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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파우시스(καταπαυσις) 사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ός)
안식(쉼)의 헬라어 καταπαυσις는 "어떤 상태에 지속적으로 머무름"을 의미하는 접두어 κατα와 "중단하다, 정지하다"를 뜻하는 어간 παυω(pauo)가 합성된 여성 명사형 단어다. 이 '파우오'에서 영어의 '정지, 멈춤'을 뜻하는 단어 pause가 유래되었다.
하나님의 안식( 카타파우시스 κατάπαυσις)에의 참예
신약성서에서는 안식의 날은 구약의 샤바트(שָׁבַת)를 음역하여 고대 헬라어인 삽바씬 (σάββασιν)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시해야 할 것은 '안식의 날'은, 고유명사로 음역하여 삽바씬 이라고 한 반면에 "안식"은 샤바트를 음역하지 않고 헬라어 고유어인 아나파우오(αναπαυω)나 카타파우시스(κατάπαυσις)로 구분하여 기록한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예를 들면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쉬게'를 아나파우오(αναπαυω)로 기록하여 우리의 쉼을 나타낸다. 안식의 원형인 하나님의 안식인 카타파우시스(κατάπαυσις)는 오늘 중심 주제가 될 히 4:1~11에서만 무려 11회 기록한다.
앞서 신약성서에서는 안식일을 구약의 샤바트(שָׁבַת)의 헬라어로 해당되는 삽바씬(σάββασιν)이라 음역했다고 했다. κατάπαυσις의 다른 형태의 아나파우오(αναπαυω)는 인간인 우리들의 안식을 한다고 말 할 때 주로 쓰인다
여기서 번역문제를 잠깐 짚고 넘어가자.
하나님의 안식을 카타파우시스(κατάπαυσις)의 대격인 카타파우씬(κατάπαυσιν)으로 기록된 헬라어를, 공동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에서 "안식처"로 번역하여 안식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공간"의 이동으로, 쉬는 장소(공간)라는 개념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도록 했다. 이는 오류이다.
구원받은 백성은 이미 가나안 땅 하나님 나라에서 들어와 산다. 이제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상태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영어로 마치 go to bed (잠자는 장소로 가다)가 아니라 go to sleep(잠자러 가다)만 하면 되듯이, 하나님의 안식 장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안식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해석이 잘못되면 본래의 뜻을 왜곡한다.
신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예수님의 안식 혁명 이후 안식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이 원하시던 새로운 해석 방법으로 접근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실패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안식할 때(σαββατισμός)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히4:9)고 이전의 안식이라고 표현했던 헬라어 카타파우시스(καταπαυσις)와는 특별하게 다른 단어를 씀으로서는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주목할 점은 이 사바티스모스(σαββατισμός)는 신약성경에서 여기 히브리서 4장 9절에 "안식할 때" 로 번역된 단어에만, 단 한 번만 언급 되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σαββατισμός라는 단어가 어떻게 유래 했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안식"을 나타내는 σαββατις와 "우주"를 표시하는 κοσmός의 합성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오래 전 부터 해 왔다. 이 한 구절밖에 없는 이 단어를 저자가 의도적으로 합성단어를 써서 강조한 것 같다. 즉 하늘의 안식 즉 우주(하늘)적인 쉼이 아니겠는가 해서다. 연구 해볼 과제다
어쨌든 히브리저자는 καταπαυσις와 σαββατισμός를 구별하여 쓰고자 했다. 전자는 일반적인 쉼(안식)이지만 후자는 완전하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남아 있는 쉼(안식)을 강조하게 위함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여 참여하도록 하는 안식이 아직 남아 있고 열려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히4:10)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새 안식에 참예(μέτοχος)할까?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한 자가 되(히3:14)“나니.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는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궁극의 구원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안식의 주체이며 순종의 아들인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에 참예할 수 있게 했다.
”시작할 때(ἀρχή)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히 3:14a)
어디서 많이 본 단어다 ”시작할 때”는 헬라어 아르케(ἀρχή)로 창조 당시의 ”태초“(요1:1)며 또한 신약 곳곳에 사용되는 용법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난 때“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다.
