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점필재(佔畢齋)와 안음향교(安陰鄕校) 훈도(訓導)
1점필재집(佔畢齋集)佔畢齋集卷之一詩寄仲容兄 宗裕김종직(金宗直)
2점필재집(佔畢齋集)佔畢齋集卷之七詩三月三日。與晉州判官崔榮,朴盈德,吾仲容兄,兪克己,都生員,鄭生員希韶等。爲禊飮。김종직(金宗直)
3점필재집(佔畢齋集)佔畢齋集卷之八詩上元日。謁仲容兄於安陰。與安陰明府及李進士祿崇,都訓導永昌,兪克己,韓百源飮。醉還。夜將二鼓。雪月交輝。過灆溪有作。時都,韓三人從還。김종직(金宗直)
4 점필재집(佔畢齋集) 佔畢齋集卷之八 詩 仲容兄詠落梅一首。自云。復詠學士樓前新柳。自午至晡。未得一聯。不覺發憤。欲輟餐。弟用其韵吟呈。 김종직(金宗直) 1789 a012_274a
5 점필재집(佔畢齋集) 佔畢齋集卷之九 詩 和仲容兄點風臺韵 김종직(金宗直)
6 점필재집(佔畢齋集) 佔畢齋集卷之十一 詩 德峯寺。與仲容兄,克己,伯玉同賦。 김종직(金宗直)
7점필재집(佔畢齋集)佔畢齋集卷之十一詩德峯寺下。溪水淸激。傍有石嵯峨。上有數松。四人列坐其下。俄而調鷹人捕兩雉來。仲容兄敎以生啗。復酌數瓢。日已昏矣。김종직(金宗直)
8점필재집(佔畢齋集)佔畢齋集卷之十一詩和仲容兄韻戲大虛。大虛所盻者。名雲英。김종직(金宗直)
* 점필재집(佔畢齋集) 佔畢齋集卷之十五 詩 人日。和仲氏。 김종직(金宗直)
9점필재집(佔畢齋集)佔畢齋集卷之十五詩仲容兄以余將赴召。遙贐以詩。豈知余之病不能進途。次韻奉寄。김종직(金宗直)
* 점필재집(佔畢齋集) 佔畢齋集卷之十五 詩 和仲氏苽堂三咏 김종직(金宗直)
10점필재집(佔畢齋集)佔畢齋集卷二十三詩送仲容兄김종직(金宗直)1789
* 점필재집(佔畢齋集) 佔畢齋文集卷之一 謁夫子廟賦 김종직(金宗直)
11점필재집(佔畢齋集)佔畢齋文集卷之二安陰縣新創鄕校김종직(金宗直)
。不肯出一言以勸守令。乾沒之與。餔歠相遭。弛慢縱臾。各廢其職。觀民風者。雖歲一至焉。而生徒苟備烏巾靑衿。謹於迎侯。則以爲不愆於禮。漫不問學舍之修廢。此所以幾於六十年而無作之者也。我殿下卽位之四年。中原崔侯榮。自晉州通判。移莅于玆。余兄仲容。方爲訓導。道同志合。
.....................
1. 佔畢齋集卷之一 / 詩 / 寄仲容兄 宗裕
丈夫何苦哭途窮。世上紛紛盡賣僮。巢父未歸爲六逸。敬通却笑與三同。
衣冠穰穰東華裏。鐘鼓喧喧北里中。楓葉蘆花馬巖曲。何時着我倚西風。
점필재집 시집 제1권 / [시(詩)] / 중용형 종유 에 부치다[寄仲容兄 宗裕]
장부가 어찌 괴로이 빈곤을 슬퍼하랴만 / 丈夫何苦哭途窮
세상은 온통 동복을 파느라 법석이라오 / 世上紛紛盡賣僮
소보는 육일이 되는 데에 돌아가지 못했고 / 巢父未歸爲六逸
경통과는 삼동이 같은 게 도리어 가소롭네 / 敬通却笑與三同
동화문안에는 학사들이 하많이 있는데 / 衣冠穰穰東華裏
북리에서는 종고 소리 대단히 시끄러워라 / 鐘鼓喧喧北里中
단풍잎지고 갈대꽃 핀 마암의 모퉁이에 / 楓葉蘆花馬巖曲
언제나 내 그 곳에서 서풍에 기대 서 볼꼬 / 何時著我倚西風
[주-D001] 소보는 육일이……돌아가지 못했고 : 소보는 당(唐) 나라 때의 공소보(孔巢父)를 말하고, 육일(六逸)은 속세를 초월한 여섯 사람, 즉 조래산(徂來山)에 숨어 날로 술이나 마시며 지냈던 이백(李白)ㆍ공소보ㆍ한준(漢準)ㆍ배정(裵政)ㆍ장숙명(張叔明)ㆍ도면(陶沔)을 이르는데, 공소보는 특히 일찍 벼슬길에 들어갔다가 뒤에 이회광(李懷光)의 반군(叛軍)에 의해 살해되었다. 《唐書 卷一百六十三》[주-D002] 경통과는 삼동이……도리어 가소롭네 : 경통은 후한(後漢) 때의 고사 풍연(馮衍)의 자이고, 삼동(三同)은 양(梁) 나라 때의 고사 유준(劉峻)의 말에 “나는 풍경통(馮敬通)과 세 가지 같은 점이 있으니, 불우함이 한 가지이고, 강직함이 두 가지이며, 그와 내가 똑같이 투기하는 아내를 둔 것이 세 가지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南史 卷四十九》[주-D003] 동화문 : 궁성(宮城) 동문(東門)의 이름인데, 학사(學士)들이 이 문으로 출입하였다고 한다.[주-D004] 북리 : 은(殷) 나라 주왕(紂王)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음란한 무악(舞樂)의 이름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2. 佔畢齋集卷之七 / 詩 / 三月三日。與晉州判官崔榮,朴盈德,吾仲容兄,兪克己,都生員,鄭生員希韶等。爲禊飮。
年光又是暮春初。花雨晴來化日舒。祓禊豈緣徐氏女。風流空想右軍書。
縱無絲竹堪娛客。喜有溪山不負予。太守扶歸民勿訝。醉中應得夢華胥。
점필재집 시집 제7권 / [시(詩)]
삼월 삼일에 진주 판관 최영, 박영덕, 우리 중용형, 유극기, 도 생원, 정 생원 희소 등과 함께 계사를 닦고 술을 마셨다[三月三日與晉州判官崔榮朴盈德吾仲容兄兪克己都生員鄭生員希韶等爲禊飮]
세월은 어느덧 또 모춘의 초경이 되어 / 年光又是暮春初
꽃비가 개이자 화일이 온화하게 펴이누나 / 花雨晴來化日舒
불계가 어찌 서씨의 딸에게서 인연했으랴 / 祓禊豈緣徐氏女
풍류는 부질없이 우군의 글씨를 상상하네 / 風流空想右軍書
비록 손들을 즐겁게 할 관현악은 없으나 / 縱無絲竹堪娛客
나를 저버리지 않는 산천이 있어 기쁘다오 / 喜有溪山不負予
태수가 많이 취함을 백성들은 놀라지 마오 / 太守扶歸民勿訝
취한 가운데 응당 화서의 꿈을 꾸리라 / 醉中應得夢華胥
