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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어 아히카르 이야기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과 잠언의 창조 모티브
이환진*
1. 들어가는 말 아히카르 이야기는 공용 아람어로 기록된 문헌이다.1)
기원전 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하는 이 문헌은 문학적 형식과 모티브가 성경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문학적인 면에서 잠언(10장-29장)의 두 행 형식과 같다. 또한 그 내용도 많이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아히카르 이야기는 여러 나라 말로 번안되어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 중 우리가 아는 것으로는 이솝 이야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아히카르라는 이름은 구약 외경 토비트서(11:18, 14:10)에도 등장한다.
특별히 토비트 14장에는 아히카르 이야기를 짤막하게 소개하면서 악의 결과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2. 아람어 아히카르 이야기는 어떤 문헌인가?
아히카르 이야기는 1907년 이집트의 엘레판틴(Elephantine)에서 독일인 학자들이 발견한 문헌이다.
독일인 학자 자카우(Sachau)가 1911년 처음으로 이 문헌을 해독하여 출판하였다.2)
그 이후로 여러 학자들이 이 문헌을 편집하고 해석하여 펴냈는데, 주요 문헌으로는 코울리(Cowley)의 기원전 5세기 아람어
파피루스라는 책과3) 린덴버거(Lindenberger)의 아람어 아히카르의 격언이라는 책이 있다.4)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문헌으로는, 엘레판틴의 아람어 문헌을 모조리 편집하고 해석하여 펴낸 포르텐(Porten)과
야르데니(Yardeni)의 고대 이집트 아람어 문헌이 있다.5) 모두 아람어 문헌을 함께 싣고 있는 책들이다.
파피루스 위에 기록한 이 문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야기 부분과 격언 부분이다.
격언 부분은 잠언을 연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이야기 부분은 신 아시리아 왕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신 아시리아 왕실에 아히카르(Ahiqar)라는 관리가 살고 있었다.
고대 사회의 관리들은 대부분 학자들이다. 또한 현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현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입양한다.
나딘(Nadin)이라고 하는 젊은이를 아들로 입양하여 교육하는데, 아히카르의 격언은 아마도 이 아들을 교육한 내용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런데 이 문헌의 뒤에는 잘 깨져서 알 수 없지만, 아들이 배신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히카르는 이제 왕실에서 은퇴하여 지방에서 쉬고 있는데 왕이 보낸 심부름꾼이 그를 죽이러 온다.
그런데 마침 아히카르와 그 왕의 심부름꾼은 매우 잘 아는 사이였고 심지어 그 심부름꾼은 평소 아히카르를 존경하는 사람이어서
그 두 사람은 꾀를 내어 죽음을 모면하게 한다. 종을 대신 죽게 하고 아히카르를 살려낸다.
살아난 아히카르는 자신을 배신한 아들을 찾아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따진다.
그제서야 아들은 마음을 돌이키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빈다. 뒷부분의 내용은 깨져서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마도 아히카르가 입양한 아들 나딘을 용서하든지 아니면 벌을 내리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까 짐작한다.
3. 아히카르의 격언 부분 속에 등장하는 지혜의 여신 호크마격언 부분 가운데 제6란 79행에 지혜가 언급되며, 또한 제12란
187행-189행까지 지혜의 여신이 등장한다.6)
잠언 8장의 창조 모티브에 나오는 지혜와 같은 뜻의 호크마(*מה כ ח(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람어 본문과 그 내용은 이렇다.