'확실한 것'은 헬라어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다. 별로 사용되지 않던 단어라 근자에 까지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다가 고고학적 발굴 문서에서 정확한 용례가 밝혀졌다. 이집트의 모래 아래에서 발굴된 문서들로, 소유권 권리증서, 사업 거래 계약서, 계약서들(covenants) 등 제1세기에 사용된 법적 문서들 ”표제“에 사용된 단어가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였다. 그 후에 확실한 의미를 알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24b)
곧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또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강조할 때 쓰였다.
언약은, 그리스도와 나는 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형제이며 인류는 신의 성품을 공유하는 하나님과 닮은 존재다.
하나님과 인류의 창조 시 약속된 계약문서다
히브리서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이것을 다시 쓰면 이렇다
“계약서”
”아담과 나 하나님은 아담이 폐기하지 않는 한, 처음 창조 후부터 영원까지 마련한 안식에 참여시켜줄 것을 엄숙히 계약한다“ (히 3:14) 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히브리서에서 안식은 가나안 안식( 히 3:11,18) 창조의 안식(히4:3) 제칠일 안식(히4:4,9) 천상적 안식(히 3:4) 등으로 표현한다. 저자는 히3:7-11에서 시편 95;7-11절을 인용하면서 가나안이 안식이 없었던 이유가 믿음의 부족 즉 불순종의 결과라고 언급하고 있다. 4장에서 여러 안식 중 그리스도인이 들어가야 할 안식을 설명한다. 그럼 과거의 이스라엘의 가나안 안식과 다른가 같은가?
첫째는 안식을 “땅”을 이야기하면서 장소 혹은 물질적 개념( rest as a place)의 안식을 소개한다. 둘째로 상태의 안식( rest as a condition)을 소개한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현실적인 세상에서부터 시작됨을 말한다.
가나안의 안식을 보자 히브리서 3장 19절에서는 이스라엘이 믿지 못한 연고로 안식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앞 절인 18절에는 그 믿음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바 순종하지 아니함 이라는 “행동” 즉 활동(Acts)을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이는 믿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위로 표출되지 아니한 것은 헛것이며 믿음이 곧 순종이라고 언급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다.(히4:3) 그들은 음성을 듣고 믿음에 반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히4:2)
저자는 더 나아가 광야의 안식은 원래 완전한 안식이 아니라고 말한다(히4:8) 저자는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가나안 안식이 아닌 다른 안식이 있음을 증언한다.
시편 95편을 인용한 히브리서 4:7-9에 보면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καταπαυσις)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σαββατισμός)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안식의 궁극적인 원형은 일곱 번째 날의 쉼(안식)(창2:2 히4:4)의 모형인 가나안 안식이 그 모형인데, 여호수아의 인도에 따라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2세대들도, 비록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긴 했지만, 하나님의 노를 발하게 하여 하나님의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했다(히3:11)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을 모형에 담아 부분적으로 경험하게 했지만 그들이 믿음이 없음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서 궁극적인 안식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주어진 안식은 καταπαυσις의 안식으로서 원래 완전한 안식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식은 σαββατισμός의 안식이다. 원형적인 안식인 것이다,
이 σαββατισμός의 안식은 구약 창세기 2장 2절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가 원형이다.
창세기 2장 2절의 안식(安息)은 히브리어는 샤바트(שָׁבַת)로서, 안식(שָׁבַת) 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원형인 하나님의 안식이다.
창조주일을 잘 생각해 보자. 아담은 6일째 창조되었다, 7일 즉 그 하루가 바로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식 즉 샤바트( שָׁבַת)를 하셨다. 즉 이 안식은 사람의 안식이 아니다. 창조의 일(work)을 하신 후 그 분의 안식을 하셨다. 사람은 창조과정에서 하나도 한 일(work)이 없다. 따라서 피곤하여 쉬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일곱째 날은 사람 측에서는 둘째지만, 오직 하나님에게만 일곱째에 해당된다.
하나님이 그분의 일(work) 즉 창조사업을 마치신 후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기 위한 날 공교롭고 영광스럽게도 자격이 없는 아담을 하나님의 안식에 초대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쉬심이란 무엇인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시121:4) 는 분이시다.
