착한 미혜에게 왜 이런 슬픔이 또다시 찾아왔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웃이란 몸이 아니라 그 마음이 함께 있는 자’라는 어느 교수님 말처럼 가까운 이웃들의 정성 어린 성금으로 미혜가 포기했던 중학교에 진학하던 날 잔잔한 기쁨을 느끼며, 미혜에게 작은 행복 큰 행복이 듬뿍 찾아주길 두 손 모아 빌었다.
김한성/ 수필가, 교육자
선산에서 태어나서 군위에서 자랐으며
‘수필공원’과 ‘에세이21’로 등단했다.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교육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공부했다.
2010년 42년 6개월 동안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정년으로 퇴임했다.
영남수필문학회 회장, 대구수필가협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 수필분과 위원장을 지냈다.
대구문학 신인상, 전국교원 예술상, 교원 실기대회 금상, 영호남수필문학 대상, 독서감상문 전국대회 최우수상, 한국교육자 대상,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다.
2008년 문예진흥기금을 받아서 첫 수필집 <해바라기>를 펴냈다. 2014년 <헛전화>를 출간했다
*주) 행간을 뗀 것은 인터넷에서 눈의 피로를 덜기 위함일 뿐입니다.
첫댓글 ‘이웃이란 몸이 아니라 그 마음이 함께 있는 자’라는 어느 교수님 말처럼 가까운 이웃들의 정성 어린 성금으로 미혜가 포기했던 중학교에 진학하던 날 잔잔한 기쁨을 느끼며, 미혜에게 작은 행복 큰 행복이 듬뿍 찾아주길 두 손 모아 빌었다.
‘오래 헤어져 있던 동포끼리 우선 만남은 작은 통일이요, 이 작은 통일이 쌓이고 쌓이면 큰 통일이 올 것이 아니냐는 이 어린이의 깜찍한 생각은 어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 윤석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