[주-D001] 화일 : 만물(萬物)을 화생(化生)시킨다는 뜻에서 늦은 봄의 일기를 이른 말이다.[주-D002] 불계가 …… 인연했으랴 : 불계는 신(神)에게 빌어 재액(災厄)을 떨어버리는 일을 말한다. 진 무제(晉武帝)가 상서랑(尙書郎) 지우(摯虞)에게 상사일에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우는 이유를 묻자, 지우는 “한 장제(漢章帝) 때에 평원(平原)의 서조(徐肇)가 삼월 초하루에 딸 셋을 낳았다가 초사흘에 모두 죽자 마을에서 괴이한 일로 여겨서 모두들 물에 가서 씻으며 액막이를 한 데서 유래했다.”라고 하였고, 상서랑 속석(束晳)은 “옛날에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성을 쌓은 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즐긴 일과 진 소왕이 상사일에 하곡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다가 물속에서 검을 받들고 나온 금인(金人)이 서하(西夏)를 차지할 수 있게 해주겠다 하여 패자가 된 일에서 유래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古今事文類聚 前集 卷8 曲水流觴》[주-D003] 풍류는 …… 상상하네 : 진 목제(晉穆帝) 때 계축년 3월 초에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의 난정(蘭亭)에서 왕희지(王羲之)ㆍ사안(謝安) 등 당대의 명사 수십 명이 계사(禊事)를 치르고 유상곡수(流觴曲水)의 놀이를 하며 풍류를 만끽했는데, 이 때에 왕희지가 난정기(蘭亭記)를 친히 짓고 썼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우군(右軍)은 바로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낸 왕희지를 가리킨다.[주-D004] 화서의 꿈 : 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라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진 것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길몽(吉夢) 또는 그냥 꿈의 뜻으로도 쓰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3. 佔畢齋集卷之八 / 詩
上元日。謁仲容兄於安陰。與安陰明府及李進士祿崇,都訓導永昌,兪克己,韓百源飮。醉還。夜將二鼓。雪月交輝。過灆溪有作。時都,韓三人從還。
天地中間不動塵。嫦娥滕六最精神。緩騎白鳳肝膓冷。吟過孤臺共四人。
醉罷鴒原鷄欲棲。淸光上下屬吾儕。非關興盡仍回棹。莫把灆溪比剡溪。
점필재집 시집 제8권 / [시(詩)]
상원일에 안음에 가서 중용형을 뵙고, 안음현감 및 진사 이녹숭ㆍ훈도 도영창ㆍ유극기ㆍ한백원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해서 돌아오니, 밤은 2경이 되어가는데 눈빛과 달빛이 서로 빛나므로 남계를 지나면서 시를 지었다. 이 때 도 훈도ㆍ유극기ㆍ한백원 세 사람이 따라 돌아왔다[上元日謁仲容兄於安陰與安陰明府及李進士祿崇都訓導永昌兪克己韓百源飮醉還夜將二鼓雪月交輝過灆溪有作時都韓三人從還]
천지의 중간에 먼지 하나 움직이지 않으니 / 天地中間不動塵
달빛과 눈빛이 가장 정신이 쇄락하구나 / 嫦娥滕六最精神
말 느슨히 몰며 백봉의 간장은 썰렁한데 / 緩騎白鳳肝腸冷
네 사람이 함께 고대를 읊으며 지나노라 / 吟過孤臺共四人
우리 형제 잔치 파하니 닭은 홰로 올라가고 / 醉罷鴒原雞欲棲
밝은 달빛은 위아래로 우리들을 따르누나 / 淸光上下屬吾儕
흥이 다하여 배 돌린 것과는 상관 없으니 / 非關興盡仍回棹
남계를 가지고 섬계에 비교하지 말아다오 / 莫把灆溪比剡溪
[주-D001] 백봉의 간장 : 뛰어난 시상(詩想)을 비유한 말. 한(漢) 나라 때의 문장가인 양웅(揚雄)이 흰 봉황[白鳳]을 토(吐)하는 꿈을 꾸고부터 사부(詞賦)가 더욱 뛰어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주-D002] 남계를 가지고……비교하지 말아다오 : 진(晉) 나라 때 왕휘지(王徽之)가 일찍이 산음(山陰)에 살 적에 어느 날 밤 눈이 막 개고 달빛이 청량하자, 문득 섬계(剡溪)에 사는 친구 대규(戴逵)가 생각나므로, 즉시 조그마한 배를 타고 대규의 집을 향하여 밤새도록 가서 그의 집 문앞까지 가서는 들어가지 않고 배를 돌려 되돌아왔다. 그러자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본디 흥이 나서 왔다가 흥이 다하여 되돌아가는 것이니, 어찌 꼭 안도(安道: 대규의 자)를 만나볼 것이 있겠는가.”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八十》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4. 佔畢齋集卷之八 / 詩 / 仲容兄詠落梅一首。自云。復詠學士樓前新柳。自午至晡。未得一聯。不覺發憤。欲輟餐。弟用其韵吟呈。
臨池濯濯自知時。免被征人浪折枝。唯有嬌春情緖在。憑風繅出萬金絲。
점필재집 시집 제8권 / [시(詩)]
중용형이 낙매 한 수를 읊고 스스로 이르기를 “다시 학사루 앞에 있는 새 버들을 읊으려고 했으나 정오부터 석양까지 한 연구도 얻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분이 치밀어서 밥도 먹고 싶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아우가 그 운을 사용하여 읊어 바치다[仲容兄詠落梅一首自云復詠學士樓前新柳自午至晡未得一聯不覺發憤欲輟餐弟用其韻吟呈]
못 가의 고운 버들이 절로 때를 아는데 / 臨池濯濯自知時
나그네가 부질없이 가지 꺾는 걸 면하였네 / 免被征人浪折枝
오직 아리따운 봄의 정서가 있어서 / 唯有嬌春情緖在
바람 의지해 수많은 금실을 켜내누나 / 憑風繅出萬金絲
