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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복음5장1~18절
제목 : 38년된 병자의 치료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두 가지 목적입니다(요20:31).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는 자들이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시기 위해
요한은 7가지 기적과 표적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안의 혼인 잔치집에서 물로 포주를 만들었고,
두 번째 표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의 죽을 병을 고치심이고,
오늘은 세 번째 표적으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심입니다.
이 표적은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적인 생각 속에서 이 사건을 비난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유대 지도자들과 대립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 받으시기를 소원합니다.
1. 그 때와 환경(1~4절)
1) 시기는 명절이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입니다(1절).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그 후에’는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친 후에
"유대인의 명절" 오순절을 말합니다(Calvin).
오순절은, 유월절 두 째날 부터 7주를 계수하여 제 50일을 말합니다(신 16:9-12).
*유월절 :1월(닉산월=태양력 4월) 14일, 15~20 무교절.
예수님께서 이런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목적은,
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2) 예루살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2절)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예수살렘의 양문(羊門)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1888년에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그 위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물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문의 명칭을 삼았습니다
[어문 (魚門), 마문(馬門) 등].
양문(羊門)은 예루살렘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으며,
이 문을 통하여 기드론 골짜기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양문(羊門)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된 유래로
①그 성문 안에 양(羊)시장이 있었다(느3:1,32, 12:39)는 설과
②이 문을 통해서 제물로 쓰일 양(羊)이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행각"은 현관식으로 지은 시설을 가리킵니다.
3)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이는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었습니다(3,4절).
“[3]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물이 동한 것은”,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물질을 자유로이 사용하신다는 증표다. 그 뿐 아니라, 그 것은, 그 때에 병자들의 치료된 원인이 오로지 직접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려주는 증표이기도하다”라고 하였습니다.
2.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심(5~9절)
1)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5절)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삼십 팔 년"이란 연수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짐이 아닙니다.
여기 38년이란 연수는, 그 병자가 실제로 앓고 있었던 기간일 것입니다.
2)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습니다.
그는 그 병자가 절망 상태에 빠진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絶望)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십니다.
곧, (1) 그의 마음속에 소망(所望)을 일으키시며,
(2) 고쳐 주시기를 약속하시는 의미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물으심은 그 병자에게 믿음을 일으킬 만한 적당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소망(所望)과 약속(約束)에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긍휼에 의하여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그 38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눅 4:25-27).
*눅4:25~27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27]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이를 “하나님의 주권”이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려 병자들 중에 ‘38년된 병자를 고침’은 “예수님의 선택적 치료”라고 합니다.
구원도 마찬 가지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구원을 받게 된것은 주님의 선택적 구원입니다.
이와 같은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感謝)할 처지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유달리 저런 놀라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3)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물음에 병자의 대답입니다(7절)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그때 예루살렘의 인심이 무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나 언제나 인심은 이렇게 무정합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외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모르게 죽을 지경의 고생을 당하다가 남 모르게 죽습니다.
4)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8,9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께서 이 명령을 내리심이, 동시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은 동시에 능력이 되는 법입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 "곧 나아서"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의 비상 능력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병 고치시는 능력의 역사(役事)는 그렇게 완전하여 그 병자를 즉각적으로, 또는 완전히 고쳐 주셨습니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말하기를, "그것이 그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하며, 또한 그의 전도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병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3.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고 유대인들이 트집 잡음과 답변(10~18절)
1)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합니다(10절).
“[10]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습니다(느 13:19; 렘 17:21-22).
*느13:19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러나 그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듯이 너저분하고 자질구레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오용하였습니다.
*신약 시대 이후에 완전히 체계화된 미쉬나 법전에 따르면 유대 랍비들이 안식일에 금지한 항목은 무려 39가지나 됩니다.
그 분량도 24장으로 마가복음 정도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39가지 일들을 크게 6가지 주요 항목으로 만들어 세분했습니다.
안식일에 나무에 올라가는것, 짐승을 타는 것, 수영하는 것, 손뼉 치는 것,
엉덩이를 치는 것, 춤을 추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당시에는 이정도의 세분화는 안되었어도 아주 엄격하고 억압적이어서 안식일의 정신을 희생시켰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유대 종교 당국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기고 범하는 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병 나은 사람이 대답입니다(11절)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자기는 발뺌을 하려고 말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권위를 승복하고 그에게 의지하는 생각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난치병에서 건져 주신 이의 말을, 그로서는 복종할 만하였습니다.
*9: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행3:9~10 “[9]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10]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3)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묻습니다(12절)
“[12]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그 때 유대인들이 강퍅하였던 것이 여기 드러납니다.
그들은, 그 불쌍한 병자의 고침 받은 반가운 사실을 묵살시키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한 사실만을 추궁합니다.
(1)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린 긍휼보다, 사람들의 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마 15:2,9),
*마15:2,9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2)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헛되이 정죄하여 죽이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4) 고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피하셨으므로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13절)
“[13]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그에게로 모여들 우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는 병 고쳐 주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그는 더욱 원하신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십니다(14절).
“[14]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이 귀절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그 고침 받은 자의 병들었던 원인이 그의 어떤 특별한 범죄에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죄를 다시 범치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Luther).
이 해석에는 난제가 있으니, 그것은, 성경말씀이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을 특수한 죄악에 돌리지 않은 사실입니다(요 9:1-3).
