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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예수께서 중풍병 환자에게 말씀하셨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서,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막2:10-12)
10 I will prove to you, then,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So he said to the paralyzed man, 11 “I tell you, get up, pick up your mat, and go home!”
12 While they all watched, the man got up, picked up his mat, and hurried away. They were all completely amazed and praised God, saying, “We hav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 단절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을 찾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베드로의 처갓집에 몰려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네 명의 친구가 한 명의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인파에 밀리다 보니 지붕 위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어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였습니다.
친구의 병을 고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죄 용서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4. 무리 때문에 예수께로 데리고 갈 수 없어서, 예수께서 계신 곳 위의 지붕을 걷어 내고, 구멍을 뚫어서, 중풍병 환자가 누워 있는 자리를 달아 내렸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 환자에게 "아들아,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막2:4,5)
그 일은 일종의 동문서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닌데.......
그런데다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말씀을 의아하게 여긴 것입니다.
6. 율법학자 몇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막2:6)
잠시 침묵이 흘렀을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이 소통의 단절에 대해 생각을 해보도록 합시다.
* 사마리아 여인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지나가셨습니다.
지치신 주님은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 물 한 잔을 구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퉁명스러웠습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은 유대 사람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였다. (유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과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요4:9)
주님도 호락호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0.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며,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4:10)
주님의 말씀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생수를 주실 수도 있는 분께서 왜 이 여인에게 물을 구하셨는가?
이 여인은 반박했습니다.
물바가지는 내가 내 손에 들고 있는데.......
11.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구해 주시겠습니까?(요4:11)
도통 서로 자기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동문서답이 이어지다가 주님께서 대뜸 그 여인의 약점을 짚어버렸습니다.
16. 예수께서 그 여자더러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 하시니,(요4:16)
이렇게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에 뒤통수를 맞은 다음 서로 말이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충격 요법을 쓰신 것 같습니다.
그 녀는 결국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말씀이 통하자 그 녀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물통은 버려두고 마을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28. 그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요4:28,29)
주님과 말이 통하자 이 여인은 딴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과 말이 통한다는 것을 최상의 희열이었습니다.
성경과 말이 통하면 여러분은 딴사람이 됩니다.
그 때에 마을로 먹을 음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똑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33.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요4:31-33)
소통의 단절입니다.
* 전체의 대강
1. 하나님, 사슴이 타도록 목말라 시냇물을 찾듯,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애태웁니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명의 하나님을 갈망하니, 언제 내가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 수 있을까?
3.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나를 보고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고 비웃으니, 밤낮으로 흘리는 눈물이 나의 음식이 되었구나.(시42:1-3)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과의 분리됨을 경험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려온다면 실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음성에서 진정한 평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 그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가?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다만 어떻게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성경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충분히 이를 수 있습니다.
혹시 히브리어 헬라어도 알아야 하고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이런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개역 성경도 개정 개역도 있고 새 번역도 있고 공동 번역도 있습니다.
그 중 쉬운 번역을 골라서 읽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또 우리들은 충분한 훈련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것도 초등학교에서 배운 것입니다.
국어 숙제 중에서 전체의 대강 써오라는 숙제를 안 해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성경을 읽고 그 전체의 대강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
성경을 인용하며 성경에 없는 내 말을 영양가 없이 하지 말고!
* 먼 나라 이야기
바울은 기이한 말을 합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이 이 예수를 알지 못하고, 안식일마다 읽는 예언자들의 말도 깨닫지 못해서, 그를 정죄함으로써, 예언자들의 말을 그대로 이루었습니다.(행13:27)
그들은 안식일마다 읽어서 외워 놓고도 그 말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저를 보고 귀신을 쫓아 달라고 초청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때 한 밤을 세우며 찬송만 했습니다.
빈들에 마른풀같이 이 일절 가사만 가지고 그를 위해 찬송을 했습니다.
이 놈의 귀신이 이 찬송을 따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 절 가사만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교회 새벽종이 울릴 때였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귀신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무서워 그거 부르지마!
