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귀퉁이의 작은 원탁 / 허숙희
아침에 일어나 방을 나와 창문을 연다. 창 너머 멀리 보이는 금오산 정상을 바라본다. 그 옆으로 떠 오르는 둥근 해와 마주한다. 이글거리는 붉은 해의 정기를 받으려고 크게 기지개를 핀다. 그리고 잠깐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곳은 세평 남짓한 우리 집 주방이다.
퇴직하고 남도를 여행하면서 묵어갈 잠자리를 준비한다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고향 집을 고치기로 했다. 많은 돈 안 들이고 간단히 수리했다. 아래채를 헐어 내고 안방과 아랫방을 터서 하나로 크게 만들었다. 부엌은 입식으로 개조하였고 난방은 기름보일러로 바꾸었다. 싱크대, 옷장, 식탁을 비롯해 필요한 가재도구를 사서 채웠다. 주방이 넓지 않아 식탁도 간신히 들여놓았다. 거실도 좁아서 아무것도 놓지 않았다. 그런대로 가끔 오가며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생각과는 달리 고향 집에 머무는 날이 늘어나며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럴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부엌살림이 익숙하지 못해 퇴직하고 부엌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알맞은 곳이 여기가 아닐까? 궁리 끝에 식탁을 좁은 거실로 내놓고 그 자리를 꾸미기로 했다. 주방 겸 서재라고나 할까?
제대로 된 책상은 놓을 수 없었다. 수원 집 베란다에 있는 원탁과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노트북을 펴서 놓으면 가득 차는 작은 크기지만 창가에 놓으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꼬마 3단짜리 서랍장을 놓았다. 키 작은 4단 책꽂이도 냉장고 옆 벽에 딱 붙여 놓았다. 녹음기와 블루투스 스피커(전자 기기에 무선으로 연결해서 쓰는 스피커)도 설치했다. 구석에는 이젤과 보면대도 세워 놓았다. 여름에는 선풍기, 겨울에는 오방 난로까지 준비했다. 내게 필요한 건 다 갖추어 놓았다. 좁지만 큰 불편은 없었다. 오히려 좋은 점이 많았다.
창가에 앉아 책을 보려면 팔만 쭉 뻗으면 원하는 책을 꺼낼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문을 꼭 닫으면 남편이 크게 틀어 놓은 티브이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장님의 방송 소리도 방에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마을 분들이 찾아오면 주방 문을 열고 바로 만나 차도 마시며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다. 부엌일을 하면서 언제든 라디오 방송을 크게 들을 수 있었고 음식을 끓이면서 넘치거나 태우는 일도 없어졌다. 반찬이 만들어지는 동안 잠깐 앉아 쉴 수도 있었다. 또 하모니카 연습할 때 음원을 크게 틀어도 남편의 잔소리를 듣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창밖으로 우리 집 작은 뜰에서 계절에 따라 색깔을 바꾸어 가며 크는 나무와 화초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남편은 25년 전 내가 장학사로 발령받자 공부하는 전문직이 되어야 한다며 시집간 딸이 쓰던 방에 으리으리한 책장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책상과 의자를 들여놓고 멋지게 꾸며 주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서재처럼 근사했다. 그러나 그 방 주인인 난 항상 늦은 퇴근과 바쁘다는 이유로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지금도 책상과 의자는 빈집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지금 고향 집 주방 창가에 놓인 책상은 다르다. 신랑과 함께 운동하거나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애용한다. 하모니카를 불거나, 일기 쓸 때도 또, 환경 교육 강의 자료를 만들고 연필 드로잉할 때도 늘 함께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멀리 있어 늘 그리운 사람들과 스마트 폰과 블로그 포스팅으로 이야기 나누는 자리이기도 하다. 지난해 ‘일상의 글쓰기’ 수업과 숙제도 여기서 해 냈다.
남편은 잠들었는지 조용하다. 지금도 ‘책상’이란 글감으로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주방 귀퉁이에 있는 작은 원탁에 앉아서.
첫댓글 선생님의 생활이 휀히 보이네요. 그책상 위에서 웃고 운 날들의 생활이 한 편의 수필로 써지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읽어 주시고 정감 어린 답글 고맙습니다.
주방 원탁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행복한 곳이예요.
지금도 주방에서 하하하
좁은 시골집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 잘 활용하고 계시네요. 시골에 살면 넓은 실내가 아니어도
잘 지낼 수 있드라고요. 그곳에서 좋은 글 많이 쓰실 것 같습니다.
행복은 만들어가는게 분명한 거죠? 하루하루 즐거움을 만들고 있어요.
일상의 글방도 행복한 인연이예요. 선생님들의 답글을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
작지만 선생님만의 공간 부럽습니다. 저도 전원 생활을 꿈꾸는 한 사람입니다.
선생님만의 공간을 직접 보지 않아도 짐작이갑니다. 좋으시겠어요. 평온한 일상 누리시길 응원할게요.
선생님, 글이 참 좋습니다. 일상도 잘 그려지고 감성도 잘 드러난 좋은 글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