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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智通, 智常, 志道) 禪師 .
僧智通은 壽州安豊人이다 初看楞伽經-約千餘遍이나
而不會三身四智하여 禮師하고 求解其義하니 師曰하시되
三身者란 淸淨法身이 汝之性也요 圓滿報身이 汝之智也이며
千百億化身이 汝之行也이니 若離本性하고 別說三身하면
卽名有身無智하며 若悟三身-無有自性하면 卽名四智菩提니라
聽吾偈하시고 曰하시되
自性具三身함을 發明成四智하나니
不離見聞緣하고 超然登佛地니라
吾今爲汝說하노니 諦信永無迷하여
莫學馳求者리니 終日說菩提하니라.
智通 스님은 수주 안풍 사람이다.
처음에 능가경을 약 천여번 보았으나
세가지 몸
(三身)과 네가지 지혜
(四慧)를 알지 못해서
조사께 예배하고 그 뜻을 해석해 주시기를 원하니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3신이란 청정 법신이 너의 자성이요,
원만보신이 너의 지혜이며
천백억 화신이 너의 행이니,
만일
본성을 여의고 달리 3신을 말하면
곧 몸(體)만 있고 지혜(반야)가 없는 것이라 하며,
만일
3신의 자성이 있음이 없음
(無相: 眞空)을 깨달으면
곧 보리인 네가지 지혜라 이름하느니라,
나의 게송을 들으라" 하시고
이르시기를
자성이
삼신을 갖추었음을 깨달아 밝히면
사지를 이루나니
(자성 가운데 이 삼신이 있음을 깨달으면
무명에 가린 네가지 지혜가 드러나니)
보고 듣는 것 여의지 않고도
한번 뛰어나 불지에 오르니라.
(색즉시공이니
보고 듣는 것을 떠나지 않고
문득 깨달아 불지에 오르니라)
내 이제 너를 위해 말하노니
참된 이치를 믿어 길이 미하지 말아서
(너를 위해 설해 주나니
참된 이 이치를 믿어 길이 헤매지 말고)
달리 쫓아 구함을 배우지 말지니
종일토록 말로만 보리라 하니라.
(밖으로 쫓아 구함을 배우지 말지니
항상 도를 말로만 하게 되니라)
강설:
3신
(법신, 보신, 화신)이란
자성이 청정법신(本覺)이요,
자성의 지혜가 원만보신(始覺)이요,
밝은 행이 천백억화신(應覺)인 것이다.
이 본성을 떠나서 달리 3신을 찾는다면
몸
(3신)이라는 相만 쫓을 뿐
어리석어 지혜롭지 못한 것이니
몸(바탕)은
있음이 없는(空한) 이름일 뿐 임을 깨달으면
이것이 네가지 (반야)지혜
(대원경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성소작지)인 불지견이라 하는 것이다.
通이 再啓曰하되 四智之義를 可得聞乎소서 師曰 旣會三身이면
便明四智인데 何更問耶인가 若離三身하고 別談四智하면
此名有智無身也이니 卽此有智가 還成無智니라
復偈曰하시되
大圓鏡智性淸淨이요 平等性智心無病이며
妙觀察智見非功이요 成所作智同圓鏡이니라
五八六七果因轉이니 但用名言無實性이니
若於轉處不留情하면 繁興永處那伽定하리라.
智通이 거듭 여쭙기를
"네가지 지혜의 뜻을 들려 주시옵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이미 3신을 알았다면
四지는 따라서 밝혀진 것인데
어찌 다시 묻는가?
만일 三신을 여의고 따로 四지를 말한다면
이것은
'지혜(반야)만 있고 몸(바탕)은 없다' 하는 것이니
곧 이 지혜가 도리어
지혜 없음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라"
다시 게송으로 이르시기를
대원경지는
자성이 청정한 것이요
(자성이 맑아 깨끗함이 크게 원만하여
거울과 같이 비치고)
평등성지는
마음에 병이 없는 것이며 (마음이 미혹하지
않으면 일체평등한 성품의 지혜요)
묘관찰지는
봄에 애씀이 아니요 (스스로 바르게 보는 지혜요)
성소작지는
둥근 거울과 같으니라.