[주-D001] 나그네가 부질없이 가지 꺾는 걸 : 한(漢) 나라 때의 장안(長安) 사람들이 손님을 보낼 적에는 반드시 패교(霸橋)까지 배웅해 가서 버들가지를 꺾어 송별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5. 佔畢齋集卷之九 / 詩 / 和仲容兄點風臺韵
杏壇佳興向來新。臺上時時墊角巾。水氣侵膚涼起栗。林光搖酒綠生鱗。
微官自喜交游淡。長嘯誰知樂意眞。應笑領原懷五斗。簿書叢裏未抽身。
점필재집 시집 제9권 / [시(詩)] / 중용형의 점풍대 운에 화답하다[和仲容兄點風臺韻]
행단의 아름다운 흥취 향래에 새로워라 / 杏壇佳興向來新
대 위에서 때때로 두건의 각이 꺾이도다 / 臺上時時墊角巾
물 기운 살에 닿으니 서늘하여 소름이 일고 / 水氣侵膚涼起栗
숲 빛이 술에 흔들리니 푸른 비늘 생기누나 / 林光搖酒綠生鱗
미관이라 절로 교유가 담박함이 기쁘거니와 / 微官自喜交遊淡
길이 읊으니 즐거운 참 뜻을 누가 알리오 / 長嘯誰知樂意眞
응당 이 아우가 오두미 녹봉에 연연하여 / 應笑鴒原懷五斗
부서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 웃으리라 / 簿書叢裏未抽身
[주-D001] 두건의 각이 꺾이도다 : 풍류 있는 모습을 형용한 말. 후한 때 고사(高士)인 곽태(郭太)가 일찍이 비를 맞아 두건의 일각(一角)이 꺾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일부러 두건의 일각을 꺾어서 임종건(林宗巾: 임종은 곽태의 자)이라고까지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6. 佔畢齋集卷之十一 / 詩 / 德峯寺。與仲容兄,克己,伯玉同賦。
水石自縈帶。禪扉塵思醒。雪華蒙嶽頂。栢黛透窓櫺。
未有僧燒佛。唯應虎聽經。棲鴉迫歸騎。故故愧山靈。
점필재집 시집 제11권 / [시(詩)] / 덕봉사에서 중용형ㆍ극기ㆍ백옥과 함께 짓다[德奉寺與仲容兄克己伯玉同賦]
수석이 절로 띠처럼 둘러있으니 / 水石自縈帶
절 사립에 속세의 생각이 깨누나 / 禪扉塵思醒
눈 꽃은 산꼭대기에 덮여 있고 / 雪華蒙嶽頂
푸른 잣나무는 창 틈으로 보이네 / 柏黛透窓欞
부처 불태운 중은 있지 않으나 / 未有僧燒佛
응당 불경 듣는 범은 있으리 / 唯應虎聽經
저녁 까마귀가 돌아갈 길 재촉하니 / 棲鴉迫歸騎
한사코 산신령께 부끄럽구나 / 故故愧山靈
[주-D001] 부처 불태운 중 : 중국의 고승(高僧) 단하(丹霞) 천연(天然)이 혜림사(慧林寺)에 이르렀을 때 마침 큰 추위를 만났다. 그가 법당에 들어가보니, 부처가 목불(木佛)이므로, 이를 도끼로 쪼개서 불을 놓고 있자, 그 절의 주인이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힐문하니, 단하가 막대기로 재를 뒤적이면서 “석가(釋迦)의 몸은 화장하여 많은 사리(舍利)가 나왔다기에, 나도 이 부처에게서 사리를 받으려 하오.” 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하니, 단하가 “사리가 안 나올 바에야 나무 토막이지 무슨 부처님이오?”라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2] 불경 듣는 범은 있으리 : 범이 불경 읽는 소리를 듣는다는 뜻인데, 육귀몽(陸龜蒙)의 고원사시(孤園寺詩)에 의하면 “암석 위에는 진리 깨친 사람이요, 창문 앞에는 불경 듣는 범이로다[石上解空人 窓前聽經虎]”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7. 佔畢齋集卷之十一 / 詩 / 德峯寺下。溪水淸激。傍有石嵯峨。上有數松。四人列坐其下。俄而調鷹人捕兩雉來。仲容兄敎以生啗。復酌數瓢。日已昏矣。
金地寒飈中酒出。嵌岩落日割鮮還。一年一度每a012_293d如此。誰謂遨頭不得閑。
점필재집 시집 제11권 / [시(詩)] / 덕봉사 아래 계곡의 맑은 물이 세차게 흐르는데, 곁에는 우뚝한 바위가 있고 그 위에는 소나무 두어 그루가 있어, 네 사람이 그 밑에 벌여 앉았노라니, 이윽고 매를 부리는 사람이 꿩 두 마리를 잡아왔으므로, 중용형이 날것으로 먹자고 하여 마침내 다시 술 두어 바가지를 마시고 나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德峯寺下溪水淸激傍有石嵯峨上有數松四人列坐其下俄而調鷹人捕兩雉來仲容兄敎以生啗復酌數瓢日已昏矣]
덕봉사 찬바람 속에 술에 취해 나와서 / 金地寒飇中酒出
깊은 골짝 지는 해에 꿩고기 먹고 돌아왔네 / 嵌巖落日割鮮還
해마다 한 차례씩 매양 이와 같이 하거늘 / 一年一度每如此
태수가 한가롭지 못하다고 그 누가 말하는고 / 誰謂遨頭不得閑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8. 佔畢齋集卷之十一 / 詩 / 和仲容兄韻戲大虛。大虛所盻者。名雲英。
上元宮裏掌書仙。不要纏頭錦數千。忽遇玉皇香案吏。玄霜擎倚綵雲邊。
점필재집 시집 제11권 / [시(詩)] / 중용형의 운에 화답하여 대허를 희롱하다. 대허가 관계했던 기녀의 이름이 운영이다[和仲容兄韻戲大虛大虛所盻者名雲英]
상원궁 안에서 문서 맡은 신선은 / 上元宮裏掌書仙
비단 수천 필의 화대를 바라지 않는데 / 不要纏頭錦數千
갑자기 옥황상제의 향안리를 만나서 / 忽遇玉皇香案吏
현상을 떠받들고 채운 가에 기대섰구나 / 玄霜擎倚綵雲邊
[주-D001] 상원궁 안에서……맡은 신선 : 문재(文才)가 있는 기녀(妓女)를 비유한 말. 상원은 선녀(仙女)인 상원부인(上元夫人)을 가리키고, 문서 맡은 신선이란, 옛날 장안(長安)의 한 기녀가 문필(文筆)이 관중(關中)의 제일이었으므로 당시에 그를 ‘문서 맡은 신선[掌書仙]’이라 호칭했던 데서 온 말인데, 임생(任生)은 그에게 시를 지어 부치기를 “옥황전 위에서 문서를 맡던 신선이, 한번 세속 마음에 물들어 구천을 내려왔네[玉皇殿上掌書仙 一染塵心下九天]”라고 했다 한다.
