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베란다 / 이지선
겨우내 거실 먼지를 뒤집어쓴 화초들을 베란다로 옮기는 일. 한 해 가드닝의 시작이다. 작년 다이어리를 살펴보니 작년 보다 2주 빠르다. 오지랖 넓게도 지구가 걱정이 된다. ‘정말 지구 온난화가 심각해지는 건가?’ 하지만 베란다에서의 화초들 자리를 정하는 고민에 어느새 지구걱정은 멀리 사라진다.
사는곳이 아파트 1층이라 볕이 좋지 않다. 그래서 그나마 볕이 잘 드는 자리는 고운 꽃을 피우는 화초의 자리이다. 손바닥만한 베란다에 그동안 키워온 화초들이 적지 않아서 화초들의 자리 정하기는 신중해야 한다. 해마다 봄이면 같은 고민을 하건만 왜 화초들의 자리가 매번 바뀌는지 모르겠다. 화초들의 종류가 많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건 볕이 잘 드는 자리는 한정적이니 이제 어떤 화초를 선택할지 결정해야 한다. 마치 내가 어떤 화초를 선택할지 고민하는 것을 아는지 모두들 더 곱게 보이려 경쟁하는 것 같다. 꽃망울이 이제 막 맺힌 꽃기린, 어릴 때 마시던 환타 색 꽃이 흐드러지게 핀 카랑코에, 작은 보라 방울들이 옹기종기 모여 은은한 향기까지 함께 주는 무스카리, 어제 사온 향기 뿜뿜 히아신스, 뜬금없이 피어난 다육이 꽃 등등...... 일단 바람 잘 통하고 볕이 좋은 자리는 꽃부자 제라늄에게 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일단 제라늄은 꽃 보기에 실패할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온순한 화초라서 햇빛만 충분하면 꽃을 팡팡 터뜨려 준다. 봄 햇살에 몸을 잘 달궈 놓은 제라늄은 꽃이 귀한 한여름에도 꽃을 아낌없이 피워내기 때문에 충분히 제일 좋은 자리에 놓일 만 하다. 작년부터 유럽 제라늄에 푹 빠져서 한 두 개 사 모은 것이 벌써 12개다. 이제 그만 들여야지 하면서도 매번 또 들이는걸 보면 '병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 저기 삽목한 작은 화분들까지 빼곡히 자리를 정해주고 나니 율마가 생각이 난다. ‘참! 율마는 정말 햇빛 없이는 안 되는데......’ 베란다 화초 사이를 겅중 성큼 걸어서 율마가 들어있는 화분을 옮겨 놓았다. 한 번 쓰다듬어 주니 피톤치드 향이 깊게 올라온다. 화분 옮기느라 아픈 허리도 싹 낫게 하는 행복한 향기다. 그 다음은 이젠 정말 옮겨주지 않으면 삐쳐서 꽃을 안 보여줄 것 같은 장미다. 병충해도 많고 통풍도 잘 시켜줘야 하고, 영양제도 꼭 꼭 챙겨줘야 하는 까탈스러운 장미다. 소혹성 B612호에서 해와 같은 시간에 꽃을 피웠던 장미가 생각난다. 다행히 내 베란다의 장미는 노랑과 분홍으로 어린왕자의 장미처럼 빨강은 아니다. 어쨌건 올해도 좋은 자리 차지했으니 귀한 꽃 보여주길 기대해본다. 또 눈에 띈 화초는 반짝이는 주황색 비늘을 지닌 금붕어모양의 꽃이 다글다글한 네마탄서스다. 처음 화원에서 본 순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얼른 데워와 키운지 벌써 3년째다. 다육이처럼 키우는 화초라 손이 많이 가지 않는데도 금붕어를 닮은 꽃들을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피워대는지 모른다. 누군가가 나에게 화초 키우기 똥손인 자들에게 적합한 화초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추천해주고 싶은 식물이다. 마지막으로는 재작년에 동학년을 했던 선생님께서 주신 할미꽃이다. 아직 플라스틱 포트에 담겨져 있어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기에 비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 볕이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은 아니고 ‘할미꽃’이라는 이름 때문에 왠지 좋은 자리를 드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옮겨 놓고 나니 이유가 좀 웃긴다.
꽃은 피지 않지만 햇빛이 있어야 잎사귀의 무늬가 예쁜 관엽 식물들도 신중하게 자리를 정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잎사귀의 오묘한 무늬들이 사라져서 시시한 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흰색 하트무늬가 귀여운 하트무늬고무나무, 호야, 바나나 크로톤 등. 무늬가 아름다운 식물들을 배치하고 나니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오늘의 화분 옮기기는 이제 그만 하라는 신호다. 가드닝을 시작한지 올해로 10년이다. 재작년부터는 화분들을 옮기고 나면 허리가 아파서 작은 화분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식물들이 커 가면 어쩔 수 없이 다시 큰 분으로 옮겨야 하니 화분은 커질 수 밖 에 없다. 그래서 허리에 무리가 가니 예전에는 하루면 끝냈던 화분 옮기기가 이제는 이틀은 해야 한다. 이제 서서히 자리 배치도 끝났고 아예 아파트 밖으로 옮길 대형 화분 너댓개만 남았다. 이 큰 화분들은 어쩔 수 없이 작은 아들 녀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궁둥이를 토닥토닥해서 옮겨야 한다. 다행히 웬일로 기분이 좋은 중2가 별 투덜거림 없이 화분을 옮겨주어서 오늘의 일이 마무리 되었다. 내일은 오늘 자리를 못 정해준 화초들을 정리하고 영양제를 꽂아주기만 하면 된다.
어느새 늦은 오후의 아름다운 햇빛이 베란다를 가득 채워 준다. 베란다로 나온 화초들이 거실에 있을 때 보다 더 빛나 보인다.
늘 이맘때면 베란다로 나오는 나의 화초들과 함께 시작하는 올 한해도 반짝이는 한해가 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첫댓글 가드닝 10년 꽃들의 자리차지, 네마탄서스와 똥손 재미있네요
같은 단락을 이루는 문장은 계속 이어서 쓰세요.
아기자기한 꽃들이 햇살을 받아 환하게 웃는 듯 합니다. 선생님의 부지런한 손길에서 꽃들이 듬뿍 사랑을 받는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프로필 사진의 멋진 베란다가 그냥 되는 게 아니었군요.
아기자기한 솜씨, 똥손인 저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와, 선생님은 꽃을 잘 알아 주고 잘 돌봐 주시네요. 죽일까봐 무서워서 못 키우는 저는 부러울 뿐입니다.
저도 똥손인 주제에 올봄에 화분 몇 개 들여놓았어요. 20년 가까이 키우던 파키라를 죽였더니 텅 빈 화분이 안쓰럽기만 합니다. 식물을 좋아하는 선생님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반려견이 아닌 반려 식물을 키우는 선생님의 행복한 일상이 글 읽는 나에게도 전해져서 흐믓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