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백형태
비탈에 버티고 서서 긴 줄 드리우고
깊은 바다 낚아 올린다
햇살의 출렁임 속에서 헤엄치는 이파리 잡고 있다
가지에 잡힌 이파리는 싱싱하고
파도 치는 바람이 지나가면
식솔들은 살아있다고 온 몸 팔딱 인다
여름의 끝 어여차 어기여차
낚시에 걸려 두드러진 파란 힘줄에
파닥파닥
푸르른 비늘이 보인다
참 억세게 고기를 끌어올리는 나무
바람에 흔들려도 위태위태한 절벽에 서 있어도
넓은 잎새의 나무
모감주 나무
시작노트
바닷가 그늘 넓은 나무를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반영된 모습이 낚시를 하는
아버지처럼 보인다
그 나무 이름이 모감주 나무였다
귀가길
백형태
삐걱 이는 수레 위에
파지를 싣고
하루 종일 동네 헤집다
언덕배기 오르는 지친 눈
짓누르는 무게만큼
차 오르는 거친 숨결
버거운 관절이
사슬처럼 감겨 들지만
절뚝이는 한쪽 다리
세상은 외면해도
흐르는 땀방울로
절망을 씻는다
가로등 마중하는
수레의 파지 위엔
막내딸 한 아름 되는
수박 환하게 웃고 있다
시작 노트
절망을 씻고 희망을 조각하며 집으로 가시는
다리 온전치 않아 힘들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래서 웃음이 많은 폐지 줍는 아저씨
얘기를 하며 수레를 밀어 드렸습니다
시골 버스
백형태
장터 지나 다리 건너면
둔내 터미널이 있다
바래진 낙엽처럼 구멍가게 앞 모퉁이 평상 위로
사람들의 엉치가 엉겨 웅성거리기 시작하면
버스한대 들어선다
이 빠진 횡 한 바람 속 사람은 타고 내리고
정류장은 농사일로 바빠 오랜만에 만난 이들의
두서 없는 언어의 쉼터였다
사투리 구수한 굵은 목소리의 운전기사
탐문 수사 하 듯
버스에 오른 이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는다
철수 할머니 아프다더니 다 나았나?
순지네 개 새끼 났다니 몇 마리야?
감나무 김씨 서울서 아들이 진급했다더니 한턱 내야지?
서리가 일찍 내려서 고추농사 망해 빚더미에 앉았다던 박씨는 어때?
배회하는 정류장마다 잠자는 숨은 소식들을 긁어내며
앞 문을 열면 동리사람들은 타고 내린다
삶의 드라마로 송출된 기사의 기억력은
황량한 겨울 나무 울음소리에 묻혀가는 바람 세차게 불고 있다
버스는 고개 넘어 갑천 메밀막국수 집 앞을 지나고
매일 같은 길 돌아 동리 사람들의 바쁜 희망을 싫고
정처 없이 떠도는 수다스런 말을
기사는 오늘도 운전석에 앉아 건넨다
같은 길을 돌며 시골의 인심을 주워 담는다
시작노트
횡성으로 내려와 처음으로 시골버스를 탔다
시간마다 온다는 그 버스를 타고 횡성원주까지 나가는 동안
한두명씩 타는 사람들과 내리는 사람들과 쉬지않고 대화하는 기사 아저씨
아마 그 긴 거리안에 있는 가구들에 경조사는 다 꾀고있는 모양이다
시시 콜콜 모르는 것 없이 다 물어 보는 것이 신기하고 사람사는 정이 느껴진다
점심
백형태
비 초록 초록 내리다 그친 오늘은
방울방울 맺힌 풀 내음에 취해
배고픔도 어느새 잊었지만
길가에 핀 민들레와 나란히 앉아
수런수런 떠들며 시를 먹습니다
물소리 바람소리 뻐꾸기소리
야국 한 송이 구름 한 조각 접시에 담아
배부르게 한 끼 배를 채웁니다
점심 값 보태
시집 한 그릇 샀습니다
시작 노트
머리가 아프거나 하면 들에 나가 시집을 읽거나 외웁니다
나도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 민들레 쇠별꽃 산괴불주머니 들국화 등
우리 꽃들이 지천으로 널려
지친 마음에 활력을 전해 주기 때문인가 봅니다
흔들리며 사랑하며
백형태
이젠 목마른 젊음을
안타깝다 말하지 않으련다
헤매고 또 헤매는 내 눈은 언제나 빈 손인 걸
이 젊음을
더 이상 부끄럽다 말하지 않으련다
누구나 보균하고 있는
사랑이란 불치병은 밤에 더욱 심하다
마땅히 치유법이 없는
그 병의 증세는
지독한 외로움으로 시작하고
그리움으로 밤이 내린다
기쁨보다는 슬픔
환희보다는 고통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심한
그렇다 치더라도
어찌 그대가 없는
이 세상을 살아 갈수 있을까
길이 있었다
늘 혼자서 가야 하는 길이였기에 쓸쓸했다
