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선산
1. 지명의 변천사
-단성현은 조선 세종때 단계(丹溪)현과 강성(江城)현의 두마을을 합하여 개칭된 지명이다.
-1895년(고종 32년) 단성현은 단성군, 산청현은 산청군으로 하여 진주부 관할로 승격되었다.
-1914년 4월(일제강점기) 단성군은 산청군에 병합되었다.
-신안 선산 지번
(구) 단성군 도산면 상정리 다보현 건좌원→(신)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산 14
2. 성묘 대상 선조
세수 | 선조 휘 | 配(부인) | 생졸일 | 비고 |
17 | 언박(彦博) | 廣州 이씨 | ? | 양자 |
18 | 지일(之逸) | 파평 윤씨 | ? | |
19 | 준(俊) | 안동 권씨 | ? | |
가. 언박(공)
-조선 9대왕 성종 재위기간(1469~1494) 때의 인물로 추정된다.
자는 ‘관부(寬夫)’, 생부의 휘는 강릉부사공의 4촌 아우 ‘담(曇)’이시다. 생조부의 휘는
병사공의 아우 종2품 병조참판공 ‘종신( 자: 군경 )’이시다. 창간보인 <무오보> (1798년)에는
관직이 정3품 병조참의로 기록되어있다. 부인은 종 6품 현감(지금의 면장) ‘이강’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생부와 생조부의 산소가 위치한 옛 지명 경기 시흥군 과천면 명달리(현, 서울 서초동)
이셨으나 실묘되었다. 실묘사유는 선조들께서 임진왜란(1592년),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등의 외침을 받아 전라도와 경상도 등으로 피난, 이주하셨고
선영이 천리길 먼 곳이므로 성묘가 힘들어진데 기인한다.
-1965년 음 3월 8일 현 위치에 제단을 설립하고 의령인 학자 ‘남문희’(南文熙)와 28세손
‘기립’(基立) 종친이 비문에 기록을 남기셨다. 1974년 <갑인보>에는 제단 설립일이 동년 음
10월 14일로 기록되어있다.
‘기립’ 종친은 2파 ‘봉채’ 파조의 3자 ‘성호’ 후손이며 초명은 ‘기필’, 자는 ‘성직’,
호는 ‘송원’ 이시다. 1908년 음 2월 5일 출생하여 1974년 음 1월 2일 67세로 돌아가셨는데
덕수 장씨 부인 사이에 2남 4녀를 두셨다. 묘는 의령읍 중리 여문곡 건좌이시다.
(갑신보 2권 p421)
-1995년 4월, 4파 30세손 ‘성조’(成助) 종친이 ‘언박(공)’이하 4세손의 비문을 해석하였다.
나. 지일(공)
-조선 10대왕 연산군과 11대왕 중종사이에 출생하셨다고 비문에 기록되어있다.
정황상 1494~1544년 기간 중 삶을 영위하신걸로 추정된다. 산소는 자좌 쌍봉이시다.
-선대의 참화를 생각하시어 출사의 길을 접고 옛 지명 과천에서 지금의 산청으로 이주하셨다.
-한때 실묘 처지에 있었으나 표단석을 발견하여 1920년 봉분을 다듬고 비석을 세웠다.
통훈 대부 홍문관 시강 ‘성순(性淳)’ 방예(傍裔; 방계 후손)께서 기록을 남기시고(記)
밀양 박씨 박만영(朴晩榮) 문신이 글을 쓰셨다(書). 품계 통훈대부는 당하관으로서
정3품 하계 관직이고 통정대부는 당상관으로서 정3품 상계 관직이다.
-27세손 ‘성순’ 종친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초명은 ‘지순’, 자는 ‘원초(原初)’, 호는 ‘우아당’이시다.
19세(1887, 고종24)에 병과 16등으로 승정원에 출사하셨고 후에 병조좌랑(정6품)을 지내셨다.
조정으로부터 고려의 후예라는 사유로 홍문관 시강 관직이 내려졌으나 거절하셨다.
개성 왕씨 4번째 대동보인 1918년 <무오보> 서문을 쓰셨으며 저서에는 1921년 발간된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와 <우아당집>이 있다.
1869년(고종 6년) 음 1월 21일 출생하여 개성에 거주하다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3년 55세로
별세하셨다.
부의 휘는 ‘정린’, 조부는 ‘헌주’이시다. 3형제중 차남이며 숙인 강화 봉씨 사이에
3남1녀를 두셨다.
13세손 ‘효충’ 호조참판공의 분파인 개성북파 후손이다.(갑신보 2권 p882)
다. 준(공)
-조선 12대왕 인종(1544~1545 재위)과 13대왕 명종(1545~1567 재위) 때의 인물로 추정된다.
-선친인 ‘지일’ 선조 산소 주변에 장사지냈으나 실묘하여 1920년 3월 추모비를 세웠고
‘성순’ 종친이 비문에 기록을 남기시고 박만영 문신께서 쓰셨다.
-부인은 성균관 생원 ‘권즙’의 따님이시고 생원은 생원시 합격자로서 벼슬은 없었지만
군역 또는 잡역이 면제받는 특권층이었다.
-공의 아우는 함안문중의 파조인‘열(悅)’선조이시다.
-2000년 10월 27~30일 의령 화성 석물사에서 ‘언박’ 공의 추모비를 봉분 쪽으로 이설하고
‘준’공의 추모비와 함께 축을 쌓았으며 ‘지일’ 공의 봉분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주변정비와
잔디 교체를 하였다.
화정 및 내산다 선산
가. 20세손 ‘서(瑞)’공
-1573년생(조선 선조 7년, 계유생)으로 별세일을 알 길 없다.
-자는 ‘직여(直汝)’, 호는 ‘학포(學圃)’이시다.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옛 지명, 단성군 진대리)에서 출생하시고 약관 20세때
임진왜란을 만나 경남 고성군 구만면 화룡정으로 피난하셨다. 전란이 끝난 후
의령읍 (옛 지명, 덕곡면)에 입향하셨다.
-덕곡면은 일제강점기시인 1920년 의령면과 병합된 후 1979년 의령읍으로 승격되었다.
-1922년 3월 장파의 28세손 ‘기주’(基周) 종친이 비석에 기록을 남기셨는데 종친의
자는 ‘기대’, 호는 ‘초차’를 쓰신다. 1863년 음 4월 19일 출생하여 1931년
음 3월 21일 69세로 돌아가셨다. 김해 김씨 부인 사이에 5남 3녀를 두셨다.
묘는 상리 신기 당협산이다. (갑신보 2권 p339)
나. 평택 임씨(平澤 林氏) 할머니
-친정 부친의 휘는 ‘응수’, 조부는 통훈대부 ‘완근’, 증조부는 훈련봉사
‘무업’이시다. 훈련봉사는 조선시대 군사의 무예훈련과 병서습득을 관장하던
훈련원의 종8품 관직이다.
-좌측에 큰아들 ‘봉의’ 선조 내외의 쌍봉이 있다.
----------------------------------------------------------------------------------------------------
의령군 화정면 입향조 ‘서’선조 부곡 선영으로 1961년 신축보 화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