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1.
바람이 밤의 피부를 베어갔다 칼처럼 날카로운 건물들 사이
영리한 피아노처럼 아스팔트와 횡단보도 검은 외투들과 흰 마스크들
모두가 정확히 건반을 두드리며 배곧 거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검은 건반처럼 검은 외투에 닫힌 그대만은
그대의 흰 손가락 굳은 듯 흰 건반을 건너뛰지 못하고 있었다
서성거림과 글썽거림
그 어디 즈음을 그대만의 악기로 연주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상상했다
검은 봉투가 회포리막회집 편의점 공인중개사학원 지나 푹푹 휘파람을 불어대며 지나갔다 또 다른 과녁을 향해
그대는 어떤 과녁을 보았을까
조그맣게 흔들리는 검은 외투를 보았고 나의 외투도 다소 흔들거렸다
검은 외투에 갇힌 속울음 다듬어 울림이 되었으면 바랬다
정확히 두드리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그대
그대의 전부 바이올린 소리 되어라
무작정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응원했던
어린 단풍나무에 강의실 불빛이 내려앉은 겨울밤이었다
2.
기억을 먹으며 사는 사람들 기억은 춤을 닮아 술을 닮아
텅 빈 강의실 앉아 사람들이 흘리고 간 기억 부스러기를 보고 있다 아니면 사람들의 기억 부스러기가 나를 끌어당기는 건지도 모를 일
따뜻하고도 허무한 기억들 유년과 학창시절의 얽히고설킨 기억들 그런 어정쩡한 부스러기들이 뭉쳐 있다
난무하는 기억에 끌려 다니다 보면
신화 속
우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했다던 나르시스들이 텅 빈 강의실을 벚꽃 잎처럼 흩날렸다
신화를 뛰어넘어 학원 문을 열면
웃음이 치명적인 미녀 스치고 젊음 자체로 아름답던 젊은이들 머금다
기억을 과식해가며 공부하는 어른에게선 사소한 감동을 느끼곤 하던 날들
눈웃음+깡패 두 단어가 얼마나 가까울 수 있는지 그것만 가르쳐주던 학개론 수업
옆자리의 그대도 가끔 웃으며 검은 외투 대신 수수한 꽃을 묻혀 오곤 하는 날들
각자 자신의 기억들로 모두가 젊어졌다 믿던 강의실
어차피 삶이란 자신의 기억을 소환해가며 살아가는 비루한 패러디일지도
하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
봄이니까 봄이 어지럽게 만들었으므로
나는 그날들을 지금도 사랑한다 힘 센 봄을 당해낼 수 없었던 날들
3.
지긋지긋은 취해가는 거
술에 취한 새끼 고양이 세 마리 어미 고양이 꼬리를 물고 걸어가는 거
지금도 문장도 대책없이 술에 취해 갔다
나는 아무 잘 못 없는데 이놈의 비 때문에 덕수궁 돌담길 때문에 무조건적 미친 자식 더위 때문에 온갖 때문에 지긋지긋하기 때문에
가지런히 세워 놓은 초록 병목에 휘파람이나 불어보고 터벅터벅 강의실로 향하던 여름 (술은 수업 시간을 버티는 힘이 될 수도 있어요-중요합니다)
창밖에서 짧고 굵게 맑스 말스 튀넨 튀네 소리 초록 잎 사이 사납게 내리는 비 사이 음흉한 담배연기 초록을 물컹거리게 만들었다
근데 음흉한 담배 연기가 초록을 물컹거리게 했다고 아 뭔가 쎄 하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어지럽다(과음은 해롭습니다)
다시 시작해보자
장마 : 89도씨의 비가 내린다 흐물거림은 도처에 깔려있다 초록이 물컹거리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함은 차라리 초록을 원했으므로 나는 물컹거리는 초록으로 걸어갔다 푹 푹 빠지는 발 리듬 리듬 소리 내며 걸어갔다 근처를 날던 새들도 내려앉아 구토를 하는 초록 순간 등을 두드려주고 싶은 마음 흐물거렸다 지긋지긋함은 잔인했다 나는 물컹거리는 초록을 계속 걸었다 잠시라도 앉으면 새처럼 구토할까봐 계속 걸었다 몽골의 평야를 그려 보기도 하고 강의실에서 밀라노까지는 얼마나 멀까를 생각해보며 걸었다 초록이 목울대를 채워갔다 물컹거리는 초록에서 헤엄치고 있다 눈은 초록 몸은 물컹거림 계속 되었다 끝인가 결국 초록에 갇힌 허우적이었나 감각의 끝에 매달린 뿐 포기와 기다림 그런 주저했던 시간 긴 휘파람 초록에 긁혀가며 들려오는 소리 담배연기가 물컹거림 사이를 아슬아슬 피하며 다가오는 모습
그대의 커피향 연기 그대가 커피 잔을 긁혀내는 소리
나는 강의실에서 떠나지 않았다 물컹거리는 초록 같은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4.
아스팔트를 걷는 달팽이 노을에게 다가가는 이유는
남청색의 저녁 빛은 오고야 말았는데
잠시 동안의 절정 오랫동안의 몰락은 함께 오는데
멀리 언덕 넘어 한 쪽 눈을 잃은 트럭이 다가오는 중이다
망설임 2.5초
나는 그대 같은 친구 같은 달팽이를 껴안는다
외투와 피부 장마 첼로 봄의 기억 초록 휘파람 커피 느닷없는 붉은 제라늄까지
단어들이 까맣고 조그마해 기어이 마침표가 될 때까지
휘발되지 않고 그대에게로 삼투압 중인 나
그대에게는 가을새 새벽별이 스쳐 지나간다
또다시 건방진 웃음을 지으며 찬바람이 당도하는 202210290700
그대는 찬바람에게 나의 휘파람까지 더해 선언하듯 응원하듯
바람아 얼마든지 마음껏 베어보아라
나는 자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