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인공지능)과 ‘기본소득’이라는 이데올로기
● <기본소득>의 당위성에 대한 너무나 단순한 논리
한 학생과 <기본소득>이라는 것에 대해서 대화를 하였다. 그 학생은 <기본소득>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본소득>에 대한 그 학생의 너무나 단순한 논리를 듣고서 적잖이 놀랐다. 어쩌면 그 학생의 생각이 우리나라 평균적인 대학생들의 사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은 염려스럽기도 하였다. <기본소득>이란 모든 국민을 상대로 국가가 매월 일정한 금액을 마치 월급을 주듯이 주는 것을 말한다. 현재 진보진영의 일부 정치인들에 의해서 주장되는 사안이지만, 어떤 정치인은 오래전부터 무슨 <국민 배당금>이라는 말로 주장해온 내용이다.
왜 <기본소득>이라는 것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그 학생은 전혀 망설임 없이 “앞으로 AI(인공지능)가 인간의 직업을 대신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기본소득>으로 직업이 없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현재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논리가 바로 이것이며, 그 학생은 이러한 정치인들의 주장을 아무런 비판적인 반성 없이 그대로 수용한 듯 했다.
● 기본소득에 관한 실효성의 문제들
그렇다면 위의 주장이 가지는 문제는 어디에 있을까? 그 문제는 크게 3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첫째는 실효성에 관한 것이다. 만일 국가가 ‘모든 국민을 상대로’ 매월 일정량의 금액을 마치 급여처럼 준다고 할 때, 그 모든 국민이라는 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감옥에 있는 죄인들은 해당이 될까? 어린이들이나 청소년은 해당이 될까? 비록 국적은 취득하지 못했어도 시민권을 획득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해당이 될까? 만일 시설에 있는 치매 노인이라면 누가 기본소득을 수령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동일한 액수를 지급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직업의 유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달리 지급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에 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며, 이상적인 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② 둘째는 재원마련에 관한 것이다. 코로나 19로 경직된 내수를 회복하기 위해서 기껏 국민 1인당 30만 원 정도를 지급했는데도 엄청난 재원이 들고, 이로 인해 국가채무가 많이 늘고 있다고 걱정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만일 모든 국민을 상대로 매달 50만 원 정도만 지불한다고 해도 엄청난 재원이 요구될 것이다. 1년에 12번 씩, 매년 그렇게 지급을 한다면 3년 4년 혹은 10년이 지나게 되면 그 액수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는 부자들의 세금을 올려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정착이 될 것인데, 과연 부자들이 매달 그리고 매년 자신들의 부를 조금씩 나누어주는 이 같은 방식에 동의를 할까? 결국 이는 모두가 가난하게 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는 정책이 될 것이다. 한 국가가 국민들의 삶에 있어서 ‘하향평준화’를 지향할 때 그 국가는 결국 어떻게 될까? 그리고 어떤 정부가 자신들의 국민들의 삶 특히 경제적 삶에 있어서 ‘하향평준화’를 목표로 할 수 있을까?
③ 셋째는 과연 「기본소득」으로 젊은 청년들의 일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것이다. AI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대신하니까, 기본소득을 주어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가장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과연 젊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가지지 않고서 국가에서 주는 100만 원 정도의 급여를 받게 된다면, 이 돈으로 충분히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이 돈으로 어떻게 생활을 하고 저축을 하여 내 집을 마련할 수 있을까? 평생 내 집이라는 것 없이도 과연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 결혼은 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렵사리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 돈으로 어떻게 자녀를 기를 수가 있을까? 자녀를 낳아 기른다고 해도, 그 돈으로 어떻게 자녀가 원하는 교육을 제공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결국 기본소득 보다는 직업을 갖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 미래에 AI가 인간의 직업을 대신할 것이라는 이데올로기
④ 넷째는 AI가 직업을 대신할 것이라는 환상이다. 물론 향후 인공지능이 매우 발전하면 많은 부분에서 인간의 일을 ‘로봇’이 대신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AI가 대다수의 인간의 직업을 대신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로봇 청소기가 있다고 해서 모든 가정주부들이 다 로봇 청소기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청소를 하는 일 자체가 주부의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만일 청소를 할 수 있는 건강이 허락한다면 사람이 직접 청소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로봇 청소기는 다만 주부를 도와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로봇이 농사를 대신 지을 수 있고, 로봇이 대신 건축을 할 수 있다고 해도, 농부의 삶을 위해서 그리고 건축가의 삶을 위해서 우리는 로봇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있다. 어떤 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설령 로봇이 자신의 자녀를 대신 키워줄 수가 있다고 해도, 로봇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고 어머니가 자녀를 직접 기르는 것은 어머니의 고유한 권리이다. 마찬 가지로 농사를 짓는 것은 농부의 고유한 삶이요 권리이며, 치료를 하는 것은 의사의 고유한 삶이고 권리이다. 이처럼 그 어떤 직업 분야도 로봇이 사람을 대신 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법은 도출되지 않는다.