[주-D002] 옥황상제의 향안리 : 임금 곁에 시종(侍從)하는 문사(文士)를 뜻함. 당(唐) 나라 원진(元稹)의 시에 “내 본디 옥황상제의 향안 받들던 아전이라, 쫓겨나서도 봉래산 가까이 살게 되었네.[我是玉皇香案吏 謫居猶得近蓬萊]”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 현상 : 선약(仙藥)의 이름임.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佔畢齋集卷之十五 / 詩 / 人日。和仲氏。
七莢新春律。三家去歲村。金花驚節轉。霜鬂怯年尊。
落砌泉聲碎。烘窓日色溫。韶光何衮衮。懷抱向誰論。
점필재집 시집 제15권 / [시(詩)] / 인일에 중씨에게 화답하다[人日和仲氏]
일곱 명협은 새 봄의 율력이요 / 七莢新春律
세 집은 지난해의 마을이로다 / 三家去歲村
금화는 시절의 변천에 놀랍고 / 金花驚節轉
흰머리는 나이 많아진 게 겁나누나 / 霜鬢怯年尊
섬돌에 떨어진 샘물 소리는 부서진 듯하고 / 落砌泉聲碎
창에 쬐인 햇빛은 따스하구려 / 烘窓日色溫
봄 경치가 이 얼마나 성대한가마는 / 韶光何袞袞
이 회포를 누구와 함께 논해 볼꼬 / 懷抱向誰論
[주-D001] 인일 : 음력 정월 초이렛날의 아칭(雅稱)임.
[주-D002] 일곱 명협 : 명협은 요(堯) 임금 때 조정의 뜰에 난 서초(瑞草)의 이름인데, 매월 초하룻날부터 15일까지는 날마다 한 잎씩 나서 자라고, 16일부터 그믐까지는 다시 매일 한 잎씩 져서 다하였으므로, 이것을 근거하여 달력을 만들었다고 하는 고사에서, 즉 정월 초이레가 되었음을 이른 말이다.
[주-D003] 금화 : 음력 정월 초이레, 즉 인일(人日)에 부인(婦人)들이 머리에 장식하는 채색 조화(造花)를 말한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9. 佔畢齋集卷之十五 / 詩 / 仲容兄以余將赴召。遙贐以詩。豈知余之病不能進途。次韻奉寄。
老大襟懷易自傷。鴒原一日九回膓。宦情草草同雞肋。雲路冥冥送鴈行。詩喩二虫蘇內翰。琴傳一女蔡中郞。會須杖策凝川曲。掉盡觥船擘蠏黃。
점필재집 시집 제15권 / [시(詩)] / 중용 형이 내가 장차 소명에 응하여 가리라 생각하고 멀리 시로써 전별하였으니, 어찌 내가 병 때문에 길을 나서지 못하는 줄을 알겠는가. 차운하여 받들어 부치다[仲容兄以余將赴召遙贐以詩豈知余之病不能進途次韻奉寄]
늘그막의 회포는 절로 상하기 쉬운 것이라 / 老大襟懷易自傷
형제간 걱정 하루에도 아홉 번씩 창자를 회전하네 / 鴒原一日九回腸
벼슬할 뜻은 초초하여 닭갈비 같거니와 / 宦情草草同雞肋
구름의 길엔 아득히 기러기떼를 보내도다 / 雲路冥冥送雁行
시는 소 내한의 이충시를 깨달았을 뿐이요 / 詩喩二蟲蘇內翰
거문고는 채 중랑의 한 딸에게 전하였네 / 琴傳一女蔡中郞
장차 의당 지팡이 짚고 응천곡으로 나가서 / 會須杖策凝川曲
큰 술잔 저어 마시며 게장도 쪼개 먹어야지 / 掉盡觥船擘蟹黃
[주-D001] 시는 소 내한의……깨달았을 뿐이요 : 소 내한(蘇內翰)은 곧 한림학사(翰林學士) 소식(蘇軾)을 가리킨 것으로, 소식의 이충시(二蟲詩)에 “그대는 수마아를 보지 못했나 흐르는 물을 걸음걸음 거슬러 오르되 큰 강은 날마다 동으로 천리를 흐르건만 이 벌레는 팔짝팔짝 뛰어 길이 여기에 있다오 그대는 안람퇴를 보지 못했나 폭풍을 따라 급히 나는데 바람 따라 한번 가면 어디에서 묵는지 바람 맞으면 다시 쑥대밭으로 떨어진다오 두 벌레의 어리석고 지혜로움을 모두 헤아리지 못하니 강가에서 이것을 아는 사람 없음을 한번 웃노라[君不見水馬兒 步步逆流水 大江東流日千里 此蟲趯趯長在此 君不見鷃濫堆 決起隨衝風 隨風一去宿何許 逆風還落蓬蒿中 二蟲愚智俱莫測 江邊一笑無人識]” 한 데서 온 말이다. 《蘇東坡集 卷二十一》
[주-D002] 거문고는……전하였네 : 채 중랑(蔡中郞)은 후한 때 중랑장을 지낸 채옹(蔡邕)을 이르는데, 그의 딸 염(琰)은 어려서부터 음률(音律)에 통하여 9세 때에 자기 아버지가 거문고를 탈 적에 줄이 끊어지는 소리를 듣고는 어느 줄이 끊어졌음을 알아맞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佔畢齋集卷之十五 / 詩 / 和仲氏苽堂三咏
池
窄窄軒窓澹澹池。烟嚬風皺雨餘姿。無端蘸却苽a012_328b堂老。白髮蒼顏帶影嬉。
葵
殿春寧要衆芳知。見拔公儀亦一奇。似爲幽人稱素節。日中頩笑雨中欹。
菊
煌煌金靨耀陶廬。園裏群芳揔不如。一夜靑姨弄鉛屑。何曾得得伴幽居。
점필재집 시집 제15권 / [시(詩)] / 중씨의 과당 삼 영에 화답하다[和仲氏苽堂三咏]
○ 지(池)
비좁은 헌창 아래 맑디맑은 못에는 / 窄窄軒窓澹澹池
바람 연기에 잔주름 일어라 비 뒤의 자태로세 / 煙嚬風皺雨餘姿
까닭없이 과당 늙은이 그림자를 담그어라 / 無端蘸却苽堂老
흰 머리 푸른 낯으로 그림자와 함께 놀이하네 / 白髮蒼顔帶影嬉
○ 규(葵)
봄 삼월에 어찌 다른 꽃처럼 알아주길 바라랴만 / 殿春寧要衆芳知
공의에게 뽑힌 것또한 한 가지 기이한 일이로다 / 見拔公儀亦一奇
은자를 위해 결백한 지조에 맞추기나 하듯이 / 似爲幽人稱素節
일중에는 활짝 웃고 우중에는 기울이누나 / 日中頩笑雨中欹
○ 국(菊)
반짝반짝한 금빛 보조개 도려에 빛나니 / 煌煌金靨耀陶廬
정원의 여러 꽃들이 다 이만 못하도다 / 園裏群芳摠不如
어느 날 밤 서리 귀신이 흰 가루를 뿌리거든 / 一夜靑姨弄鉛屑
어찌 자유로이 은자와 짝한 적이 있었던고 / 何曾得得伴幽居
[주-D001] 공의에게 뽑힌 것 : 공의는 전국 시대 노(魯) 나라 공의휴(公儀休)를 말하는데, 그가 노 나라 재상이 되었을 적에 자기의 채소를 먹어 보고는 맛이 좋으므로, 자기 채소밭의 아욱을 모두 뽑아 버렸던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一百十九》
[주-D002] 도려 : 도잠(陶潛)의 집이란 뜻으로 곧 은사의 집을 의미하는데, 도잠의 음주시(飮酒詩)에 “집을 인경에 지어 살지만 거마의 시끄러움 없어라 …… 동쪽 울밑에서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보노라[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 采菊東籬下 悠然見南山]”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10. 佔畢齋集卷二十三 / 詩 / 送仲容兄
