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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사 요약>
19세기가 저물어 가는 1895년 12월 28일 프랑스 리용에서 사진 건판 제조 공장을 운영하는 뤼미에르 형제가 개발한 1초당 16프레임을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 겸용 영사기 시네마토그라프 곧 촬영, 영사 겸용 기재로 찍은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 ‘열차의 도착’ ‘단란한 아침 식사’등 10여 편의 실사 필름이 공개 되 영화의 탄생을 알린 지 106년, 그로부터 2년만에 인도, 중국,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사진 시대를 연 지 이제 100여 년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 활동사진이 영화로 정착되는 과정은 수입(1896년), 흥행(1897년), 제작(1899년) 등 일정한 사이클에 의해 진행된 일본의 경우와는 달랐다. ‘제작’으로 쉽사리 전환하지 못한 채 ‘수입’과 ‘흥행’이 거듭되는 지루한 수용기였다. 이 시기에 을사보호조약(1904년)과 한일합방(1910년)이라는 굴욕적인 역사에 휘둘리면서 제작의 주도권을 일본에게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 영화의 기점이 된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1919년)의 등장까지 22년간은 정착을 위한 길고 긴 모색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도 우리 손으로 활동사진을 만들어 내려면 연극이라는 ‘대리모’를 빌려야 했다. 게다가 자주적인 제작 기반이 조성될 때까지 연기를 제외한 자본과 기술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감) 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이렇게 한국 영화의 역사는 시초부터 어긋난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 영화사 기술의 문제점은 초창기 영화사의 형성에 있었다. 곧 활동사진의 도래시기를 둘러싼 논란, 일본인이 주도한 영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 그리고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에 앞서 ‘국경’이란 영화가 존재했느냐의 여부였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영화 역사가 정립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 된다.
그동안 ‘아리랑’(1926년)의 나운규, ‘임자 없는 나룻배’(1932년)의 이규환과 같은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여 무성 영화를 정착시키고, 이명우의 ‘춘향전’(1935년)을 계기로 발성 영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의 강화된 통제 정책과 압력으로 한국 영화는 ‘어용’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감격 속에서 출발한 광복기의 영화도 뒤이은 분단과 한국 전쟁으로 자주적인 역량을 미처 펼쳐 보지도 못한 채 비상의 날개를 접어야 했다. 다행히 전란의 폐허 속에서 일구어 낸 ‘춘향전’(1955년, 이규환 감독)의 상업적 성공으로 영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60년대는 한국 영화의 전성기였다. 연간 제작 편수가 100편선을 돌파하고 이 해 말에는 220편을 상회하는 활기를 찾게 된 것이다. 문예 영화붐과 함께 작품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이 시기는 양적으로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괄목할 성장을 이루었다. ‘하녀’(1960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오발탄’(1961년), ‘갯마을’(1965년), ‘만추’(1966년) 등을 내놓은 김기영, 신상옥, 유현목 등 이른바 트로이카 감독과 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감) 수용, 이만희 등이 그 주역이었다. 하지만 산유국의 오일 파동과 겹쳐 불황을 겪은 70년대는 저질 영화의 시비를 낳았다. 그런 가운데 ‘겨울여자’(1977년, 김호선 감독), ‘별들의 고향’(1974년, 이장호 감독), ‘바보들의 행진’(1975년, 하길종 감독)과 같은 히트작이 나온 것은 다행이었다. 임권택이 ‘만다라’(1981년)로 거듭나고 강수연이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년)이 로카르노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함으로써 1980년대는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90년대는 위기와 도전의 시기였다. 미국의 직배 영화 공세를 스크린쿼터의 사수 투쟁과 젊은 영화인들의 의지, 보다 합리적인 시장 배극 체계의 도입 등으로 맞서며 돌파해 나갔다.
I. 활동사진의 수입 (1897-1918년)
1. 활동사진의 국내 유입 시기
한국에서 영화가 상영되었음을 밝혀주는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903년 6월 24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영화광고이다. 이 광고에 의하면 10전의 입장료를 받고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 기계창고에서 하오 8시부터 10시 까지 단편영화를 상영하고 있음을 알렸다. “동대문 내 한성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시술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 및 비 오는 날을 제한 외에는 매일 하오 8시에서 10시까지 실행하는데 한국 및 구미 각국의 생명 도시 각종 극장의 절승한 광경을 담은 필름을 구비하고 있다더라. 입장요금은 동전 10전” 장사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던 것 같다. 황성신문(1903년 7월 10일자)에 보도된 기사로 미루어 볼 때 동대문 한성전기 회사의 활동사진은 10일 가량 상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매일 밤 거둬들인 수입액이 1백여 원(元)에 이를 정도였다.
활동사진 이전의 영상에 대한 접촉인 1894년 소공동에 차린 천연당 사진관에서 비롯된 사진 촬영은 하나의 이변이었다.
활동사진을 처음 들여온 시기는 언제일까? 이에 대해서는 1897년 10월 10일 내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근거로 런던타임즈 1897년 10월 19일자 보도 기사를 제시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통설인 ‘1903년 활동사진 도래 시기’보다 5년이 앞서는 중요한 사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97년 10월 10일을 전후한 3일 동안 에스터 하우스라는 영국인이 조선연초주식회사와 공동구매 방식으로 프랑스 파테사의 단편 실사 필름을 들여다 충무로 진고개에 있는 중국인 소유의 가건물에서 상영했는데, 빈 담배갑 일정량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무료 입장시켰고 모든 관람객에게 기생 사진 카드 7장씩을 기념으로 나눠주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활동사진의 공개 장소로 언급된 이현은 지금의 충무로 2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말한다.
이 밖에도 미국인 여행가 버튼 홈즈(Burton Homes)의 여행기에서 언급된 내용들은 1899년 한국에서 전차를 타고 영화촬영 했음을 밝히고 있다.
개항과 함께 이 땅에 서구 문화가 들어와 개방의 기운이 뻗치던 무렵, 그러나 아직 서울 거리에 전차나 전기가 미처 들어오기 전에 ‘팔딱 사진’으로 불린 활동사진을 선보인 것이다.
2. 극장의 설립과 흥행
19세기 후반부터 서울이 산업 도시로 변모해 감에 따라 시민들의 관심도 점차 서구적인 공연 문화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옥내 무대 공간이 필요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욕구는 기존의 야외 무대에서 전천후 상설관으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그래서 처음 생긴 것이 1899년 서울 아현에 등장한 무동연회장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02년 12월 2일, 본격적인 현대식 상설 극장인 협률사가 개관 프로 ‘소춘대유희’를 개막하면서 첫 선을 보였다. 한국의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영화가 전래된 것은 1903년 동대문 기계창 이후로 봐야하며, 원각사의 전신인 협률사(왕실극장)를 비롯하여 영화 흥행을 목적으로한 전용 영화 극장이 미국이나 프랑스의 최신필름 등을 본격적으로 상영하여 서울의 명물로 등장하였다. 궁내부 소관의 국립극장 격인 협률사는 지금까지 한국 영화사의 기점이 된 1903년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창의 활동사진 상영과 거의 같은 시기(7월 10일)에 영화 흥행을 함으로써 극장 관람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동대문의 기계창고는 동대문 활동사진 관람소로 명명하다가 1908년 광무대로 바뀌어 영화와 함께 민속 기예도 공연하였다.
그러면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춘 민간 극장이 처음 나온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1907년 7월 17일로, 실업가, 유지 및 동대문시장 상인 출신인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 등이 발기하여 서울 종로구 수은동에 개장한 단성사가 개장하였고 연흥사, 고등연예관(스카라 부근), 우미관(국도), 조선극장, 장안사(파고다), 대정관 등 일인들이 극장을 소유하여 외화를 직수입 상영하였다고 한다. 1910년 이후 한국에 들어온 영화들은 지금 들어봐도 꽤나 수준이 있는 외화들로 그 당시 관객의 영화 문화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였나 가늠할 수 있다. <쿼바디스><엘리자베스 여왕><지바고><부활><쟌다르크> 등의 문예물이나 <인톨러런스><호반의 처녀> 등 실험극이 상영되었다니 놀라운 이야기다.
더 이상 고루한 공연 프로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영화의 상영에 비중을 두기 시작한 것은 1909년 4월부터였다. 당시에는 광대 놀이나 권번 기생들의 춤을 먼저 보여 준 뒤에야 활동사진을 트는 것이 상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이 개선되지 않은 데다 화재까지 겹치는 악운에 직면하면서, 단성사는 일본인 다무라 미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1911년의 일이었다.
서구의 영화가 사물의 복사라는 단순한 영화의 1차원적인 영역을 벗어나 예술의 단계로 발돋움 하기위해 노력하던 20세기 초는 같가지 영상실험의 각축장과도 같았다. 프랑스 졸즈 멜리에스의 '월세계의 여행'이나 미국의 에드윈 포토의 '소방수의 하루'나 '대열차 강도', 그리고 데이빗 워크 그리피스의 '국민의 창생'이나 '불관용'등의 영화는 영화예술구축의 기둥이 된다. 그러나 '월세계의 여행'이 나왔던 1902년 부터 '불관용'이 나왓던 1916년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단 한편의영화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때 당시 가장 빠르게 선진 문물을 접 할 수 있었던 일본 유학생들이 결성한 신극단체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원각사는 단성사보다 열흘 남짓 늦은 1907년 7월 26일, 협률사를 이어 받아 민간화하면서 새 모습으로 출범했다. 당시 대한신문 사장이었던 이인직 등이 임대하여 약간의 개보수 후, 자신의 창작 ‘은세계’ 공연으로 첫 발을 디딘 연극전용 극장이었다.
목조 2층 양식인 경성고동연예관이 문을 연 것은 1910년 2월 18일이었다. 황금정, 즉 지금의 을지로 입구 외환은행 본점 자리에서였다. 당시 관객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반반 정도로, 어느 때나 만원을 이루었다. 4일마다 영화를 교체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제작된 단편 영화 15종 가량이 소개되었다. 대체로 풍경 실사 2편 정도에 마술 실황과 활극, 서커스, 희극이 대부분이었다.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3대 한국 영화 중심관으로 부동의 자리를 굳힌 조선극장은 1922년 11월 6일, 한국인의 자본으로 인사동에 개설되었으며.
II. 한국 영화의 탄생 (1919-1924년)
1. 활동사진 연쇄극과 위생 영화의 제작
활동사진이 들어온 1897년부터 1910년대 중반까지를 우리 나라 활동사진의 정착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한국인들은 새로운 기계 복제 방식의 경이로운 시각 체험과 문화 향수 형태의 전환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 이후 24년까지는, 분출되는 제작 욕구를 실현시킨 한국 영화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를 지척에 둔 세기말에 탄생하여 인류의 시선을 사로잡은 활동사진은 가히 문명사적 혁명의 물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활동사진은 수입과 흥행의 정착 과정을 거쳐 바야흐로 마지막 제작 단계로 넘어오게 된다.
사이토는 취임과 함께 문화 정책을 들고 나와 한국인들의 격앙된 감정을 완화하려 했다. 그들의 이른바 한반도의 지배 논리는 일본의 타율적 힘이 없는 한 정체된 후진 사회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강점은 한국을 ‘근대화’시키는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이었다. 이같이 일본의 조선 통치를 위한 전략이 변화하는 가운데 외국 영화가 들어오긴 했으나, 자막에 부담을 느낀 일부 사람들과 통속적인 눈물짜기 신파극에 식상한 관중들이 새로운 볼거리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영화의 제작 환경도 한층 무르익어 갔다.
