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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정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 구미산 기슭에 있는 용담정은 조선시대 말,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대거 봉기한 농민운동의 정신이 된 동학의 발상지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천도교로 발전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태어나고 도를 깨우친 곳이다. 동학의 중심 사상인 인내천과 후천개벽 사상을 설파한 최제우는 백성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41세의 나이로 처형돼 용담정 일원 경주 구미산에 묻혔다.
용담정 일대는 1975년 천도교중앙총부에서 용담정 정자, 포덕문, 용담정사, 성화문 등을 건립해 천도교 성역지로 조성해 관리하고 있다. 또 인근지역 백률사 터와 굴불사 터가 있는 소금강산 지역, 나원리 오층석탑 등과 함께 국립공원지역으로 지정돼 관리되면서 중요 문화관광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경주시는 동학 발상지 일대를 한국 정신문화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정립한다는 목적으로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사업비 133억원을 들여 최제우 생가를 복원하고 유허비 이설, 수운기념관과 교육수련관 건립, 탐방로 조성 등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용담정은 동학, 천도교에 대한 종교인의 목적이 아니더라도 동학을 알고자하거나 용담정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위해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조선말기 쇄국정책을 비웃듯이 청나라, 러시아, 영국, 일본 등 열강의 침략이 밀려들면서 정부는 무능력한 상태가 되었다. 농민에 대한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심해지자 농민층은 자신들과 뜻을 같이한 몰락한 양반계급과 함께 사회변화의 물꼬를 열어 나갔다. 결국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해 탐관오리를 쫓아내고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동학농민운동은 반봉건적인 성격을 띤 사회 변혁 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농민층이 중심이 되어 신분 차별을 비롯한 전근대적 질서를 바꾸려 한 개혁 운동이었으며,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에 무장투쟁으로 맞선 민족운동이었다. 이후 동학 농민군의 개혁안은 갑오개혁에서 일부 실현되었으며, 반침략 투쟁의 의지와 경험은 항일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다.
최제우의 동학은 후에 천도교로 발전되었고, 동학농민운동의 기본정신으로 항일 의병운동, 갑오개혁 등의 전통질서를 붕괴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노력들의 기초가 됐다. 한때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세우는 기초가 되고,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를 제시한 동학의 발상지 용담정은 역사기행의 필수적인 코스로 선택할 만 하다.
◆천도교 성지 용담정
용담정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의 탄생지로, 무극대도를 한울님으로부터 받아 포덕을 시작한 천도교의 발상지이다. 경주시에서 영천방향 서쪽으로 약 12㎞지점 가정리에 위치한 구미산(龜尾山) 계곡에 있다. 이곳 용담정은 도학으로 이름 높았던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이 나이 6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구미산 계곡에서 시를 읊조리며 소일하던 곳이다. 최옥은 세번째 부인인 한씨를 맞아 1824년 10월28일 최제우를 낳았다. 태어나던 날부터 구미산이 사흘 동안 크게 진동하였다고 한다.
최제우는 장년이 되어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도(道)를 찾고자 10여 년간 전국을 순회하다가 가산만 탕진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착잡한 심경으로 다시 용담정으로 돌아와 각도(覺道)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60년 4월5일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는 한울님의 계시를 받아 무극대도를 이루었다. 그는 ‘용담가’를 지어 이 득도의 과정과 내용을 서술했다. 용담가라는 가사의 명칭은 용담정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리고 포덕을 행한 곳곳에서 신도들이 용담정으로 모여들어 불과 1년이 되지 않아 수만의 신도가 운집하였다. 나라에서 이를 ‘이단지도’라 하여 백성과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죄명으로 그를 참형에 처하였다. 그 뒤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거두어 구미산 기슭에 안장했다.
1968년 4월 현지에 있는 교인들의 성금으로 정화되기 시작한 이곳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직접 관할하게 되었고, 1974년 구미산 일대가 경주국립공원권에 편입됨에 따라 본격적인 성역화운동이 전개되었다. 1975년 2월 천도교는 구미용담성역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용담정과 포덕문, 용담정사, 성화문 등을 건립해 성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천도교는 가정리 일대에서 천도교의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궁을촌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동학농민운동과 동학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한 1860년대에 조선 사회는 심각한 혼란과 위기를 맞고 있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고, 오랜 기간 세도정치가 지속되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지방관과 토호의 횡포와 착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연재해와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농민들의 삶은 매우 피폐해졌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각지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회 불안은 확산되었고, 서양 열강의 중국 침략 등으로 외세에 대한 위기감과 서학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었다.
이때 1차 동학농민운동인 고부민란은 탐관오리의 학정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을 핍박하여 그 학정에 불만을 품고 일어난 것이 1차 봉기이다. 1차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그걸 빌미로 조선에 들어와서 경복궁에 난입, 조선에 압박을 가했다. 이러한 일본의 행동에 분노한 동학농민군들은 집강소를 중심으로 2차 봉기를 일으켰는데, 남쪽 진주 사람들만 참가한 1차 때와는 달리 2차 때는 북쪽의 사람들도 농민군에 참가하여 자그마치 20만 명에 달했다. 농민군들은 한양까지 진격하다가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2차 봉기가 패하면서 농민군은 해산하고 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전봉준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성리학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였는데, 19세기에는 정감록의 도참사상, 주역이나 미륵사상에 기초한 후천개벽사상 등이 민중사회에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최제우는 오랜 방랑으로 농민의 현실을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사회 현실과 민중의 요구에 기초한 새로운 사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한국 전통의 경천사상을 기초로 유ㆍ불ㆍ선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을 창시했다.
