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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록(海槎錄) 慶七松海槎錄 上 萬曆三十五年丁未(1607,선조40)正月小 二十五日己丑 경섬(慶暹) 1607
晴。昏雪。留尙州。與主牧。並轡訪鄭監司景任於道南書院。乘夕而還。咸陽山陰兩倅。設別酌。
慶七松海槎錄 上 / 萬曆三十五年丁未正月小
二十日甲申
晴。朝發水回村。踰鳥嶺暫憩于龍湫。馳入聞慶縣。日未夕矣。微雨暫灑。會一行軍官譯官輩設酌。金孝舜連呑十餘大椀。備邊司差官。持松雲抵日本僧人書札及禮物追到。仍見本家平書。
松雲。與圓光元佶長老。西來一曲子。曾與兄吹之。瞥然如昨。再換春秋。無情歲月。如石火電影。長吁耳奈何。遙想老兄。於無位眞人面目上。能發大光明。度脫諸島生靈。高哉高哉。向者余以先師諦南遊馬島。前至貴國。得見圓光老兄與西笑長老五山諸德。盛論臨濟狂風。別明宗旨。不亦多乎。余之本願。只要盡刷赤子。以副先師普濟生靈之訣。願莫之遂。空手而還。無任缺然。余自西還。衰病已深。仍入妙香山。自守待盡矣。適來聞有使行。卽以寒暄二字。遠驚老兄靜中春睡去也。惟兄無違本志。當以度生願。前告大將軍。盡刷生靈。無冷舊盟幸甚。不腆薄物。統希笑領。不宣。
雲孫一卷。淸香四封。眞笏六束。藥蔘一斤。管城二十柄。
與承兌西笑長老。海城一別。星霜再換。鯨波接天。回首奈何。春生諸島。遙想老兄。順時珍福。道眼益高。倒用橫招。直以西來印印之使。海外衆生。咸蒙潤澤。以報諸佛莫大之恩。慶喜所謂將此深心奉塵刹。是則名爲報佛恩者。不亦體乎。松雲西還。衰病侵尋。卽入妙香山以盡。此報身爲期。聞渡海使臣之一行。仍付以候狀焉。向者松雲。因奉先師遺諦。以普濟爲任。南遊馬島。遂至貴國。得見鹿苑大長老西笑師兄。與圓光長老五山諸德。盛論宗旨。以明所從來。兄亦不辱先師正眼。余亦得知同宗一脈。盛光於東海也。此亦夙緣。夫豈人力致之。曩時余旣以普濟爲任而前去。則朝鮮赤子之陷異域者。譬猶墊溺水火。不此濟導。而心何慊焉。將軍初欲有意刷還。而竟爲不然。今乃空手而還。今因有使行。語及此耳。唯兄。善報大將軍。盡刷其時之不施者。無食前言。此非干老僧事。只以拯人濟人爲念而遠遊。見知於大將軍與諸將諸大長老。敢以是進焉。惟兄圓照。不腆薄物。統希笑領。不宣。
雲孫二卷。淸香四封。眞笏六束。藥蔘三斤。管城三十柄。
與玄蘇書。別來如昨。星霜再換。相思一念。未嘗暫忘。只以百草頭上祖師意自寬耳。餘何足道哉。古德。或以望州亭相見。或以烏石嶺相看。以是道眼看來。則長老之眼。松雲之見。松雲之眼。長老之見云。何以別商量去也。余乃西還。衰病侵尋。西入妙香山。自守待盡矣。適來聞使臣之行。爲寄相思字。以問老兄安否萬一也。向者余以先師遺訣。南遊至貴島。與兄及柳川。前至日本。得見圓光長老五山諸德。盛論宗旨。且明所從來。佳則佳矣。未遂本願而回。無任缺然。惟兄更爲盡力。盡刷生靈。無落前期幸甚。不腆薄物。統希笑領。不宣。
太守處爲告問候狀。余病伏遠山。未及修狀。慚負。且晩聞柳川仙去云。此人體富骨勁。誰知乘化至此易也。爲之痛焉。豐前臨別。求以靑瓦古硯等若干物。余自西還。卽入遠山。病未能出行。未及備付使行。慚負。以是意各報之是仰。
雲孫一卷淸香四封眞笏五束藥蔘一斤管城二十柄
與宿蘆禪師書。道無形。何有所隔。心無迹。誰敢去留。無去留無形迹。興來獨與精神會。然則在萬里長相見。師與我。又何容聲於其間哉。師亦以此眼照之。不腆薄物。統希笑領。不宣。
雲孫一卷。淸香三封。眞笏三束。管城十柄。藥蔘一斤。
20일(갑신)
맑음. 아침에 수회촌을 떠나 조령(鳥嶺)을 넘어 용추(龍湫)에서 잠깐 쉬었다가 문경현(聞慶縣)으로 달려 들어가니,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 그리고 가랑비가 살짝 뿌렸다. 일행의 군관(軍官)ㆍ역관(譯官)들을 모아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김효순(金孝舜)이 큰 사발로 연달아 10여 잔이나 마셨다. 비변사 차관(備邊司差官)이, 송운(松雲) 스님이 일본 중에게 보내는 편지 및 예물(禮物)을 가지고 나중에 도착하였다. 이어서 본가의 평안하다는 편지를 받아 보았다.