마침 황금관의 신축 2주년 기념(1908)으로 <선장의 처>라는 연쇄극이 한국땅에 선보이게 되었는데, 김도산은 여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1918년. 이 무렵 단성사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외국 영화만 편애한다는 세간의 비판을 감안, 이듬해 그 대표인 김도산에게 500원의 제작비를 주어 연극 속에 들어갈 야외 장면을 찍도록 한 것이다. 당시 신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김도산과 단성사의 사주인 박승필이 힘을 합쳐 1919년 10월에 영화도 상영할 수 있게 개조한 단성사에서 '의리적 구투' 는 연쇄활동 사진극 즉, 키노드라마를 처음으로 올리게 된다. 키노 드라마란 영화와 연극이 한 무대에서 교대로 등장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것을 찍게 된 이유는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의 부족과 인적자원의 부족, 자금의 부족때문임은 말 할 것도 없다. 즉 한정된 무대에서는 표현할 수 없는 야외 정경, 도망치는 악한을 무대 밖의 산이나 바다로 쫓아가 때려눕히는 장면 따위의 극적 상황을 촬영해 두었다가 무대에서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줄거리에 맞춰 영사하는 형식을 말한다. 이렇게 자동차와 자동차가 쫓기고 쫓고 하다가 마침내 뒤 차가 앞 차를 바짝 몰아 두 사람이 격투를 할 때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나며 옥양목 스크린이 위로 올라가면, 무대에 바로 영화 장면이 이어져 실제로 배우들이 격투를 한다. 희한하기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극과 영화, 다시 연극으로, 또 영화로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바로 연쇄극이다.
기점으로서의 ‘의리적 구토’와 김도산 극단 신극좌 대표 김도산은 누구보다도 ‘조선 사진’을 바라는 민중들의 기대와 영화의 흥행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1919년 10월 27일, 단원들을 이끌고 단성사주 박승필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연극 속에 영화를 얹은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만들어 단성사 무대에 올림으로써 한국 영화의 기점을 장식했다. 이 땅에 영화가 들어온 지 22년만이었다.
‘의리적 구토’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활극조의 신파 연쇄극이다. 작품의 내용은 그 당시 만연하던 신파 활극류에 불과하나, 우리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발표는 영화사적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민족의 자긍심을 내세운 작품이다. 일인들이 운영하던 극장속에서 유일하게 조선인으로서 단성사를 운영하던 박승필의 숨은 뜻은 우리 전통 예술의 활성과 새로운 영상 예술에 대한 기득권의 야망이 읽을 수 있다. <의리적 구토> 이후 <시우정(1919)><형사고심(1919)> 등 잇달아서 제작된 4편의 연쇄극이 그 점을 암시한다. 아쉬운 점은 영상 기술이 없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인 촬영 기술에 의존하여 일본인 소유의 카메라인 영국제 윌리엄슨(Williamson) 궤짝 카메라로 찍었다는 사실이다. 둘째, 한국 최초의 영상 예술이다. 영화 미학적으로 볼때 연쇄극은 연극 예술의 확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연극 공연 사이에 스크린에 비추어진 영상의 참여는 연극무대의 보조적 존재로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일종의 무대막 구실에 불과한 기능이다. 따라서 영화라 명명하기엔 영화적 조건이 미미하고 영상으로서의 가치는 필름으로 스크린에 보여 준다는 물리적 조건만으로도 유효하다. 세째, 영화 작업의 여건을 마련했다. 촬영을 제외한 모든 작업이 순수한 한국인의 손으로 이루워졌다는 사실은 완전한 한국영화를 만드는 기초적인 작업을 완수 했다고 본다. 이후 이필우가 일본에서 영국인으로 부터 촬영과 현상 기술을 배우고 귀국하여 1920년 <지기>를 비롯하여 다수 연쇄극의 활동사진 부분을 촬영하게 되었는데, 이로서 모든 제작과정이 순수히 국내에서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박승필의 민족자본과 김도산의 우리기술로 만들어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 이후 2,3년은 바야흐로 연쇄극의 시대였다. 연쇄극 제작은 주로 당시 신극단체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기세는 ‘문예단’을 이끌며 <지기(1920)><장한몽(1920)> 등을 연쇄극으로 만들었고 ‘혁신단’을 주도한 임성구는 <학생절의(1920)> 등을 만들었다.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는 흥행 여건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상업적 타개책이라는 측면과 연극에 편승한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손으로 연기를 촬영기 필름에 담아 낸 최초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영화 제작의 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쇄극이면서도 단순한 배경 화면의 역할을 넘어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극영화적 성격의 작품과 기록 영화가 동시에 소개된 예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영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엉성한 형태’이긴 하지만 최초로 조선인이 손수 영화를 만든 1919년을 한 분기점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정리하면, 상영되는 필름의 길이가 길어진 점, 이야기가 들어가면서 일화(에피소드)와 극적 요소를 가지게 된 점, 점차 흥행 자본이라는 것이 형성된 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19년 10월 27일이 우리 나라 영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더욱 확고해진 셈이다.
1918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예술계는 문학이 주도했고, 영화라고 해야 미국과 프랑스 작품이 극장가를 지배했다. 자연히 관객들 사이에서 우리 영화를 기대하는 소리가 높아 갔다. 마침 그때 일본의 세도나이까이 극단이 내한 공연을 가졌다. 김도산은 그때 본 ‘선장의 처’라는 연쇄극에 특히 자극을 받아 ‘의리적 구토’를 내놓게 된다. 물론 거기에는 침체한 흥행의 국면을 전환시켜 보자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이 시도가 성공하자 그는 신극좌에서 잇따라 연쇄극 등을 연출하여 연쇄극의 창시자답게 과도기의 흥행계를 이끌었다.
‘황혼’(1920년)과 일본 작가 오자끼 고오요오의 인기 통속소설인 ‘곤지끼야사’를 번안한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 이야기 ‘장한몽’(1920년, 3권)을 내놓아 신극좌에 맞섰다. 이 연쇄극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여배우 마호정이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당시만 해도 여자들이 무대에 서는 것을 금기로 여겼다. 이런 가운데 폐쇄적인 사회의 통념을 깨로 여자가 무대에 오른 것이다.
특히 ‘학생절의’의 경우 촬영 쪽에 많은 비중을 두고 격투를 벌이던 악한이 3층 아래로 떨어지게 만드는 등 오락적 요소를 대폭 가미함으로써 영화적 구성에 한발 다가섰다.
활동사진 연쇄극은 우리의 독창적인 공연 형식은 아니었다. 일본이 그 원조였다.
기록 영화의 실상 우리나라의 기록 영화는, 활동사진 연쇄극과 연륜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매우 희귀하다.
한강철교, 장충단, 동대문정거장, 살곶다리 등 서울의 풍경을 담은 ‘경성 전시의 경’은 연쇄극 ‘의리적 구토’와 함께 같은 날 탄생한 최초의 기록 영화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경성 교외의 전경’은 그 연장선상에서 도회 밖의 모습을, ‘고종 인산 실경’은 승하한 고종 황제의 국장과 민초들의 애도 장면을 필름에 담아 각기 현장감과 역사적 가치를 높였다.
위생 계몽 영화의 존재 초창기 한국 영화사에 접근할 때 자주 부닺치게 되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이미 정설로 굳어진 우리 나라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에 앞서 계몽 위생 영화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국경’이라는 활극이 단성사에서 공개되었으나 실체에 대해 확인해 준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안종화는 연쇄극이 소멸되기 바로 전 해, 송도 이서의 관서 지방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전국에 급속히 번져 가자 위생 상식을 보급하기 위해, 경기도 위생과의 위촉을 받은 극단 취성좌 연기진이 2700 피트 분량의 필름으로 만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처음에는 위생에 대한 강화가 관중들을 지루하게 만들까봐 권번 기생의 여흥을 사이에 끼워 넣고‘ 호열자 예방에 관한 활동사진’과 ‘요절할 서양 희극’을 보여 주는 순서로 유인책을 썼으나, 점차 각 지방에서 호평을 받은 위생극을 곁들이거나 단독으로 위생 영화 중심의 프로그램을 짰다. 상영 장소도 단성사나 우미관과 같은 전문 극장에서 공회당, 소학교 운동장, 공원 등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대부분 무료 관람이던 것이 1922년 중반에 이르면서 저렴한 요금을 받기도 했다. 위생 선전 활동사진회는 한때 하루 동안 1만여 명의 군중을 동원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화려하게 출발하며 개화한 연쇄극은 불과 3년이 못되어 소멸하고 마는데, 이기세가 ‘문예단’을 해산하고 <매일신보> 기자로 전향하고 얼마가지 않아 ‘신극좌’의 김도산마저 뜻하지 않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데 원인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연쇄극은 자연 소멸되고 말았는데, 찬연했던 초기에 비해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어찌되엇든 이 연쇄극은 한동안 외국 활동사진에 빼앗겼던 관객을 어느 정도 돌이켰고 우리 영화 제작의 시험기가 된 중요한 경험이었다.
우리 나라에는 1920년부터 각종 계몽 영화가 성행했다. 이러한 흐름은 ‘인생의 악귀’류의 위생 영화나 ‘월하의 맹서’와 같은 저축 장려 영화에서 도량형 계량기 선전 영화, 온돌 개량 장려 영화, 전기에 대한 선전 영화, 납세 계몽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계몽 영화는 정부나 산하 기관에 의해 무료 상영되었다. 위생 영화는 처음엔 서양과 일본에서 들여온 실사 필름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차츰 문화 영화에서 간단한 줄거리를 가진 극영화의 형태로 발전했다.
2. 최초의 극영화 ‘국경’의 상영과 좌절
‘국경’(1923년)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은 영화 학계에 그나마 활기를 불어넣었다. 침체된 한국 영화사 연구에 자극을 주는 촉매가 되었다. 이는 그동안 ‘국경’의 존재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일부 영화사가들의 주장을 접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일본인 유명 배우 원산만)가 조선에 흥행 기반을 두고, 내용이야 어떻든 조선 사람들을 상대로 영화를 만들고 관람시켰다는 사실은 결코 소홀히 평가할 수 없는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일본에서 만든 영화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영화를 받아들이고 연마하여 일본의 기술과 제 작 경험, 축적된 경제력을 이용함으로써, 처음으로 돈벌이가 될 극영화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극영화 ‘국경’은 일본 쇼지큐 키네마가 만든 것이 아니라, 조선에 연고를 가진 원산만이 조선 배우를 동원하여 제작한 사실상의 우리 영화라는 결론에 이른다. ‘국경’의 실체 확인은, 총독부의 주도 아래 저축 장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월하의 맹서’보다 앞섰다는 사실 못지 않게, 맨 처음 흥행용으로 제작된 극영화라는 데에 영화사적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3. ‘월하의 맹서’와 영화사의 활동
이러한 영화 제작의 모색기에 때맞춰 극영화의 체계를 갖춘 ‘월하의 맹서’가 1923년 4월 9일 서울 경성호텔에서 선을 보여 관심을 끌었다. ‘국경’이 하루만에 극장 간판을 내린 지 석 달여 만이었다. ‘월하의 맹서’는 조선 총독부 체신국이 저축계몽을 목적으로 1700여 원을 들여 제작한 관제 보급 영화이다.
이 작품이 거둔 영화사적 성과라면,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감독(윤백남)과 스타(이월하)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때부터 그가 사망한 1954년까지의 40년간, 윤백남의 예술적, 사회적 활동은 연극(1912-1922년)을 출발점으로 영화(1923-1926년)와 문학(1927-1953년) 등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 또한 최초의 연예지 ‘예원’(1916년)을 창간했고, 경성방송국의 초대 조선어 방송 과장(1933년)으로 취임하여 우리말 방송을 개척했다. 말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 초대 학장(1953년)을 지내기도 했다.
