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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역사문화관
시간은 멈추지 아니하고 흘러 역사를 꾸민다. 역사는 또 시간의 흐름으로 잊어지기도 하지만 흔적을 남긴다. 시간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끝없이 창출되는 역사는 오늘에 이어져 생멸하며 발전하기도 하고 도태되기도 한다. 그래서 과거사를 돌아보면서 지혜를 얻고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박물관을 짓고, 기념관을 설립하는 것도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보려는 노력의 하나일 것이다. ‘온고이지신’이라는 고사성어를 굳이 들추지 않아도 박물관으로 이어지는 학생들의 늘어나는 발걸음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라 천년의 화려한 역사를 대표하는 것들 중에 황룡사는 늘 앞자리를 차지한다. 진흥왕을 비롯해 4왕의 손을 거치면서 완성되고, 700년의 긴 세월동안 백성들의 평화를 지켜왔던 터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룡사는 불국토 신라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삼국유사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연 작가는 삼국유사에서 황룡사를 가장 많은 분량으로 설명하고 있다. 1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황량한 벌판으로 남은 땅을 후벼 파면서 그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들을 보면 분명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무엇이 있음이 분명하다.
황룡사가 건축된 배경과 소실되기까지의 과정, 황룡사 9층목탑의 건설과 소실 등을 영상물과 기념물, 복제 유물로 꾸며진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새로운 경주의 체험학습장이 되고 있다. 카페테리아 쉼터와 기념품점 등의 종합휴게실 개념으로 운영되면서 이제 새로운 힐링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황룡사 700년
황룡사는 신라시대 통치철학을 비롯해 당시의 주변 정세까지 짐작하게 하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약체 신라가 삼국 중에서도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하는 시대에 건축되었다는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해 어머니 지소태후의 섭정에서 벗어나 직접 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통치이념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건축해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진흥왕은 스스로 전륜성왕임을 자처하면서 백제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영토로 편입하고, 고구려도 압박해 북으로도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왕권강화에 나서 553년 왕궁을 지으려다 사찰로 변경 황룡사를 건축했다. 황룡사는 가로, 세로 각각 약 300m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 조성된 것으로 신라시대 최대 규모의 사찰로 확인되고 있다. 황룡사의 위치는 당시 신라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황제의 거처를 나라 중심에 두고자 하는 의미로 읽힌다. 법흥왕에 이어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으려는 이데올로기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거칠부와 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승려 혜량의 영향도 크게 미쳤다는 전문가들의 분석도 있다.
황룡사는 남쪽에서부터 남문,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건물을 세웠다. 건물의 크기를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 내부로 들어오면서 점점 규모가 확산되는 형식으로 지어 부처의 편안한 세계로 들어서는 분위기로 꾸몄다.
금당에 세웠던 장육존상 삼존불의 높이가 5m 이상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건물의 웅장한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특히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용마루로 사용되었던 치미는 높이 182㎝, 최대 폭 105㎝로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동양 최대 크기의 치미다. 황룡사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진지왕을 지나 진평왕대에도 상당한 보수 확장공사를 했다.
선덕여왕이 즉위해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9층목탑을 세웠다. 1층부터 9층까지 일본을 비롯 9개 주변국가를 아우르는 의미도 담고 있어 황룡사는 호국사찰의 본산으로 해석된다. 왕권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한 건축으로도 이해된다. 목탑은 선덕여왕의 여동생 남편이자 김춘추의 아버지 용춘의 지휘로 백제 장인 아비지가 건축했다. 높이 82m로 요즘 27층 높이의 건물이다. 순수 목조건축물로 요즘 기술로도 흉내내기 어려운 뛰어난 건축기술이다. 황룡사 9층목탑 심초석에서 발견된 백자 항아리는 당나라에서 제조한 것으로 확인돼 당시 중국과의 문물교류를 짐작할 수 있다.