〈송운(松雲) 스님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원광원길(圓光元佶)장로(長老)에게 보냄 : 일찍이 노형과 더불어 서래곡(西來曲) 한 곡조를 불던 때가 어제 같은데, 춘추(春秋)가 두 번 바뀌었으니, 무정한 세월이 돌 불과 번개 그림자 같아 길이 탄식할 뿐입니다. 어찌하리까? 멀리서 생각건대, 노형은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면목 위에서 능히 큰 광명을 발하여 모든 섬의 생령을 도탈(度脫)하였을 것이니, 훌륭하고도 훌륭합니다. 전번에 내가 선사(先師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유체(遺諦)로써 남쪽으로 대마도(對馬島)에 가서 놀 적에, 귀국에까지 가서 원광(圓光) 노형과 서소(西笑)장로(長老)ㆍ오산(五山)의 제덕(諸德)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임제(臨濟)의 광풍(狂風)을 성대히 논하여 종지(宗旨)를 별도로 밝힌 것이 또한 많지 않았습니까? 나의 본원(本願)은 다만 적자(赤子)를 다 데려옴으로써 선사의 ‘생령(生靈)을 보제(普濟)하라.’는 유결(遺訣)에 부응(副應)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매 서운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귀국한 뒤부터 노병이 이미 깊어졌으며 그 길로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가, 스스로를 지키며 죽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는데, 마침 사신이 간다는 말을 듣고 즉시 한훤(寒暄 추운 것과 더운 것. 곧 문안 드리는 것) 두 글자를 가지고 멀리 노형의 조용한 봄잠[春睡]을 깨우는 것이니, 바라건대 형께서 나의 본 뜻을 어기지 말고 마땅히 도생원(度生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소원)으로써 대장군에게 고하여 생령을 모두 돌려 보내어 주시어,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물품은 모두 웃고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雲孫 문종이의 별칭) 1권, 청향(淸香) 4봉(封), 진홀(眞笏) 6속(束), 약삼(藥蔘) 1근, 관성(管城 붓의 별칭) 20자루.
승태서소(承兌西笑)장로에게 보냄 : 해성(海城)에서 한 번 헤어진 뒤, 성상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거센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하니, 머리를 돌이켜 본들 어쩌겠습니까? 모든 섬에 봄빛이 찾아왔습니다. 멀리서 생각건대, 노형은 때에 따라 진복(珍福)하고 도안(道眼)도 더욱 높아졌으리라 여겨집니다. 뒤바뀐 초청(이쪽에서 먼저 초청하는 것)을 하여 곧 서래(西來)의 인(印)을 찍어주어, 해외의 중생이 모두 은택을 받아 모든 부처의 막대한 은혜에 보답하게 하였으니, 경희(慶喜 문수보살의 딴 이름)의 이른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진찰(塵刹)을 받드는 것이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를 또한 체험하지 않습니까? 송운은 돌아온 뒤 노쇠한 병이 찾아들어 묘향산에 들어가 이 보신(報身 불가에서 말하는 육신(肉身))을 마치기로 기약하였더니, 바다를 건너가는 사신의 일행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안부편지를 부치는 것입니다. 전번에 송운이 선사의 유체(遺諦)를 받들어 보제(普濟 널리 중생을 건짐)를 임무로 삼고, 남쪽으로 대마도에서 놀다가 드디어 귀국에 가서 녹원(鹿苑) 대장로ㆍ서소(西笑) 사형(師兄)ㆍ원광장로ㆍ오산의 제덕(諸德)을 만나보고 종지(宗旨)를 성대히 논하여 소종래(所從來)를 밝혔는데, 형도 선사의 정안(正眼)에 욕되지 않았고, 나도 동종(同宗)의 일맥임을 알게 되어 동해(東海)에 매우 빛이 났었습니다. 이것 또한 숙연(夙緣)이지 어찌 인력으로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전번에 내가 이미 보제(普濟)를 임무로 삼고 갔으니, 이역(異域)에 빠져 있는 조선의 적자는 비유컨대, 물불[水火]에 빠진 사람과 같은 것인데, 이를 건져내지 못하고서야 마음이 어찌 만족하겠습니까? 장군이 애초엔 쇄환해 주려 하였는데, 마침내 실천하지 않아,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 사신의 행차가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니, 바라건대, 형께서 대장군에게 잘 보고하여 그때 돌려 보내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실어 보내어, 이전에 했던 말을 어기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것이 노승에게 관계되는 일은 아니나, 사람을 건지려는 생각으로 멀리 돌아다니다가 대장군과 모든 장수, 모든 대장로를 알았기로 감히 이렇게 아뢰는 것이니, 형께서 잘 살펴주기 바랍니다. 변변찮은 물품은 웃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 2권, 청향 4봉, 진홀 6속, 약삼 3근, 관성 30자루.