윤백남의 업적은 크게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월하의 맹서’를 통해 감독의 위상을 확보하고 극영화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둘째,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영화인에 의한 독립 영화사를 창설하였고, 셋째, 나운규, 이월화, 이경손과 같은 후진을 양성하여 영화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윤백남은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인 영화감독과 각본 작가의 원조로서 초창기 한국 여화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당시 그녀에게 대적할 만한 여배우라면, 뒤이어 토월회에 입단하여 ‘춘향전’의 주연을 맡은 복혜숙 정도였다. ‘조선 극단의 꽃’으로 신파 무대를 주름잡던 이월화는 은막에 등장하면서 대중들로부터 더욱 사랑을 받았다. ‘월하의 맹서’는 이 나라 은막의 화형(花型) 배우, 곧 스타 탄생의 모태였다.
단성사는 극장 경영에 이어 영화 제작에까지 손댄 동아문화협회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춘향전’이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자, 이에 자극을 받아 촬영부를 신설하고 ‘장화홍련전’(1924년)을 만들게 된다. ‘장화홍련전’은 지금까지의 작품들과는 달리 일본인의 도움 없이 순수 우리 자본과 기술, 인력에 의해 제작된 최초의 조선 영화라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비록 우리 고유의 전통과 정서가 담긴 ‘춘향전’을 일본인이 먼저 화면에 옮기긴 했지만, 그나마 늦지 않게 자주적 역량을 쏟아 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이는 두말할 필요 없이 단성사 경영주 박승필의 선각자다운 개척 정신과 흥행 감각에 따른 결과였다.
일반이 손꼽아 기다리던 조선 고대소설 ‘장화홍련전’의 영화극은 단성사에서 초일을 내이자 만도의 인기가 비등하여 조선에 상설관이 생긴 이후로 처음 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조선에 활동사진이 생긴 이래 초유의 성황”을 가져온 ‘장화홍련전’의 인기는, 그동안 관객들이 ‘우리의 것’에 얼마나 굶주렸는지 웅변으로 증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승필(1875-1932년)은 외래 문화가 한국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영화를 새로운 대중 매체로 전환시키고 뿌리내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찍이 개화에 눈뜬 그는 최초의 극장인 협률사에 이어 상설관 구실을 해온, 동대문 전기회사 활동사진부를 인수했다. 이어 1908년 9월 6일, 광무대로 명칭을 바꾸면서 면모를 일신하는 등 경영 수완을 발휘해 극장 흥행계의 대부로 자리 잡았다. ‘의리적 구토’를 비롯한 연쇄극과 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여 한국 영화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며, 나운규의 작품 ‘잘 있거라’(1927년), ‘옥녀’, ‘사나이’(1928년) 등에도 출자하여 제작의 활성화에도 일조했다. 심신은 지쳐 있었고, 그나마 사업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 빛을 보게 될 무렵인 32년 1월 4일, 5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한다. 광무대 사장 6년, 단성사 사장 18년의 인생이었다. 단성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1월 8일 하루 동안 휴관하고, 우리 나라 처음으로 극장장인 단성사장을 거행했다. 윤백남은 그의 죽음을 ‘전사’로 비유하고, “싸움의 마당에서 후생을 위하여 피 흘리다 화살이 다 떨어져 명예의 전사를 하고 말았다.”하고 비통해 했다. 박승필은 서울 태생으로 신교육은 별로 받지 못했으나 판단력이 좋고 광무대의 소리꾼이었다는 정도로 알려졌을 뿐, 그 밖의 성장 배경이나 신상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없다.
III. 무성 영화의 정착(1925-1934년)
1. 나운규 시대의 개막
한국 영화는 1926년을 고비로 중요한 전환의 기회를 맞이한다. 배우들이 양산됨에 따라, 그동안 영화 해설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독점적인 스타의 영예를 누려 온 변사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34년까지 10년간은 꾸준한 제작 편수의 증가와 괄목할 수준 향상, 대중들의 높은 관심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면서 무성 영화 전성기를 이뤘다. (1926년.) 그런 나운규가 원작, 각색, 감독 및 주연을 한 ‘아리랑’이 공전의 대흥행을 기록한 것이다. 800여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하여 3개월 만에 만들어진 ‘아리랑’이 개봉되자, 서울 장안의 화제는 모두 이 영화에 집중됐고 관객은 문자 그대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구극의 구조를 탈피한 이 작품은 마치 어느 의열 단원이 서울 한 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레임을 느끼게 했다. 도토리 키재기처럼 고만고만한 영화가 고정 관객을 서로 나눠 가졌던 시기에, ‘아리랑’은 그야말로 군계일학과 같은 존재였다.
‘아리랑’은 단순히 줄거리를 화면에 옮기는 역할로 만족했던 그때까지의 한국 영화 수준으로 볼 때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민족의 저항을 담은 그 내용과 함께 당시로선 생각하기 어려운 영화적 기법을 구사하여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조선인 고유의 감정, 사상, 생활의 진솔한 일단을 정확히 파악했을 뿐 아니라 시대의 분위기를 짜임새 있게 묘사했다.
‘아리랑’에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기법이 있었다. 곧 비유와 암시, 상징의 몽타주가 그것이다.
나운규는 화면의 편집과 구성에서뿐 아니라 편집의 전환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그가 설정한 사막과 물은 1920년대 우리 나라 현실의 함축적인 반영이었다.
나운규는 몽타주나 사진 촬영 기법에 대해 그가 알 턱이 없고, 정식으로 영화 수업 과정을 거친 것도 아니지만 영화적 감각은 천재적이었다.
‘아리랑’이 거둔 예술적 성과를 꼽는다면, 첫째, 일제의 지배 아래 잃어 버린 우리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민족 의식을 깨우치고자 한 점, 둘째, 소재 선택에 제약을 받는 악조건 속에서도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빌어 슬기롭게 주제를 형상화한 점, 셋째, 민족 고유의 풍속과 정서를 화면에 녹여 냈을 뿐 아니라 전래의 민요인 ‘아리랑’을 주제가로 내세워 새롭게 활용함으로써 민족 음악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2. 제 길 트기와 기생 배우의 진출
무성 영화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기생의 출연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유교적인 인습 사회에서 여성의 대외 활동은 금기였다. 더욱이 남성들이 여자 역을 대신하는 여장 남우가 엄존했던 시대였다. 기생들이 부분적이나마 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일반 여성들이 영화계에 진출하는 데에 윤활유 구실을 해주었다.
변사, 각광받은 해설 스타들 변사는 서양에서 발명된 매체와 전통적인 동양의 화술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변사’로 불리는 영화 해설자는 자막에 의존해야 했던 무성 영화 시절에는 단연 선망의 대상이었다. 은막의 우상이 배우라면 변사는 극장의 스타였다. 배우들을 무색케 하는 인기로 인해 변사는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다시피 했다.
조선에 변사가 전문 직업인으로 등장한 것은 1912년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될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단편 실사 필름이 자취를 감추고, 이야기가 들어간 일정 분량의 영화가 흥행용으로 자리 잡으면서부터였다.
명월관 기생들이 인력거를 타고 와 저마다 모셔 가려고 쟁탈전을 벌일 만큼 인기를 끌었던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 변사들도 발성 영화시대를 맞이하면서 차츰 사양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카프 영화 운동의 도전과 몰락
1930년대 전후의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의 조선에서도 세계 정세의 영향을 받아, 영화도 사회의 발전과 역사적 임무 한가운데 서야 한다는 자각이 싹트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집단에 의해 창조되는 예술’은 식민지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폭넓은 민족 사회 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반대와 함께, 당시 조선 사회의 현실을 옳게 반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김기진, 박영희, 이상화 등 문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러한 문학 운동의 대두로 조선 영화계에서도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조선 문학의 발전과 카프 결성에 영향을 끼친 최초의 영화는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카프의 장점은 보수 진영의 개인적 활동과는 다르게 비판 의식을 동반한 이론 무장의 연대였다는 점이다. 서광제, 김유정, 윤기정, 박완식, 황일현 등이 그 대표적인 논객이었다. 어쨌든 카프는 지금까지 조선 영화를 주도해 온 순수 예술의 입장과는 상반된 이념을 들고 나오면서 관심을 끌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단 수단을 소유하지 못해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 생활하는 노동자 편에 선 이들 카프 운동은, 문인들이 주동이 돼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기치를 들면서 연극, 영화, 미술 등 방계 예술 분야로 확산돼 나갔다.
4. 신예 이규환의 등장 이후
주목 끈 ‘임자 없는 나룻배’ 침체와 혼미로 위축된 1930년대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이규환이었다. 그의 등장은 나운규 이후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그의 데뷔작 ‘임자 없는 나룻배’(1932년)는 민족적 비애의 정서를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탁월한 영화였다.
‘임자 없는 나룻배’의 성공 요인은 무엇보다 나운규의 천부적인 연기력에 힘입은 바 컸다.
무성 영화 시대는 나운규와 이규환의 주도 아래 양분되는 모습을 보였다. 전반을 나운규가 선점했다면, 후반은 이규환의 판세로 기울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무성 영화 시대는 이들이 존재함으로써 빛날 수가 있었다. 그들은 곧 한국 영화의 역사였다.
나운규는 영화계에 들어선 지 12년 동안 여러 작품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조국의 현실을 우회저기으로 표출하고 고발하는 예리한 작가 의식을 드러내는가 하면, 때로는 관객의 취향에 영합하는 상업주의적 계산을 엿보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 세계를 경향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민족 정서와 저항 의식을 담은 비판적 사실주의 계열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암시적이나마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대한 반일 감정이 배여 있다. 둘째, 삶의 애환과 인도주의적 접근의 통속극이다. 셋째, 정의의 구현과 인과응보를 추구한 활극조의 경향이다.
영세성을 면치 못한 제작 자본 무성 영화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 영화계는 여전히 어두웠다. 자본의 영세성과 기술의 낙후, 창작 의욕의 침체 등으로 활력을 찾지 못했다. 당시 영화 제작 자본은 정상적인 영화사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임시변통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한 가지가 지방 부호의 자본이었다. 영화인들은 이들을 잡고 영화에 투자할 것을 종용했고 이들은 문화 사업에 참여한다는 우월감으로 돈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즉흥적이고 주먹구구식인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영화의 산업화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계 영화계의 사정은 달랐다. 1930년대 미국은 이미 강철, 석유와 함께 영화가 3대 유력 산업의 하나로 떠올랐고, 일본도 동시 녹음이 활기를 띠어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오락의 중심 매체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시 우리 나라의 극장은 모두 100여 개였다. 일본은 동경에만 300여 관이 몰려 있었다. 기업으로서의 영화 산업이 얼마나 활기를 띠고 있는지 잘 말해 주는 현상이다. 27년 50여 군데 밖에 안 됐던 우리 나라 영화 상설관의 규모와 비교할 때 그나마 절반 가량이 늘어난 셈이나, 열악한 관람 환경을 감안하면 그 수준은 10년 정도 뒤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IV 발성 영화 시대 (1935-1945년)
1. 무성에서 발성으로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 탄생 전후 우리 영화제가 숙원이던 발성 영화 시대를 맞이한 것은 1935년 10월 3일부터 13일까지 10일간 단성사에서 공개된 이명우, 이필우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춘향전’ 때부터였다. 세계 최초의 발성 영화 ‘재즈 싱어’(1927년)가 나온 지 8년, 여러 시도 끝에 일본이 재즈를 매개로 한 ‘마담과 마누라’(1931년)를 공개한 지 4년 만에 거둔 기술의 개가였다.
우리나라에 발성 영화 시대가 개막된 것은 연극의 형식 속에 활동사진을 도입한 ‘의리적 구토’(1919년)가 선을 보인 지 16년 만이었다.
‘춘향전’은 일반 영화의 갑절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갔다. 입장 요금도 그 비율에 해당하는 1원을 받았다. 그런데도 첫날부터 연일 초만원으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등장인물이 나누는 사소한 대사, 다듬이질 소리, 대문 여닫는 소리에도 호기심으로 눈을 번뜩였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첫 발성 영화라는 대견스러움에 감동하여 웬만한 허물은 덮어 주었다.