(갓 없는 거울처럼 밝게 비치니라)
5, 6, 7, 8식은 果와 因을 굴리니
(5, 6, 7, 8의 아는 것은 인과를 변전하니)
다만 이름과 말로 쓰나 실다운 성품은 없으니
(다만 명사일 뿐 실상의 성품이 없으니)
굴리는 곳에 마음(情)을 머무르지 않으면
(씀에 따라 집착심만 없으면)
번거로이 일어나도
큰(那伽) 定에 길이 머무르리라.
(항상 작용해도 큰 고요함(定)에 머무리라)
강설:
3신이란 것이
자성을 떠나 있음이 없으니
이 본래 마음에서 세가지로 나눔을
이름한 것을 알았으면,
네가지 지혜도 또한 본심인 자성의 작용을
이름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법신, 보신, 화신인
3신을 여의고
4지혜를 말한다면 반야지혜(4지)는 있으나
그 근본체인 몸은 없다 하는 것이 되니
(4가지 지혜가 3신과 더불어 있어)
오히려 지혜 만 있음으로 잘못 알게 됨이
스스로 지혜 없는 것(無智)이라 하신 것이다.
곧 자성은 없이 있는
진공의 체에 묘유한 반야로,
지혜가 3신(體)에 함께 없이 있는 것이다.
通이 頓悟性智하여 遂呈偈曰하되
三身元我體요 四智本心明이며
身智融無 하니 應物任隨形하노라
起修皆妄動이요 守住匪眞精이라
妙旨因師曉하니 終亡染汚名이로다.
※
智通 이 자성의 지혜를 몰록 깨달아서
게송으로 일러 바치기를
3신이 원래 나의 바탕(체)이요
(3신이 본래 나의 체(근본바탕)요)
4지는 본래의 밝은 마음이며
(네가지 지혜는 이 마음의 밝음이니)
3신 4지가 융통하여 걸림이 없어
(3신과 4지가 둘 아니게 함께 통하여 걸림 없어)
만물(相)에 응함에 형세 따라 맡기노라.
(현상에 순리대로 응하여 밝게 쓰노라)
다시 닦는다는 것 모두 망령된 행이요
(본래 그러함을 알면 닦는다는 모두가 헛된 짓이요)
머묾을 지킴도 참된 뜻 아님을
(定이라 하여 머물고만 있음도 잘못된 소견임을)
묘한 뜻 스승으로 인해 깨달으니
(깊은 도리 六조로 인해 깨닫게 됨에)
마침내 더러워진다는 이름조차 없도다.
(마침내 본래 청정함에 다시 물들 것이 없도다)
강설:
3신이 본성인 한 바탕(體)으로부터 나눔(작用)이요,
네가지 지혜 또한 스스로 자성인 체에
구족되어 있어 쓰임(用)이니,
빈 가운데 소소영령한 작용이요 나툼이니,
일체가 이를 벗어남이 없고
일체를 떠나 이 또한 달리 있음이 아니니,
체가 곧 定이요 空이나
밝은 반야지혜가 묘하게 있어 밝게 보고
바른 작용을 하며 걸림이 없음이거늘
定에만 국집하여 장좌불와로 앉는것 만을
지킴도 삿된 집착이요,
본래 이루어진 청정을 다시 닦을 것이 있다는
소견 또한 망령됨이니,
청정 본성은 불구부정하여 더러워진다는
말조차 없어서 더러운것, 번뇌, 망상이니 하는 것
모두가 본래 없는 것을 거짓 이름한
假說일 뿐인 것이다.