날을 창세기 본문에서 “일곱째 날(day 욤 ַוֹם) 즉 시간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쉬심의 본질은 공간에서의 쉬심이 아니라 시간에서의 쉼이다. 처음에 죄없이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이었기 때문에 시간은 아담에게 아낄 대상도 낭비할 대상도 아닌 함께 하는 관계였다. 아울러 시간이 흘러 죽거나 늙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냥 같은 날이다. 이 의미 없을 수도 있는 시간에 변화를 주신이가 하나님이시다. 영원한 시간에, 매 일곱째 날 이라는 포인트 즉 하나님의 쉬심으로 특별난 시간이 된 일곱째를 겨우 하루 밖에 안 된 아담을 초청하여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 인간의 완전한 쉼을 완성하게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쉼은 그분이 쉼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이 특별하게 만드신 쉼이다. 잘 생각해 보자. 죄 없는 인간에게도 영원히 살기 위서는 반드시 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죄지은 우리에게는 더욱이 공간 안에서조차 피곤한 삶을 쉬는 쉼이 필요하다.
유명한 유대인 우화가 있어 소개한다.
”태초에 시간은 영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할 되지 않은 시간 영원한 시간은 공간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시간은 일곱 날로 분할되어 공간의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이렛날을 제외하고 하루가 쌓일 때마다 또 다른 사물의 영역이 생겨났다. 안식일 즉 이렛날은 외톨이였다.“
랍비 시므온 벤 요하이(Simeon Ben Johay)는 이를 부연 설명한다. ”창조 작업이 완료되자 일곱째 날이 탄원했다. 우주의 주재(主宰)시여 당신께서 지으신 만물이 저마다 짝이 있습니다. 한주의 모든 평일 중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와 넷째 다음에 다섯째와 여섯째가 짝을 이루고 있지만 저만 홀로 외톨이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곱째 너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짝을 이루어라“
여섯째 날까지는 공간이 필요하지만 일곱째 날은 인간이 필요한 날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일곱째 날의 쉬심(rest)은 인간과 짝을 이루어 인간의 쉼을 돕기 위해 만드신 특별히 구별하여 떼어 놓으신 관계의 날이다
또한 샤바트(שָׁבַת)는 “내려놓다”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만드는 것을 내려놓았듯이 아담도 공간에서 내려놓아 나의 시간으로 오라는 초청의 단어다.
내려놓아 쉬는 방법이 또한 히브리서에서는 제시되었다
히 4:6-7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순종치 못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함을 앞에서 언급했다. 그들이 믿음이 없고 순종하지 못한 이유는 성경에서 뜻밖의 언어로 풀어낸다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히4:7) 그리고 다음 단어 “오늘날”(히4:7)을 유의해보자
아담은 창조의 여러날 중 여섯째 날 창조되었고, 하루 후에 안식 할 날을 맞았다. 창조를 쪼개어 보자. 첫째 날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어느 날이지만 빛의 관점에서는 오늘(날)이다. 둘째 날은 하나님에게는 어느 날이지만 둘째 날 창조된 물 에게는 오늘(날)이다. 셋째 날도 하나님에게는 어느 날이지만 바다와 땅 식물에겐 창조된 오늘(날)이다. 마찬가지로 여섯째 날도 하나님께는 어느 날이지만 아담에게는 오늘(날)이다.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히 4:7)이 되었다
하나님은 영원의 시간을 쪼개어 하루 하루를 분리하셔서 물질을 만드셨고 만들어진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들인 하나님의 여섯 번 째 하루가 사람에게 선물한 하나님의 유일한 시간일 뿐이다.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히4:7)이라고 언급한 저자의 탁월한 식견에 찬사를 보낸다.
오늘날이라는 성경의 개념은 번역상 우리말로 오늘날 이라고 해서 이해하기가 난해 하지만 사실은 오늘날은 지금이나 하루의 개념으로 쓰인다. 장소적 관점에서는 여기요 시간적 관점에서는 지금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이 없었던 이유는 오늘 날 이라고 표현된 주어진 지금을 등한히 하고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여러날 즉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을 들여서 자기 방식대로 해결함으로 완전한 안식에 이르지 못했다.
히 4: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라”
다른 날 즉 그들이 불순종으로 인해 참 안식을 얻지 못했던 가나안의 입성한 그날(구원의 관점에서는 오늘 날) 의 실패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하나님은 지금(오늘 날)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기 원하신다. 오늘 날 내려놓아 쉴 때(שָׁבַת) (σαββατισμός)이다. “다른 날”이란 없다. “안식할 때(σαββατισμός)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히4:9)고 언급한 남아 있는 때는 “오늘 날” 즉 지금이다.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 (히 4:7) 의 “어느 날”이 “오늘 날”이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