2년 동안 5편 남짓에 머물렀던 발성 영화는 193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10여 편이나 쏟아져 나왔다. 이로써 37년부터 나타난 완전 발성 영화 제작의 염원이 일단 달성된 셈이다.
발성 영화가 궤도를 잡으면서 영화계는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음성 연기가 서툰 무성 영화의 스타들이 은막에서 사라진 반면, 연극 출신 연기자들이 대거 영화계로 진출했다. 발성 영화 초기에는 무대 연기자들이 대사의 소화력은 갖추었으나, 과장된 억양과 동작의 부자연스러움으로 다소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영화 예술은 영혼으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뚜렷한 신념 아래 영화를 만들어 온 이규환은 사색적이었으나 일단 일에 들어가면 몸을 내던지는 무서운 추진력의 소유자였다. 그의 작품을 보면 일제 지배 아래서 만든 초기 작품이 단연 빛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 거론한 일련의 작품, 곧 ‘임자 없는 나룻배’, ‘무지개’, ‘나그네’ 등은 민족 정서와 피지배자의 분노, 인생과 운명, 또는 허무주의가 짙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통제와 수난의 연대기
V. 격동의 광복 영화기 (1945-1954년)
1. 해방기의 항일, 광복 영화
8.15 광복 이후 우리나라 영화가 걸어온 길은, 일제 말기에 남긴 오욕의 자취를 지우고 새롭게 출발하는 일이었다. 당장 흩어진 기자재를 모으고 절대량이 부족한 필름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마음뿐이었다.
조국의 독립은 그 감격만큼 많은 신인을 배출하는 소득을 가져온다. 이른바 이규환, 윤봉춘, 전창근 등으로 대표되는 광복 전 세대와 이에 대비되는 해방 세대, 즉 김성민(‘사랑의 교실’, 1948년), 윤대룡(‘검사와 여선생’, 1948년), 한형모(‘성벽을 뚫고’, 1948년), 노필(‘안창남 비행사’, 1949년) 등 감독과 황여희(‘자유 만세’, 1946년), 김승호(‘자유 만세’, 1946년), 최은희(‘새로운 맹세’, 1947년), 주증녀(‘조국의 어머니’, 1948년), 노경희(‘수우’, 1948년), 최남현(‘돌아온 어머니’, 1949년), 황정순(‘여성 일기’, 1949년), 이집길, 황해(‘성벽을 뚫고’, 1949년), 윤일봉(‘푸른 언덕’, 1949년), 이향(‘심판자’, 1949년)등 연기자가 바로 그들이다.
2. 분단 전쟁기의 시련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반공 포로가 전격적으로 석방되고, 이 해 7월 29일, 휴전 협정 조인으로 정부가 서울로 환도함으로써 영화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다음 해 3월 31일, 정부에 의해 국산 영화의 보호 육성책의 하나로 입장세법이 개정돼 국산 영화 관람에 따르는 입장세가 면제됨으로써 우리 나라 영화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된다.
VI. 한국 영화의 부활 (1955-1969년)
1. 전후 중흥의 맥박
1950년대 중반에 들어가면서 한국 영화는 비로소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정부의 환도와 함께 서울로 돌아온 영화인들은, 국산 영화에 대한 면세 조치라는 정책적인 호재를 만나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영화인들은 의욕을 갖고 다양한 소재 발굴에 나섰고, 제작자는 경쟁력을 가진 영화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이런 변화 속에서 국도극장에 개봉돼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년, 조미령, 이민 주연)은 한국 영화의 중흥을 예고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춘향전>의 성공은 사극의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에 자극받아 신상옥 감독의 . <꿈>(이상 1955년). 등으로 이어지면서 사극의 열기를 높였다.
유현목은 이 시기에 등장한 신상옥, 김기영 등과 함께 가장 주목받는 영화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출세작 <교차로>(1956년)와 <잃어버린 청춘>(1957년) 등은, 한국 전쟁 후 사회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한 주제 의식과 영상 감각이 돋보였다. 이러한 그의 체취는 뒷날 대표작이 된 <오발탄>에 이르러 한층 강렬한 주제 의식을 발산한다.. 김기영 감독은. 전쟁에 상처 입은 인간들의 모습과 현실 적응의 생존 본능을 특유의 시선으로 그려내어 관심을 끌었다.
이 무렵[1950년대]의 두드러진 경향은 <자유 부인>(1955년, 한형모 감독) 이후. 등 흥행작들이 말해 주듯이 통속극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은, 자유 풍조가 만연시킨 전후파적 애정 편력과 가정 윤리(<자유 부인>), 또는 좌절을 딛고 일어선 참전 상이용사의 의지를 담아 전후 사회상을 반영하였다.
1959년은 제작 회사의 난립으로 작품의 경향도 다양했다. 옛 신파극인. 등이 은막에 등장하는가 하면, . 등 희극물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1950년대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그 성격이 반공물이거나 문예물, 또는 통속극을 가릴 것 없이 그 소재가 거의 분단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955년부터 59년까지의 시기를 우리 영화의 중흥기로 분류하는 이유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영화 제작의 양적 증가를 들 수 있다. 이 기간 동안에 만들어진 작품 편수는 1955년 15편, 56년 30편, 57년 37편, 58년 74편, 59년 111편이다. 이 같은 영화 제작 추세는, 그때까지 연간 20편에 밑돌던 현상을 감안할 때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100편대를 돌파했다는 것이 그 상징적인 지표이다. 둘째는, <춘향전>과 <자유 부인>의 성공에서 엿볼 수 있듯이 한국 영화가 관객의 호응을 받을 만큼 이 시대 민중의 최대 오락이었다는 점이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처음 개국(1956년 5월 12일)되기는 했지만, 보급과 프로그램 수준이 영화를 위협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한 까닭이기도 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로서 영화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실상 1950년대 중,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는 그 내용과 형식면에서 괄목할 발전을 이룩했다. 처음에는 전근대적인 신파조의 통속극과 유치한 희극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50년대에 감독으로 입문한 신상옥, 김기영, 유현목 등의 기세와 김소동, 홍성기, 이강천, 김성민 등의 가세로 점차 작품의 질을 높일 수 있었다. 중흥기는 오락적 성과나 예술적 잠재력에 있어 이 땅의 영화인들에게 창조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다.
2. 영화의 전성기
당시 3만대에 지나지 않던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도, 문화방송(MBC-TV)이 개국되던 69년 말에는 22만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도 영화는 대중들이 선호하는 오락의 중심에 있었다. 적어도 컬러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영화사가들은 1960년대를 한국 영화의 전성기로 분류하는데,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영화 제작 편수의 증가와 작품의 질적 향상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불과 87편이 만들어져 소강 상태를 면치 못했으나, 불과 2년 만에 ‘100편의 벽’을 뛰어넘어 112편을 기록했다. 69년에는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200편 선을 돌파하는 제작의 황금기에 이른다. 총천연색 영화 비율이 흑백 필름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또한 이 시기에 한국 영화사상 최대의 성과로 꼽히는 <오발탄>, <하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만추>, <갯마을> 등이 제작되었다. 둘째는, 극장과 영화 관람객이 대폭 늘어났다는 점이다. 1950년대까지는 전국의 극장 수가 200여 개, 연간 관람객 수가 1000만 명에 미치지 못하던 것이, 61년에 이르면서 160개에 가까운 극장이 세워지고 관객 또한 5배 이상 늘어나 5,800여 만명에 이르렀다. 끝으로는, 제작, 배급 등 유통 구조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까지는 영화 제작은 개인 제작사가 중심이었다. 먼저 만들고 싶은 영화의 각본과 최소한의 제작진을 갖추고 전주를 구한 다음에야 회사 간판을 거는 식의 투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60년대로 들어와서는 일정 시설과 운영 체계를 갖춘 방식이 요구되었다.
1960년대 인기 정상의 대표적인 두 스타, 고전적인 여성미를 상징하는 최은희와 현대적 감각의 소유자인 김지미의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는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성춘향>의 성공과 <춘향전>의 패배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대형화면의 위력을 홍보하는데 기여했다.
닫힌 영화 정책 박정희 정부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한다는 미명 아래 1961년 9월 12일, 문교부 고시 148호를 발표하고, 같은 달 9월 30일까지 새로 제정된 신규 등록 기준에 따라 영화사 등록을 다시 하도록 했다. 군사 정부의 영화정책은 ‘보호와 육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통제와 관리’라는 의도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뚜렷한 양적 증가와 질적 향상으로 사상 유례 없는 황금기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소재와 표현 면에서는 오히려 제약을 받는 불이익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햇빛이 강하며 그림자도 길게 마련일까. 1961년에 일어난 5․16 군사 쿠데타는 그나마 누릴 수 있었던 소재와 표현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퇴행의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내각 책임제가 시행된 민주당 정권 말기에 개봉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년)이 그 대표적인 피해의 사례이다. 군사 정부가 들어서자 서울 시내 극장에 5일 동안 일제히 영업 정지령을 내리고, 상영 중인 <오발탄>의 재검열을 지시했다. 내용이 너무 어둡고 사회를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게 그 이유였다.
표현의 규제 대상은 <잘 돼 갑니다>의 경우처럼 정치성이 내포되었거나, <오발탄>에서처럼 현실을 어둡게 묘사했거나, <춘몽>, <벽 속의 여자>처럼 반윤리적이거나, <폭로>와 같이 현실 고발적인 내용이 해당되었다.
4․19 혁명으로 잠시 민주화의 물꼬가 트이는 듯했으나, 군사 정부는 곧 창작 자유에 대한 영화인들의 기대를 잠재웠다. 이 같은 정치 사회적인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화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6년)에 따른 기대 심리와 늘어나는 수출에 편승하여 양적 팽창과 함께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뭐라 해도. 서민물의 성행과, 대중 소설과 대칭되는 단편 소설 등 순수 문학이 원작으로 제공된 문예 영화의 활기, 그리고. <맨발의 청춘>(1964년) 등 왜색 영화가 일으킨 청춘 영화의 유행이었다. 신성일, 엄앵란과 같은 짝을 이룬 스타가 탄생한 것도 이때였다.
일반 흥행 영화 문예 영화가 질적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통속극은 흥행과 양적으로 다른 장르를 압도했다. 1960년대에 제작된 한국 영화 총 편수 가운데 통속극이 그 절반인 784편을 차지했다. 그 다음이 활극, 공포극 221편, 풍자 희극 131편, 반공 영화 57편, 사극 47편, 문예물 43편 순이었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농경 사회에서 산업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1960년대의 통속극은 50년대 말에 유행한 .류의 기구한 운명을 다룬 복고조의 신파극이 퇴조한 대신. 일상적인 소재, 사랑이나 인간 관계로 바뀌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맨발의 청춘>(1964년)과 <초우>(1966년)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매개로 신분 차이에서 오는 절망감과 빗나간 신분 상승의 허망을 그렸고. <미워도 다시 한번>(1968년)은 유부남을 사랑한 미혼모의 슬픈 이별을 담았으며, <아낌없이 주련다>(1962년, 유현목 감독)는 연하의 청년을 사랑한 전쟁 미망인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50년대의 통속극이 <자유부인>이나 <목포의 눈물>의 경우가 말해 주듯이 시대 풍조나 파란 많은 여인의 운명 따위에 관심을 보였다면, 60년대는 서민의 생활이나 가정을 중심으로 빚어지는 소재가 주류를 이루었다.
전성기의 작품과 주역들 화제작, 문제작 주변 생활 속에 띄어든 대학생들의 이상과 좌절, 그리고 재기의 의지를 그린 이성구 감독의 <젊은 표정>(1960년)으로 1960년대 벽두를 장식한 한국 영화계는, 어느 때보다 질적으로 풍성한 문예 영화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영화사상 황금의 월척으로 꼽히는 문제작과 가작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 시기였다. 이미 <하녀>(1960년), <오발탄>(1961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등의 작품을 통해 의욕적 문예 영화의 불을 당기기 시작한 문예 영화의 행렬은.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년). 등 가작이 뒤를 이으면서 절정에 이른다.