6조대사의 법문은
상근기를 위한 평등門인 直示요,
석가세존의 法門은 일체 중생을 이끄는
차별門임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보리를 밖으로 구하고 말로 만 떠드는 것은
마치 전五·六의식 七잠재심(말라)식에 迷하여
매달리는 것이고,
따라서 자성 밖에서 3신을 찾는 것이며
3신을 떠나서 별도로 4지혜를 구하려 하는 것이 되므로
오히려 지혜가 어둡게 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4지혜라는 것은
첫째
대원경지로 자성의 8식(함장식)이 공적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밝고 청정한 본성 그대로
굴려 쓰임을 대원경지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여래의 참된 지혜(불지견)이고
모든 경계에 물들어 끄달림이 없으며
안과 밖이 밝게 사무쳐(內外明徹) 만물(일체)이
두루 실다움을 비춰 밝게 보지 못함이 없는
경계의(거울같은) 지혜인 것이다.
또, 마음에 병이 없는 것이 평등성지라 한 것은
제7 잠재심식(말라식)이 객관 경계를 6식을 통하여
교섭(접촉)하되 자타의 분별이 사라져
(평등: 진공) 증,애가 없이 여여하게 굴려 씀을 말하며
중생과 더불어 자타 일체가 평등함을 보고
대자비심으로 근기 따라 이끌어 주고 열어 보여
깨달아 들게 하는 지혜인 것이다.
분별 집착으로 인한 걸림이 없는 것이
병이 없다고 하는 것으로
치우친 소견을
병이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 묘관찰지란 6식(의식)이
모든 경계에 집착심이 없이
온갖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잘 분별해 알되
조금도 끄달려 흔들림이 없어 물들지 않아
자재하게 굴려 쓰는 지혜인 것이다.
이같이 관찰하는 지혜는
6식과 7식을 수고로이 하여 아는 知解 지식이 아니요
본성반야의 밝아 또렷하게 들어나는 지혜행인 것이다.
또, 성소작지란
5근(안이비설신)인 전5식이 경계에
물듦이 없어 본성작용으로 굴려
(변전: 능변)서 업식을 초월하여 집착함이 없이
밝게 아는 지혜작용의 봄이 부처의 봄으로
바르게 행하는 것이다.
이 성소작지와 대원경지가 같음은
모든 근기와 형편에 따라 알맞게 응용하며
경계에 따라 교섭하되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어서 두가지 상이 없음을 밝게아는
본성반야의 지혜작용이 둘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五식과 八식은 因이 緣을 만나 행한 업이
果로 함장식에 갈무리되고 바뀌어(轉)
다시(異類) 나며, 六식과 七식이 경계에
교섭하여 행한 업이 원因을 짓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미하면 쓰임이 알음아리로 계교하게 되고
깨치면 수고롭지 않는 지혜의 발현으로 바르게
쓰게 되는 것이니,
투철히 깨달아 지극함에 계합하면
다시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동체대비의 발현으로 定에만 국집하여
머물러 있지 않고 일체중생의
一大事를 위해 다시 어느 곳이나 출현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에 머물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
※
대원경지는
법신을 이루고
평등성지는 보신을 이루고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는 화신을 이루며
八식(함장식: 아뢰아식)을 굴려
(바른 반야로 쓰게 되면) 4지를 이루며
4지와 더불어 3신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3신이 4지와 함께 법신이 근본이 되는 것이며
듣고 보는 작용과 相을 떠나서가 아니라
전五, 六식, 七식, 八식을 그대로 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성불 가운데
이 모두가 포용 구족되어 있는 것이며,
다만 쓰임에 따라 성인과 범부가 갈라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3신 4지는 하나로(자성)부터 갈라진 것이나
둘 아니어서 4지혜는 업식 업행이 변전하여
본성반야 그대로의 쓰임인 것이며
我에 집착하여 분별심으로 쓰면
4지가 발현되지 않는 중생의 행이 되는 것이다.
