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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땀 그리고 눈물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은 예수님의 생애의 수난과 십자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네 명의 복음서 저자들은 마치 갈매기떼들이 어선 주위를 맴돌 듯, 당시의 시공간 속으로 모여들어 자신들의 믿음의 카메라를 들이대며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사건을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땀이 땀방울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눅22:44) 고 전한 사람은 누가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기에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히5:7)라고 덧붙임으로서 주님생애의 절정인 기도의 완성본을 마무리합니다.
이 본문들을 모두 겹쳐서 보면 주님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기도사역의 핵심에는 피와 땀 그리고 눈물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의 거룩한 액체는 생명의 핵심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뜨거운 피를 가지고 수고로운 땀을 흘리며 눈물로 탄식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 모든 요소는 인간이 살아 가면서 치루어야 하는 고통스런 대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땅의 인생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저 겟세마네의 어둔 골짜기를 자신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가득 채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통해 탄생한 것입니다.그 거룩한 액체들로 얼룩진 주님의 절절한 기도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향한 장렬한 준비과정이었고 이후 영광의 부활과 새로운 역사의 지평을 열기 위한 서막이었던 것이지요. 구원받은 백성들은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드린 기도 속에서 잉태되어 갈보리에서의 속죄의 피를 모판으로 하여 탄생한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음악이론 가운데 주제와 변주가 있습니다. 주제가 작곡가 자신이 전하는 가장 큰 목적이며 의도라면, 변주는 그 주제를 가지고 대위법이나 화성등 음악의 법칙들을 사용하여 곡의 내용을 확장시키고 해석하는 기법입니다. 따라서 변주의 기능은 주제를 나타내는 주요작업이지만 어디까지나 주제에 종속되어 사용될 때만 그것의 존재가치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주님의 생애와 신자들의 관계가 바로 그러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애를 주제로 하여 삶이라는 무대를 변주곡으로 연주하는 영광스런 교향악단의 멤버들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덧씌운 어둡고 슬픈 멜로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훌륭하게 연주해 내야 합니다. 피와 땀과 눈물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남겨주신 고귀한 하늘의 악기들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이 악기들은 왠지 거북스럽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날마다 승리의 트럼펫을 불고 싶고 기쁨의 플루트만을 연주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가진 본성입니다만 인생이란 내 맘대로 되지않는 것임을 살아갈수록 더 깊이 알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 하나님의 섭리의 표지판이 우뚝 서 있음을 똑똑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죄다 비비꼬여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퍼즐판 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스런 영역 안에 있음을 깨닫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게 다 무엇이던가요? 돈 권력 명예가 아닙니까? 이 욕망의 덩어리들을 한 묶음의패키지로 싸발려서 그것들을 몽땅 차지하려는 탐욕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불나방이 죽음을 무릅쓰고 불빛을 타고 들어가듯이 모든 것을 다 바쳐 정력적으로 행동합니다. 자신들의 인생의 지갑에서 빠져 나가는 피와 땀과 눈물을 결코 아까워 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해 저문 시간 광야의 배고픈 군중들이 고작 주님께 드린 빵 부스러기보다도 더 하잘것 없는 탐욕 한 덩어리를 얻으려고 저마다 생명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인생은 무엇 하나를 얻으려 해도 예외없이 수고의 대가을 치루며 살아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 말입니다. 이것이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남긴 인생의 핵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내가 믿음으로 연주해야 하는 내 삶의 변주곡이자 숙제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이렇게 요약 진술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신비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이 본문 속에 두 가지의 색체감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죽음과 생명! 바로 그것입니다.믿는 사람들 안에 역설적인 이분법이 작동한다는 것이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겟세마네의 탄식과 눈물,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으면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없었듯이, 지금 여기서 우리도 자신들의 삶 속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동반한 희생이 없이는 생명(성령을 통한 은혜)을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믿음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의 일을 한다고 말들을 하는데 그 주의 일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기도에는 어린 아이들이 수두룩합니다. 