<하녀>는 중산층 가정에 가정부가 들어오면서 일어나는 파멸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핵심은 음악 교사인 가장(김진규)과 식모(이은심) 사이에서 벌어지는 불륜 관계의 비극이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년)은 사실주의 영화의 기본 형식인 ‘먼 거리 촬영(롱 쇼트)’를 적절히 살린, 뛰어난 기교와 흑백 영상미로 한국 전쟁이 몰고 온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과 빈곤한 삶을 부각시킨, 해방 이후 사실주의 영화의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암울한 서울의 야경으로 시작해 밤 장면으로 끝나는 어두운 화면 구조, 숨막힐 듯한 실내의 폐쇄 공간으로 설정된 이 영화의 무대는, 월남한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해방촌이다. 1950년대 후반 실향민의 암담한 삶과 노모의 발작적 갈망이 상징하는 분단의 깊은 후유증, 부패한 자유당 정권 아래의 사회상을 뛰어난 영상미와 날카로운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나운규의 <아리랑>(1926년) 이후 최대의 수확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년)는 서술적 묘사보다 분위기를 살린 이색작이다. 단순한 내용으로 승부를 건 점이 눈에 띄었다. 단선적인 구성에다 등장 인물마저 집약시켜, 차창의 풍경이나 벤치의 낙엽, 그리고 남녀 주인공의 트렌치 코드에까지 여유롭게 살피도록 만들었다.
깡패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대부분의 영화는, 무언가 깊은 상처를 받아 그런 처지로 내몰린다는 당위성을 부여받기 마련이다. 1960년대의 청춘 영화의 상징처럼 회자되는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년)도 그런 틀을 지킨 화제작이었다.
대표적인 ‘메가폰’의 주인공들 -신상옥,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이만희 196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를 주도한 것은 신상옥, 김기영, 유현목 등 이른바 ‘감독 삼두 마차(디렉터 트로이카)’와 김수용, 이만희, 강대진, 박상호, 이성구, 김묵, 정진우 등이었다. 이 중 영화계 입문 경력이 가장 앞선 신상옥은 연출뿐만 아니라 제작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미학적 구도와 사실주의에 몰두해 온 유현목의 탐색은, 인간의 문제에서 신의 차원으로 옮겨가는 변이를 보여 주었다. 또한 신상옥은 토착성을 중심으로 한 특유의 탐미주의적 시각을 보여 주었다. 두 감독과 함께 1960년대 한국 영화를 이끈 김기영은, 성악(性惡)적 잠재 의식과 가학성 음란증(새디즘)의 마성을 각각 표출하여 주목을 받았다. 김수용의 안정된 감성과 끊임없는 변모, 이만희의 비범한 상황 인식과 저력도 관심을 끌었다. 또한 이봉래는 낙관적인 서정주의를, 박상호는 분단에 대한 개성적인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이성구와 함께 60년대의 막차를 타고 입문한 최하원은, 각기 투철한 영화 감각과 매끄러운 형상력을 바탕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아울러 서민의 세계를 일관성 있게 추구해 온 강대진 감독은 평범한 서민의 삶을 긍정적인 인간애로 <박서방>과 <마부>(1961년)를 일구어 냈다.
신상옥(1925년-)은 데뷔작 <악야>(1952년) 이후 <꿈>(1955년). 등과 1960년대 벽두를 장식한 <성춘향>(1961년) 등 성공작을 내놓아 흥행 감독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등 일련의 문예 가작을 내놓으면ㅅ저 그가 단순한 상업주의 작가가 아님을 환기시켰다. 장르를 초월한 그의 연출작은, 앞의 경우처럼 순수 문학 소재의 영화가 갖기 쉬운 흥행적 취약점을 <연산군>(1961년). 와 같은 사극 대작으로 만회하며. 가족극에서. 괴기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최기에는 양공주를 사랑한 문학 청년의 갈등을 통해 해방에서 한국 전쟁에 이르는 사회상을 비판적 시각으로 조명한 <악야>.가 말해 주듯이 추악한 현실과 꿈의 허망에 초점을 맞춘 사실주의 계열로, 중반기인 1960년대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일련의 문예 영화에서 봉건 사회의 인습과 타파를 추구하는 한편, <연산군>. 등 역사물을 빌어 권력의 속성과 허무를 부각시켰다면. 60년대 후반기에는. 괴기물로 특유의 몽환미를 보여 주었다.
김기영 감독(1919-1998년)은 <하녀>(1960년)을 계기로, 그동안 .등에서 추구해 온 사실주의를 접고 심리주의 세계를 지향했다. 그는 시점을 사회 밑바닥에서 가정으로 돌리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대상을 성악(性惡)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그래서 그 앞에는 섬뜩하리 만큼 잔인한 상황, 피와 성욕, 죽음 따위의 파국이 전개되며, 그는 막다른 폐쇄공간 속에서 마치 외과의사가 집도하듯이 사물을 냉정하고 예리하게 관찰했다. 화면은 그에게 있어 수술대나 다름없었다. 1960년대 이후 공들인 <하녀>(1960년), <화녀>(1971년), <충녀>(1972년) 등 여자를 대상으로 한 실내극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여자에게 끌려 다니는 무력한 남성의 모습이다. 그동안 남성 지배 사회에서 겪었던 굴종과 성적 억압에 대한 일종의 정화 작용(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 흐르는 것은 김기영 특유의 가학성 음란증(새디즘)이다.
유현목(1924년-)은 첫 작품 <교차로>(1956년) 등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당초 몽타주 위주의 표현주의적 기법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청춘>91957년)을 고비로 <오발탄>(1961년). 등 활동 중반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현실고발적인 리얼리즘의 초석을 다져 나갔다. <김약국의 딸들>은 결혼만 하면 불행해지는 한 가문의 징크스를 운명론적 관점으로 접근했고, <잉여인간>은 분단 전쟁이 가져온 정신의 황폐와 빈곤을 한 치과의원에 모여드는 소시민의 푸념을 통해 부각시켰으며, <순교자>는 신을 부정해야 하는 고문 속에서 신에 대해 회의하면서도 구원을 위해 신앙은 필요하다고 부르짖는 목사의 고뇌를 그렸다.
1958년 <공처가>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딘 김수용은, 60년대 초까지. 거의 희극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을 계기로 문예 영화와 청춘 영화를 주 장르로 활로를 모색, 안착하였다. 그의 작품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바다에 삶의 근거를 둔 여자의 숙명을 강조한 고은아 주연의 <갯마을>(1965년), 가난을 딛고 일어서는 소년 가장 이윤복의 이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년)등을 꼽을 수 있다.
이만희(1931-1975년)는 극한 상황의 표출에 능란한 승부욕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영화 전성기에 이루어 놓은 자취들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년) 등 전쟁의 참상과 전우애 및 민족 동질성의 모색으로, <만추>(1966년). 등 심미적 표현과 인간애의 시선을 통해 각각 창출된 것이었다. 뚜렷한 성과가 없는 통속극으로 출발하였다. 그런 그를 영화계가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미마인의 유산을 탐낸 전 남편의 음모극 <다이알 112를 돌려라>부터였다. 이 영화에서 보여준 인물 설정과 심리 묘사, 상황으로 몰고 가는 긴장감의 처리 등은 이후 그의 작품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련의 가작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만희는 등장 인물을 즉물적으로 내던져 싸늘한 카메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편에서 관조하고 동조한 영화 작가였다.
정상에 떠오른 별무리 -김승호, 최은희, 최무룡, 김진규, 신영균, 김지미, 신성일 영화의 풍요는 배우들에게도 활기를 불어 넣었다. 1950년대에 벌써 검증을 받았거나 가능성을 보인 김승호, 최무룡, 김지미 등이 선두 그룹을 지켰다. 이어 <과부>(1960년)로 출발한 신영균과 <청춘교실>(1963년), <맨발의 청춘>(1964년) 등 청춘 영화 열기로 급부상하게 된 신성일․엄앵란 짝, 이만희 감독의 작품에서 두각을 나타낸 <7인의 여포로>(1965년)의 문정숙, <난의 비가>, <갯마을>(1965년)의 고은아 등이 가세하여 한국 영화는 어느 때보다도 두터운 주연급 배우층을 형성하게 된다.
문예 영화 전성기를 누린 1960년대는 배우들에게도 전성기를 구가할 모처럼의 기회였다. 김승호의 <마부>(1961년), 최은희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김진규의 <오발탄>(1961년), 신영균의 <연산군>(1965년), 문정숙의 <만추>(1966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최은희의 <성춘향>(1961년)과 김지미의 <춘향전>(1961년)이 벌인 열띤 경쟁을 계기로 총천연색 대형화면 시대를 연 60년대는, 한일 수교와 함께 일기 시작한 일본색 청춘물에 편승하여 신성일, 엄앵란 단짝의 독주가 지속되었다. 한편 <초우>(1966년)의 문희, <유정>(1966년)의 남정임, <안개>(1967년)의 윤정희 등 이른바 여배우 삼두마차 시대로 접어들었다. 청순한 눈매(문희>와 친화력 있는 얼굴(남정임), 신선한 분위기(윤정희)로 특징되는 이들 호적수는, 1960년대 후반의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었다. 이렇듯, 은막의 주역인 이땅의 배우들은 60년대에 특별한 황금기를 누렸다.
김승호(1918-1968년)는 서민적인 풍모와 체취, 열정적인 연기로 1950년대 중후한 영화 중흥기에서 60년대 후반 영화 전성기까지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끈 대표적인 연기자이다.
김진규(1923-1999년)는 최무룡, 신영균과 함께 19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이끌면서 특히 중년층 여성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 화려한 정상의 자리를 굳히는 한편,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비롯하여 <오발탄>. 등 작품성이 있는 문예 영화에서 기량을 발휘하였다.
VII. 1970년대 한국 영화
1. 침체의 수렁
그러나 70년대부터는 영화 제작이 절반으로 줄었을 뿐 아니라 작품의 질마저 떨어져 흥행 면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문을 닫는 극장이 늘어나고, 한국 영화 관객수도 현저히 감소했다. 당국의 시책에 맞춰 외화수입권만 얻자는 빗나간 풍조가 70년대 우리 영화계를 침체의 수렁으로 빠뜨렸다.
심사 위원 수십 명만을 위한 1회용 영화를 만들어 쿼터나 따고 팽개치는 편법이 횡행했다. 영화 정책과 시장 논리가 상충됨으로써 영화 산업 자체가 기형이 돼버린 것이다. 정부는 영화의 계도성과 교육성을 강조한 국책 영화 위주로 정책을 폈으나, 관객들은 이런 틀에 얽매인 영화에 흥미를 잃고 말았다. 한국 영화 전반의 침체로 인해 시설과 기술, 인적 자원, 자본 등 영화 존립의 필수 요건들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 진흥은 헛돌았고, 국민 계도와 국가 홍보만 내세우다 보니 방향 감각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 한국 영화는 당국의 시책이 기획하고 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책이 영화예술을 발전시키는 선을 넘어 영화를 획일적인 틀 안에 얽어맨 것이다.
불황의 한파로 영화계가 빈사 상태에 빠지자, 1973년 당국은 영화법을 개정했다. 영화발전의 저해 요인이 자본의 영세성이라고 판단하고, 기준과 시설을 법으로 강화해서 촬영소, 촬영기, 조명기구를 갖추고 5,000 만 원의 공탁금을 건 업자에게만 한국 영화 제작권을 부여하고, 결손의 보상책으로 외화 수입권을 주었다. 이 개정 영화법에 의해 78년까지 14개사가 제작권을 갖고 외화 쿼터를 배정 받았다. 그 결과 ‘업자는 살고 한국 영화는 죽는’ 비극이 초래됐다.