영적인 중립에서 영적인 일단 기어가 들어가기까지 한 밤을 꼴딱 새워야 했던 것입니다.
12.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이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막4:12)
부르기는 불러도 그것이 제대로 된 찬양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 집착
물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마을로 가는 일이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악몽이었습니다.
‘저거 남편이 다섯이나 된다’고 이 여인의 뒤통수에 대고 마을 사람들이 속닥거렸기 때문입니다.
그 낄낄대는 소리.......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이 물로 빨래도 하고 목욕도 밥도 해 먹어야 하니 이 우물가에 안 올 수는 없고.......
그 녀는 두레박을 우물 안에 깊이 내리면서도 두레박을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뒤통수로 다가오는 마을 사람들을 더 의식했던 것입니다.
물바가지를 들어오려 서둘러 돌아가려는데 주님의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물 한 모금 달라하시는 것입니다.
퉁명스럽게 대꾸하니 엉뚱한 말씀이 그 녀의 귀에 들린 것입니다.
13.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4:13,14)
이 여인은 바로 그런 물을 원했습니다.
그런 물만 상상했습니다.
꼭지만 틀면 콸콸 쏟아지는 물!
이렇게 집착하다 보니 성령 하나님은 꼭지만 틀면 세탁기로 콸콸 쏟아지는 물로 생각된 것입니다.
15.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요4:15)
이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통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아먹으려면 제 집착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딴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빨래 생각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오직 중풍병에서 나아야 한다는 집착!
아브라함의 시작은 그가 죽자사자 집착했던 것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창12:1)
* 성경의 주도권
의사가 병을 진찰하고 진단했는데 내 병이니 내가 잘 안다고 마구 끼어들어 보세요.
잘못하다가 정신병동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의사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내 몸의 일이지만 병에 관한 한 나보다 더 정확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병 낫고 싶으면 치료에 관한 한 모든 주도권을 의사에게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문제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요8:23)
하나님 나라에 관한 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온 예수님께서 아실 것입니다.
성경을 펴두었다면 성경이 나를 가르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경 앞에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성실하시며 구체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목사들이 문제입니다.
달랑 성경 한 줄 인용하고 끌어모은 예화며 한 푼 값어치도 없는 세상 제 잡 경험이나 들려주고 강대상에서 유행가 한 가락 혹은 이상한 성대 묘사나 해서 교인들로 낄낄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충실히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설교 내용은 그가 인용한 성경 말씀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는 전적으로 성경 말씀에 자신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 주님의 계획
주님께서 가버나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살펴봅시다.
제 1막은 회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특별히 예수님을 통해서 그 가르치심의 권위를 눈으로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은 찾았는데 주님은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병자를 치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입니다.
그들이 귀신과 병의 현실에서 얼마나 고통을 받으며 살았던가!
제 2막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마을을 떠나 다른 마을로 가신 일입니다.
주님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시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아닙니다.
주님은 그들은 등지고 떠나신 것입니다.
탕자의 돼지우리 안에서의 삶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돼지우리야말로 교회 안에 있는 지성소입니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돼지밥을 먹으며 세상 사람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가버나움의 주민들이 눈뜨고 보니 예수님이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는 무리를 등지고 떠나신 것입니다.
제 3막 1장은 주님께서 다시 베드로의 처갓집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변한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는데 네 사람이 한 명의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병의 치료만 선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병의 치료를 먼저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과 충돌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거기에서 자신이 누구신지를 밝히려 하신 것입니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10 I will prove to you, then,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 입증
오늘 본문은 제 3막 2장입니다.
제 1장에서 병치료를 위해 온 환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환자는 죄의 용서를 받고 이미 하나님의 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입니다.
