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월악산(月岳山)과 조령산(鳥嶺山) 중간에 있는 통일신라의 마의태자와 관련된 사찰.원래 명칭은 미륵세계사이고, 충주 미륵대원지를 터전으로 삼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나말 여초에 창건된 석굴 가람지로 추정되고 있다. 석등 2기, 당간지주(연화문), 대좌, 석귀부 등이 있으며, 중요 문화재들도 갖추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56대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와 마의태자가 신라의 멸망을 슬퍼하여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누이인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조성하여 남쪽을 바라보도록 마애불(磨崖佛)을 만들고, 마의태자는 석굴 가람을 조성하여 북쪽을 향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 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현재 미륵세계사에 의해 불법의 등불을 이어가고 있다. 미륵세계사는 1960년에 창건되었으며, 최근 대웅전 복원 계획이 심의 통과되어 개보수중이라 추진중여서 안타깝게 마애불을 친히 볼 수는 없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조부인 작제건(作帝建)이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던 중 이곳에 절을 창건하여 머물다가 갔다고도 전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주변에 산재한 덕주사(德周寺)·덕주골 등 마의태자 일행과 관련된 명칭으로 보아, 이 절의 창건이 마의태자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보물 제96호인 괴산미륵리석불입상과 보물 제95호인 괴산미륵리오층석탑은 마의태자가 일행과 함께 건립한 것이라 전한다. 현재 사지(寺址)에 산재되어 있는 석불·석탑·석등·귀부(龜趺) 등의 문화재로 보아 당시에는 규모가 매우 큰 가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 말 조선 초에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18세기경에 중건하였으나, 1936년의 폭우로 산사태를 만나 사찰이 매몰됨에 따라 폐사가 되었다가, 6·25 이후에 조그만 요사만을 지어 세계사라고 불렀다.
최근까지 이 절의 원래 이름이 알려지지 않다가 청주대학교의 발굴조사로 미륵당초(彌勒堂草)라고 새긴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미륵사지임이 확인되었고, 현재 중원문화권의 개발에 힘입어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로 향한다. 하늘재는 신라시대 8대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한 길이다. 이후 신라가 한강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과, 고구려와 백제의 남진을 막는 전략거점의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고갯길이 되었다.
미륵리에서 하늘재로 향하는 초입에 ‘중원미륵리사지’가 있고, 이곳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할 때, 이에 반대했던 마의태자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먹으면서 생을 마쳤다”라고 기술되어있다.
신라가 망하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과 딸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먼 길을 떠났으며,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월악산 기슭에 다다른 남매는 각기 덕주사와 미륵사를 세운다. 덕주사를 창건한 덕주공주는 남향의 바위에 마애불을 새겼고, 미륵사를 세운 마의태자는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한다.
하지만 마의태자가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간 길은 가까운 동해안을 피해 이곳(충주)과 원주를 거치는데, 두 곳은 통일신라시대 제2의 수도로 중원경과 북원경이라 불렸으며, 모두 신라 지지기반이 붕괴되지 않은 곳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신라부흥운동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행보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 미륵리석등(충북 유형문화재 제19호), 미륵리5층석탑(보물 제95호)이 북쪽을 향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미륵리석불입상은 이 절터의 주존불로 원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지금의 석축만 남게 되었다.
중간 중간 굵은 자갈로 포장했던 흔적의 일정한 폭의 평탄한 길이 고개로 올라간다. 미륵리에서 시작해 2km 조금 넘는 하늘재 정상에서 오르막이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만나며 내리막으로 바꾼다. 내세(미륵리)와 현세(관음리)경계, 이젠 하늘을 바라본다. 신라가 국운이 승천하며 한강진출 교두보로 열었던 하늘재에서 마의태자의 신라부흥의 원은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며 이젠 역사속 기억으로 구름이 되어 하늘재를 넘는다.
유물로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인 중원미륵리석등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중원미륵리삼층석탑, 사각연화석등·귀부·당간지주·공깃돌 등이 있다.
석등은 고려시대에 제작된 높이 2.3m의 화강암재이며, 귀부는 길이 6.4m, 넓이 1.5m, 높이 0.8m의 거대한 돌거북으로 등 중앙 부분에 비를 세웠던 홈이 패어 있고, 얼굴을 높이 쳐든 모습이 생동감이 넘치는 동양최대의 귀부이다. 바위 위에 올려진 지름 1.5m의 공깃돌은 온달장군이 국경 경비 중 휴식을 취하면서 부하들과 더불어 놀이를 할 때 사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밖에도 발굴조사 때에 범자(梵字)가 새겨진 기왓장을 비롯한 많은 고려 초기의 수막새·암막새·명문와·치미(鴟尾), 구마도(驅馬圖)와 맹호도(猛虎圖)가 그려진 기와, 사자석상·용머릿돌·금동귀면·청동신장·금동소탑옥개 등이 발굴되었다.
미륵불 수리 중이라 내부를 못봤네요.아쉽네요
내부수리 보수중인 모습
미륵리 원.미륵세계사가 같이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