제12란 187행-189행 (Porten-Yardeni, col. 12 lines 187-189) .187 תרתין מל ן
שפי רה וזי תלתא רחי מה ל שמש ש [ת ה] חמרא ו י ניקנהי כב ש חכמה [ ] .188 ויש מע מל ה ולא יהחו ה ⦁ הא זנה יקיר [ק ד ]ם ש מש וזי יש ת ה חמרא ו ל א [י ניקנהי] .189 ו חכ מתה אבד ה ו[◦]◦[◦]◦נ◦ מן חזה ⦁ מ ן שמי ר [◦◦◦]י נו ע ממא ו[ח]כמת[ם ] ל אה י ה ה[ ]
제6란 79행 (Porten-Yardeni col. 6 line 79) .79 אף ל אלהנ יק[י]רה הי ע[ד ל ע]ל[מ ן לה ] מל כות א בש [מי]ן ש ימה ה י כ י בעל קדש ן נשא[ה ] 이 두 부분은 전통적으로 같이 이어지는 내용으로 읽어 왔다.
이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2.187 아름다운 것7) 둘이 있으니 - 솨마쉬[太陽] 님8) 흐뭇해하시는 것 셋이 있나니9) - 술을 마셔도10) 나눠 마시는 사람11)
슬기를 지키는 사람12) 12.188 들은 말13) 발설(發說)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 솨마쉬[太陽] 님께 소중한 사람 술을 마셔도
나눠 마시지 않는 사람 12.189 그런 사람 슬기를 망치는 사람14) …을 보는 사람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을 사람들은 입나니 -
슬기는 신[神]이라! 6.79 아, 슬기는 신들도 소중히 여기나니 - 슬기 나라는 영원하여라! 바로 하늘[天]님이 슬기를 세우셨나니 -
아, 거룩하신 님15) 슬기를 드높이시나니! 위의 인용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앞부분은 지혜가 얼마나 솨마쉬에게 소중한가를 말하는 부분이고, 뒷부분은 신들 가운데에서도 지혜가 얼마나 칭송을 받는가 하는
점을 역설한 부분이다. 우리에게는 야훼라는 말이 더 익숙할 터이지만(잠 6:16-19), 아히카르의 격언에는 태양신인 솨마쉬가
더 익숙한 최고신으로 등장한다. 이 신이 “즐거워하는 이, 흐뭇해하는 이”는 바로 지혜를 지키는 이라는 것이 이 부분의 주요
내용이다. 그러니까 잠언의 야훼는 아히카르 이야기의 태양신 솨마쉬를 대치하여 등장하는 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와 술이 서로 관련지어 나오는 얘기는 코헬렛(1:3)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술에 절어보자고 그렇게 몸을 즐겁게 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슬기를 추구하였나니”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하지만 지혜가 술과 관련되어언급되는 곳은 그리 흔하지 않다. 사실 술을 과도하게 마시지 말라는 충고가 메소포타미아의
지혜문학에는 더 많이 등장하는 까닭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가 술과 관련되어 언급되는 아히카르 이야기는 무척 독특하다.
그런데 이러한 지혜는 사람들과 관련이 깊다는 뜻으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총을 받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런 생각은 우리 선조들의 전통적인 생각과도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하늘”이라는 말은 아람인들의 전통적인 신인 “하늘님”(바알 솨마인)을 가리키는 듯하다.16)
이러한 해석이 맞다면 바로 지혜가 이 하늘님에게도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기는 바로 신[神]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 표현은 곳곳이 깨져 있는 까닭에 정확하게 읽기는 어렵다.
학자들에 따라 “슬기는 신들에게서 비롯되었다”로 읽기도 하는데,17) “비롯되었다”는 말보다는 이 부분의 문맥상 “바로 신이다”
로 읽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신들이 무척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인 까닭이다.
이러한 생각은 잠언(3:19-20; 8:22-31; 9:1-6)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벤시라(1:9-10; 24:4-6) 뿐만 아니라 에녹서
(제1에녹 41:1-2)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생각이다.18) 이러한 문학적 전승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 더 설명하기로 한다.
“슬기 나라”라는 표현은 “슬기의 왕국” 또는 “지혜의 왕국”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이 가운데에서 “나라”는 흔히 우리가 “(하느님)
나라”라고 말할 때 등장하는 “나라”와 같은 표현이다.