현소(玄蘇)에게 보냄 : 작별한 것이 어제 같은데, 성상이 두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그리워하는 일념은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온갖 풀의 위에 조사(祖師 달마대사(達磨大師))의 뜻이 있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위로하고 있을 뿐이니, 나머지야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고덕(古德 덕이 높은 옛 스님)은 망주정(望州亭)에서 서로 만나 보기도 하고, 오석령(烏石嶺)에서 서로 보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므로, 도안(道眼)으로 본다면, 장로의 눈으로 송운이 보고, 송운의 눈으로 장로가 본다 하겠거늘 어찌 달리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서쪽으로 돌아와 쇠병(衰病)이 찾아들어 서쪽에 있는 묘향산으로 들어갔으며, 그대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사신이 간다는 말을 듣고 서로 그리는 문자를 보내서 노형의 안부를 만 분의 일이라도 물으려는 것입니다. 전번에 내가 선사의 유결(遺訣)에 따라 남방을 돌아다니다가, 귀도(貴島)에까지 가서 형 및 유천(柳川)과 더불어 일본에 가서 원광장로ㆍ오산의 제덕(諸德)을 만나 종지(宗旨)를 성대히 논하고, 또 소종래를 밝혔으니, 좋기는 좋으나 본원(本願)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서운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형께서 다시 힘을 다해 생령들을 모두 돌려보내 주되 전번의 언약대로 하여주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변변찮은 물품은 모두 웃으며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태수(太守)에게 고하는 문후(問候) 편지 : 병으로 깊은 산중에 누워 있느라고, 편지를 올리지 못하니,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또 뒤늦게 들으니, 유천(柳川)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몸이 건강하였는데, 이처럼 쉽게 죽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마음이 아픕니다. 풍전(豐前)에서 작별할 적에 청기와[靑瓦]ㆍ고연(古硯) 등 약간의 물품 구득을 말씀하셨는데, 내가 서쪽으로 돌아온 뒤부터는 곧 깊은 산중에 들어가서 병으로 나다니지 못하였기에 사신의 편에 마련하여 부치지 못하니,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이 뜻으로 여러분에게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운손 1권, 청향 4봉, 진홀 5속, 약삼 1근, 붓 20자루.
숙로선사(宿蘆禪師)에게 보낸 편지 : 도(道)는 형체가 없는 것인데 무슨 막히는 바가 있겠으며, 마음은 형적(形迹)이 없는 것인데 누가 감히 보내거나 붙잡겠소. 보내거나 붙잡음도 없고 형체와 자취도 없지만, 흥이 나면 정신과 더불어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 리 밖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같이 서로 보는 것이 스님과 나인데, 또한 어찌 우리 사이에 말할 필요가 있소. 스님도 이런 안목으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변변찮은 물품이지만 모두 웃고 받아주기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운손 1권, 청향 3봉, 진홀 3속, 붓 10자루, 약삼 1근.