同經自閱墻。今日俱老大。名位弟居前。叨逢時運泰。八座幸蟬聯。顧影慚冠帶。每懷鴒原恨。榮悴難倚賴。白首程驛官。焉能免霑丐。兄雖處之安。初服實狼狽。秋風迫庭樹。汲汲回㫌旆。病阻良夜話。辜負千里會。送行不出門。何況江郊外。生別亦呑聲。愁雲增曖曖。但願善自保。才名猶未艾。
점필재집 시집 제23권 / [시(詩)] / 중용 형을 보내다[送仲容兄]
서로 다툴 때부터 함께 지냈는데 / 同經自鬩墻
지금은 모두 나이가 많아졌네 / 今日俱老大
명성과 지위를 아우가 앞섰으니 / 名位弟居前
외람되이 좋은 운수 만난 때문이로다 / 叨逢時運泰
팔좌는 다행스럽게 이어졌지만 / 八座幸蟬聯
나의 분수엔 관대가 부끄러워라 / 顧影慚冠帶
매양 영원의 한을 생각하노니 / 每懷鴒原恨
영췌간에 서로 의뢰하기 어렵구나 / 榮悴難倚賴
백수로 정역의 관원이 되었으니 / 白首程驛官
어떻게 더럽힘을 면할 수 있으랴 / 焉能免霑丐
형은 비록 편안하게 대처하지만 / 兄雖處之安
초복에는 실로 낭패가 되었다오 / 初服實狼狽
가을 바람이 뜨락 나무에 불어오니 / 秋風迫庭樹
서둘러 깃발을 돌려 떠나는데 / 汲汲回旌旆
병으로 깊은 밤의 대화를 못 나누어 / 病阻良夜話
천리 길의 만남을 저버렸네그려 / 辜負千里會
전송할 땐 문밖도 나가지 못했으니 / 送行不出門
더구나 강교 밖이야 말해 뭐하랴 / 何況江郊外
생이별 또한 슬픔을 감당 못하니 / 生別亦呑聲
시름겨운 구름이 더욱 흐릿하구나 / 愁雲增曖曖
다만 스스로 잘 보중하기 바라노니 / 但願善自保
재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오 / 才名猶未艾
[주-D001] 서로 다툴 때 :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형제끼리 집안에서는 다투지만, 밖에서는 서로 감싸 주네[兄弟鬩于墻 外禦其務]”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곧 어렸을 때를 가리킨 말이다.
[주-D002] 팔좌 : 한대(漢代)에 육조(六曹)의 상서(尙書)와 일령(一令)ㆍ일복(一僕)을 합해서 일컫는 말로, 즉 판서(判書) 지위를 뜻한다.
[주-D003] 영원의 한 : 할미새는 항상 꼬리를 위아래로 흔들어 마치 화급한 일을 고하는 것 같으므로, 전하여 형제가 위급한 때에 서로 돕는 비유로 쓰이는 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할미새가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급난한 때를 당했도다[鶺鴒領在原 兄弟急難]”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4] 초복 : 사환(仕宦)하기 이전에 입던 옷을 가리킨 말로, 전하여 은거(隱居)하려는 지조를 의미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
* 佔畢齋文集卷之一 / 謁夫子廟賦
景泰甲戌秋。嚴君。自成均司藝。出爲星州敎授。乙亥春。余及仲氏。往省焉。因留黌序讀書。携諸子。入禮夫子廟。見大聖以下四a012_398d聖十哲。皆塑以土。歲月已遠。黯黲如入古寺。見千歲偶人。予愕然不敢指視。以爲大聖大賢如有靈。其肯依此而受享乎。於是。咎始作者之無稽。書此賦。遺諸子。俾改以木主云。賦曰。
歲旃蒙之首時。余鯉趨乎玆黌。羣狂簡之君子。瞻夫子之廟庭。撫中唐之文杏。欣時雨之敷榮。闢金鐍以磬折。起闕里之遐想。入余跽而仰視。忽盱睢以戃惘。何於穆之淸廟。塼泥土而肖像。無異夫浮屠之宮兮。安得髣髴乎東門之堯顙。矧歲久而日a012_399a逖。宜繪綵之漫喪。冕旒十二。網蝥蟲兮。河目海口。塵雝雝兮。赤白陁剝。苔蝕山龍兮。蝸涎畫字。暈于衣裳兮。塊四聖與十哲。亦東西之相望。或冠倒而笏墮。或眸矐而指亡。縱後世之繕塗。猶瘢胝與瘍瘡。匪聖靈之宜宅。慨廟貌之不臧。雖籩豆之潔蠲。恐鬼物之旁窺。昔夫子之周流。志不陋夫九夷。我東海之文明。曾仁賢之所治。苟尊崇之有道。應夫子之來綏。况夫子之精神。譬如水之在地中。求之則在。道之斯通。何必靦形像而禋祀。冀肹蠁之昭融。範黃金猶不可爲。而又土木之是肖。始作俑之a012_399b無稽。豈不至今其可誚。喟聖神之履運。煥頖制之復古。妥木主以釋菜。用以彰夫昭報。光聖德於不顯。體姬室之䂓模。何必重夫改作。尙因襲乎前圖。誶曰。南山何有。侯栗蓁蓁兮。培陽擁陰。風露流津兮。剖而作主。肌理均兮。用周人栗。可以妥夫子之神兮。亟撤土塑。返黃祗兮。毋令魑魅。有憑依兮。明告君子。余言不欺兮。聖人復起。謂余有知兮。
점필재집 문집 제1권 / 부(賦) / 알부자묘부(謁夫子廟賦)
경태(景泰 명 경제(明景帝)의 연호. 1450~1457) 갑술년 7월에
단종 | 2 | 1454 | 갑술 | 景泰 | 5 | 24 | 봄, 星州敎授로 나간 부친을 仲兄과 함께 찾아 뵙고 黌序에 머물러 독서하다. 이때 〈謁夫子廟賦〉를 지어 조정에 陳啓, 位版을 木主로 개조하게 하다. |
엄군(嚴君)께서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성주 교수(星州敎授)가 되어 나가셨으므로, 을해년 봄에 내가 중씨(仲氏)와 함께 가서 뵙고, 인하여 그 곳 향교(鄕校)에 머물러 글을 읽었다. 그런데 제자(諸子)를 데리고 부자(夫子)의 사당에 들어가 예배하고 보니, 대성(大聖) 이하 사성(四聖)과 십철(十哲)이 모두 소상(塑像)으로 되었는데, 세월이 오래됨으로 인하여 어둠침침한 것이 마치 고사(古寺)에 들어가 천년 된 우인(偶人)을 본 것과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서 감히 손가락으로 가리키지도 못하면서 ‘대성과 대현(大賢)들이 만일 영혼이 있다면 어찌 여기에 의탁하여 향사(享祀)를 받겠는가.’ 생각하고는, 이에 맨 처음 이것을 만든 사람의 터무니없는 행위를 나무랐다. 그리고 이 부(賦)를 지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목주(木主)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 부는 다음과 같다.