슬기가 가득한 나라, 슬기가 편만한 나라, 슬기가 판치는 나라, 슬기가 다스리는 나라가 영원토록 이어지리라고 한다. 지혜 칭송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라”( ות כ מל(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19)
따라서 슬기가 가득한 상태, 슬기가 편만한 상태, 슬기가 판치는 상태, 더 나아가 슬기가 다스리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말쿠트라는 아람어이다. 이러한 이해가 옳다면 슬기가 다스리는 상태, 슬기가 가득한 세상을 이 지혜 칭송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하늘님”이 바로 지혜를 “든든히 세우신다”고 말한다.
이 말은 뒤이어 나오는 “거룩하신 님”이 슬기를 “드높이신다”는 말과 짝말로서, 신으로서 지혜의 속성을 잘 반영하는 표현이다.
사실 “든든히 세우다”는 말은 건축 용어이다. 성서 히브리어나 우가릿어와 마찬가지로 공용 아람어에서도 이 용어
(*ון כ(는 건축 용어로 신전이나 궁전을 지을 때 등장하는 전문 용어이다.
그런데 이 용어가 신학적으로 차용되어 신(들)의 창조 행위를 가리킬 때 자주 등장한다.20)
이렇게 볼 때 “하늘님이 지혜를 든든히 세우신다”는 말은, “하늘님”의 창조행위를 묘사하는 말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어서 나오는 “하늘님은 슬기를 드높이신다”는 말은 지혜 칭송의 연장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거룩하신 님”
이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거룩하신 분들의 주(主)”라는 표현을 내 나름대로 풀어 본 것이다.
“거룩하신 분들”이라는 표현은 잠언(9:10)에서 하느님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 말인데,21) 우가릿 문헌에서 “신들”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잠언에서는 이 말을 야훼 하느님을 가리키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거룩하신 님”은 바로 “하늘님”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이다. “하늘님” 조차도 슬기를 칭송하는 것이다.
모든 신들조차도 무척 소중히 여기는 신(神)이 바로 슬기, 곧 “호크마”인 까닭이다! 4.
잠언(3:19-20; 8:22-31; 9:1-6)의 지혜와 창조 모티브 성경 전체에 창조 이야기는 여러 판(版, version)으로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잠언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를 나는 창조 이야기의 지혜 판(the Wisdom version of the Creation stories)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잠언의 지혜 판에도 세 종류가 있다. 짧은 이야기(잠 3:19-20), 긴 이야기(8:22-31), 비유 이야기(9:1-6)가 그것이다.
이들을 읽어보면 이렇다. 야훼님은 로)חכ מה)슬기 든든히 놓으시니 땅의 토대를 - 든든히 세우시니 저 하늘을 깨우침으로.
앎 심연(深淵)이 샘물을 용솟음치게 하나니 하늘이 이슬을 촉촉이 적시나니.(잠 3:19-20) 야훼님 처음 그 발걸음 떼실 적 날
지으셨나니 머나먼 그 옛날 일을 시작하시기 오래 전 그 때부터 날 빚으셨나니 맨 처음 땅이 생기기 훨씬 이전 일이라 심연(深淵)이
생기기에 앞서 샘마다 물이 고이기에 앞서 난 태어났어라 산마다 가라앉기에 앞서 또 오름보다도 먼저 난 태어났어라 땅을 들녘을
세상의 첫 흙덩이를 만드시기에 앞서 - 하늘을 펼치실 때 난 이미 거기 있었어 심연(深淵)의 얼굴에 선을 그으실 때 위 하늘을
튼튼하게 만드실 때 심연(深淵)의 샘물이 터져 나올 때 바다에 경계를 그으시어 물이 그 선을 넘지 못하게 하실 그 때 땅의
토대마다 든든하게 하실 때 난 그분 곁에서 든든한 이가22) 되었노라날마다 그분의 기쁨 언제나 그분의 즐거움 세상의 즐거움
인간의 기쁨이었노라(잠 8:22-31) 슬기가 집을 짓는다 일곱 기둥 집을 짓는다 잔치를 마련한다 술을 빚는다 아, 밥상을 차리는구나!