동학은 서학(西學)에 대립된 것으로 최제우는 “나 또한 동쪽에서 태어나 동도(東道)를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라고 했다. 우주 만물은 모두 지극한 지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의 정성으로 그 지극한 기를 몸과 마음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이 시천주(侍天主) 사상이다. 최제우의 천인합일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그의 사상에서 천주(天主)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다. 천주를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인간은 신분이나 빈부, 적서, 남녀 등의 구분없이 모두 평등하고, 수행을 하면 모두 군자가 될 수 있으며 마음을 잃지 않고 기를 바르게 하는 ‘수심정기(守心正氣)’를 강조했다.
그는 5만년에 걸친 선천의 시대가 지나고 후천의 시대가 개벽하였다며 변화에 대한 민중의 갈망을 담아 동학에 의해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의 새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제우는 여러 민중사상을 흡수하여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항해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의 기초를 제공했다. 그의 사상은 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것으로 발전하고, 3대 교주인 손병희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체계화됐다.
◆최제우
조선 말기의 종교사상가로 민족 고유의 경천사상을 바탕으로 유·불·선과 도참사상, 후천개벽사상 등의 민중 사상을 융합하여 동학(東學)을 창시하였다. 최제우는 1824년 12월18일 경주 가정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성묵이다.
아명은 복술, 관명은 제선, 호는 수운(水雲)이다. ‘제우(濟愚)’는 35세 되던 해에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스스로 지은 이름이다.
그의 집안은 7대조인 최진립이 의병을 일으켜 순국하여 병조판서로 추서되었으나, 후손들은 중앙의 관직을 얻지 못해 쇠락하였다. 그의 아버지인 최옥도 영남 지방에서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문사였지만 과거에 낙방해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최제우는 최옥이 63세 때에 곡산(谷山) 한씨(韓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13세에 울산 출신의 박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10세에 어머니를 잃고, 17세에 아버지마저 죽자 3년상을 마친 뒤 1844년부터 1854년까지 각지를 유랑했다. 이 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당시 조선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를 이해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1854년 고향으로 돌아와 처가가 있는 울산 유곡으로 거처를 옮겼다. 1855년 한 승려에게 을묘천서(乙卯天書)라는 비서(秘書)를 얻는 신비 체험을 하였다.
1856년 양산 천성산에서 입산 기도를 시작했으나 숙부의 죽음으로 중단했다가 이듬해 천성산 적멸굴에서 다시 49일간 기도하며 도를 닦았다. 1859년 다시 경주로 돌아와 용담정에서 수도를 하였다. 그러다 1860년 득도해 동학을 창시했다.
‘용담가’, ‘안심가’ 등의 한글 가사를 지어 포교 활동을 시작했으나, 1861년 지역의 유생들에게 서학(西學)으로 몰려 경주를 떠났다. 울산, 부산을 거쳐 남원 은적암으로 거처를 옮겨 ‘포덕문’, ‘논학문’ 등을 저술하며 교리와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경주로 돌아와 포교를 하다가 관아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으나 풀려나와 포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교인의 수가 늘어나자 경주와 영덕, 대구, 청도, 울산 등지에 접소를 설치하고 두어 교도를 관장하게 했다. 1863년에는 접소가 14곳, 교도의 수는 3천여 명에 이르렀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성장해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되자 1863년 8월에 최시형을 북도중주인으로 임명해 도통(道統)을 잇게 했다. 자신은 포교 활동을 계속하다가 1864년 1월18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 죄’로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대구감영으로 이송 심문을 받다가 4월15일에 대구장대에서 41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경주 가정리 구미산에 묘가 있으며, 1907년에 사면되었다.
그는 포교를 위해 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몽중노소문답가, 도수사, 권학가, 도덕가, 흥비가, 검결 등의 한글 가사를 지었다. 또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 등 한문으로 된 글들을 남겼다. 그의 한문 저술들은 1880년 최시형에 의해 ‘동경대전(東經大全)’으로 편찬되었으며, 한글 가사들은 이듬해 ‘용담유사(龍潭遺詞)’로 묶여 간행되었다.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
경주시가 우리나라 근대사상의 뿌리가 되었던 동학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동학은 조선말기 핍박받던 백성들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민족의 긍지와 주체성을 확립하려했던 구국 운동이었다. 그러한 동학이 경주에서 태동된 것을 홍보하고 경주를 한국정신문화의 중심지로서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신라 천년의 역사문화와 함께 새로운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경주시는 동학발상지 성역화 사업을 현곡면 가정리 일원에 용담정과 ‘수운 최제우 생가’를 복원하는 이원화 사업으로 전개한다. 먼저 현곡 가정리 315번지 최제우가 태어난 곳에 1천871m² 부지에 안채와 사랑채, 방앗간채, 화장실, 사주문 등의 구조로 생가를 복원했다. 최제우의 태묘가 마주보이는 구미산 동남쪽이다. 생가는 2012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2014년 완공하여 오전 9시~오후 6시 관람할 수 있다.
2009년부터 2017년 완공을 목적으로 133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유허비를 이설하고 수운기념관, 교육수련관 건립, 탐방로 조성 등의 성역화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천도교로 발전한 동학은 백성과 나라를 바로 세우려 했던 우리민족의 정신운동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신라 천년의 유구한 문화가 살아 있는 경주에서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로 이어지는 전통문화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용담정을 역사문화를 찾아가는 경주 역사기행의 백미로 강추한다.
(2016.12.19)
첫댓글 동학의 성지
현곡 구미산 일대.......
백성들의 희망을,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한 혁명적인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