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법화경과 그 영향
1. 법화경과 그 영향
옛날에 일본의 두 승려 호겐(H?gon)과 렌조(Renz?)가 있었다. 호겐이 『화엄경』을 독송한 반면 렌조는
『법화경』을 신봉하였다. 『화엄경』의 신통력과 호겐의 덕행으로 한 천신이 호겐에게 계속 먹을 거리를
대주었다. 자비로운 마음과 약간의 자만심을 가지고 있었던 호겐은 어느날 렌조를 초대하고 천신에게 두
사람이 먹을 음식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천신은 약속을 했으나 불행히도 그날 음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렌조는 저녁 때까지 기다리다가 돌아가 버렸다. 그가 토굴을 떠나자마자 천신은 많은 음식을 가지고
나타났다. 렌조가 덕행을 잃고 분노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렌조는
『법화경』의 신통력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호법신중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고, 나약한 『화엄경』의 신은
문을 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매우 감명받은 호겐은 『화엄경』 독송을 버리고 열렬한 『법화경』
신봉자가 되었다. 이처럼 종교적 수행은 종종 신통력과 결부되었고 『법화경』은 그중에서도 신통력이 매우
뛰어나다고 전해진다.
이와 비슷한 많은 이야기들이 11세기에 『법화경』을 믿고 독송하고 사경하고 전파하는 공덕을 증명하는
신비한 이야기책인 『법화험기(法華驗 記, Hokkegenki)』에 나온다(Dykstra, 1983: 59-60). 많은 동아시아
불교인들은 초기부터 붓다의 궁극적인 진리와 해탈을 위한 마지막 가르침이 『법화경』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 일련(日蓮, Nichiren, 1222-82)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일본 불교도들은 『법화경』을 해탈의
수단만이 아니라 말법시대에 수행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적절하고도 유일한 경전으로 여긴다. 중국의
어떤 관료는 30년 동안 매일 이 경전을 암송하였고 여든 살이 넘어서는 하루에 세 차례씩 암송하였다고
한다.
어떤 중국 고승은 30년 동안 『법화경』을 37,000회 암송하였다고 한다. 『법화험기』에 따르면 하루에 30회
이상, 그리고 한 달에 1천회 이상 암송한 일본인들도 있다고 한다. 어떤 중국 승려는 자신의 피로
『법화경』을 사경하면 ‘상상할 수 없는 공덕’이 생긴다고 말하였다.
그런 열렬한 열의를 가지게 한 경전(과 적지 않은 동아시아 예술과 문학)은 정밀하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법화경』 산스크리트본은 주로 단편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이본(異本)들이 현존하고, 문헌
학적인 역사가 복잡하다.
현존하는 최초의 한역본은 축법호(竺法護, Dharmarak?a)가 286년에 한역(290년 개정)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되고 널리 유포된 한역본은 구마라집과 그의 역경팀이 406년에 한역한
것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산스크리트본이 원래 인도에서 편찬된 경전이니까 한역본보다 먼저 만들어졌다거나
신빙성이 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중국에서 경전을 인쇄하고 보존한 것이 산스크리트어본보다 훨씬
앞선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산스크리트어본을 원본이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문헌학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문제가 있다.
구마라집의 『법화경』은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법화경』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한 일본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부분들(1-9, 17품)이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1세기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비록 의문점들도 있고 완전히 설득력 있는 증거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지만 일본에서는 그 경전의 대부분 이 2세기 말경에는 다 성립되었다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인다.
『법화경』은 하나의 극적(劇的)인 경전이다. 전달하려고 하는 내용은 별개로 치더라도 끊임없는 장면
변화와 적지 않은 부분들에서 나타나는 인상적인 비유가 『법화경』의 성공 요소이다. 고대본에는
『법화경』과 『법화경』 전파자들을 비웃는 이들에게 권위를 세울 필요성이 있었음이 나타난다.
중국과 일본불교에 따르면 『법화경』은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이고 붓다가 육신의 죽음 또는 『법화경』
자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반열반(般涅槃)에 들기 바로 직전에 가르쳤다고 한다.
여기서 석가모니 붓다는 청중들에게 자신이 불교와 비불교의 종교적인 목표를 성취한 사람들보다
인식과 정신적으로 한없이 뛰어난 존재임을 명확하게 하려고 애쓴다
세존은 수없이 많다.
신들과 인간들,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
누구도 붓다를 알 수가 없다.
붓다의 힘[力] …
붓다의 두려움 없음[無畏] …
붓다의 해탈 …
붓다의 삼매에 대해서,
붓다의 다른 법들과 마찬가지로 누구도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Hurvitz 1976: 23)
그렇지만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청중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한 방편(方便)을 사용한다. 이 방편을 통한
가르침은 대승의 핵심적인 교리이자 『법화경』의 주된 가르침의 하나이다. 이것이 동아시아에서
『법화경』이 널리 유포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임은 명백하다.
초기불교의 중국전파 과정에서 불교 전법승들이 직면한 중대한 문제점이자 나아가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에서도 제기된 문제점 중에는 한편으로 분명히 모순된 내용의 가르침들을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리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와 매우 상이한 문화적 특성에 맞추기 위해 불교의 메시지를
조절해야하는 절박함이었다.