해 을해년의 봄을 당하여 / 歲旃蒙之首時
내 이 학교에서 아버님께 수업을 받으며 / 余鯉趨乎玆黌
수많은 광간의 군자들을 / 群狂簡之君子
부자의 묘정에서 우러러보았네 / 瞻夫子之廟庭
사당 마당의 문행나무를 어루만지니 / 撫中唐之文杏
단비에 잎이 활짝 피어 싱싱하여라 / 欣時雨之敷榮
자물쇠 열고 들어가 절을 올리니 / 闢金鐍以磬折
그 옛날 궐리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네 / 起闕里之遐想
내 들어가 꿇어앉아 우러러보고는 / 入余跽而仰視
문득 눈 부릅뜨고 낙심하노니 / 忽盱睢以戃惘
어찌 이 그윽하고 깨끗한 사당에 / 何於穆之淸廟
진흙을 뭉쳐 소상을 만든단 말인가 / 塼泥土而肖像
부도의 궁전과 다를 바가 없거니 / 無異夫浮屠之宮兮
어떻게 동문의 요상에 방불이나 할손가 / 安得髣髴乎東門之堯顙
더구나 해가 오래되고 날이 멀어졌으니 / 矧歲久而日逖
의당 소상의 채색은 마멸됐으려니와 / 宜繪綵之漫喪
면류관 열두 줄에는 / 冕旒十二
해충들이 그물을 쳐 놓았고 / 網蝥蟲兮
하목과 해구에는 / 河目海口
먼지가 가득 쌓였도다 / 塵雝雝兮
채색이 다 벗겨 떨어지니 / 赤白陀剝
이끼는 산룡을 침식하고 / 苔蝕山龍兮
달팽이 침으로는 글자를 그려 / 蝸涎畫字
의상에 여기저기 얼룩졌도다 / 暈于衣裳兮
사성과 십철의 소상들도 / 塊四聖與十哲
동서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는데 / 亦東西之相望
혹은 관이 넘어가고 홀이 떨어졌으며 / 或冠倒而笏墮
혹은 눈이 빠지고 손가락이 없기도 하네 / 或眸矐而指亡
비록 후세에 도장을 했다는 것도 / 縱後世之繕塗
오히려 여기저기 흠집투성이라 / 猶瘢胝與瘍瘡
성현의 영령이 의지할 곳 아니니 / 匪聖靈之宜宅
사당이 좋지 못함이 개탄스럽네 / 慨廟貌之不臧
비록 제기는 깨끗하다 하더라도 / 雖籩豆之潔蠲
귀물이 곁에서 엿볼까 염려로다 / 恐鬼物之旁窺
옛날 부자께서 천하를 주류할 적에 / 昔夫子之周流
구이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았었고 / 志不陋夫九夷
우리 동해 지역의 문명은 / 我東海之文明
일찍이 성현들이 다스린 곳이니 / 曾仁賢之所治
진실로 존중함을 도리가 있게 하면 / 苟尊崇之有道
응당 부자께서 편히 흠향하시리라 / 應夫子之來綏
더구나 부자의 정신이야말로 / 況夫子之精神
비유컨대 물이 땅에 있는 것과 같으니 / 譬如水之在地中
구하는 곳엔 반드시 있어 / 求之則在
도가 여기에서 통하거늘 / 道之斯通
어찌 꼭 형상을 보고 제사하여 / 何必靦形像而禋祀
매우 밝게 흠향하기를 바란단 말인가 / 冀肸蠁之昭融
황금으로 본을 뜬대도 될 수가 없는데 / 範黃金猶不可爲
더구나 토목으로 닮게 한단 말인가 / 而又土木之是肖
처음 만든 자의 터무니없는 행위를 / 始作俑之無稽
어찌 지금 나무라지 않을 수 있으랴 / 豈不至今其可誚
아 성신이 좋은 운수를 만났으니 / 喟聖神之履運
문묘 제도를 환연히 복고시키어 / 煥頖制之復古
목주를 봉안하고 석채를 올려서 / 妥木主以釋菜
이로써 밝은 보답을 현창시키리 / 用以彰夫昭報
드러나지 않은 성덕을 빛내어 / 光聖德於不顯
희실의 규모를 의당 본받아야지 / 體姬室之規模
어찌 꼭 고쳐 만들기를 중난케 여기어 / 何必重夫改作
아직도 이전 것만 인습한단 말인가 / 尙因襲乎前圖
고하노라 남산에는 무엇이 있느뇨 / 誶曰南山何有
좋은 밤나무가 무성하도다 / 侯栗蓁蓁兮
양으로 배양하고 음으로 옹호하며 / 培陽擁陰
바람과 이슬로 윤택하게 하였네 / 風露流津兮
쪼개어 신주를 만들면 / 剖而作主
나무의 결도 똑 고르리니 / 肌理均兮
주인의 밤나무를 써야만이 / 用周人栗
부자의 신령을 편케 할 수 있으리라 / 可以妥夫子之神兮
속히 흙의 소상은 훼철하여 / 亟撤土塑
대지로 돌려보내서 / 返黃祗兮
온갖 잡귀들로 하여금 / 毋令魑魅
의지할 곳이 있게 하지 말아야지 / 有憑依兮
군자들에게 밝게 고하노니 / 明告君子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오 / 余言不欺兮
성인이 다시 나오더라도 / 聖人復起
나더러 앎이 있다고 하리라 / 謂余有知兮
[주-D001] 광간 : 뜻이 커서 행실이 뜻을 따르지 못하나, 진취(進取)의 기상이 풍부함을 이름. 공자(孔子)가 진(陳)에 있을 적에 이르기를 “돌아가야겠다. 오당(吾黨)의 소자(小子)들이 광간하여 빛나게 문채를 이루긴 하나 그것을 재단할 줄 모르는도다.”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公冶長》
[주-D002] 궐리 : 공자(孔子)가 탄생한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주-D003] 동문의 요상 : 요상은 요 임금의 이마란 뜻인데, 공자가 일찍이 위(衛) 나라의 동문을 나가자, 고포자경(姑布子卿)이 공자를 맞이하여 뵈므로, 자공(子貢)이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 스승이 어떠한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요 임금의 이마와 순(舜) 임금의 눈과 우(禹) 임금의 목과 고요(皐陶)의 입을 지니었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주-D004] 면류관 열두 줄 : 천자(天子)의 면류관은 앞뒤로 늘어뜨린 줄이 각각 열둘씩이고, 제후는 각각 아홉씩인데, 공자의 소상에는 천자의 면류관을 씌웠으므로 이른 말이다.
