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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여인 기씨는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갔다가 궁녀가 된 뒤 원 순제의 총애를 받아 귀빈이 되었고, 훗날 북원의 황제가 된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은 다음 오랜 간난신고 끝에 제1황후가 되었다.
기씨 형제들은 이런 기황후의 후원을 받아 권세를 누렸으며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입성책동을 벌이는 등 국정을 농단하다 공민왕에게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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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1259년(고종 46년) 원나라에 항복하면서 속국으로 전락한 뒤 80여 년 동안 원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았다.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야 했고, 왕자는 볼모가 되어 심양에서 살아야 했다.
아울러 고려는 원나라의 침략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지원하는 병참기지 역할을 담당했고 수시로 환관과 공녀를 바쳤다.
이런 비참한 시기에 공녀로 끌려간 기씨는 원나라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다 순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황후의 지위까지 올랐다.
공녀로 선발되어 대도에 끌려가다
《원사》 〈후비열전〉에는 순제의 황후 10명이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올제이후투그(完者忽都)라는 이름의 여인이 바로 고려 출신의 기황후이다.
그녀는 1315년(충숙왕 2년)에 개성에서 행주 기씨의 후손 기자오의 5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서 이행검의 딸 이씨이다.
원나라는 1231년(고종 18년)부터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했다.
고려는 28년 동안 끈질긴 항쟁했지만 1259년에 결국 항복했다.
그 후 원종이 원 세조 쿠빌라이의 부마가 되어 우호적인 관계를 정립하고 원나라의 도움을 얻어 무신정권을 축출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때부터 원나라는 부마국이 된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자국의 정벌 전쟁에 소요되는 각종 물자와 함께 수많은 공녀를 요구했던 것이다.
1274년(원종 15년) 원나라는 귀순한 남송의 군사들을 혼인시킨다는 명목으로 고려에 공녀 140명을 보내라고 통보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는 과부처녀추고별감을 만든 다음 전국에서 과부와 처녀들을 모집했다.
이에 기겁한 백성들은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조혼을 시키거나 여자들을 감추었다.
그러자 충렬왕은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신분에 관계없이 공녀를 선발하여 원나라에 보냈다.
그 때문에 고려 사회가 들썩이자 유학자 이곡은 1335년(충렬왕 복위 4년)에 〈공녀반대상소문〉을 올려 그 폐단을 호소하기도 했다.
‘공녀로 뽑히면 부모친족이 모여 밤낮으로 곡을 하며 웁니다. 공녀가 가는 날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다가 난간이나 길에 엎어집니다. 울부짖다가 너무 비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매 죽는 자도 있습니다.’
원 순제의 총애를 받다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뿐만 아니라 환관들도 요구했다.
본래 원나라의 민족 분류에 따르면 고려인은 몽고족, 색목인에 이어 3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하지만 원 세조는 고려인들의 학문과 경륜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을 제국 경영에 적극 활용하려 했다.
당시 고려 여인들은 미모와 품격이 뛰어났으므로 원나라의 황족과 대신들은 공녀로 데려온 고려 여인을 아내나 첩으로 삼는 일이 많았다.
일례로 김심의 딸 달마실리(達麻實利)는 원나라 인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1328년(충숙왕 15년) 황후로 책봉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양광도 행주의 사족 출신으로 총부 정6품직 산랑을 지낸 기자오의 막내딸 기씨는 공녀로 선발되어 원나라에 끌려갔다.
1333년 고려인 환관 고용보의 주선으로 궁중에 들어간 그녀는 원나라의 황제 순제의 눈에 띄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순제는 과거 어머니가 북방을 순력하던 명종과 관계해 몽고 초원에서 태어났는데, 한때 황실 내부의 권력다툼에서 패하여 고려의 대청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처럼 성장 과정에서 심한 고초를 겪은 탓에 성품이 내성적이었던 그는 차 시중을 들던 아름다운 기씨에게 호감을 느끼고 후실로 삼았다. 〈원궁사(元宮祠〉에는 그녀의 용태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기황후는 은행나무 빛 얼굴에 복숭아 같은 두 볼, 버들가지처럼 가냘픈 허리로 궁중을 하늘하늘 걸었다.
순제가 천한 기씨를 늘 곁에 두며 총애하자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제1황후 타나시리(答納失里)는 그녀에게 매질을 일삼았고, 심지어 인두로 지지기까지 했다.
그녀는 선왕인 문종을 옹립했던 엘테무르의 딸이었는데 막강한 가문의 권세를 배경으로 매우 오만했다고 한다.
명나라 초 권형(權衡)의 야사집 《경신외사》에서는 타나시리가 권신의 딸이라는 점을 뽐내며 어린 황제를 가벼이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민했던 기씨는 그녀의 투기를 참고 견디며 때를 기다렸다.