ⓒ 한국고전번역원 | 정봉화 (역) |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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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완벽(趙完璧) | 정사신(鄭士信)이 지은 그의 전(傳)인 〈조완벽전〉을 살펴보면, 그는 진주(晉州)의 사족인(士族人)으로, 장령(掌令) 하진보(河晉寶)의 질손 여서(姪孫女壻)이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약관(弱冠)의 나이로 왜적에게 포로로 끌려가 왜국 상인의 종이 되었는데, 그 왜국 상인이 안남국으로 무역하러 갈 때 조완벽이 한문을 제법 안다는 사실을 알고 조완벽에게 안남국에 같이 가서 도와주면 나중에 풀어주겠다고 약속하고 그를 데리고 안남국에 갔다. 이러한 연유로 조완벽은 1604년(선조37) 이후로 두 차례나 안남국을 왕래하며 그곳의 진기한 문물을 견문하는 한편, 지봉이 1597년에 연경(燕京)에서 만난 안남국 사신 풍극관(馮克寬)과 수창한 여러 시가 안남 사인(士人)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완벽이 일본으로 돌아온 뒤, 왜국 상인이 그와의 처음 약속을 어기고 그를 풀어주지 않았는데, 주변 왜인들이 두 차례나 약속을 어긴 왜국 상인을 비난하자 왜국 상인이 어쩔 수 없이 조완벽을 풀어 주었다. 이에 조완벽이 종에서 해방되어 돈을 모아서 1607년(선조40)에 본국의 고향인 진주로 돌아와 무탈하게 지내던 모친과 아내와 상봉하였는데,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일을 진주에 같이 사는 김윤안(金允安)에게 말해주었다고 하였다. 《梅窓集 卷4 趙完璧傳》 참고로, 이밖에도 조완벽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지봉의 〈조완벽전〉,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기조완벽견문(記趙完璧見聞)〉, 경섬(慶暹)이 1607년(선조40)에 통신 부사(通信副使)로서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 종사관 정호관(丁好寬)과 함께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임무도 아울러 띠고 일본을 왕래하면서 견문한 것을 일기체로 적은 《해사록(海槎錄)》을 들 수 있다. 이상에서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지봉의 〈조완벽전〉에는 정사신의 〈조완벽전〉과는 달리, 조완벽이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된 경위에 대해 1607년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들어왔을 때 조완벽이 주인인 왜국 상인에게 슬피 하소연하여 우리나라 사행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언급한 점이다. 또 경섬의 《해사록 하》 윤6월 1일 조에, “포로로 잡혀온 진주 사인 조완벽은 영리하고 믿을 만한 자이다. 그에게 유문 한 통을 주어 그로 하여금 쇄환할 백성들을 불러 모아 유시하도록 하였다.[被虜晉州士人趙完璧, 伶俐可信人也. 給諭文一度, 使之招諭刷還.]”라고 하였다. 《芝峯集 卷23 趙完璧傳》, 《蒼石集 卷12 記趙完璧見聞》, 《海槎錄下 潤6月》 또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1549년(명종4) 식년시 병과에 급제한 조완벽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조완벽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약관의 나이로 왜적에게 포로로 끌려간 일로 비추어 볼 때 동일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지봉집(芝峯集) |
경섬(慶暹) (1562~1620)
조선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임진왜란(壬辰倭亂) 후 첫 번째 사절로 일본에 건너가 국교를 다시 열게 하고 임진왜란 때의 포로 1,340명을 데리고 돌아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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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집 제3권 / 서(序)
해동 회답부사(海東回答副使)로 떠나는 시정(寺正) 경섬(慶暹) 선생을 전송한 글
해동(海東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떠나는 것을 사람들은 난처하게 여기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바다에 언제 폭풍이 불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때문이요, 그 둘째 이유는 일본의 속마음을 믿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때문이다. 선생을 아끼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어찌 나만 유독 그런 걱정에 생각이 미치지 않겠는가마는, 그런 이유를 거론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고 여겨진다.
우선 첫 번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진동하는 우렛소리가 가고 오니, 위태하다. 미리 잘 살펴서 자신이 견지(堅持)하고 있는 신념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震往來厲 億无喪有事]” 하였다. 군자라면 정상적인 상황에 처하든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하든 간에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신념을 반드시 지니고 있게 마련인데, 《주역》에서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각자의 내부에 지니고 있는 그 마음가짐이다.