[주-D005] 하목과 해구 : 하목은 눈이 우묵하게 들어간데다 위 아래가 바르고 편평하면서 길쭉함을 말하고, 해구는 입이 매우 큰 것을 이르는데, 이는 다 공자의 상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6] 산룡 : 곤룡포(袞龍袍)에 산과 용의 모양을 문식(文飾)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7] 구이를……않았었고 : 구이는 동방에 있는 아홉 종류의 오랑캐이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구이의 지역에 가서 살려고 하자, 혹자가 “비루한 곳에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가 살면 무슨 비루함이 있으리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罕》
[주-D008] 목주 : 밤나무[栗]로 만든 신주(神主)를 말한다.
[주-D009] 희실의……본받아야지 : 드러나지 않은 성덕(成德)이란 은미하고 심원한 주 문왕(周文王)의 덕을 이른 말로, 《시경(詩經)》 주송(周頌) 열문(烈文)에 “드러나지 않은 덕을 사방의 제후들이 본받는다.[不顯惟德 百辟其刑之]”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공자를 비유한 것이다. 희실(姬室)은 희성(姬姓)인 주(周) 나라를 가리킨 것으로 희실의 규모를 본받는다는 것을 바로 주 문왕에게 맨 처음 목주(木主)를 사용했으므로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7
.....................
11. 佔畢齋文集卷之二 / 安陰縣新創鄕校
朝鮮受帝命。尹東夏。首以闢庠序。育人才爲務。雖窮陬遐裔。莫不有鄕校。由是。文明之治。度越前古。安陰爲縣。介居山谷。實小且僻。然其登帳之戶。殆一千有奇。自感陰徙治于利安。且已五十有七年。爲邑如是其久也。生齒如是其繁也。而學舍至今未克建。生徒貿貿。僑寓或僧舍。或縣司。前後凡六所。最後。依於縣宰之廢衙。湫隘頹頓。非惟師生之次無別。先聖先師憑神之版。亦且束之屛處。每春秋釋奠。始出而陳之以祭。嗚呼。何其慢易之至於斯耶。原厥所以。守令則曰。簿書期會。不獲譴於監司。足矣。吾不知其他。學官則曰。饔飧供具。屬饜足矣。營繕非吾力所及。不肯出一言以勸守令。乾沒之與。餔歠相遭。弛慢縱臾。各廢其職。觀民風者。雖歲一至焉。而生徒苟備烏巾靑衿。謹於迎侯。則以爲不愆於禮。漫不問學舍之修廢。此所以幾於六十年而無作之者也。我殿下卽位之四年。
中原崔侯榮。自晉州通判。移莅于玆。余兄仲容。方爲訓導。道同志合。語及于是。慨然有營建之志。
于時。朝廷有旨。令諸道。修葺學校。兄語崔曰。時不可失。卜地於縣治之北三里許。得厚岩寺舊址。林麓幽邃。面勢隆曠。東西二川。鏘鳴金石。合流于巽維。宛若泮水之制。兄又語崔曰。地不可失。遂欣然諧協。須材之夫。發於儒吏之戶。陶土之工。徵諸遊手之徒。募得良民許遠。先立夫子廟。規制宏敞。
是癸巳之秋八月也。
未幾。崔侯政成而還朝。平陽申侯允完繼來。其程督一如崔侯。左齋右庖。前置修軒。明倫之堂。端據其後。而東西夾室。具焉。乃塗其雘。周以崇墉。
告成于甲午之夏四月。
성종 | 5 | 1474 | 갑오 | 成化 | 10 | 44 | 茶種을 심어 供上하다. 〈茶園詩〉를 짓다. |
又作十二位之神主。奉安新廟。旣舍采已。大合縣之耆老而落之。隣邑文士。咸來觀禮。
余以兄之故。亦往賓席。酒一行。進諸生而諗之曰。吾東方。家塾黨庠。無其制。而民益蚩蠢。幸値聖明。十室之邑。皆有學舍。以敎子弟。每三載。貢其俊秀者。二三子之邑。獨闕焉無聞。豈徒長民者之責。諸君與有愧焉。今也。連得賢宰。而吾兄無一權力。惟以祗順上意。誘導後進爲心。贊二侯。終始經度。百年闕典。一朝而新。使諸君春秋弦誦。有游息藏修之所。雖欲怠於爲學。容何辭焉。諸生應曰。諾。旣而。又告之曰。爲學有本原。孝弟是也。孝弟也者。無所不在。諸君在家。則有家廟之事。於校則有奠采之禮。其周旋升降。灌𨡜獻酬。於是乎齋其誠。在家則有父母。於校則有師長。其省謁唯諾。服勤諫諍。於是乎比其敬。在家則有兄弟。於校則有朋友。其友愛恭順。麗澤摩勵。於是乎推其信。苟能是。則學不出於黌序。而德成藝立。他日。興於鄕。立於朝。擧此而措之。無所往而不綽綽然矣。諸生復應曰。敢不書紳。以毋墜先生之命。遂記于壁。以擬夫白鹿洞䂓云。
점필재집 문집 제2권 / 기(記) / 안음현에 향교를 새로 창건하다[安陰縣新創鄕校]
조선(朝鮮)이 황제의 명을 받아 동하(東夏 동방 화하(東方華夏))를 다스리면서 으뜸으로 학교를 개설하여 인재(人才) 양성하는 것을 급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아무리 궁벽한 고장의 먼 곳 백성들에게도 향교(鄕校)가 있지 않은 데가 없어, 이로 말미암아 문명(文明)의 치적(治績)이 전고(前古)를 초월하였다.
그런데 안음현(安陰縣)은 산골짜기에 끼여 있어 실로 작고 또 궁벽하다. 그러나 그 민적(民籍)에 오른 호수(戶數)만도 거의 천여 호가 되고, 감음현(感陰縣)을 이안현(利安縣)으로 옮겨 다스린 지도 벌써 57년이나 되었다. 고을은 이토록 오래되었고, 인구는 이토록 번성해졌는데도 지금까지 학사(學舍)를 건립하지 못하여 우매한 생도(生徒)들이 승사(僧舍)나 혹은 현사(縣舍) 등 전후로 모두 여섯 군데에서 붙여 있다가, 최후에는 현재(縣宰)의 폐아(廢衙)에 의지해 있는데, 이 곳은 땅이 낮고 좁은데다 건물도 퇴락하였다. 그래서 스승과 생도의 자리만 구별이 없을 뿐 아니라, 선성(先聖), 선사(先師)의 위판(位版) 또한 묶어서 밀쳐 두었다가 매양 봄, 가을의 석전(釋奠) 때에야 비로소 꺼내서 진열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아, 어쩌면 만홀하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 까닭을 추구해 보면 이러하다. 수령(守令)은 곧 “관청의 직무 수행에 있어 감사(監司)로부터 견책만 받지 않으면 족하다. 나는 기타의 일은 알 바 아니다.”는 태도이고, 학관(學官)은 곧 “조석(朝夕)의 음식만 배부르게 먹으면 족하다. 건물을 짓거나 수리하는 일은 내 힘이 미칠 바가 아니다.”는 태도에서, 한 마디 말이나마 꺼내서 수령에게 권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재(民財)를 마구 취렴(聚斂)하는 수령과 음식이나 탐하는 학관이 서로 만나서 해이하고 완만하게 서로 부추기면서 각기 자기의 직무를 유기해버렸다.