검열 제도도 한국 영화 발전을 막은 장애 요인이었다. 영화 한 편을 제작하려면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 각본 심사에 통과해야 하고, 제작이 완료되면 검열이라는 또 하나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2원제가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목적한 만큼 흥행이 되지 않자 관객을 관제 동원하는 등 강제성을 띠어 물의를 빚었다. 결국 국책 영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졸속적인 정책의 산물이었다.
영화진흥공사의 설립과 영화 제작의 기업화를 목적으로 73년 개정한 영화법은 결국 14개 영화사에만 영화 제작권과 외화 수입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특혜로 성장한 14개 영화사들이 외화 수입에 과열 경쟁을 빚어 수입 단가를 올리는 등 부작용이 일자 당국이 외화 수입 창구를 일원화한 것이다. 그러나 근시적인 관료주의와 획일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1977년에는 연간 제작 편수의 상한선을 없애고 국책 영화와 우수 영화의 구분을 단일화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종전에 우수 영화 제작자에 대한 외화 수입 쿼터를 14개 등록업자에게 ‘나눠주기’ 식으로 안배했던 것을 지양하고, 우수 영화 제작 실적에 따라 편수에 제한 없이 외화 쿼터를 주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우수 영화의 기준이 여전히 모호하여 외화 쿼터 배정에 따른 잡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관 주도에서 부분적이나마 자유 경쟁 방식을 도입했다는 것은 진전된 변화였다.
불황의 1970년대에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극장 수의 현저한 감소였다. 71년 717개로 집계됐던 극장 수가 78년 말에 488개로 줄어, 7년 간 229개가 문을 닫았다. 특히 대중 오락 시설이 많지 않은 중소 도시에 문을 닫은 극장이 많았다. TV 수상기의 대량 보급은 극장의 감소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1970년 이후 기하급수적인 수상기의 보급 증가가 영화 산업 전반에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극장을 찾는 관객의 발걸음을 안방에다 잡아 둔 것이다.
극장의 육성은 영화 산업 발전에 필수이나 당국의 정책적인 배려나 지원이 따르지 않아 극장은 계속 감소해 갔다.이들은 요금의 현실화, 시설 개선을 위한 금융 혜택, 영화 기자재 수입에 대한 감세 혜택을 요망했다. 결국 극장 수의 감소는 영화 산업의 침체로 직결되고 말았다.
스크린쿼터라는 제도가 있음에도 극장주들은 낮은 입장료를 이유로 한국 영화의 상영을 꺼렸기 때문에 완성도 높은 영화조차도 극장을 잡지 못해 개봉을 못하는 악순환이 거듭됐다. 영화 정책의 졸속으로 인해 한국 영화는 푸대접을 받으며 수렁을 헤어나지 못했다.
목적극 범람이나 인기작가 원작에 편승하는 제작의 기현상 또한 외화 쿼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편에서는 스크린쿼터제를 강화할 것과 한국 영화 요금의 현실화, 개봉관 증설로 한국 영화의 개봉 적체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 제기됐다.
영화 발전을 저해한 영화 정책 정부가 한국 영화 보호 육성을 위해 마련한 법과 제도가 혹독한 비판을 받은 이유는 무엇보다 유신 체제의 관료적 경직성에 기인한다. 영화법 개정은 영화 산업의 기업화에 초점을 맞췄다고 하지만 통제의 성격이 강했다.
여기에 대중 사회의 진전과 그에 따른 대중 문화 현상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부작용도 적지 않게 파생됐다. 인구의 도시 이동, 통신 기술의 발달, TV 등 대중 매체의 확산에 따른 사회 변동이 가속화되는 추세에서 정부는 경제 부흥과 수출 드라이브에만 전력을 집중해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하였다. 대중 문화 또한 향락과 오락을 추구하는 대중의 욕구에 편승해 상업화로 치달을 수 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특히 영화는 획일적인 정책과 까다로운 검열로 인해 대중 사회의 문제 의식을 작품화하기가 힘들었다. 그 결과 고작 성(性)을 소재로 한 접대부 영화나 감각을 자극하는 십대영화, 국적 불명의 폭력이 난무하는 활극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권위적인 유신 체제는 영화 매체를 정치적으로 통제하고 이용했으며, 졸속적인 영화 정책으로 한국 영화의 골간을 허약 체질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그나마 한국 영화의 맥을 유지시킨 것은 오로지 영화인들의 깨어 있는 정신과 각고의 노력이었다.
2. 암울한 시대의 풍속도
1970년대 초 한국 영화는 싸구려 액션 영화와 질이 낮은 희극, 국적 불명의 위장 합작 영화가 난무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1971년 이성구 감독이 한국 최초의 70mm 영화 <춘향전>을 완성했으며 문학성을 살린 영화가 제작됐다. 유현목 감독의 <분례기>, 신상옥 감독의 <전쟁과 인간>도 주목을 끌었다.
<분례기>는 방영웅, <무녀도>는 김동리, <석화촌>은 이청준, <비련의 벙어리 삼룡>은 나도향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같은 문예 영화 제작은 1970년대 전후반으로 이어져 문학과 영상의 만남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형성했다. 74년 김수용 감독이 조정래의 소설 『황토』를 영화로 옮긴 것을 비롯, 75년에는 유현목 감독이 선우휘의 『불꽃』을, 이만희 감독이 황석영의 『삼포가는 길』을 영화화했다.
문예 영화는 비록 외화 쿼터를 노리고 제작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원작의 문학성을 영상에 옮겨 한국 고유의 향토적 색채로 우리의 감성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특히 시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유현목, 신상옥, 김기영, 김수용, 이만희, 하길종 등 작가정신이 투철한 장인들이 역량을 발휘한 것은 1970년대 한국 영화가 건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유현목, 이만희, 김수용 감독 등이 문예 영화 전문 작가로 부상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와 <충녀> 김기영 감독은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독창적인 실험 정신으로 사양길의 영화에 불을 당겼다. 1971년에 발표한 <화녀>는 관객 23만 4,000여 명을 모아 그 해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이듬해 내놓은 <충녀>도 16만 2,000여 명의 관객 동원으로 연속 흥행 1위를 기록했다. <화녀>는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충녀>는 백상예술대상을 받았다. <화녀>는 김기영이 각본, 감독, 제작을 도맡아 여자의 광기를 그린 이색적인 작품이다. 주제는 여자의 업과 망집(妄執), 서릿발 같은 광기다. 때로 괴기(怪奇)한 김기영의 본질이 경쾌한 속도감과 예각적인 카메라 시각 속에 녹아들어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높인 공포극이면서도 인간을 관조하는 묵직한 주제가 돋보였다. 작중 인물 모두가 끝내는 파멸로 치닫는 충격적인 소재를 전위적으로 풀어낸 작가 정신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두 편 모두 표현주의 작품으로 구분되는데, 김 감독은 주로 여성의 심리를 다루면서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악마적 본성과 성욕을, 상징과 환상을 섞어 표현하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았다. <화녀>와 <충녀>는 1970년대 초 한국 영화의 벼랑 끝에서 솟은 화제작이다.
십대 영화의 열풍 1970년대 중후반 ‘고교’라는 수식어가 붙은 십대 영화(일명 ‘하이틴 영화’)가 장기간 돌풍을 일으켰다. 청소년이라는 제한된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십대 영화가 인기를 모으며 한 시기를 풍미한 배경은 무엇보다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밝고 재미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청춘 영화의 비애 십대 영화들이 선풍을 일으킨 이상기류 속에서, 197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의식과 고뇌, 애정 풍속도를 보여 주는 청춘 영화들이 한편에서 명맥을 이어갔다. 60년대식 청춘 영화와는 차별되는 색깔과 내용으로, 달라진 세상 풍경을 화면에 담아낸 점이 특징이다. 젊은 감독들의 잇단 등장으로 영화가 젊어진 탓도 있지만, 억압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싹튼 청년 문화가 영상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길종 감독이 1975년에 발표한 <바보들의 행진>은 당시 대학가 젊은이들의 낭만을 경쾌한 속도와 싱그러운 질감으로 그려내 관객들의 호응을 얻은 청춘 영화이다. 청바지와 통기타와 생맥주로 상징되는 청년 문화를 이루며 억압적인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번민과 저항 의식을 ‘바보들’이란 우화로 그려내, 웃음 뒤에 진한 비애(페이소스:pathos)가 묻어나는 작품이다.
신성일은 연기자로서 감독의 길을 밟은 나운규, 윤봉춘, 최무룡, 최은히의 뒤를 이었으나, 제작자로 나서서는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활득 스타 박노식도 1971년 <인간사표를 내라>로 연출에 뛰어들어 72년 <작크를 채워라>, 73년 <집행유예>로 3년 연속 흥행 순위 10위 안에 진입하면서 한국판 암흑가 영화(느와르) 장르를 개척했다. 당시 한국 영화가 뒷골목 세계의 암투와 우정을 박진감 넘치게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장동휘, 허장강, 박노식 등의 독특한 성격파 활극 스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 <별들의 고향>과 <겨울여자>
봇물 이룬 호스티스 영하 영화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1970년대 중반이후 호스티스를 그린 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진 것도 당시의 사회상을 깊이 반영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경제가 성장하고 국민 소득이 점차 높아지면서, 자본주의 병리 현상의 하나인 향락 산업이 독버섯처럼 번져나갔다.
이런 세태에서 1974년 선풍을 일으킨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과 75년 개봉된 <영자의 전성시대>가 호스티스 영화의 기폭제가 됐다. 영자는 밑바닥 인생을 몸으로 부딪히며 사는 윤락녀였다. 때묻지 않은 시골 처녀 영자(염복순)가 도회의 창녀로 전락하여 때밀이 창수(송재호)와 엮어가는 사랑을 애틋하게 그린 이 영화는 물질 만능으로 치닫는 세태 속에서 하층민의 일그러진 상을 사실감 있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불황의 영화계에 떠오른 <별들의 고향> 1974년의 영화계 사건은 이장호 감독이 만든 <별들의 고향>이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 이 영화에는 영웅이나 우상이 없고 이 점에서 1960년대를 풍미한 ‘청춘 영화’와 대조된다. 특수한 인물의 특수한 이야기가 아니라 별들처럼 흩어져 있는 우리들 주변의 평범한 이야기들을 통해 또 하나의 우리들 모습을 정직하게 묘사한 연출 태도는 70년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양식으로서 한국 영화에 새바람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이 영화를 신선하게 해주는 것은 색채 감각과 음악이다. 이장희, 강근식의 음악은 종래의 설명 위주의 보조역을 벗어나 개성있는 사운드로 빠른 템포의 화면과 앙상블을 이룬다. 소설의 재미와 품격을 1시간 40분에 압축, 영상화한 20대의 이장호 연출 감각은 높이 살만하다. 화가 문오역의 신성일이 자신의 정형을 이룬 연기에서 탈피하고 있는 점도 이채. 화천영화사 작품.
이런 시대 상황에서 <별들의 고향>이 등장한 것이다. 기존의 청춘 영화나 멜로 영화와는 다른 신선한 감각이 뭔가 새로움을 갈구하던 젊은이들의 욕구와 맞아 떨어졌다. 물론 당시의 시대상이나 세계적인 조류를 반영한 측면도 크지만, 무엇보다 기존의 윤리관이나 영화 형식을 뛰어넘은 파격이 대중을 사로잡은 것이다. 첫째는, 도덕성의 반란이다. 기존 가치나 기성 세대의 윤리 규범은 작가나 감독에게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소설과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지만 스스로가 책임질 줄 아는 신세대들이다. 둘째는, 기존의 영화들과는 문법이나 형식이 달랐다. 젊은이들의 언어와 감각으로 그들 자신의 의식과 생활을 꾸밈없이 솔직 담백하게 그려냈다. 셋째는, 속도감과 색채 감각이다. 이야기 전개가 늘어지지 않고 매끄러우며, 음악의 박자도 빨라졌고 색채감이 풍부한 영상 또한 새로웠다.