또 주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제 2장의 첫 마디는 이것입니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10 I will prove to you, then,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 행하신 이 일이 옳음을 입증하시는 시간을 갖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I will prove to you,
* 인자
주님이 지금 입증하실 내용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대상은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보이실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예수님을 신성 모독했다고 여긴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들은 예수님을 30세의 목수의 아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고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3년의 공생애의 교육목적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게 된 사람은 천국의 열쇠를 이미 손에 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3년의 공생애를 마치는 최종의 순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내가 누구인지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막8:29)
베드로의 이 대답은 주님께서 가시던 길을 급선회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곧바로 예루살렘을 향하셨고 십자가를 감당하시게 되셨습니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막8:31)
이 일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우리의 길도 그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막8:34,35)
십자가를 향해서!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즉 인자란 하나님의 아들에 상대적인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이름이라면 사람의 아들이란 우리와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잠시 썩고 말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그 나약함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그 인자의 몸으로 십자가를 감당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즉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중풍 병에서 치유되어 벌떡 일어나는 기적은 이 육적 장애의 육적 극복을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십 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 중풍 병자가 담을 넘고 지붕을 뚫으며 예수님께 왔던 동기는 육적 한계로 인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사람의 육적 한계를 그의 영적 회복의 기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죄용서란 그에게 하늘 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영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장에 예수님께서 동문서답을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람이 사람 안에 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두신 목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차원을 바꾸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데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 죄용서의 일을 감당하십니다.
* 땅에서
멍석 위에는 마당마다 붉은 고추들이 뒹굴고 있습니다.
가을 햇볕에 말려지고 있습니다.
작년 우리는 사마리 댁에게 고추를 샀습니다.
저희 부부가 그 태양초를 사다가 일일이 물로 닦아내서 말린 후에 방앗간으로 들고 갔습니다.
그것을 곱게 빻았습니다.
방앗삯을 지불해야 했는데 권사님은 내게 핸드폰으로 계좌이체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머리를 박박 긁으며 그거 할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방앗간 안에서 폰을 꺼내서 은행 업무를 보라는 것입니다.
시대가 하도 빨리 변하니 도대체 적응을 못 하겠습니다.
실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는데 하나님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2.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2)
성경은 태초의 그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1:14)
그 하나님께서 주소지를 이 땅으로 옮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 이 땅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하나님 나라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용서를 선언하시자 주님등록이 거창읍사무소에서 천국 동사무소로 적이 옮겨진 것입니다.
물론 그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제 설교를 통해 여러분의 주민등록이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 일이 죄 용서입니다.
아니면 제가 무슨 다른 이유로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겠습니까?
* 말씀의 대상
주님은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11.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11 “I tell you, get up, pick up your mat, and go home!”
병자에게 바로 이 말씀 한마디로 딴판의 세상이 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수 없이 이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어두움에서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잠듭니다.
그런데 밝은 세상이 오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변화는 우리 일생을 두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14.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서, 낮과 밤을 가르고, 계절과 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15. 또 하늘 창공에 있는 빛나는 것들은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16. 하나님이 두 큰 빛을 만드시고, 둘 가운데서 큰 빛으로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으로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창1:14-16)
과연 그 일이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이 병자에게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는 일은 주님의 이 한마디면 족했습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get up, pick up your mat, and go home!”
천일 야화를 보면 “열려라, 참깨” 그 암호문을 아는 사람만 그 문을 열 수 있습니다.
호박, 바나나, 양파, 들깨.......
수만 가지의 식물 중에 참깨만 통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새벽을 여는 일에 그 비밀번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쓰는 거창 사투리로 명령하신 것입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get up, pick up your mat, and go home!”
비밀번호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사람 생명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정의의 내용을 가졌을 때 그 말이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을 때 우리 일상의 말은 곧 하나님 나라의 말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인가?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 존재는 하나님의 나라의 말을 할 것입니다.
그 존재가 그 말의 질을 가를 것입니다.
이 땅의 말에서 하나님 나라 말로!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14:10-12)
중풍병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에게는 일어나라는 말과 들것을 챙겨들고 집으로 가라는 말은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는 들것에 실려서 지붕에서 줄 타고 예수님 앞에 나타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님께 그 병의 현실이란 무의미했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중풍병자는 이미 중풍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믿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현실을 믿을 것인가 그래서 또다시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혹은 그 현실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get up, pick up your mat, and go home!”