기도의 악기를 잘 연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준비물이 다름 아닌 피와 땀과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바쁘게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무언가 분주히 활동하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로 보이지만 ,기도의 자리에 앉으면 숨이 막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뭔가 잘못된 게 있지 않을까요? 기도할 때 우리도 주님처럼 피땀을 흘리면서 뜨겁고 열렬하게 구한다면, 성령을 통하여 부활의 생명 곧 은혜의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한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씀의 현실적 체험입니다. 아, 하나님이 신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축복의 시냇가에 와서 약속하신 성령의 물을 마시며 사는 양들이 얼마나 드물단 말입니까? 모두가 쓸모없는 일에 분주히 돌아다니지만 영혼은 바싹 말라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이 땅에서 누릴 영광의 약속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삶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주님이 실증적으로 보이신 죽음과 생명의 이중주는 이렇듯 성도들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재현되어야 마땅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의 야성성이 아닐까요? 믿음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날 밤을 새워가며 기도에 전심했던 불타는 열정이 언제 어디로 사라졌단 말입니까? 콘크리트처럼 화석화된 불신앙의 굳은 살을 가열차게 타오르는 열렬한 기도로 삼켜버릴 때까지는 하나님은 우리를 가만 두지 않으시고 피와 땀과 눈물이 흐르는 또 다른 삶의 현장인 고통의 광야를 지나게 하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의 학교에서 이 세대의 나태한 죄의 옷을 벗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배워야 하는 필수과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자들이 광야의 세상을 지날 때, 이 땅의 여기 저기에는 슬픔의 버드나무가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 나무에는 탄식과 고통, 아픔과 불행, 질병과 사망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있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슬픔의 버드나무 아래에선 결코 안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으로 하늘로 향하지만 하늘의 부르심을 입기 전까지 여기 순례길에서 슬픔의 두 친구들인 탄식과 눈물을 동반하며 적지 않은 시간을 견디며 살아가야 합니다. 저들이 하늘 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땅의 거추장스러운 누더기들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 때까지는 모두가 피와 땀과 눈물로 젖은 수고스러운 옷을 입고 주를 의지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들어 온 모든 인생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세차게 바람 불고 풍랑이 이는 컴컴한 밤에 가련한 인생들은 비탈진 요단강의 둑길을 홀로 내려가야 합니다. 극도로 고통스럽고 무서운 이 생에서의 마지막 밤, 그 시간에 인간은 오직 자기 혼자만 존재할 뿐입니다. 소름이 돋고 솜털이 곤두 서는 절대적 공포 앞에 그 어디에도 출구가 없습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곧 닥칠 현실이며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저 여리고의 성벽처럼 우리 앞에 우뚝 가로막고 서 있는 피할 수 없는 미래상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홀로 있음을 거부하며 피하려 합니다. 쓸쓸함, 고독 , 소외감, 적막감 등은 인간적 정서와는 친밀해지고 싶지않은 어휘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믿음의 삶을 끝까지 견지한 사람의 마지막도 저 무서운 죽음의 공포와 처절한 홀로있음을 체감하면서 어디론가 다른 우주로 사라져 버린단 말입니까? 정녕 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삶이 무슨 가치가 있으며 또한 거기에 그 어떤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지점에서 우리의 믿음의 렌즈는 저 겟세마네의 고통과 심연의 골짜기를 지나 죽음의 극지대 갈보리를 정조준합니다. 그런 후에 비로소 영광의 새벽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을 입으신 부활의 첫 증인을 정확히 포착합니다. 그 거룩한 곳에서 죽음을 넘어 낙원의 오솔길을 예비하신 그 분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요 복음의 본질입니다. 할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의 그 언약의 신실하심 안에서만 인간의 미래가 있고 영원한 소망의 빛이 반짝입니다. 그분은 일찍이 인생들이 겪어야 할 극단적 죽음의 고통을 몸소 짊어지신 분, 하나님의 심판의 칼을 내 대신 맞으시고 나의 죄책과 저주와 사망을 영원히 폐기처분하신 분, 온 몸의 모든 땀과 피와 눈물을 짜내어 마귀의 얽어 맨 멸망의 쇠빗장을 부수시고 용서와 자비의 문을 열어주신 분으로서 승리의 구원자이심을 우리의 믿음은 증언합니다.
그 절박한 마지막 시간이 이르면 이제 우리는 그토록 사모한 영광의 얼굴을 직접 뵈올 수 있을 것이며 그의 손을 붙잡고 하늘문으로 들어 갈 것입니다. 이 때를 위하여 일찍이 믿음의 작가 에드워드 모우트는 다음의 찬송시를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 이 몸의 소망 무언가/우리 주 예수 뿐일세/우리 주 예수 밖에는/믿을 이 아주 없도다.
세상의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무섭게 바람 부는 밤/ 물결이 높이 설랠 때/우리주 크신 은혜에/소망의 닻을 주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그 위에 내가 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