“잔칫상 드시라” 사람을 보내어 소리 지른다 마을 어귀 높은 곳에서 외친다
“마음 열린 이23) 누구나 이리 오시라! 누구나 어서 오시라 어서 드시라!” 또 이렇게 외친다
“마음을 비우라24) 그러면 살리라 깨달음 그 길을 걸으라!”(잠 9:1-6) 이 세 종류의 창조 이야기가 지혜와 맞물려 각각 묘사되는
모습이 사뭇 신기하다. 짧은 이야기(잠언 3장)는 그 앞에서 지혜를 얻는 길이 생명나무를 껴안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창세기(3장)의
금령과 정반대되는 명제를 내놓는다. 곧 야훼문헌 신학의 안티테제를 우리는 여기서 읽는다.
야훼문헌 저자나 잠언 저자나 모두 창조 사건이라는 문맥에서 얘기하지만 말하는 내용은 정반대이다.
지혜가 창조의 모티브라는 것이다. 긴 이야기(잠언 8장)는 지혜가 아예 창조주로 등장한다. 사실 맨 앞에 나오는 “야훼님 처음
그 발걸음 떼실 적 날 지으셨나니”라는 말 속에서 “짓다”는 표현은 지금껏 해결이 되지 않은 말이다.
아니, 이것은 지금껏 두 가지 가능성으로 읽어 왔다. 하나는 위의 인용문처럼 “창조하다”라는 뜻으로 읽어온 전통
(예, 칠십인역, 페쉬타역)이고, 또 하나는 “얻다”라는 뜻으로 읽어온 전통(예, 심마쿠스역, 아퀼라역, 테오도시온역)이다.
위의 문맥에서는 “창조하다”나 “낳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하여 그렇게 읽은 것뿐이다.
또 이스라엘 코네 아레츠 새김글이라는 히브리어 문헌에 “땅을 창조하신 이 [엘]”라는 표현이 나오는 까닭에 그렇게 읽은 것이다.25)
하지만 이러한 읽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얻다”라는 읽기는 이미 존재해 있었던 것을 단지 내 것으로 삼았다는 뜻이므로, 실은 지혜가 이미 창조 전에 존재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창세기 처음 두 절의 읽기와도 같은 전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창세기 맨 첫 절을 상황절로 읽느냐, 독립절로 읽느냐 하는 논쟁도 이미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상황절로 읽을 경우 땅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성립된다.
사실은 이러한 이해가 고대 중동의 세계관이나 창조관과 일치하기 때문에 요즘은 대부분의 성경역본과 학자들이 상황절로 창세기
맨 첫 절을 읽기도 한다. 하느님의 창조 이전에 이미 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얘기는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부분에도 등장하는
생각이다. “땅을 들녘을 세상의 첫 흙덩이를 만드시기에 앞서”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여기서 땅이나 들녘이나 첫 흙덩이나 모두 고대 중동인들의 창조 신화에 언제나 제일 먼저 등장하는 용어들이다.
특히 수메르 신화인 루갈레(Lugale)라는 문헌에는26) 땅은 이미 존재해 있었고 그 제사 신들이 그 땅을 둘로 나누어 하늘과 땅으로
나누었다는 얘기가 등장한다.27)
위의 8장 긴 창조 이야기의 특징은 한마디로 지혜가 창조 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하느님이 늘 그에게 묻고 질문하고 또 자문을 구하여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 “땅의 토대마다 든든하게 하실 때 난
그분 곁에서 든든한 이가 되었노라”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든든한 이”라는 말은 사실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용어(ון מ א(이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번역본들마다 이 용어를 달리 읽어온 것이 사실이다.