예컨대 정 부자(程夫子 송(宋)나라의 학자 정이(程頤))가 자신의 마음속에 성(誠)과 경(敬)의 정신을 늘 지니고 있었던 것이나, 당공 개(唐公介 송나라의 직신(直臣)임)가 평생 동안 충(忠)과 신(信)의 자세에 입각했던 것 모두가 위에서 말한바 자신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진동하는 우렛소리로 놀란 뒤에야 내부의 마음가짐을 재정비하려고 한다거나, 배가 위태로워진 뒤에야 성(誠)과 경(敬)의 정신을 찾으려 한다거나, 태풍이 불어닥친 뒤에야 충(忠)과 신(信)의 자세를 회복하려 한다면, 자신의 신념대로 대처하기가 어렵게 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던 다른 것까지도 거꾸로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빚게 되고 말 것이다.
지금 해동까지의 거리가 일만 리라 하지만, 그것도 한 걸음 한 걸음을 합친 것이요, 그 바다에 고래등 같은 파도가 일어난다고 하지만, 그것도 평지에서 계속 이어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따라서 자신이 견지하고 있는 신념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한 걸음씩 걸어 가면 되는 거리만이 눈앞에 놓여 있을 뿐 일만 리의 길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요, 평지의 연속이라는 생각만 들 뿐 고래등 같은 파도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서야 갑작스럽게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정상적인 상황에서 미리 준비해 두고 있던 신념대로 행동하기만 하면 될 것이니, 선생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 이유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음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왕년에 그 나라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다. 그리하여 말할 수 없이 약탈을 자행하면서 능침(陵寢)에까지 화가 미치게 하였으니,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화란(禍亂)을 일으킨 주범은 단지 그 나라의 대신(大臣)이었을 뿐이고, 그 뒤로 세상이 바뀌어 오늘날 그 나라에서 섭정하고 있는 사람은 완전히 그와 반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기회가 있으면 몇백 명씩 우리나라의 백성들을 온전히 돌려보내 주고 있으며, 능침에 화를 끼친 두 범인도 붙잡아 보내 우리나라에서 처단토록 하였다.
이번에 그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온 것 역시 선의(善意)를 가지고 화해할 일을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사리를 따져 볼 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험한 파도를 헤치며 우리나라를 찾아온 그 충정(衷情)을 무작정 외면할 수만은 없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회답사(回答使)라는 이름을 붙여 그 나라에 보낸다면, 어찌 명분이 서지 않겠으며 체통(體統) 역시 얻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들 역시 예모(禮貌)를 차리느라 겨를이 없을 것이니, 그들을 믿을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속마음을 의심할 여지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노론(魯論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시경(詩經)》 삼백 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에 통달한 솜씨를 보여 주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에 독자적으로 처리하는 솜씨를 보여 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외우고 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였다. 임금과 정승이 인재를 선발하여 사신으로 보낼 적에 국서(國書)를 그에게 건네 주기만 할 뿐, 국서 이외의 내용에 대해서 해야 할 말은 가르쳐 주지를 않는데, 이것이 이른바 전대(專對)라고 하는 것이다. 장군(將軍)이 삼군(三軍)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가 있고, 사신이 사방에 나가 있을 때에는 전대(專對)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이는 모두가 똑같은 이치에 입각한 것이라고 하겠다.[其致一也]
선생은 정치에 통달한 군자로서, 이번에 또 사신으로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선생이 보빙(報聘 답방(答訪))하는 여가에 전대하는 일을 훌륭히 수행하고 돌아와 복명(復命)하는 영광을 입게 되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선생은 부디 힘쓰도록 하라.
다른 본(本)에는 ‘기치일야(其致一也)’라는 대목 아래에 “내가 또 마침 듣건대, 이번의 사신은 우리나라의 백성을 쇄환(刷還)해 오는 임무도 띠고 있다고 하였다.”라는 한 구절이 첨가되어 있고, 그 뒤의 내용 역시 “이러한 때를 당해서는 그 나라에서 당연히 우리나라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문제에 대해서 먼저 우리나라에 성의를 보여 주려고 할 것이다. 선생은 정치에 통달한 군자로서, 이번에 또 사신으로 나가게 되었다. 따라서 나는 선생이 회답하는 여가에 전대하는 일을 훌륭히 수행하여, 담소하고 응대하는 사이에 원만히 문제를 매듭 짓고 돌아와 복명하는 영광을 입게 되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선생은 부디 힘쓰도록 하라.”고 다소 다르게 되어 있다.
[주-D001] 진동하는 …… 것이다 : 진괘(震卦) 육오효(六五爻)에 나오는 말이다.[주-D002] 시경(詩經) …… 소용이겠는가 : 《논어》 자로(子路)에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