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는 사마천이 저술한 역사서로 초기 태사공서(太史公書)로 불렸다. 옛 신화시대부터 전한초기인 기원
전 2 세기 말 한 무제(漢武帝)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기원전 109년에서 기원전 91년 사이에 쓰여졌다.
전체 130편으로 전설상의 黃帝부터 한무제까지를 기록한 역사책이다. 최초의 역사책은 춘추일 것이나 사기로
부터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이어가는 紀傳體의 시초이다.
한무제의 신하 사마천은 태사령 직책으로 있던 부친인 사마담의 직책을35세 때 이어 받았는데, 태사령은 사관이
아니라 천문 역법 제사를 책임진 日官이다.
또,사기는 부친인 사마담이 이미 자료수집과 개략적인 구도를 잡아놓은 상태에서 죽으면서 유언으로 제국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뜻을 남긴다. 그러므로 사기는 사마담과 사마천의 공저라고 해도 무방한데, 사관의 견해를
‘태사공曰’로 표현한 것은 부친을 존중하는 의미이고 사기의 원래명칭도 太史公書인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또 서문에 해당하는 태사공자서를 사기의 맨끝인 130편째 글로 삼아 사실상 부친의 열전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99년 흉노전쟁에 출정한 이사장군 이광리가 휘하 이릉 등이 출정한 싸움에서 지고 이릉이 흉노에 투항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총 책임자 이광리의 누이가 무제의 비첩인것을 모르는 사마천은 옳고 그름에 따라 단순히
이릉을 변호하였으나 무제의 분노를 산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사마천 자신만 모른채
형을 면할돈이 없어 궁형에 처해진다. 그후 이를 딛고 사기를 집필한지 20년후 55세에 사기를 완성하고 60세에
졸한다.
사기 자체는 文史哲의 종합으로 유명하다고 전해진다. 또 역사서이면서도 당시는 史學의 개념이 없던 때라 제자
백가의 한 저술로 인식했다고도 한다. 공자가 春秋筆法과 微言大義로 정도를 나타내려 했다면 사마천은 다각도
로 인물을 조망하고 상황에 맞는 서술방법을 택하여 종합분석을 꾀한, 역사학의 창시자라 하겠다. 구성은 후대
기전체 역사 서술 방식의 모범이 되었으며, 유려한 필치와 문체로 역사서로서의 가치 외에 문학서로서도 큰 가치
를 가진 서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구성은 : 본기. 표. 서. 세가. 열전. 으로 대략하고,
본기 : 중국 역사 초 오제. 하. 은. 주. 진. 진시황. 항우. 고조. 여태후. 효문. 효경. 효무본기. 총 12편의 연대기다.
표 : 본기에 나오는 제왕이나 12 제후들의 흥망성쇠를 정리한 연표다.
서 : 총 8편으로 예서(禮書).악서(樂書).율서(律書).역서(曆書).천관서(天官書).봉선서(封禪書).하거서(河渠書).
평준서(平準書)이다.
세가 : 30편으로 역사적인 주요 제후를 언급한다.
열전 : 총70편으로 왕,제후 이외 역사적 주요 인물인 영웅,정치가,학자,군인,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다.
사마천의 사기를 말한다.
위 요약한 사기는 공자의 춘추의 정신을 계승한 중국의 중화정신을 고취하는 중국 역사서이고, 주변까지 망라
하기는 하였으나, 자국의 역사관에 입각한 중국민들의 자의적인 기록이다.그러므로 주변의 수많은 제국들의
상태를 축소, 왜곡,하고 자국의 요소가 조금만 있어도 타국의 역사를 중국 역사 속으로 편입시킨 사례가 많다.
특히 고대로 갈수록 대부분의 기록은 지금 고고학적으로 발굴되는 시례들로 보아 그러한 정황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가령 1980년 이후 중국 고고학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동이족(東夷族)의 영역이었던 요하(遙河)·대릉하(大
凌河) 유역에서 황하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질과 양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의 증거들이 무더기로
나왔기 때문이다.
1982년 사해(査海), 1983년 흥륭와(興隆窪)에서 발견한 주거 유적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집단 취락지로서
각각 ‘중화(中華) 제일촌’, ‘화하(華夏) 제일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취락이 조성된 시기인 8200~7600년 전
이곳은 화하족의 중심지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출토된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옥장식(귀고리) 등도 동이족,
나아가서 한반도 문화 유형과 더 가까웠다.
뒤에 이어지는 이른바 홍산(紅山) 문화(6500~5000년 전)와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 문화(4000~3500년 전)도
돌무덤, 석성, 제단 등과 같은 우리 고대 문화의 특징적인 모습들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하·대릉하 유역
일대에는 이런 정체불명의 고국(古國) 문명 유적이 확인된 것만도 수천 개가 될 정도로 쏟아지듯이 나오고 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이제 중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제외시킨 주나라 공화 원년(BC 841) 이전
의 왕조사 연대를 확정하는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를 통해 2000년 중국사의 상한선을 BC 2070년
(하나라 건국 연도)으로 연대를 끌어올렸다. 올해부터는 전설상의 오제(五帝) 시대까지 1000년을 더 끌어올리기
위한 ‘중화문명 탐험공정’에 들어갔다.
그 중심에는 우리 동이족의 문화인 요하·대릉하 유적이 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이를 ‘요하 문명’이라고 명명하고
황하 문명과 더불어 중국 문명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즉 황하 문명에 기초한 중화주의를 폐기하고 “동이의 요하
문명과 한족의 황하 문명, 그리고 남방·서북 문화가 중원으로 모여 완성된 문명”으로 거의 정리한 상태이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이후는 더 새로운 중국의 동북공정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단적인 사례로 보아서도 동북쪽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서북,서남,동남쪽의 역사 오류는 사미천의 중화사상
에 입각한 사기의 신빙성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이 사기를 많이 읽고 유려한 필체와
사마천의 신세를 동정하고, 역사가의 사명정신을 높이 사는 순수한 감상에 빠져,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냉정을 잃고 있다. 그러므로 이점을 참고하여 읽을것을 조언한다.
그러므로 공자는 춘추를 통하여 중국민의 단합을 최초 말했다면, 사마천은 이러한 공자의 정신을 계승하여 사기
란 역작으로 중화사상에 불을 짚힌 형국이다. 선진 고조선 문명이 아시아 대륙 전역에서 풍미하였을 때에 애당초
소수였던 지나인들이 정착 농경으로 부와 종족을 일구어 고조선의 선진 문물을 흡수한 뒤 대다수의 이족들을 그
땅에서 몰아 내었던 것은 무었 보다도 칼보다 더욱 강한 공자나 사마천 같은 문필가의 필의 힘이 그들을 단합시킨
순작용을 하였다고 본며, 우리도 그러한 것을 거울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고, 나아가 사기를 번역하거나 공부하는
사람들도 사기가 갖고있는 단순한 내용이나 한자 풀이에만 매달리거나 명예나 출세,돈을 위할것이 아니라, 한국
문필가로서의 자긍심도 엿보여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