전식(轉識)이 후득지(得智)가 되면
즉 업識이 智로 轉식이 증得으로
변전하게 되어 곧 4지를 내게 되는 것이다.
전五식은
안, 이, 비, 설, 신의
다섯 감관을 통해 객관(경계,객진)을 인식하는
지말적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전五식도 우리의 자성 바탕과
상즉한 둘이 아님을 깨달아 증득하여
업식인 삿되고 어리석은 무명중생의 행함이
변전하여 반야지혜로 행함이 성소작지인 佛行인 것이다.
제六 의식을 뒤집어(굴려 바르게 씀) 밝게 보는
이것이 곧 묘관찰지라 하는 것이다.
六의식은 전五식이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경계를 대상으로 설립되는 이같은
객관현상 가운데 있는 온갖 원리를
인식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일체의 학문, 지식, 사고, 추리 등은
이 六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등성지는
제七심식(나라는 것에 국집하는 말라식)이
밝게 바르게 굴려서 쓰는 지혜인 것이며
七심식은 모든 식 가운데 다른 식은
모두 사량, 분별이 있으나
오직 사량, 분별이 없이 "나"라고 하는
미혹의 근본 의식인 "나"를 국집하여
전5식 6식의 주가 되는 것이므로
근본 무명과 중생심의 중심이 되는 것으로
八식을 자아의 존재로 집착하는 심식인 것이다.
제八함장식
(아뢰아식)을 반야로써 밝게 쓰이는 것
(轉)이 대원경지가 되는 것이니,
제八식은 없어지지 않는 식으로 무몰식이라고도 하며
일체의 경험되는 행위가 저장
(업행, 업식, 업장으로 갈무리: 입력)되는 식인 것이다.
따라서
3신 4지가 본성을 떠나서 있음도,
각각 3신 4지가 따로 스스로의 성품을 갖고
있음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8식을 바르게 굴려 씀이 4지를 이루고
4지를 묶어 3신을 이루며
이 3신 4지가 하나로 돌아가며
하나로부터 나누게 된 것이다.
僧智常은 信州貴溪人이다
年出家하여 志求見性하며
一日은 參禮하자 師問曰하시되 汝從何來며 欲求何事하시니
曰하되 學人近往-洪州白峯山하여 禮大通和尙하고
蒙示見性成佛之義이나 未決狐疑이니다 遠來投禮-伏望이오니
和尙께서 慈悲指示하소서.
智常스님은 신주 귀계 사람이다.
초년에 출가하여 견성할 뜻을 빌며
하루는 조사님께 찾아 뵙고 절을 하자,
조사께서 물으시기를
"네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무슨 일을 구하고자 하는가?" 하시니
이르기를
"학인이 요사이 홍주 백봉산에 가서
대통(신수)화상을 뵈옵고 견성 성불의 뜻을
보여주심을 입었으나 깊은 의심을 풀지 못하였사옵니다.
멀리서 찾아 와 뵈옵고 업드려 바라오니
화상께서는 자비로 가르쳐 보여 주시옵소서"
강설:
학인이 닦아 깨우침에는 기연이 닿아야 한다.
기연이란
배우는 자의 근기가 익어 마치
계란 속의 병아리가 숙성되어
껍질을 쪼아 나오려는 경지가 되었음이
기 요,
이 기를 명안종사가 때에 맞추어 직지하여
밖에서 껍질을 쪼아주는 줄탁( 啄)의 순간을
이르는 것이다.
智常 스님의 기와 신수대사의 연이 맞지 않았으므로
六조 대사를 다시 찾아 뵙고
껍질을 벗겨 주시기를 간청하게 된 것이다.