결국 타나시리는 1335년 엘테무르 일족을 멸문시키려는 승상 메르키트 바얀이 기획한 순제모역사건에 연루되어 귀양 가던 도중 독살당하고 만다.
이때 순제는 기씨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지만 바얀이 부족의 전통을 내세워 강력히 반대했다.
칭기즈 칸 시절부터 황후는 옹기라트(弘吉刺) 가문 출신에서 뽑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제는 하는 수 없이 바얀의 딸인 바얀후투그(伯顔忽都)를 제1황후로 맞아들였다.
원나라의 제2황후가 되다
정변으로 실권을 장악한 바얀은 직함만 해도 무려 246자에 이를 만큼 탐욕스러웠다.
서슬 퍼런 바얀 부녀의 눈치를 보며 기회를 엿보던 기씨는 1339년 황자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으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타고난 미모에 영민함까지 갖추었던 그녀는 2년 뒤인 1340년 2월 좌승상 톡토를 이용하여 바얀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바얀의 죄목은 ‘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황제의 윤허도 없이 황족을 죽였다.’라는 것이었다.
황자의 생모로서 입지가 대폭 강화된 기씨는 태황태후가 관리하던 휘정원을 접수한 다음 그 재화를 바탕으로 유력 대신들을 포섭했다.
그로 인해 원나라 조정에는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
이윽고 대신들은 순제에게 기씨를 황후로 봉하라고 재촉했고, 국사인 사랄반까지 동조하고 나서자 순제는 그해 4월 기씨를 제2황후로 책봉했다.
그때부터 기황후는 흥성원에 거주하면서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칭하고 엄청난 자금력을 이용하여 제1황후를 무력화시키고 궐내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어서 고려 유민, 고려인 유학생들을 요직에 배치하여 친위세력으로 활용했다.
기황후가 득세하면서 고려의 친정 행주 기씨 가문의 지위도 급상승했다.
당시 고려는 충숙왕 사후 음행과 방탕을 일삼던 충혜왕이 복위한 상황이었다.
순제는 고려인 환관 고용보와 박불화를 고려에 보내 이미 사망한 기황후의 부친 기자오를 영안왕에 추증하고, 살아있던 모친 이씨를 영안왕대부인에 책봉했으며 조부 기홍영을 인왕으로 추증했다.
기황후의 큰오빠 기철은 덕성부원군, 기원은 덕양군에 봉하는 등 형제들 역시 모두 고위관직에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권력기반이 공고해진 기황후는 순제가 즉위할 때부터 후계자로 내정되어 있던 황제의 사촌동생 엘터구스(燕帖古思)와 그의 어머니 보타시리(不答失里)를 살해한 다음 환관 박불화를 이용하여 순제에게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압박했다.
그 결과 1353년에 이르러 아유르시리다르가 황태자가 되었다. 그녀는 또 박불화를 추밀원 동지추밀원사로 임명하여 군권까지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1358년 원나라에 기근이 들어 대도에서만 20만 명의 백성들이 굶어죽고 거리에 시체가 나뒹구는 비참한 정경이 벌어졌다. 이때 기황후는 자정원의 자금을 풀어 대규모 구호사업을 벌이고 시체들을 경도 11문 밖에 묻어주었다.
그로 인해 기황후는 민심까지 끌어안으면서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구가했다.
당시 기황후는 자정원에서 일하는 고려인 환관들을 우대했는데 박불화에게 2품직인 영록대부를 제수하기까지 했다.
얼마 후 기황후의 조종을 받은 자정원당의 신료들은 순제에게 양위를 요구했다.
순제의 반발로 그 시도는 무산되었지만 논란의 와중에 순제 편에 섰던 인물들은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났다.
공민왕과의 갈등
기황후가 원나라에서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행주 기씨는 고려 최고의 권문세족으로 행세하면서 갖은 행패를 부렸다.
특히 큰오빠 기철은 친원파 신료들과 함께 4차 입성책동을 주도했고, 충혜왕을 퇴위시키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또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빼앗고 관리를 제멋대로 임명했으며 법령조차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국왕조차 우습게 여겼던 듯 어느 날 공민왕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며 말을 걸어와서 호위병을 불러 내치기까지 했다.
고려 조정에서 기황후의 어머니인 영안왕대부인을 위해 연회를 베풀자, 기씨 일가가 식장에 쓸 조화를 만들기 위해 5천여 필의 포백(布帛)을 사들인 탓에 시중의 물가가 폭등할 정도였다.
평소 그들의 횡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으로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1356년 4월, 기철 일족을 비롯하여 권겸, 노정 등 친원파를 일거에 제거해 버렸다.