성경에 그저 몇 번 나오는 이 용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우리말 성경 새번역은 “명공”(名工)이라고 읽었고, 또 프랑스어 현대어역(BFC, 1997) 역시 비슷하게 “건축가”(architecte)로,
영어 새예루살렘 성경(NJB)도 “장인”(master craftman)으로, 또 영어 신개정표준역(NRSV) 도 “장인”(匠人, master worker)으로 읽었다. 그런데 우리말 개역은 아예 “창조자”로 읽었다.
이렇게 창조자로 읽는 전통도 강하다. 아무튼 “얻다”로 읽든, “창조하다”로 읽든 맨처음 이전부터 지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잠언 8장의 긴 창조 이야기의 지혜 판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점은 “날마다 그분의 기쁨, 언제나 그분의 즐거움, 세상의 즐거움, 인간의 기쁨이었노라”고 하는 마지막
부분이다. 이 부분은 완벽한 교차대구(chiasmus)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기쁨(ᄀ)-즐거움(ᄂ) :: 즐거움(ᄂ)-기쁨(ᄀ)”이라는 구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쁨과 즐거움은 하느님의 기쁨이나 즐거움 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쁨과 즐거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의 창조 행위 자체가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말로 그 끝을 맺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앞서 언급한 아히카르의 격언에
지혜가 바로 신들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기쁨을 주고 또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그래서 세상이 바로 이 지혜로 말미암아 살맛이
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얘기하고도 일맥상통하는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잠언 8장의 창조 이야기 지혜 판은 고대 아람 사람들의 창조관을 그대로 답습하되 더욱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혜의 놀라운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잠언 9장에서는 어떻게 인간에게 그 기쁨이 지혜의 창조 행위 속에서 더욱
구체화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지혜는 이제 건축가가 되어 일곱 기둥을 다듬고 깎아 집을 세운다.
“슬기가 집을 짓는다 일곱 기둥 집을 짓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재미난 사실은 “일곱 기둥”이라는 말이다.
문자적으로는 “그 기둥들, 곧 일곱”이라고 읽을 수 있는 이 표현을 나는 그냥 “일곱 기둥 집을 짓는다”고 했는데, “일곱”이라는
숫자는 수메르 문헌(TIM 9 63:6-11)부터 시작하여28) 에녹서를 거쳐 탈무드까지 천지(天地)가 각각 일곱 하늘과 일곱 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곧 하늘도 일곱 층이요 땅도 일곱 층이라는 대칭 구조로 되어 있다는 생각인데, 이러한 고대 중동사람들의 세계관을 염두에 둔다면
지혜가 왜 일곱 기둥을 깎고 다듬어 집을 짓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는 지금 세상을 창조하고 있는 셈인데, 바로 이러한 세상 창조는 구체적으로 손님 초대의 모습까지 이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술을 빚고 짐승을 잡고 또 밥상을 차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손님을 부르러 가는데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저자거리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목청껏 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이 역시 지혜의 창조 사역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창세기 맨 첫 장을 읽던 랍비들은 왜 인간 창조가 가장
늦게 되었을까하고 의문점을 가졌다. 그리고는 그 이유를 온갖 삼라만상을 다 만드신 뒤 하느님은 인간을 그 창조 잔치의 손님으로
초대하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랍비들의 전통적인 생각이었다.
한번 이러한 전승을 읽어보기로 하자.29) 세상은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 인간이 피조물 가운데 가장 늦게 나타난 존재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것 역시 디자인이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인간이 직접 찾아보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잔치를 벌이는 주인이시다. 음식을 준비하여 밥상을 차리고 당신 손님을 자리로 안내하신다.
인간이 세상에 가장 늦게 나타난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자부심을 지녀야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개미가 자신보다도 더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토세프다 산헤드린 8)30) 토세프다와31) 탈무드에 나오는 이 하느님의 모습이 바로
잠언 9장의 잔칫상차리고 손님을 기다리는 지혜의 모습이 아닐까?