기계 기술문명의 이기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 휴머니티한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또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로봇이 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은 로봇을 만들거나 그 기술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는 바일 뿐, 당위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미래에 인류의 삶을 대신하는 것이 로봇일 것이라는 생각은 다만 모든 인류가 그렇게 원한다는 한에서만 사실이 될 것이다. 비록 인간의 삶에 조금씩 기계가 대신하고 인간의 삶 자체가 매우 기계적으로 변해 갈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기계가 인간의 삶을 대신할 수 없으며, 기계란 어디까지나 인간의 삶의 풍요를 위한 수단 혹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결코 기계가 인간의 삶을 대신하거나 빼앗아서는 안 된다. AI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만일 대다수의 사람들이 AI가 인간의 삶을 대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또 자신의 직업과 삶을 양보하지 않고자 한다면, 결코 AI가 인간의 직업과 삶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사유들을 종합하면, 미래에 AI가 대부분의 인간의 직업을 대신할 것이라는 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으며, 그 결정은 인간 스스로의 몫이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이렇게,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첫째는 그들이 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마치 청바지를 만드는 공장 사장이 “미래에는 누구나가 편리하고 질긴 청바지를 입게 될 것이다”라고 광고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야 자신들이 부와 권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지배이념을 가진 정치인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직업이 없고 국가가 주는 <기본소득>에 의존하게 될 때, 너무나 수월하게 국민들을 지배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람과 기계의 조화와 중용에 있다. 기계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지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AI시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인간은 다만 생존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 가치 있는 삶,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자유로운 삶이란 보다 나은 삶을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삶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하거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자아나 자신의 삶 그 자체가 문제가 될 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들의 기본 생계를 염려할 것이 아니라, 자유롭고 의미 있는 국민의 삶을 염려해야 한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주려고 하기 보다는, 누구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본다거나, 삶의 태도나 자아의 모습 등에 적용해 본다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가 화가인가 미술교사인가? 그가 글을 쓰는 작가인가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인가? (...) 특히 도덕적 차원에서 그가 수전노인가 자비로운 사람인가? 깨끗한 정치인인가 위선적인 정치인인가? 하는 것 등이 문제가 될 때, 우리는 ‘누구나 그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된다’는 말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이 곧 살아간다는 것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롭게 갱신되고, 보다 나은 곳, 보다 빛나는 곳으로 나아가는 상승운동이다.” 『베르그송과의 1시간』, 세창출판사, 2020, p. 115~116.
AI란 인간이 만든 기계이다. 비록 ‘인공지능’이 매우 인간과 유사해도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든 기계일 뿐이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지 생존을 위해 기계에게 자신의 삶을 양보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이 될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 인공지능에게 물어 볼 수가 없다. 누구를 자신의 친구나 연인으로 삼을 것인가를 인공지능에게 물어볼 수 없듯이, 자신의 삶이 어떤 삶이 될 것인가를 인공지능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인생에 있어서 결과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목적이나 목표를 설정하고, 매일 조금씩 보다 나은 삶,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노력한다는 그것에 있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