졸지에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하자 절치부심 복수의 기회를 노리던 기황후는 두 차례 홍건적의 침공으로 고려의 국세가 현저하게 약화되자 1363년 순제를 설득하여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 왕혜를 고려의 국왕으로 책봉했다.
공민왕이 이에 불복하자 기황후는 최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했다.
당시 최유가 이끄는 원나라 군사들은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했지만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대패하고 물러났다.
제1황후 책봉과 허망한 최후
1364년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를 배척하던 볼루드테무르가 대군을 이끌고 대도를 공격했다.
이때 아유르시리다르는 자신을 지지하던 코케테무르의 진영으로 달아났지만 기황후는 포로가 되어 연금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듬해 코케테무르가 군사를 일으켜 볼루드테무르를 축출하자 실권을 되찾았다.
기황후는 1365년 제1황후 바얀후투그가 죽자 그녀가 관리하던 중정원을 자정원에 흡수하여 숭정원으로 개편한 다음 순제를 압박함으로써 마침내 제1황후의 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당시 순제는 그녀에게 ‘솔랑가스(肅良哈)’라는 성을 하사하고 다음과 같은 책봉교지를 내렸다.
하늘 아래 사람의 도리로 부부만한 것이 없다.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를 내조하는 것 또한 고금의 도리다.
이제 그대 솔롱고씨(肅良合氏)는 천하의 어머니로 공경스럽고 근검절약하는 행동으로 천하를 이끌고 황가를 빛냈으니, 이제 옥채옥보를 내려 황후로 삼는다.
더욱 힘써 짐을 보좌하여 영원한 복이 되도록 하라.
원나라의 제2황후가 된 지 25년 만에 제1황후의 자리에 오른 기황후는 거액의 내탕금을 내놓아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키고, 고려 여인 권씨를 황태자비로 맞아들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권력 기반을 다졌다.
《원사》 후비열전에 따르면 기황후는 《여효경》과 역사서를 즐겨 읽었고 역대 황후들의 좋은 덕행에 대해 공부했으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상품 중에 진귀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태묘에 제사지낸 뒤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황후의 영화는 길지 않았다. 남쪽지방에서 한족들이 일으킨 홍건적의 난이 중원을 휩쓸면서 원나라를 압박했던 것이다.
1368년, 반란군을 통합하여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25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북진을 개시했다.
오랜 내분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원나라 황실은 다급하게 연경을 버리고 상도를 거쳐 응창부 쪽으로 도망쳐야 했다.
응창부는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타알 호수 부근이라고 한다.
이후 그녀의 행적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데, 일설에는 1368년 응창부에서 포로가 되었고 136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370년 순제가 죽은 뒤 그녀의 아들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가 카라코룸에서 제위에 올랐다.
그가 북원의 초대 황제 소종(昭宗)이다.
고려의 위기를 부채질하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6개월 뒤에 명나라에서 편찬한 《원사》나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에서는 공히 기황후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원나라 황실의 권력 투쟁에 빠져들면서 내부의 분열을 좌시했고, 고려에서는 그녀의 권세를 등에 업은 기씨 일문이 충목왕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각처에 농장을 세워 백성들을 수탈했으며, 충혜왕이 원나라로 끌려갈 때 앞장서는 등 매국 행각을 벌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기황후는 또 원나라 고관들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관 박불화를 통해 공녀를 독촉했고, 동생 기철이 이운, 조익청 등과 함께 제4차 입성책동을 벌였다는 기록도 있다.
최근 일부 학계나 방송매체에서 부각시키고 있는 고려양(高麗樣), 즉 몽골에 전해진 고려풍습은 당시 수많은 환관, 공녀들이 끌려간 탓에 저절로 퍼졌을 뿐 기황후의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 후기에 기황후는 비천한 공녀로 끌려가 세계 최강대국의 황후가 되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가 모국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친원세력의 배후로 작용하면서 고려는 국체를 상실할 위기에까지 내몰렸던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기도 연천군 상리에는 기황후의 묘로 알려진 고분이 남아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녀가 죽자 몽고식 풍습에 따라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여 장사지냈다고 한다.
그녀를 안장한 뒤 큰 재실을 지었으므로 일대가 재궁동(齋宮洞), 혹은 쟁골로 불렸다. 1656년(효종 7년)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연천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속전에 따르면 연천현 동북쪽 15리에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묘가 있고, 석인·석양·석물이 있으나 지금은 밭을 갈고 소를 기르는 곳이 되었다.’
1995년 향토사학자 이우형이 실시한 연천문화원 지표조사에서는 기황후의 묘 근처에서 석물 2기와 청자편, 토기편이 수습되었고 연못의 흔적을 확인했다.
그때 발견된 석물 2기 중 하나는 목이 잘렸지만 나머지 1기는 온전했는데 모양이 원숭이나 동자상과 흡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