지혜가 하느님처럼 음식을 준비하고 밥상을 차리고 손님을 안내하니 말이다.
그런데 잠언을 보면, 지혜는 손님을 부르라고 시종을 보내놓고는 그냥 기다릴 수 없어 직접 저자거리로 찾아 나서서는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마음 열린 이, 누구나, 이리 오시라! 누구나 어서, 오시라, 어서 드시라!” 이렇게 나는 읽어보았지만, 여기서
“마음 열린 이”라는 말( י פת(은 보통 “어리석은 이”나 “단순한 이”로 읽는다. 하지만 이 말 자체가 “열다”나 “열려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기에 나는 과감하게 그냥 “마음 열린 이”로 읽어 본 것이다.
이렇게 마음 열어놓고 잔칫상을 받는 사람이 무언가 새로운 음식과 술을 더욱 더 잘 음미할 수 있지는 않을까?
또 그런 이가 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옮겨본 것이다.
여기서 밥을 먹는다는 말은 지혜와 정(情)을 나눈다는 얘기이다.
곧 지혜와 한 동아리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잠언 9장은 이렇게 표현한다.
“마음을 비우라, 그러면 살리라, 깨달음, 그 길을 걸으라!” 이 부분은 “어리석음을 버려라. 그러면 생명을 얻으리라. 다만 깨달음의
길을 걸으라”로도 옮길 수 있는 표현이다. 곧 지혜의 길을 걸으라는 얘기이다.
지혜를 추구하라는 것인데, 지혜는 바로 깨달음 그 자체라는 얘기는 잠언에서 수도 없이 반복되는 얘기이다.32)
그러니까 잠언 9장에 나오는 지혜 창조의 비유 이야기는 지혜의 창조 사건을 구체적으로 인간의 일상사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를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고자 한 부분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 창조 사건의 실현을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로 복음의 천국잔치 비유가 바로 위 잠언 9장의 모티브를 차용하여 전개한 이야기가 아닌가!
5. 벤시라의 지혜 전승 벤시라는 흔히 우리말로 집회서(集會書)라고 부르는 책이다. 중국어 성경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이는데,
예수 벤시라라는 이름에서 온 책 이름이다. 이 책의 24장에는 창조 이야기의 또 다른 지혜 판본이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그리스어 본문을 읽어왔으나, 나는 여기서 시리아어 페쉬타역에서 옮겨보기로 한다.33) 슬기는 뽐낸다
신들 속에서34) 그 자태 한껏 뽐낸다 슬기는 신들의 모임에서 입을 뗀다 그 무리 틈에서 자랑한다35)
“나 슬기는 높으신 님 그분 입에서 비롯되었죠 안개처럼 온누리 가슴에 품죠 저 하늘 높은 곳 그곳은 나의 집36) 구름 기둥은
내가 앉는 바로 나의 자리죠 나 또한 하늘을 두루 살펴보았죠37) 심연(深淵)의 밑바닥 그곳을 거닐기도 했어요 샘물을
세상 토대를 모든 사람을 난 보살피죠38) -
어디서 조용히 좀 쉬어볼까 쉼터를 난 찾아 보았죠 어디서 좀 쉬어볼까 궁리했죠 -
온누리 내신 님 이르시는 그 말씀 날 내신 님 나의 터 정해 주셨죠39) 야곱 안에서 살라 이스라엘 안에서 자리 잡으라40) -
난 생겨났죠 태곳적 일이죠41) 하여 난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꺼예요42) 이렇게 난 그분의 성막(聖幕) 거기서 님을 섬기죠43)
그래요 난 시온 거기서 살죠 님 예뻐하시는 도읍 그곳은 바로 내가 내려간 곳이죠44) 예루살렘 그곳은나의 둥지죠 -
소중한 무리들 가운데 난 생겨났죠45) 님의 몫으로 이스라엘이 물려받은 몫으로46) -” (벤시라 24:1-16, 페쉬타역) 그러니까
벤시라의 지혜는 예루살렘 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가 창조된 이후 그가 살아가는 곳은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재미난 점은 지혜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말한다. 후대의 문헌이기에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지혜가 하는 일은 마르둑이 한 일과 똑같다. 바빌론 창조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에 등장하는 최고의 신 마르둑은 원수인
티아맛을 죽인 뒤 그의 시신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데, 그렇게 온 세상을 창조하고는, 위에서 지혜가 그리 하듯, 하늘을 그리고