師曰하시되 彼有何言句인가 汝試擧着하라 曰智常하되
到彼하여 凡經三月토록 未蒙示誨나이다 爲法切故로 一夕에
獨入丈室하여 請問-如何是智常의 本心本性하니
大通께서 乃曰하시되 汝見虛空否함에 對曰見하니 彼曰하시되
汝見虛空이 有相貌否인가 對曰하되 虛空無形인데
有何相貌하니 彼曰하시되 汝之本性이 猶如虛空하여
了無一物可見하면 是名正見이요 了無一物可知하면
是名眞知이며 無有靑黃長短하며 但見本源淸淨-覺體圓明하여
卽明하면 見性成佛이요 亦名如來知見하나이다.
學人이 雖聞此說이나 猶未決了이오니 乞和尙께서 開示하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
그분이 무슨 말을 하던가?
네가 시험 삼아 말해 보라"
智常이 이르기를
"智常이 저곳에 이르러서 무릇 석달을 지나도록
보여 가르쳐 주심을 받지 못했나이다.
법을 위한 마음이 간절하므로 하룻 저녁에는
홀로 방장(조실)실에 들어가
'어떤 것이
이 智常의 본심이며 본성입니까?' 하고 여쭈니
대통화상께서
이에 이르시기를
'네가 허공을 보았느냐?'
하심에 대답해 이르기를 '보았습니다' 하니
그분께서(彼) 이르시기를
'네가 본 허공이 모습인 相이 있더냐?'
대답해 이르기를
'허공은 형체가 없사온데 무슨 모양이 있겠나이까?'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너의 본성이 허공과 같아서
마침내 한 물건도 볼 것이 없음을 알면
이것이 이름하여 정견이요,
마침내 한 물건도 없음을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참 아는 것이며,
푸르고 누렇고, 길고 짧은 것이 있음이 없으며,
다만 본원이
청정한 깨달음의 體가 둥굴고 밝음을 보아
곧 밝아지면 견성성불이요,
또한 이름하여 여래의지견 이니라' 하시었습니다.
학인이 비록 이 말씀을 들었으나
오히려 뜻의 이치를 밝히지 못했사오니,
빌건대
화상께서는 열어보여 주옵소서"
강설:
신수대사께서
"가히 마음이 허공 같아 한 물건(相)도 없음을
아는 것이 바른 지견이요
참으로 아는것(깨달음)이요,
일체 상이 없는 청정한 覺體가
원명함을 보아 반야지혜가 밝게 드러남이
견성으로 성불인 것이요
이름하여 불지견이라"
하신 설법은
틀린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다만 신수대사의 법문은
현상(나타나 있는 相)이라고 이름하며
현실이라고 이름하는 차별 경계인
부처님은 부처님(覺人)으로써 머물고
중생은 중생으로써 머물러 행하는
그 가운데서 본성이 부처요
깨쳐 들면 곧 성불이며
불지견에 이르름을 설하신 차별문이라,
본성 성품을 직시하는 평등문으로 살피면
이 차별문은 보는 것과 볼것 있음으로
갈라져 상견을 이룸이 되는 것이다.
방장은 곧 조실이며
선지식의 거처하는 방을 이르는 것으로써
방장의 유래는 유마힐거사의 방이 一丈
(사방10척 폭3㎡)이였음으로부터 생긴 명칭이며
조실이란 것은 제4조 우바국다존자가 제도한
사람마다 산 가지(籌) 하나씩을 쌓은 것
(주실)이 祖실로 변해 오늘에 이른 명칭이 되었으며
이 방에 거처하는 선지식을 조실이라 하게 된 것이다.
師曰하시되 彼師所說이 猶在見知이니 故로 令汝未了니라
吾今示汝一偈하리라
不見一法存無見이여 大似浮雲遮日面이니
不知一法守空知하면 還如太虛生閃電이로다
此之知見瞥然興하면 錯認何曾解方便이리요
汝當一念自知非하면 自己靈光常顯現하리라.
조사께서 말씀하셨다.