그러나 성경은 다른 한편, 어떤 질병의 원인이 사람의 특수한 죄악이라고 하므로(민16:46), 우리는 이 해석을 옳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다음 해석을 더욱 적합하다고 봅니다.
(2) 여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의 헬라 원어는, "이 이상 더 범죄를 계속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필 그의 38년 전의 범죄(처음에 그가 병든 원인)를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니고, 38년 동안 병중에서도 계속 범죄 하던 것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것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그의 죄악을 가리킨 다고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더 심한 것"은 영적 형벌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마 12:43-45 참조.
위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뜻을 보여줍니다.
(1)예수님께서 친히 38년 된 병자의 과거의 죄악들을 모두 다 용서하여 주신 사실,
(2)그가 그 고침 받은 자의 성화(聖化)를 요구하신다는 사실,
(3)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성화를 힘쓰지 않는 자는,
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히2:2-3).
*히2:2~3 “[2]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그러므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그 고침 받은 자는 그 말씀에서 살아야 되며,
그 한 마디 말씀이 늘 그의 심령에 살아 있어야 됩니다.
루터(Luther)는 말하기를,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을 권장합니다. 곧, 사람이 마땅히 그리스도의 충족성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6)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합니다(15,16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 병을 고친 자는 예수님이라고 알립니다.
그 병 고침 받은 자가 그렇게 보고한 것은 예수님을 배반하는 의미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2)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핍박하기는 여기 이 사건에서부터입니다.
"핍박하게 된지라." 이 말은 헬라원어로 미완료 시상(未完了時相)에 속하는 동사 인데, 핍박하기를 계속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남들을 대신하셔서 항상 고난을 받으신 분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그 자신은 그 일 때문에 고난을 받으십니다.
7) 내 아버지께서 이제 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합니다(17절)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은 육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고, 제 칠일에는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천지 만물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은(창 2:2-3), 결코 하나님의 무 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창조 역사에서 쉬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하신 것을 붙드시고 섭리하시는 일은 계속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가 계속하여 만물유지와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십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도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하신다는 것이, 5:17,19-30에 나타난 변론입니다.
그가 이와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되신 증표입니다. 예수님의 이 변론(5:17)을 들은 유대인들 자신도 그의 변론을 가리켜,
그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의미의 변론이라고 하였습니다(18절).
예수님의 하신 일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이신 그로서 안식일에 오히려 하실 만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안식에 속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곧, "안식은 사람의 활동 능력을 정지시킴이 아니고, 보다 참된 일로 돌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에도 죽은 자를 살리고(구원)계십니다.
안식일의 참 뜻이 구원입니다(신5:15; 히4:3-11).
*신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계가 있습니다.
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18절)
“[18]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로 말미암아" 란 말은, 위의 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유로 함을 가리킵니다.
곧,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신 것과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므로 자기도 일하신다는(하나님과 자기는 동등이라는 의미) 말씀을 이유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은혜로운 계시(啓示)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가장 요긴한 점을 반대한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특수한 의미에서 아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만이 저런 특수한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 아버지" 라고 하셨고, "우리 아버지" 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의 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4. 38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
1) 의사가 못 고치는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자가 38년 동안 않았으나 많은 의사에게 병에 대한 상담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옛 어른들은 인간을 가리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고치지 못하는 병도 있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도 유명한 의사는 다 찾아 봤을 줄 압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2) 약으로 못 고치는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 병자가 38년 동안 않았으니 모든 약을 다 써 보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현대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이 만든 약으로 고치지 못하는 병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약도 부작용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약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도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을 줄 압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고쳐주셨습니다.
3) 천사가 못 고치는 병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4절).
천사는 영적 피조물로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사환들입니다.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왔어도 이 불쌍하고, 힘없고, 38년된 병자를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38년 동안 몇 번 내려왔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 왔을 줄 압니다.
그 여러 해 동안 천사는 병자를 외면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이 가련한 환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난치병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죽을병도 능히 고치시고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불가능을 넘어 모든 병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4)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의 자비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8,9,13절).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으며,
또 예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비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5) 예수님은 많은 환자 중에서 38년된 환자을 치료 했을 까요?
이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예수님께 치료를 부탁하기는커녕 물이 동하면 제일 먼저 연못에 던져 달라고 당부했습니다(7절).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다 치료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마4:23~24, 8:16, 9:35, 12:15, 막1:34, 3:10, 눅4:40,6:19).
그러나 요한복음의 어느 부분에도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치유하셨다는 사건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은 치유사건의 선택적인 기록을 통해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이 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사건들은 과감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연못에서 발견한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 굳이 믿음이 없는 한 사람을 택하여 치유한 사건을 통해 계시하고자 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인자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릴 권세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는 진리를 한 병자를 선택하여 치유하신 사건을 통해 보여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계시하기 위해 일부러 질병의 상태가 심각하고 오래된 병자를 골라 치유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절망(絶望) 한 자에게 살 길을 주십니다.
이 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일으키시며,
거기에 믿음을 건설하시려고 하십니다.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는데 하필
그 38년 앓던 병자 한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요?
이를 예수님의 선택적 치료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실시가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感謝)할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외지교회가 베데스다의 연못이 되어서
온갖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
걱정 근심 초조 불안 염려 등
가진자들이 우리교회 문을 밟으로 나흠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베데스다의 연못에 천사가 물을 요동처야합니다.
우리 외지교회가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