그간의 영화들이 허구와 환상을 좇아 현실감이 결여됐다면, <별들의 고향>이야말로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으로 의식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된다.
성개방의 징조 <겨울여자> 1977년 김호선 감독의 <겨울여자>가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이듬해까지 이어진 관객동원 수는 총 58만 5,775명으로 <별들의 고향>이 세운 최고 흥행기록 46만 명을 깬 것이다.
조해일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겨울여자>는 이화라는 한 여대생이 여러 남성들을 편력하는 동안 사랑의 의미, 삶에 대한 진실을 발견해 간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는 기존의 문예 영화나 청춘 영화와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을 당시 우수 영화 심사위원들은 ‘성윤리’에만 집착하여 간과해 버렸다. “성의 문제에 집착하여 줄거리도 빈약한 데다, 세 토막으로 이야기를 끌어간 옴니버스(omnibus: 몇 개의 단편을 모아서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한 것) 형식이 원작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평론가들이 선정하는 ‘현대영화비평가그룹상’은 <겨울여자>에 그 작품상과 감독상을 안겨 주었다. <겨울여자>의 흥행 요인은 “변해가는 현대인의 애정관을 새롭게 표출했다.”는 것이다. <별들의 고향>의 경아가 경직된 성문화에 틈새를 열어 놓았다면, <겨울여자>의 이화는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싹튼 성개방이라는 한층 자유분방한 뜨락으로 달려나감으로써 관객들의 욕구와 기대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의 날카로운 문제 의식과 산뜻한 영상미가 돋보였고, 여러 남성을 편력하는 이화 역 장미희의 연기가 추하다기보다 다정다감하고 자연스러웠다는 점도 큰 몫을 했다. <겨울여자>는 당시 물질 문명 속에 소멸되어가는 인간성을 영상으로 표출해 관객과의 교감을 이뤄 냈다.
4. 불황 속에서 떠오른 별들
최인호 원작, 한국 영화의 활기 1979년 접어들어 한국 영화가 일시적으로 활기를 띠었는데, 그 이면에는 작가 최인호의 역할이 컸다. 최인호의 소설과 각본 4편이 거의 같은 시기에 영화화되어 ‘최인호 영화시대’라는 유행어를 만든 것이다.
자칫 대중 취향의 토속성에 빠질 수도 있던 1970년대 작가들의 원작을 영화화하여 한국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데는 역량 있는 감독들의 노력이 컸다. 김수용,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 이경태 등 새로운 감각을 지닌 감독들의 산뜻한 연출력이 도약의 발판을 놓아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1970년대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매년 100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됐다. 유신 정국과 검열 강화, TV 시대의 개막과 유흥업의 확산 등 영화계 바깥의 여건은 혹독했으나, 영화인들의 열정이 난국을 돌파해 나갔다. 한국 영화 제작이 외화 쿼터를 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으나, 제3세대 신인 감독들이 속속 등장했으며, 중견 감독들의 활약으로 외화로 쏠린 관객들의 발길을 한국 영화로 돌려 놓았다.
트로이카 스타의 퇴조 은막에 비치는 배우들의 얼굴도 바뀌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은막을 수놓은 여배우 ‘트로이카’ 문희, 남정임, 윤정희가 결혼을 계기로 잇달아 은퇴했다.
1970년대 초반에 활약한 여배우로는 남정임, 문희, 윤정희를 비롯해 윤연경, 오수미, 윤미라, 우연정, 윤여정, 나오미, 김영애, 오수비, 박원숙, 박지영, 방희, 이효춘, 정소녀, 문숙, 이영옥 등을 꼽을 수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유지인, 정윤희, 장미희가 잇달아 등장하여 새로운 여배우 신트로이카를 형성하면서 한국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70년대 남자 배우들 남자 배우 쪽도 1950, 6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를 빛낸 이예춘, 장동휘, 황해, 김희갑, 최성호, 김진규, 박암, 허장강, 최무룡, 신영균, 박노식, 윤일봉, 남궁원, 윤양하 등이 70년대 들어서도 우리 영화계의 기둥 역할을 했다. 이들과 함께 연극 무대와 TV드라마에서 활약한 김동원, 장민호, 이낙훈, 이순재, 백일섭, 오지명, 박근형, 최불암, 문오장, 장욱제, 신구, 송재호, 이정길, 한진희, 노주현 등이 스크린에서도 폭넓은 연기력을 발휘했다. 이들 중 김진규, 최무룡, 박노식 등은 감독으로도 활약했다. 신성일을 빼고서 1970년대 한국 영화를 말할 수 없다. 60년 <로맨스 빠빠>로 연기를 시작한 그는 71년 <봄여름가을그리고겨울>로 감독 생활을 겸업하며 연기자로 연출자로 왕성한 의욕을 펼쳤다. 1970년대를 빛낸 배우로 하명중을 빼놓을 수 없다. 67년 홍콩 쇼 브라더스 사장에게 픽업되어 홍콩에서 영화 배우로 입문한 그는 70년대에 배우로 열정을 쏟았고 80년대에는 감독으로 활동했다.
VIII. 1980년대 한국 영화
1. 격변기의 한국 영화
한국 영화의 전환기 정치, 사회적으로 198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유신 체제가 붕괴된 후 광주 민주화 운동의 격랑으로 시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영화 정책도 경ㅅ액될 수 밖에 없었으며, 80년 12월 1일부터 TV 프로그램이 컬러화된 것도 한국 영화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영화인들은 제작 자유화와 표현의 확대를 요구했다. 그 결과 1984년 말 영화법이 개정되고, 85년 7월 시행령이 공표되어 영화계의 오랜 숙원이던 영화 제작 자유화가 실현됐다. 이로써 제작, 수입, 수출의 독점 시대가 종말을 고했고, 영화 제작자에 대한 외화 쿼터의 보상적 안배도 없어졌다. 한국 영화 제작 환경이 일대 전환기를 맞은 것이다. 제작 체제의 변화로 제작사가 우후죽순처럼 불어나 80년대 말에는 영화법 개정 전보다 5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미국의 거센 영화 시장 개방 압력의 결과로 1986년 말 영화법이 다시 개정되어 외국인도 국내에서 영화업을 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됐다.
1980년대 영화계 변화는 86아세안게임, 88서울올림픽이 큰 변수로 작용했다. 여기에 제6공화국 출범과 함께 민주화, 자유화, 국제화라는 도도한 시대적 흐름도 한국 영화의 환경 전반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계의 세대 교체가 이뤄져 젊은 감독들을 중심으로 현실 비판적인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87년 9월 각본 사전심의 폐지를 계기로 영화심의가 완화됨으로써 소재 선택과 표현의 자유가 점차 폭을 넓혀갔다.
열악한 여건과 변화의 파고를 헤치고 열정과 집념으로 이뤄낸 결실들이 해외에서 호평받음으로써, 한국 영화에 실망했던 관객들도 우리 영화를 인식하고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외국 영화 직배 저지 운동을 통해 한국 영화에 대한 이정이 싹튼 것도 힘이 되었다. 1980년대 한국 영화는 통제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생력을 갖게 되었다.
심야 극장과 비디오 시대의 개막 1980년대 초 심야 극장이 등장해 우리 사회의 새 풍속도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82년 초에 통행 금지가 해제되면서 자정에 영화를 상영하는 특별 프로그램이 생겨난 것이다. 3월 하순 <애마부인>으로 첫선을 보인 심야 극장은. 통금 해제 후 새롭게 등장한 심야 극장은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모았으며, 이러한 새 문화 풍속도는 노점상 등장으로 이어져 밤의 풍경까지도 바꿔 놓았다.
1989년 비디오가 새로운 대중 매체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비디오 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VTR 보급 대수가 260만 대를 돌파했고 시장 규모도 1,000억 원대에 육박해 영화와 음반 시장을 뛰어넘는 본격 비디오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한 비디오 대여 가게도 전국적으로 약 2만 개 업소로 불어나 극장에 가지 않고도 안방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초반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비디오 시대의 개박은 한국 영화 제작과 유통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비디오 판권 수입은 제작비의 일부분을 충당해 제작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비디오 대여 가게의 증가는 잠재적인 영화 관객을 확보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2. 외압과 검열 파문
80년대는 집단 이기주의와 당국의 강화된 검열을 뚫고, 어떤 소재를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고민과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인들은 제작의 걸림돌로 작용해 온 각본 사전심의 폐지를 끈질기게 주장하며 ‘영화 제작 자유화 실천’을 요구했다. 결국 정부는 6․29 선언에 따른 문화예술 민주화 조치의 하나로 1987년 9월 1일을 기해 각본 사전심의 제도를 폐지했다.
3. 영화 운동의 불씨
1980년대를 일군 원동력, 신인 감독들 신인 감독들의 등장으로 침체에 빠진 한국 영화계는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감각의 신예 감독들이 대거 진출함으로써 우리 영화는 돌파구를 열게 된다. 새로운 주제와 작법으로 방향감을 되찾은 것이다.
85년 선우완과 공동으로 <서울 황제>를 언출했던 장선우는 <성공시대>를 연출해 감독으로 정식 입문하였는데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90년대부터 시작된다. 1988년의 주목할 신인은 박광수, 이명세 감독이다. 박광수는 민주화, 개방화 바람을 타고 사회성 짙은 주제의 <칠수와 만수>를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개그맨>을 연출한 이명세 또한 주목할 만한 신예였다. 첫 작품부터 자신만의 개성을 강조한 그는 90년대식 몽환적인 영상과 독특한 형식을 통해 ‘스타일리스트’로 각광을 받았다.
미술대학 교수인 배용균은 수년에 걸쳐 각본, 촬영, 조명, 감독 등 일인 다역으로 공들여 완성한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42회 로카르노영화제에 출품하여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비평가상 등 6개 부문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인간의 생사를 자연속에 심도 있게 녹여낸 그의 실험 정신과 집념의 장인 정신은 국제영화제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밖에도 1979년 입문한 박철수 감독은 왕성한 활동력으로 <에미>(1985년), <안개기둥>(1986년), <접시꽃 당신>(1988년) 등 화제작을 잇달아 발표했으며.
젊은 영화 운동과 단편 영화 1982년 서울대 출신들이 서울영화집단을 결성하여 단편 영화의 영역 확대와 이론 정립을 추진했다.
1985년 영화마당 우리에서 연 '8mm 영화 워크숍‘은 단편 영화에 대한 저변 확대와 대중화 작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해 서울영화집단이 발간한 『영화운동론』은 소집단 영화의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혁 운동에 불을 붙였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일부 소장파 감독과 대학 운동권 출신 세대 중심으로 ‘민족 영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란 구호를 내건 민족 영화 운동이 전개됐고, 비디오 매체를 이용한 다큐멘터리 제작 활동이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영화제작소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1989년)와 <파업전야>(1990년)을 꼽을 수 있다. 1980년대의 단편 영화 제작과 젊은 영화 운동은 한국 영화의 영역을 다변화하고 기능을 확대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때때로 사회 변혁 운동에 경도되어 물의를 빚기도 했으나, 젊은 영화 운동과 단편 영화 실험은 침체된 충무로 영화에 신선한 자극을 불어넣어 한국 영화의 주제를 넓히고 의식을 심화시키는 긍정적 역할을 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충무로의 기존 영화에 대항한 지하(언더그라운드) 영화 운동은 90년대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으로 이어져 한국 영화의 자주성 회복에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4.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수확
부각된 임권택․이장호․배창호 감독 <짝코>(1980년), <만다라>(1981년), <안개마을>(1982년), <티켓>․<씨받이>(1986년), <아다다>(1987년),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년) 등 역작들이 1980년대에 쏟아져 나오면서 임권택 감독의 연출력은 무르익었다. 특히 정일성 촬영 감독과 호흡을 맞추면서 통속적인 줄거리 나열이나 감각주의를 배격하고 인본주의를 추구하는 진지한 연출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김성동 원작의 <만다라>는 인간적인 고뇌와 해탈의 경지를 감동적으로 그려낸 회심의 역작이다. 남북 이산 가족의 아픔을 그린 <길소뜸>은 해외영하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티켓>은 다방 여인들의 매춘을 비판적 시각으로 다룬 작품이었다.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장호 감독은 1980년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재기해 일련의 사회성 짙은 영화들을 발표했따. 81년 <어둠의 자식들>, 83년 <바보선언>, 87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등이 사회성 강한 사실주의 영화에 속한다. <바보선언>은 ‘밑바닥 인생들’의 도회지 방랑을 통해 70-80년대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현대 사회의 병리를 희화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역시 소외당한 젊은이들의 고민과 절망, 그러나 꿈을 버리지 않는 80년대 세태를 담아냈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분단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해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전환기에 뜨고 진 별들 전환기에도 별들은 여전히 뜨고 또 사라져 갔다. 1980년대에는 제작 경향에 따라 배우들의 활동 영역도 양분됐다. 성적 본능을 자극하는 성애 영화 배우들이 한 축을 이뤘다면, 현실 비판 의식이 강한 사회성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이 또 다른 한 축을 이뤘다.
