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노트 43
2. 질문 : 요즈음 좌선을 할 때 집중이 되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다보니 좌선만 하려고 하고 경행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답변 : 수행을 할 때 좋거나 싫거나 1시간씩 좌선과 경행을 병행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좋아하는 데로 따라 가면 안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좋은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것을 찾아내려고 이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좋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좋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이 괴로움이다.
이 수행을 왜 하는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중에 다섯 번째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ṇa)가 있다.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는 우다야바야 냐나(생멸의 지혜)와 함께 10가지 종류의 지혜가 있는데 어느 단계에서나 빠지게 되면 더 높은 단계로 올라 갈 수가 없다. 이 단계에서 좋은 것이 있지만 그것은 뛰어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좋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한다. 좋은 것만 찾다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만 증장시킨다.
< 참고 >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몸과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가진 역할에 대한 수행도 있고 마음이 가진 역할에 대한 수행도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세분화한 수행이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인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사념처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끌지만 마음만 가지고 수행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좌선과 함께 반드시 몸을 움직이는 경행을 해야 합니다.
좌선은 집중력을 키우고 경행을 정진력을 키웁니다. 집중력과 정진력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집중은 고요한 마음의 집중이고 정진은 노력으로 집중의 힘을 키웁니다. 경행은 정진력이지만 움직이면서 생긴 집중력은 힘이 강해 잘 깨지지가 않아 좌선을 할 때 크게 도움을 줍니다. 경행은 부처님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수행방법입니다. 상좌불교의 비구들은 아침에 탁발을 할 때 맨발로 경행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탁발 중의 찰나집중으로 좌선을 하면 더 깊게 집중해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괴로움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사실 괴로움[苦]이란 뜻은 빨리어 둑카를 한문으로 번역한 말로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한문으로 번역된 괴로움은 빨리어로 둑카인데 하찮고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불만족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하찮고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것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좋은 것만 추구하는 것이 바로 감각적 욕망입니다. 좋은 것만 추구하면 개미가 꿀에 빠져 죽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감각적 욕망도 꿀을 좋아하는 개미의 운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더 이상 다다를 것이 없는 사물의 궁극의 이치를 알아 집착을 끊는 것이 최종적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똑 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도 똑같이 알아차릴 대상일 뿐입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싫어하는 것만 하지 않기 위해서 싫더라도 좌선과 경행을 병행해야 합니다. 좌선이 경행에 도움을 주고 경행이 좌선에 도움을 주는 상승효과가 있습니다. 이런 도움에 상관없이 좋아해서 집착하고 싫어해서 배척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것이 아닙니다. 좋더라고 어느 단계에 머물면 더 높은 단계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가야할 최종적 단계는 도과를 성취하여 괴로움이 소멸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아가야할 길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좋다고 해서 어느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누구도 더 높은 단계의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이 길을 반드시 스승이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서 가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좋아서 주저 않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일곱 가지 청정의 단계와 함께 16단계의 지혜의 과정이 있습니다. 16단계의 지혜의 과정은 모든 지혜의 단계를 포함한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10가지 지혜의 과정을 밝혔습니다. 이때의 10가지는 16단계 안에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10가지를 주석서 청정도론을 쓰신 붓다고사께서 16단계로 자세하게 나누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빠사나 수행은 이런 여러 단계의 지혜와 과정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단계에 머물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과정에는 5가지 유사열반이 있어서 수행자가 열반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단계이건 이미 경험을 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야 무난히 해탈의 자유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은 앞으로 나아가느냐 뒤로 퇴보하느냐 하는 항상 두 가지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가속도가 붙어야 합니다. 나무를 비벼서 불을 내는 것처럼 끊어지지 않고 계속 정진하면 지혜의 가속도가 붙어 하나의 완성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의 완성이 열반입니다. 이러한 열반을 성취하고도 계속해서 더 높은 지혜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무수한 반복학습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같은 것을 반복해서 연마할 때 기존의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새로운 견해가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어느 수행 처나 일정한 시간표가 있습니다. 이것은 최적화된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무조건 이 시간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스승의 가르침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험하지 않은 정신세계를 바르게 갈 수 없습니다. 수행은 너무나 많은 위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위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습성입니다. 이것이 업의 과보입니다. 이 업의 과보를 개선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은 자기 내면을 통찰하는 것이므로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이때 가장 이상적인 대결은 맞서 싸우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훌륭한 무기입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앞에 어떤 것도 맞서지 못합니다.
3. 질문 : 좌선 중에 자세가 기울기도 하고 몸이 흔들립니다.
답변 : 좌선을 할 때 몸이 흔들리면 호흡의 일어남과 꺼짐을 알아차리는 것을 멈추어라. 그리고 몸이 흔들리는 현상은 자세하게 알아차려라. 그러면 자세가 바르게 잡히고 몸의 흔들림이 사라질 것이다.
< 참고 >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림이 지속되어 집중이 되면 몸과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됩니다. 이때 몸의 작은 흔들림도 크게 느껴집니다. 또 작은 소리도 크게 느껴 놀랍니다. 작은 흔들림을 느낄 정도가 되면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흔들 수 있습니다. 이때 미세한 탐욕이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자기 몸에는 기본적인 풍대가 있어서 진동하는데 이 진동을 좋아해서 스스로 흔들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미세한 탐욕입니다. 흔드는 것을 좋아하면 스스로 더 크게 흔들어서 기분이 좋게 만듭니다. 이것은 현상에 개입한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때 흔들리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지 대상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경우는 위빠사나 수행의 궤를 벗어난 것이기도 하지만 알아차림이 약해지고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첫 번째 지혜의 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때 몸의 영역과 마음의 영역을 하나로 두지 않고 서로 분리해서 각각의 역할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 몸이 아플 때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 몸과 마음이 객관화가 됩니다.
이런 수행을 하면 두 번째 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몸은 마음의 의도가 있어서 움직인다는 진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행위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고 모두 마음이 이끌어서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 단계는 모든 도의 기본으로 의심에서 벗어나는 연기의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가 성숙되면 세 번째 단계인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이때의 지혜가 무상, 고, 무아입니다.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현상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초기에 느끼는 무상, 고, 무아이므로 완전하게 법을 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미세한 무상과 고와 무아를 감지합니다. 이때 몸의 흔들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이 계속 변하며 흔들리는 것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 휩쓸리면 자신이 스스로 흔드는 것에 동참합니다. 이것이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지 않고 대상과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대상에 개입해서 하나가 된 것은 대상을 좋아한 것이라서 바른 법의 성품을 볼 수 없습니다. 몸이 움직이는 무상이라는 법이 나타났는데도 대상과 동화가 되면 나타난 법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몸이 흔들릴 때는 스스로 흔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조용히 흔들림을 알아차리면 차츰 흔들림이 약해집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흔들림이 있어도 스스로 동참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몸을 흔들면 다음 단계로 지혜로 갈 수 없을뿐더러 수행이 낮은 단계로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은 항상 진퇴의 갈림길에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집중이 되면 몸의 자세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세를 바르게 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천천히 몸을 바르게 가누면 됩니다. 이때도 신경질적으로 몸을 바로 잡으면 미세한 탐욕과 성냄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세 하나를 바로 잡는데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런 마음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과정이 기본적으로 미세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수행은 바로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때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지혜가 성숙되어 법의 치유가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