하지만 그 쉬운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기 그 말씀대로 그것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제가 병자를 향해 그 말을 했더라면 따귀를 맞았을 것입니다.
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불가능한 현실이 중요했겠지만 주님께는 말씀의 권위가 현실 위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을 향해 명령하시면 땅이 순종해서 거기에서 식물이 움 돋아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11.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창1:11)
그런 말씀의 차이는 누가 말을 했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이 했느냐 이승호가 했느냐?
그래서 저도 성령의 역사로 강대상을 빌려서 그 말씀을 전합니다.
이곳에서 처녀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하면 모두 아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썩은 육체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하면 여러분은 의심 없이 아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에서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기적
12. 그러자 중풍병 환자가 일어나서, 곧바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리를 거두어 가지고 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는 이런 일을 전혀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12 While they all watched, the man got up, picked up his mat, and hurried away. They were all completely amazed and praised God, saying, “We hav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그래서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드러누웠던 그 들것을 챙기더니 그것을 들고 집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의 그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들것을 거뜬히 들고 자신을 집을 향하고 걷고 있었는데 그 자신은 가버나움 베드로의 처갓집 마당에서 생전 처음 만난 아주 자신에게 생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중풍병에게도 거뜬히 소통되었습니다.
그런 줄 몰랐는데 중풍병에게도 두 귀가 있었던 것입니다.
중풍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더니 네 하고 답했습니다.
꼼짝없이 튀어나갔습니다.
* 사람들의 반응
사람들은 눈의 비비며 그 광경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태초의 그 말씀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십 년 전 사람들이 고추를 빻은 후에 자신이 자신의 계좌를 열어서 주인 통장으로 돈을 이체하는 은행 업무를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방앗간 사건으로 이제 은행 웹을 제 폰에 깔기는 했는데 그 일을 할 때마다 영 불안합니다.
정말로 내 돈이 제대로 전달이 된 것인가?
엉뚱한 사람이 횡재한 것 아닐까?
주님은 기적을 통해 그 죄용서의 현실을 입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강대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 일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그 말씀이다!
그 설교가 성경의 말씀을 이른다면 설교의 말씀이 태초의 그 말씀을 이르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동반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적은 그 하나님의 역사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적은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기적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것입니다.
이런 기적 현실에 대해 소박하게 반응했던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영 다른 반응을 할 것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바라바를 살리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에 대해 그 입장을 분명히 밝히신 것입니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겠다."
10 I will prove to you, then,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그 죄용서로 이미 하나님의 백상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방식에 불과합니다.
저는 동생에게 돈을 꾼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수증이 오간 것은 아닙니다.
그냥 돈을 빌려주었고 돈을 그냥 갚았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더라면 주님은 그런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을 수 있습니다.
또 이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예수님을 통한 죄 용서를 다 믿게 된 것은 아닙니다.
기적에 대해 제가 과민반응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적은 말세에 사탄이 가장 애용하는 멸망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표징들과 기적들을 행하여 보여서, 할 수만 있으면 선택 받은 사람들을 홀리려 할 것이다.
23. 그러므로 너희는 조심하여라. 내가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여 둔다.(막13:22,23)
주의할 것은 기적의 양면성입니다.
기적만 일어나면 모조리 양손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다가 기적은 말세에 사탄의 속이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 기적을 보이시는 것은 병 나은 기적을 통해서 주님의 선언하셨던 대로 죄사함의 영적인 현실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또 병 나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병 나은 것을 통해 오직 병 나은 것을 보는 사람은 볼 것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입증하시려는 것을 놓치고 만 사람입니다.
온전한 주님의 계시는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일단 우리의 집착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처럼 온통 빨래와 목욕 생각에 사로잡혀서 성령을 수돗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전적인 주도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