대개 방편을 통한 설법은 붓다가 청중들의 수준에 맞추어 가르침을 폈던 것이다. 붓다들과 관련된 곳에,
모든 것은 그 특별한 문맥에 맞는 적절한 행위를 수반하는 자비로운 의도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경장의
가르침들이 붓다의 말일지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많은 모순들이 내포되어 있고, 이러한 모순들은 매우
명백하다.
가르침들은 주어진 문맥에 적절하므로 모순들은 사라진다. 불교에서 가르침들은 사다리나 혹은 강을
건너기 위해 쓰이는 뗏목과 같다는 유명한 비유로 사용되었다. 강을 건넌 뒤 이제 뗏목은 필요 없는데
여전히 뗏목을 끌고 다니는 것은 무의미하다. 적절하게 쓰이고 나면 그 가르침은 가르침 자체를 초월한다.
중국 불교학파에서는 방편의 가르침을 판교(判敎, panjiao, p’anchiao)라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각
학파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최의 가르침, 가장 진실한 가르침으로 이끄는 단계에 따라, 그리고
자신들의 소의경전에 구현된 정도에 따라 순위를 매겼다. 그렇게 해서 각 학파는 각 교리의 목적과
궁극의 가르침을 언어를 통해 이해하는 한 어째서 오직 그 경전만이 궁극의 가르침을 내포하고 있는가를
설명한다.
더욱이 모든 현상들이 단지 상대적으로만 존재한다는 철학적 구조 안에서 작용하는 방편의 교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적용시킨다는 점에서 무한한 유연성을 갖는다. 붓다는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무한한 자비로 가르침을 베푼다. 모든 가르침은 그것을 듣는 대중들의 수준에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붓다의 자비와 지혜가 살아 있는 한 가르침의 내용이 아무리 변용되었더라도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면 그것은 불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붓다나 보살은 중생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불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할지라도 가르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상 대승불교의 방편은 단순히 교리를 대중들의 수준에 맞춘다는 것 이상으로 확대된다. 붓다나
보살의 행위는 어떤 결과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중생의 이익을 위한다는 자비로운 동기로 행하는
것이고, 살아 있는 지혜로 중생의 수준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전 전체가 방편 이야기인
『선방편경(善方便 經, Up?yakau?alya S?tra)』이라는 짧은 제목의 경전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선방편경』은 싯다르타의 생애 가운데 전설적인 사건들에 관한 일련의 질문과 대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사건들은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쓰여진
것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업의 장애로부터 자유롭고 전지전능한 붓다가 왜 탁발을 나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을까? 이것은 아마 미래에 이와 유사하게 때때로 빈손으로 돌아올 비구들에 대한
자비심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이 경전을 편찬했던 사람은 때때로 붓다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심했거나 적어도 어느 정도 독창성을 발휘해야만 했을 것이다. 붓다는 보살이면서 왜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을까?
만약 일곱 걸음을 걷는 것보다 여섯 걸음을 걷는 것이 중생들에게 더 유익하다면 보살은 여섯 걸음을
걸었을 것이다. 또 일곱 걸음을 걷는 것보다 여덟 걸음을 걷는 것이 중생들에게 더 유익하였다면
보살은 여덟 걸음을 걸었을 것이다. 일곱 걸음을 걷는 것이 중생들에게 가장 유익했기 때문에 붓다는
아무도 그를 잡아 주지 않았지만 여섯 걸음이나 여덟 걸음이 아닌 일곱 걸음을 걸었던 것이다.
(Chang 1983: 445)
방편의 교리는 대승 윤리학을 연구하는 데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지혜에
동반되는 자비라는 동기를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는 데 최우선의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방편으로 행하는 것은 다른 ‘편협한’ 도덕률 또는 계율을 고수하는 사람들과는 다를 수 있다.
『선방편경』에서 붓다는 전생에 자신이 출가 수행자였을 때 그를 사랑한 어떤 소녀가 자살하겠다고
하자 그녀를 위해 그녀와 성교를 나눈 일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있다(앞의 책: 433). 대승불교권에
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는 붓다가 전생에 사람을 죽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500명의
사람을 살해하는 과보로 오랫동안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보살은 완전한 자비의 정신으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계율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지만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 때문에 자신이 지옥에서 고통받을 각오를 하고 있다. 결국
경전에서는 보살이 중생들을 정신적으로 발전시키고 지옥을 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살인자도 극락에 환생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앞의 책: 456-7).11)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대승불교도들에게 폭력을 정당화시켜 주는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중국공산당의 침략에 대항하여 정법(正法)을 수호하기 위한 티베트 승려들의 폭력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보살의 살생을 정당화한 대승경전의 가르침으로 중국의
불교도들을 계급혁명에 참여시키고 인민해방군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법화험기』에서는 『법화경』에 대한 일본 신도의 방편을 말한다. 그는 감옥에서 『법화경』을 유포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계속 도둑질을 한다. 간수장은 꿈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감옥의
범죄자를 구하기 위해 성인 ?초 (Shunch?)는 감옥에 일곱 차례나 들어갔다. 그것은 단지 중생과
접촉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영광을 숨겨 왔던 모든 붓다들의 방편이었을 뿐이다”(Dykstra 1983: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