황룡사는 진흥왕으로부터 시작해 선덕여왕까지 4명의 왕이 94년에 걸쳐 완성됐다. 553년 짓기 시작해 1238년 몽고에 의해 소실되기까지 약 700년간 황룡사는 신라, 고려까지 호국사찰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황룡사 9층목탑실
황룡사역사문화관은 외부에서는 다소 규모가 큰 한옥으로 보인다. 1층 문을 밀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오밀조밀하게 탁자들이 놓여 있고 커피 향이 따뜻하게 반긴다. 경주시가 직영하는 ‘카페테리아’ 전시형 카페다. 동쪽 전면이 통유리로 제작돼 황룡사터에서 직선으로 날아드는 빛이 전체 분위기를 환하게 밝혀 기분까지 밝아진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천년미소로 주문을 받기도 하고, 역사관을 안내해 주기도 한다. 그들은 또 카페에 전시된 다양한 기념품들을 안내하며 판매하기도 한다. 기념품들은 신라, 경주를 상징하는 모형으로 제작된 목걸이, 반지, 지갑, 열쇠고리 등의 소품들로 제법 인기리에 판매된다.
왼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면 안내실이 마주한다. 경주시민들은 무료이지만 관광객들은 3천 원의 입장료가 있다. 단체는 2천 원이다.
남서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한 눈에 황룡사 9층목탑이 들어온다. 황룡사를 10분의 1 크기로 축소해 건축한 모형탑이다. 목재로 정교하게 다듬어 세워 당시 건축기술을 살펴볼 수 있다. 주변에는 다양한 전시를 열어 방문객들의 눈을 호사하게 한다. 모형목탑은 10분의 1로 축소한 크기지만 8m가 넘는 높이로 2층 베란다 위로 솟아 당시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동, 서, 남쪽 세 방향의 유리벽을 통해 밝게 조명돼 저절로 눈이 부시게 하는 역사다.
북쪽에 입체 영상관을 설치해 황룡사 건축설화와 9층목탑의 건축, 소실 장면을 생생하게 입체 화면으로 보여준다. 10여분 짧은 시간에 많은 공부를 하게 하는 콘텐츠로 학생들의 체험학습 필수코스로 추천된다.
◆역사속의 장육존상
역사문화관 2층은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9층목탑 찰주본기, 치미 등의 복제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또 9층목탑의 건축구조와 토목공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 고건축실을 설치해 신라시대 뛰어난 건축공법을 공부하게 한다. 황룡사의 창건설화와 칠백년의 역사기록, 중문 복원영상, 9층목탑 복원계획안, 발굴역사스페셜 등 고증연구와 향후 복원계획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실도 있다. 9층목탑의 일부를 실물크기로 복원한 부분과 포토체험존, 황룡사지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고, 간이휴게실이 벤치와 함께 준비되어 있다.
전시실 가운데 장육존상의 실물 크기를 상상할 수 있게 머리 부분을 복원 전시하고 있다. 발굴에서 출토된 불상의 머리카락에서 유추해 복원한 것이 눈길을 끈다. 황룡사 장육존상은 황룡사9층목탑,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함께 신라 삼보 중의 하나다.
장육존상에 대한 조성배경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인도의 아소카왕이 불상을 조성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인연이 있는 땅에 가서 이루어질 것을 기원하며 금, 구리, 모형 석가삼존상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그 배가 울산 바닷가에 도착해 신라 진흥왕이 솜씨 좋은 기능인들을 동원해 조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육존상은 높이가 1장6척으로 5m 이상의 신라 최대 금동불상이다. 무게는 3만5천7근과 황금 1만198푼이, 두 보살상은 구리 1만2천근과 황금 1만136푼이 들었다고 한다. 장육존상의 제작시기, 조각사, 불상의 명칭 등에 대해 다양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황룡사의 건물은 없어졌지만 장육존상은 조선시대까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최고의 토목공법 판축: 늪지에 조성된 황룡사의 육중한 건축물들이 버틸 수 있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신라인들의 특별한 우수한 토목공법 ‘판축’ 기술이 비법이다. 판축기법은 모래나 자갈 또는 흙을 일정한 간격의 널판 사이 공간에 차례대로 깔고 다짐도구로 다져 쌓아 올리는 고대 토목공법이다.