그런데 민풍(民風)을 관찰하는 이는 비록 해마다 한 번씩 오기는 하지만, 생도들이 만일 오건(烏巾)과 청금(靑衿)을 착용하고 관찰사를 맞이하는 데에 공근(恭謹)하기만 하면 곧 예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여기고, 학사(學舍)의 수폐(修廢)에 관해서는 전혀 묻지도 않았으니, 이런 때문에 거의 60년 동안이나 학사를 지은 자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전하께서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에
중원(中原) 최후 영(崔侯榮)이 진주 통판(晉州通判)에서 이 곳으로 옮겨 보임되었는데, 나의 형 중용(仲容)이 이 때 훈도(訓導)로 있으면서 최후와 서로 도가 같고 뜻이 합하여 이 일을 서로 언급한 나머지 개연히 향교를 영건(營建)할 뜻을 갖게 되었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 분부가 내려 제도(諸道)로 하여금 학교를 수리하게 하였으므로, 형이 최후에게 “이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는, 현(縣) 소재지의 북쪽으로 3리쯤 되는 곳에 땅을 가려 후암사(厚巖寺)의 옛 터를 얻었는데, 산자락의 숲은 깊고 그윽하고 면세(面勢)는 높고 탁 트이었으며, 동쪽 서쪽의 두 냇물은 콸콸 흘러서 동남방에서 합류(合流)되어 완연히 반수(泮水)의 제도와 같았다.
그러자 형은 또 최후에게 “땅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고, 마침내 흔연히 서로 합의하여, 재목 실어나르는 인부(人夫)는 유리(儒吏)의 가호(家戶)에서 징발하고, 흙 바르는 인부는 놀고 지내는 무리들에서 동원하였으며, 양민(良民) 허원(許遠)을 뽑아서 먼저 부자묘(夫子廟)부터 세우고 보니, 규제(規制)가 넓고 통창하였다.
이 때가 바로 계사년(1473, 성종4) 가을 8월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최후가 임기를 마치고 환조(還朝)하자, 평양(平陽) 신후 윤완(申侯允完)이 그 뒤를 이어 와서 그 작업을 맡겨 독책하기를 일체 최후와 같이 하여, 왼쪽에는 재(齋), 오른쪽에는 포(庖), 앞에는 수헌(修軒)을 두고, 명륜당(明倫堂)을 바로 그 뒤에 세우고 동서(東西)로 협실(夾室)을 갖추었다. 그리고는 이에 모두 단청(丹靑)을 바르고 빙 둘러 담장을 높이 쌓아서
갑오년(1474, 성종5) 여름 4월에 고성(告成)하였다. 또 십이위(十二位)의 신주(神主)를 만들어 신묘(新廟)에 봉안하고, 석채(釋菜)를 마친 다음, 현(縣)의 기로(耆老)들을 크게 모아서 낙성식(落成式)을 가졌다. 그러자 인읍(隣邑)의 문사(文士)들이 모두 와서 예절을 구경하였다. 나는 형 때문에 또한 빈석(賓席)에 참여하였는데, 술이 한 순배 돌아가자,
내가 제생(諸生)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고(告)하기를,
“우리 동방에는 가숙(家塾)과 당상(黨庠)의 제도가 없어서 백성들이 더욱 어리석었는데, 다행히 성명(聖明)의 세대를 만나서는 십실(十室)의 마을에도 모두 학사(學舍)를 두어 자제들을 가르쳐서 매양 3년마다 그 중에 준수(俊秀)한 자를 천거하여 올렸다. 그런데 이삼자(二三子)의 고을에만 유독 빠져서 들을 수가 없으니, 이것이 어찌 한갓 관장(官長)의 책임만 되겠는가. 제군도 함께 부끄러울 일인 것이다. 그러다가 지금에야 연해서 어진 수재(守宰)를 얻음으로 인하여 우리 형은 한 가지 권력도 없이 오직 성상의 뜻을 공경히 따르고 후진(後進)들을 바르게 유도할 것만을 마음으로 삼아서 두 수재를 도와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경영한 결과, 백 년 동안 결여되어온 전례(典禮)가 하루 아침에 일신되었다. 그래서 제군들로 하여금 춘추(春秋)로 글을 읽는 데에 있어 휴식하고 학문하는 장소가 있게 하였으니, 아무리 학문을 하는 데에 게으르고자 하더라도 무슨 핑계를 대겠는가.”
하니, 제생들이 그렇다고 응답하였다. 이윽고 나는 또 그들에게 고하기를,
“학문을 하는 데에 본원(本源)이 있으니, 효제(孝弟)가 바로 그것인데, 효제는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제군이 집에서는 가묘(家廟)의 일이 있고 향교에는 전채(奠菜)의 예가 있으니, 그 주선(周旋)하고 승강(升降)하며 제사지내고 헌수(獻酬)할 적에 여기에서 그 정성을 똑같이 하는 것이며, 제군이 집에서는 부모가 있고 향교에는 사장(師長)이 있으니, 그 살펴 뵙고 응답하고 명령에 따라 열심히 임무를 수행하고 간쟁(諫諍)할 적에 여기에서 그 공경을 똑같이 하는 것이며, 집에서는 형제(兄弟)가 있고 향교에는 붕우(朋友)가 있으니, 그 우애하고 공순하며 학문과 덕행을 서로 돕고 연마할 적에 여기에서 그 신의를 넓히는 것이다. 진실로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배우는 것이 이 향교를 벗어나지 않고도 덕(德)이 이루어지고 기예(技藝)가 수립되어, 후일 향(鄕)에서 천거되어 조정(朝廷)에 서게 되더라도 이 도리를 가지고 시행한다면 어디에서도 여유가 작작하게 될 것이다.”
하니, 제생이 다시 응답하기를,
“감히 큰 띠에 써서 선생의 명령을 명심하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마침내 이것을 벽에 기록하여 백록동규(白鹿洞規)에 비기는 바이다.
[주-D001] 반수(泮水) : 옛날 태학(太學)의 동서쪽 문(門) 남쪽에 빙 둘러 있던 물을 가리킨다.
[주-D002] 백록동규(白鹿洞規) : 백록동서원 학규(白鹿洞書院學規)의 준말로, 당(唐) 나라 초기의 백록동서원이 송(宋) 나라 때에 이르러 이미 황폐해졌는데, 주희(朱熹)가 그것을 복구시키고 학규(學規)를 조목별로 게시(揭示)했던 데서 온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