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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83 : 최석준(申渙鐵, 男, 1923年 7月 3日生 전남 영암군 양장면) | |
*최초증언일: 2019. 5. 25 | *진상규명회 등록고유번호: OFIWE19450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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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나토에서 돌격용 특수정 신요(震洋) 조종훈련을 받았다.- |
필자가 최석준 할이버지와 만난 날은 마침 전남 해남군 옥동마을 옥매광산 취재를 마치고 귀경하던 날이었다. 그 날 이른 아침부터 해남군 박성배 선배의 안내를 받아 현장탐방이 수월했기에 영암군 월출산 추원용 댁을 들러 푹 고아 놓은 옻닭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추형님과 함께 나주역으로 이동하던 차내에서 김진홍 감독한테서 최석준 어른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마침 영암군이었고 추형님께서 최석준 옹께 직접 전화를 거니 다 아는 멀지 않은 마을이었다. 그대로 차를 돌려 최석준 어른 댁을 방문했다. 최석준 어른의 가족들과는 30여 년 전부터 사업상 거래가 있었고 안면이 있었던 터라서 취재가 원활했다.
최석준 어른은 사위와 딸과 함께 사셨다. 마당이 넓고 농사 채가 넉넉했고 딸과 사위의 효성이 지극한 단란한 가족이었다. 화단은 채전菜田을 겸해 가꾸었는데 어르신은 화단의 잡초 뽑는 일이 유일한 소일거리라고 하셨다. 나이 들어 까마득한 옛 일. 그 날의 악몽을 다 잊을만했는데 예고도 없이 찾아뵈어 상처를 건드렸다 싶어 마음이 아팠다.
우키시마호폭침사건 마지막 생존자 최석준.
필자가 찾아갔을 때 그는 97세였다. 충남 대전에서 태어나 이발 기술을 배우던 23세 되던 초봄에 일제에 징용 당했다. 순전히 강제징용이었다는 최옹의 눈에는 벌써 이슬이 맺히며 말문이 막혔다.
「일본 가셔서 일하시던 데가 어딘지 기억나세요?」
「나구 말구. 아오모리 오미나토였어. 근디 오다가 쾅! 터져버리드만.」
「배를 타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나요?」
「처음에는 굴도 파고 비행장도 닦았는디 나중에는 배 운전하는거 가르치드만. 날쌔게 치고 나가는 작은 배를 몰고 다니다가 해방 맞았지.」
「날쌔게 치고 나가는 배라니요?」
「아 거 적 함대로 부딪치는 그 배 운전을 배웠당게.」
태평양전쟁이 말기에 가까워진 1944년 후반부터 1945년에 걸쳐 한명이나 두 명이 탈 수 있는 돌격용 특수정인 신요震洋를 만들었는데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기 바로 전에는 그 수가 6천2백 척에 이르렀다. 오미나토해군경비부 공작부에서도 제4작전 지령을 받고 신요를 제작하는 일을 감행했다. 가미가제 특공기와 같은 맥락에서 구상하여 만든 것인데 배의 앞부분에 장치된 강력한 폭약을 무기로 하여 적의 군함에 정면으로 돌진하여 파괴할 목적이었다. 신요는 1형과 5형이 있었는데 1형은 혼자 탈 수 있도록 만들었고, 5형이 2명이 탈 수 있는 구조이다. 오미나토에서 만든 신요는 1형으로 75척을 만들었다.
최석준씨는 오미나토해군경비부 관할구역에서 이 돌격용 신요의 조종훈련을 받았다. 폭탄을 장착한 신요를 몰고 나가 적의 군함으로 돌진하여 부딪쳐 죽게 되는 훈련이었다. 북태평양과 츠가루해협으로 진격하는 연합군의 함정을 겨냥한 훈련이었음을 시사한다.◼
①1998년 8월24일 일본 마이즈루 우키시마호희생자추모실행위원회 노다(野田) 회장이 추도사를 낭독하는 모습. 1996년 8월24일 칸 나오토(管 直人) 일본 후생대신이 추모실행위원회에 추도사를 보냈다. <추도사: 우키시마호사건 추도회가 거행됨에 따라 삼가 추도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키시마호가 조난당하고 반세기 세월이 흐른 오늘 우키시마호사건으로 돌아가신 분들에게 이제나마 진심으로 추도의 뜻을 올립니다.<중략>이에 새롭게 평화를 위한 결의를 다지면서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간절히 빕니다. 덧부쳐 후생성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골은 현재 동경의 우천사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유족들과 관계자들의 건승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사진 촬영•제공: 시모키타우키시마호친구들회 야나기 코자부로 대표) ②부산우키시마호폭침한국희생자추모협회 주관 추모•위령제.(부산항 수미르공원.2018) ③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주관 (남산 영화인협회 2001) ④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주관 위령제(천안문화원 대강당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