길이 있었다
늘 흔들리며 가는 길이였기에 눈물 겨웠다
길이 있었다
혼자라도 사랑할 수 있는 길이였기에 행복하다
조씨의 배추 이야기
백형태
얼굴이 새까매지도록
밭에서 씨름하는 조씨에게
속이 꽉 찬 배추 두어 포기 얻어와
칼로 반 틈을 가른다
한 잎 두 잎 촘촘하게 쓰여진 일기
할배 그 이전부터 쭉 땅 파고
땀 흘린 조씨
농사가 싫어 잠깐 시골 떠나 도회지 외도도 했었다
전자부품 공장도 미싱 돌던 조그만 옷 공장도
막노동 현장도
바람처럼 들썩들썩 떠돌다가 돌아와서
소금에 절여지고 김치가 되었지
뙤약볕에 고생하며 살던 삶
비바람이 건네준 슬픔
별에 뜨끈한 이야기라든지
이 모두 조씨의 배추 속
아삭아삭한 사연들을 먹습니다
사랑
백형태
1
파도는 절벽에 부딪히며
미안해 미안해 그럽니다
절벽은 파도를 안아주며
괜찮아 괜찮아 그럽니다
파도는 밀려와서 부서지며
절벽 깎일까 봐 애달프고
절벽은 그 자리 우뚝 서서
파도 아플까 봐 애달프다
이렇게 그대 생각에
겨울 밤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합니다
2
어쩌자고
당신하고 인연 되었는지
매일 행복하고
때론 고맙고
어쩔 땐 원망스럽고
길가다 멈춰 서서 개울 바라다 보며
넌 누구와 인연되려 흘러가니
길가다 멈춰 서서 풀꽃 바라다보며
누굴 만나려고 혼자서 피어있는 거니
길가다 멈춰 서서 내 안 들여다 보며
언제부터 내 마음 빼앗긴 거니
4월
백형태
바람 없이
싸리나무 가지에
햇살 가늘게 걸려 졸고 있는
빗금 그어 대는 날
막 세수 하고 난 당기는 얼굴로
아침 창 앞에 덩그러니 비치는
속살이 보이는 매화
온 세상 꽃 그늘에 앉으니
속눈썹 파르르 떨린다
숨만 쉬어도 배부른 향기
심장이 멎을 것 같다
이제 갓 꺼내놓은 꽃 향
삶이라는 글자에 대하여
백형태
한 때
니체* 사상에 빠져도 보고
주점에서 막걸리 마시며 쇼펜하우어*의 인생을 논하고
두서 없이 많은 시를 외워대고 술에 취해
달리*의 흘러 내리는 시계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단골 전봇대를 잡고 씨름 한 판하고
동네 허름한 목욕탕에서
어떤 아저씨의 거시기를 보면서
홀랑 벗고 목욕할 때 모습이 땡전 한 푼 없이
우리가 공수거(工手去)하는 모습인 것을
남 욕하고 우쭐거리며 잘 났다고
상처 입힐지도 상처 입을지도 모르는 말들을 함부로 하면서
억울하게 매맞는 이 말리지도 못하고 멍하니
새벽시장에서 잡부로 철근 매는 건설현장에 팔려가서 하루를 보내고
피곤에 지쳐 삶이라는 글자를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삶을 헤쳐보니
인 人 복 卜 기 己 구 口
한문 풀이는 2143 정도
무당과 주술의 샤머니즘 성 강한 人과 卜
살기 위해 먹을까 먹기 위해 살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己와口
없는 뜻 만들려 애쓰다 그냥 쉽게 사행시를 지었다
人 … 인생이란
卜 … 복잡하고
己 … 기
口 … 구한 것이라
이 것이 삶이란 글자의 종착지는 아니지만
*니체(Nietzsche, Friedrich Wilhelm): 독일의철학자시인[1844~1900]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r): 독일의 철학자 허무주의[1788-1860]
*달리(Salvador Dali):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1904-1989]기억의 연속성
첫댓글 이렇게 휘익 읽기는 쉬우나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저릿저릿 앓아가며 다듬어 왔을까요.
살아가며 건지고 골라낸 주제들의 작품마다 박수를 보냅니다.
아름다운 시 잘 읽었어요^^
모감주나무가 그런 풍경을 만들어 내는군요. 낚시에 빗댄 표현이 재밌어서 또 한번 더 들여다 보게 되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부지런하신 백형태님의 치열한 삶과 그간의 문학적 고민, 피나는 노력들이 작품마다 고스란히 녹아 있군요.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