5. 벼랑 끝의 희망, 한국 영화의 돌파구
IX. 1990년대 한국 영화
1. 변혁의 시기
기획, 홍보 체제의 변화 충무로 기존 영화사들만이 해오던 영화 제작인 1990년대 접어들어 신생 영화사와 개인 제작사로 확산되면서, 치밀한 사전 기획과 새로운 홍보 전략이 필수가 된 ‘기획 영화 시대’가 열렸다.
케이블 TV 시대 개막 1995년 3월, 케이블 TV가 본 방송에 들어가면서 우리 나라도 다매체 시대를 열었다. 초기에 21개의 채널로 출범한 프로그램 공급사 중에는 영화전용 채널 2개, 만화영화전문 채널 1개가 포함되었고, 기타 채널에서도 영화 편성의 폭이 넓어져 영상 매체 전반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케이블 TV의 개막으로 영화계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은 기우로 그쳤다. 오히려 케이블 TV의 등장이 영화의 관객층을 넓히고 매니아를 양산함으로써, 한국 영화 제작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한 편의 영화를 공중파 TV뿐 아니라 케이블 TV, 위성 TV 등 여러 매체에 공급함으로써 영화 시장이 넓어졌고, 다양성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복합상영관 시대가 열리면서 감소 추세를 보이던 극장 수가 1998년부터 증가세로 전환했다. 99년에 588개이던 전국의 극장 스크린 수는 2000년 8월 현재 707개로 119개나 늘었다. 영화 배급 양식에도 변화를 일으켜 영화 시장의 주도권은 극장주로부터 배급사로 넘어갔다. 극장은 살아남기 위해서 복합상영관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해졌고, 이와 더불어 낙후된 극장 시설의 개선도 뒤따랐다. 복합상영관은 현대 사외의 다양한 소비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거대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간다. 하지만 흥행 위주의 작품 선정에 치우쳐 예술 영화나 독립 영화를 상영하는 전용관 확보가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1997년에 불어 닥친 외환위기 한파는 영화계라고 비켜 가지 않았다. 달러 환율이 두 배로 뛰어 외화 수입이 위축됐고, 이미 계약한 작품들도 환차손을 극복하기 어려워 전면 재조정하는 등 영화계가 일대 파동에 휩싸였다. 특히 대기업의 영화 사업이 큰 타격을 받아 막대한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비디오 시장마저 냉각돼 불황의 파고를 견디기 어려웠다. 더욱이 IMF 한파로 인한 기업들의 대대적인 구조 조정은 대기업의 영화 사업 철수로 이어졌다. 삼성영상사업단은 해체됐으며, 대우는 비디오 사업을 접었고 극장도 처분했다. SK 등의 영화 사업도 중단됐다. 제일제당은 종합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나섰고 동양그룹은 극장과 케이블 TV에 주력했다. 대기업이 물러난 자리는 창업투자사 등의 금융자본이 메웠다. 대기업들은 비싼 대가를 치루고 영화업에서 퇴각하였으나, 영화 전반의 제작 환경을 개선하고 극장과 배급 체제를 현대화하는 등 영화 발전에 기여한 점도 있었다. 자본이 부족한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신인 감독들에게 등용문을 넓혀주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반면 이윤 추구를 목표로 삼는 대기업의 속성과 영상 산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한 부작용도 있었다. 특히 상업성에 치중한 짜깁기식 영화를 양산해 영화의 예술성과 작가주의 영화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영화 배급의 체계 구축 1990년대 말 한국 영화 호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상영관 확충과 한국 영화 배급 체계의 구축이었다. 90년대 중반에 대기업과 금융 자본이 영하업에 진출하면서 배급업에도 변화가 일었다. 대기업들이 극장을 소유하여 자사 영화를 배급했고, 영화의 선택권이 극장 쪽으로 넘어가면서 배급 전쟁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외국 영화 직배사들의 아성을 뚫고, 강우석 감독이 이끄는 시네마서비스에 의해 조직적인 배급이 이뤄졌다. 그러나 독주 체제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는데 새로이 제일제당의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에 가세하고 튜브엔터테인먼트가 뛰어들어 시장 다변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2000년 말의 한국 영화 강세는 ‘배급의 승리’라는 평가도 있을 만큼 한국 영화 중흥에 배급망 확충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 1990년대의 작품
1990년대 한국 영화의 특징을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형식’으로 풀어냈다고 정의할 때, 소재의 다양성과 형식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재를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맨틱 코미디’의 성쇠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에는 ‘신세대’, ‘X세대’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70년대 경제 발전기에 태어난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물질적으로 윤택한 환경에서 자라 그들만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나타냈다. 더욱이 문민 정부의 등장과 개방화 풍조에 영향을 받은 신세대들은 개인주의적이고 감각적인 특성을 보였다. 신세대의 이 같은 행동 특성을 반영한 영화가 로맨틱 코미디였다.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는 소재와 깔끔한 형식은 젊은 세대의 감각을 자극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론, 영화를 상품처럼 조립해 냄으로써 작가주의 영화가 퇴조하고 아류 영화가 번성하는 문제점도 드러났다. 관객들이 식상해하자 로맨틱 코미디는 1997년을 전후로 쇠퇴했다.
1990년대 한국 영화는 상업성에 치우친 제작 관행을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치 다양한 소재 발굴과 장르 확대, 치밀한 기획과 홍보, 그리고 배급력의 집중이 상승작용을 함으로써 한국 영화의 점유율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시장 규모도 넓히는 성과를 일궈냈다.
3. 초대형 영화의 돌풍
<장군의 아들>은 제작자 이태원, 감독 임권택, 촬영 감독 정일성 단짝이 엮어낸 한국판 액션 영화이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인데, 짜임새 있는 구성, 탄탄한 연출력, 신인들의 신선미가 돋보여 관객의 구미를 돋구었다. 결국 한국 영화도 잘 만들기만 하면 관객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해 준 것이다.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한국에 ‘초대형 영화’ 시대를 열었다. 전국적으로 580만 명이 이 영화를 보았다. 1999년 한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40%에 육박하는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 영화 시장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으며, 30년 가까운 침체의 터널에서 벗어나 60년대와 같은 한국 영화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의 위기 상황이 영화인들을 각성시켰고 우리 영화를 잘 만드는 것만이 최상의 대안임을 자각했다. 관객 역시 할리우드 영하에 물려 우리 정서에 맞는 우리 영화를 찾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점에서 <쉬리>가 회오리를 일으킨 것이다. 한국 영화를 감싸고 사랑하는 관객들의 기대에 ‘잘 만든 한국 영화’로 부응한 것이 <쉬리> 돌풍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4. 한국 영화를 빛낸 주역들
소재와 장르가 다양해진 1990년대 영화의 특성에 따라 배우들 또한 개성이 중시되었으며, 배역에 따라 흥행의 성패가 가름될 만큼 배우들의 비중이 높아진 점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아울러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조역들이 주역으로 급부상하는 현상도 두드러졌으며.
5. 위기와 도전
위기는 곧 기회라는 자각이 한국 영화를 기사회생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시장 개방에 따른 직배 영화가 전국의 극장을 장악하고 스크린쿼터마저 위태로운 상황에서 위기 의식을 피부로 느낀 영화인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 속에서 자구책을 강구했고 그 결과는 한줄기 서광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이 외화에 쏠린 관객들의 발길을 돌려놓았고,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이 이데올로기의 벽을 뛰어넘으면서 소재의 다양성 시대를 연 것이다. 침체와 불황 속에서도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 장길수 감독의 <추락하는 것도 날개가 있다> 등의 참신한 작품들이 잇달아 나와 관객들에게 한국 영화에 대한 이미지를 호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1997년 영화계에는 한국판 필름 느와르가 지배 장르로 등장했으며, 일분에서는 ‘여관방 영화’들의 유행 현상도 나타났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 물고기>는 사회 부조리와 개인을 대조시킨 필름 느와르로 주목을 모았고. 이 같은 액션 영화들은 집단과 개인, 삶의 불균형과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공감을 얻었지만, 조직 폭력을 미화하거나 지나치게 잔혹한 묘사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화 관련 수치도 한국 영화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입증한다. 상영관 수는 97년의 497개를 기준으로 3년 만에 45%가 증가한 720개로 늘었다. 2000년 전국 관객수가 6,462만 명에 이른 것은 80년 이후 최고의 수치이며, 전국민 1인당 평균 관람 횟수 1.37회도 81년 이후 최고 수치다.
X. 21세기 한국 영화
새로운 천년을 맞은 한국영화는 많은 발전과 변화를 시도중이다. IMF이후 토착자본과 대기업자본은 사라지고 금융시장의 영화진출에 힘입어, 영화는 한국에서 새로운 산업으로 각광받게 된다. 외국에 비해 자국영화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국민적 정서와 함게 한국영화도 새로운 소재와 시각, 제작비에 비해 완성도 높은 영상의 발전, 새로운 신인들의 무서운 활약에 힘입어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또한 80년가까이 한국영화의 뿌리깊게 존재하는 모순과 갈등도 표면으로 들어나며 이제 진정한 발전의 국면에 이른다.
정책, 제안서, 비둘기 둥지, 38회 대종상의 피켓시위, 공론화, 조직화로 발전되는 영화 노동자들의 몸부링은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요인은 검열과 정치적인 억압에서의 탈피라는 사회적인 분위기.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바로 스크린쿼터제도다.
니오그레 감독은 "한국 영화는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영화 중의 하나지만 그 성과는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며 "독재의 암흑기를 지났고 경제적으로 발전을 했으며 아울러 검열의 공포에서 벗어난 2000년 전후에 다양한 한국 영화들이 쏟아질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1999년 '쉬리'가 '타이타닉'을 물리쳤던 게 충격적이었다"며 "줄곧 관심을 가져왔던 임권택 감독에 김기덕이나 박찬욱, 이창동, 그리고 봉준호나 임상수 등 젊은 감독들이 합세한 한국 영화계는 어느때보다도 다양한 영화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가 얼마나 가게 될지는 아직 두고봐야 한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자극적인 영화가 관객의 지지를 받는 세계적인 추세 역시 비할리우드권인 한국 영화계에는 긍정적이지 못하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미국을 제외한 나라의 영화들은 점점 상황이 좋지 않게 되는 추세입니다. 여기에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도가 없어지면 결과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죠. 살아남을 사람들은 살아남겠지만 작은 규모의 영화인들은 결국 영화 만들기가 점점 힘들어지게 되는 것이죠." 라는 말은 남겼다. 스크린쿼터가 축소된 지금 나타나고 있는 우리나라 영화의 한 단면을 보면 할리우드적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