땅을 두루 살피는 일을 하는 것이다(Enuma Elish IV 141-143).47)
그러니까 위에서 지혜는 바로 창조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흔적을 지우려 하지만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강조하고 있는 점이 예루살렘을 자신의 집으로 삼아 살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니 오히려 에누마 엘리쉬의 마르둑이 바빌론을 자신의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지혜도 예루살렘을 자신의 집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 홀로 하늘을 두루 살펴보았죠,
심연(深淵)의 밑바닥, 그곳을 거닐기도 했어요”라는 표현은 지혜가 바로 창조의 신 마르둑이라는 점을 암암리에 암시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꺼예요”라고 말하는 부분은 아히카르의 격언에 나오는 “그의
다스림은 영원하여라”고 하는 표현과 거의 비슷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사실 그리스어 칠십인역(GI)은 이 부분을 “영원토록 살꺼예요”라고 읽는다.
이렇게 아히카르의 지혜는 잠언뿐만 아니라 벤시라 속에서도 그 표현이 다시 살아나 그 생명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히카르의 호크마 전통은 고대 중동의 텃밭 속에서 자라나 우리의 성경 속까지 파고들어 살아 숨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이어지는 부분에서 어머니라 부른다(벤시라 24:18, 공동). 그냥 어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어머니요 존경받는
어머니요 깨달음의 어머니요 거룩하신 어머니요 희망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여신이라고 말하기에는 야훼신앙 속에서 허락이 되지 않고 차라리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마음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부분은 시리아어 페쉬타역 본문과 그리스어 칠십인역(GI)에는 들어 있지 않는 부분이다.
그 이유가 어떠했을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벤시라의 그리스어 본문을 보존해온 유대인 공동체는 이 어머니라는
표현조차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틴어 불가타역에 이 부분이 보존되어 온 것을 보면 지혜는 이제 모든 이의 어머니로서
모든 이를 감싸고 아껴주고 힘주고 또 돌보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그 공동체의 신앙을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6.
나가는 말
아람어 아히카르 이야기 속의 지혜 칭송은 고대 중동에서 아주 오래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아히카르의 격언 속에 들어 있는 이 부분은 “하늘님”(바알 솨마인) 을 최고 신으로 섬기던 아람 사람들이 간직해온 전통을
보여주는데, 특히 지혜가 신으로 인간과 신들 사이에서도 칭송받고 존중받았던 흔적을 이 부분을 통해서 읽어볼 수 있다.
이 전통은 성경 속에도 흘러 들어와 창조주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여신의 모습은 지워져 있으나 그 기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혜의 모습을 통한 창조 신화 모티브는 야훼 유일신앙 전통에서도 그대로 살아 있다.
잠언 3장에서는 “지혜로” 하느님이 창조를 하지만, 잠언 8장에서는 “지혜와” 하느님이 창조를 하시고, 잠언 9장에서는
“지혜가” 아예 창조를 한다고 말한다. 이 잠언 9장에 나오는 창조자로서의 지혜는 특별히 예수의 비유 속에서 천국잔치로 초대하는
이의 모습으로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다. 물론 요한복음의 로기아 부분 역시 잠언 8장의 모티브에 로고스를 대입시킨 그리스도교
판본이라고 말해온 전통은 아주 오래된 전통이기도 하다.48)
이렇게 이 지혜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속에서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창조 사건을 일으킨다.
출처 : 대한 성서공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