-목탑의 복원: 황룡사 9층목탑 남서쪽 모서리 칸 일부를 1238년 몽고란으로 소실된 이후 800여년 만인 2016년에 당시 규모로 재현했다. 목탑의 9층 난간에서 남서쪽을 바라보면 월지, 월성의 당시 신라왕궁과 월정교가 내려다보이고, 멀리 경주 남산자락이 보이는 신라왕경 최고의 전망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복원한 목탑에서 당시 왕경의 모습을 파노라마로 둘러볼 수 있게 영상물도 제작해 두고 있다.
-황룡사를 중심으로 본 신라왕경: 신라의 천년수도 경주의 신라왕경은 정확한 비율의 네모난 방이 1천여개가 모인 바둑판 형태로 계획된 고대도시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범위는 서쪽으로는 서천, 북쪽으로는 북천, 동쪽으로는 명활산과 낭산 사이, 남쪽으로는 포석정까지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북천의 북편에 인접한 지역인 동천동 일대는 물론 경주외곽의 건천 모량리까지 주거지역이 확대되어 방리제에 의한 도시계획이 이루어진 것으로 최근 발굴조사에서 밝혀졌다.
황룡사가 위치한 지역은 신라왕경 방리구획의 핵심지구다. 황룡사지의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의 외곽 담장은 네모반듯한 모양이고, 동서 길이는 288m, 남북 길이는 281m임이 밝혀졌다. 기존 방리구획으로 짐작되는 격자형의 도로망 구획 내에 황룡사가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로 판명됐다. 이어 황룡사의 위치와 규모는 당시 도시계획과 직결되었고 황룡사는 신라왕경 방리구획 연구에 중심이 되고 있다.
◆역사관 주변의 흔적
황룡사역사문화관 남쪽으로 넓은 주차장이 조성됐다. 대형 관광버스까지 편안하게 주차하고,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발굴 현장을 살펴볼 수 있다. 호미로 역사를 들추어내고 있는 장면은 이삭을 줍는 것처럼 보인다. 주차장에서 역사관으로 진입하는 도로변에는 신라시대 황룡사를 구성했던 기왓장과 석재들이 전시되고 있다. 진입로 서쪽 공터에는 당간지주 1기와 석탑의 옥개석, 사면에 팔부신중이 부조로 새겨진 탑신이 남아있다. 분명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하지만 어떤 절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동남쪽으로는 미탄사지 3층석탑이 최근 복원돼 황량한 벌판을 지키고 서있다. 삼국유사가 당시 서라벌을 ‘사사성장 탑탑안행’이라 설명하고 있는 뜻을 저절로 수긍하게 한다. 분황사와 황룡사가 지척에 있고, 그 큰 사찰 주변에 미탄사를 비롯해 구황동 폐사지, 이름 모를 절터가 몇 걸음 옮기지 않아도 바로 닿을 곳에서 비포장도로의 돌부리처럼 눈에 밟히고 있다.
경주는 노천 박물관이라는 말을 황룡사 역사문화관으로 들어서면서 또 다시 긍정하게 한다. 황룡사 역사문화관은 1월1일, 설, 추석 등 3일을 제외하고 1년 내내 문을 열어 방문객을 반긴다. 여행객이 늘어나는 가을철 주말에는 하루에도 500여명이 방문하기도 한다. 문화체험콘텐츠이자 명실상부한 경주 최고 힐링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첫댓글 황룡사역사문화관은 황룡사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교육관이다.
9층탑의 10분의 1 모형이 2층 높이로 제작되어 있어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장육존상의 비밀도 풀어볼 수 있다.
천년 신라역사의 베일을 한겹 벗겨보는 타임머신 같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