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Dear 정생 권)
김정미
선생님의 어떤 기도문 첫 문장인 ‘하느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대로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고 안부를 물어봅니다.
초여름에 안동 땅을 밟고 오니 자꾸 하룻밤 묵었던 ‘소목화당’의 경치와 달빛이 간신히 비집고 들어올 창문을 품은 선생님의 흙집이 눈에 밟혀 몇 자 적어봅니다.
강아지 똥이 있었음직한 돌담길을 지나 선생님 사시던 집에 가 보았습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허름한 집엔 겸손하기 짝이 없는 책장과 영정사진, 향로, 헝겊 카네이션, 라이터, 생화가 담겨진 꽃병 그리고 츄파츕스 막대사탕이 있더군요. 엉거주춤 서 있는 싱크대는 조금은 뜬금없었고요.
아! 이곳에서 동지들이라 표현하신 개구리, 모기, 파리, 쥐, 미꾸라지 그리고 강아지 뺑덕이와 같이 나날을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저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입니다. 개구리와 쥐와의 동침 같은 건. 함께 산 강아지 이름이 뺑덕이라니요. 혹시 뺑덕이라 쓰고 심청이라 읽으신 건 아닌지요. 너무 과한 상상이라고요?
선생님! 사실 저는 선생님을 잘 몰랐답니다. 해서 안동 문학기행을 위해 알라딘이라는 중고 서점으로 가서 <몽실언니>만 구입하고 <강아지똥>은 구입하려다 서서 읽고 제자리에 꽂아놓고 나왔답니다. 저의 ‘인간성’에 대해 반성합니다.
“도모코가 선생님이 못생겨서 싫다고 해서 오십 년이 지나도 이가 갈린다”는 시<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는 얼마나 마음이 열리며 웃음 짓게 만드는지요. 선생님의 그 유머는 관조이며 향기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뵙게 되면 선생님 유언장 한 대목인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 할 것이다.”처럼 25살 권총각과 제가 22살 아가씨가 되면 어떨까요? 벌벌 떨지 않을 자신 있으세요? 못생겨서 싫다 하시면 저 또한 ‘반성문 3’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감히 한번 해본 농담입니다.
선생님! 거리의 청소부였던 아버지의 쓰레기 더미에서 헌책을 가려내서 혼자 글을 익히고 세상을 배우셨다면서요? 저도 얼마 전에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동화책 한 질을 어린이집을 하는 절친에게 주려고 주워다 놓았답니다. 한데 돌쟁이 외손녀에게 주겠다며 딸이 갖겠다고 하더군요. 요즘 동화책 한 질에 몇백만 원을 호가(呼價)하며 외가와 친가가 경쟁하듯 사주는 세태인데 딸아이의 알뜰함을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혹시 우리 외손녀가 세계를 뒤흔드는 동화작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기리고 추억하는 동화나라에서 <강아지 똥>, <오소리네 집 꽃밭>등을 손녀에게 주려고 구입 했답니다. 칭찬해 주세요. 할 수 있으시면 필력도 좀 나누어 주시고요.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주일학교 교사로 아이들에게 연극의 대본과 동화를 들려주다 보니 동화를 쓰시게 되었다더군요. 저는 초등학교 때 새벽종소리에 일어나 친구 따라 새벽기도도 한 적이 있답니다. 그때의 종소리는 아직도 제 귓가에 맴돕니다. 한참을 지나 종소리 대신 종탑 사방으로 스피커가 달리고 찬송을 틀어주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매주 목요일 저녁 어린이 예배 후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던 동화는 최고였답니다. 제사보단 잿밥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주님! 반성 아니 회개합니다.
일본 도쿄시부야에서 9살까지 살다 10살(1946년)에 청송외가로 오셨지만 두 번의 전쟁( 태평양전쟁과 6.25)과 병마 때문에 30살 때 방광을 들어내고 소변주머니를 다는 수술을 하셨다니, 정말 기구하십니다. 하지만 죽기 전에 좋은 글 한 편 쓰고 가면 이 세상 잘 다녀간 걸로 삼겠다 하시며 쓰고 또 쓰신 선생님. 힘들고 어려울 때 만난 동무들인 이오덕 선생,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선물한 전우익, 정호경신부들과 함께 공부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눈 게 잘 헤쳐 나올 수 있는 삶의 큰 언덕이었으리라 생각되네요.
안동에 살면서 선생님을 자세하게 소개해주신 안상학 시인, 하룻밤 묵은 소목화당 주인장, 점심 먹은 식당주인 그리고 우연히 찾아 들어간 카페의 바리스타(핸드드립만 고수) 모두 동무라네요. 살아갈 때 함께 꿈꾸며 세상 사는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동무들이 있다는 건 또 다른 축복이 아닐는지요. 제게도 그런 동무, 동역자, 문우들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사고로 다리가 3개인 개 달이네집 비나리에도 다녀왔답니다. 달이 아빠 정호경 신부도 먼나라로 가셨네요. 물론 만나셨겠지요. 권 선생님께서는 “나 죽고 나면 집을 다 쓸어버려라” 하셨다던데 이렇게 보존되니 뒤란에 있는 보리수 열매도 맛볼 수 있고 검약한 집을 돌아보며 얼마나 욕심이 모가지까지 차 있었는지 반성도 할 수 있으니 참 다행입니다.
아이들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곳에서 살 수밖에 없으니 조금이나마 평화롭게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면서 모든 인세를 아이들을 위해 쓰라는 유언을 남기신 선생님! 선생님을 만나 뵈니 떠난 뒤의 뒷모습도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뒷모습에 반하면 못 헤어 나오는 거 아시나요? 뒷모습의 아우라는 생각보다 크고 셉니다. 오래간다는 말입니다.
권정생 선생님!
두서없이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어머님과 정신부님 그리고 그곳의 새동무들과 함께 전쟁, 배고픔 없는 곳에서 행복하시길......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P.S 선생님! 돌아 나오다 본 뒷간(화장실엔)엔 조탑안길 57-12란 주소록이 붙어있던데 다음부터는 이곳으로 부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