"그(신수) 대사의 말씀이 오히려
보고 앎이 남아 있으니
그러므로
너로 하여금 요달치 못하게 된 것이니라,
내가 이제 너에게 한 게송을 보이리라"
한법도 보지 않는 없다는 소견을 둠이여
(한법도 없다는 없음이 있으니)
뜬구름이 해의 낯을 크게 가린것과 같으니
(이 없다는 소견이 오히려 크게 가렸으니)
한법도 알것이 없다는 공한 앎을 지키면
(공하여 알 것이 없다는 공이라는 생각이)
도리어 허공에 번개가 번쩍임을 냄과 같도다.
(오히려 허공에 공이라는 허물을 그렸도다)
이 안다는 소견의 언듯 봄이 일어나면
(알고 보는 소견이 능소로 벌어지면)
그릇 안 것이니 이것이 방편인 줄 어찌 알리요
(이것이 방편인 교설을 잘못 아니)
네가 마땅히 한 생각 어긋남을 알면
(마땅히 이 한생각이 어긋남을 알면)
자기의 신령한 광명이 항상 명백히 드러나리라.
(자성의 신령한 지혜가 밝게 드러나리라)
강설:
한법도 보지 않음은
곧 한 가지의 相도 있음이 없음이니
일체에 능소가 끊어진 평등함이라
한 법도 보지 않는다는 소견과
밝아 청정하여 빈 것에 공하다는 소견을 지으면
相見이 되어 능소(주객)로 둘로 벌어 지게 되는 것이니
본래 찾을 것도 보아야 할 자성이 달리 있음이 없는 것이다.
常이 聞偈已하고 心意豁然하여 乃述偈曰하되
無端起知見하여 着相求菩提하나니
情存一念悟하면 寧越昔時迷리오
自性覺源體가 隨照枉遷流하나니
不入祖師室이면 茫然趣兩頭로다.
智常 이 게송을 다 듣고
마음이 막힘 없이 밝게 깨닫게 되어서
이에 게송을 지어 이르기를
까닭 없이(無端) 아는 소견 일으켜서
(괜히 안다(공하다는)는 소견을 내어)
相에 집착해서 보리를 구했나니
(상에 국집하여 보리를 구했으니)
실로 깨달았다는 한 생각이라도 있으면
(한 생각 깨달았다는 생각만 있어도)
미했던 옛 때 보다 어찌 나으리오.
(깨닫기 전과 다를 바 없음이로다)
자성인 깨달음의 근원인 바탕이
(자성이 원래 청정하여 相이 없는데)
비침을 따라 굽어 흐르니
(상을 쫓아 도리어 삿되어지니)
조사의 방에 들지 못하면
(명안조사 지시를 받지 못하면)
망연히 두 가지로 향하리라.
(아득히 멀어져 상견만 더 하리라)
강설:
공하다는 생각과 한 법도 없다는
空見의 소견을 갖게 되어 空한 것과
공함을 아는 상대적 소견이 허공에 뼈를 만듦이니,
허공같이 비어 공하다는 말들이 방편으로
일러 보인 교설임을 깨닫지 못해
空이라는 상에 국집해서 보리를 구함이
깨닫기 전과 다를 바 없는 것임을 깨닫고 보니,
잘못되면 삿된 소견의 병통이 되므로
명안조사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능소로 벌어져 어긋나게 된다는 뜻이니
명안조사의 가르침이 이토록 중요하다 하였다.
智常이 一日은 問師曰하되 佛說三乘法하시고
又言最上乘하시나 弟子未解이오니 願爲敎授하소서
師曰하시되 汝觀自本心하고 莫着外法相하라
法無四乘이나 人心이 自有等差하니 見聞轉誦은 是小乘이요
悟法解義는 是中乘이며 依法修行은 是大乘이요
萬法盡通하며 萬法俱備했으나 一切不染하고 離諸法相하여
一無所得을 名最上乘이니라
乘是行義이며 不在口爭이니 汝須自修하되 莫問吾也하라
一切時中이나 自性自如니라 常이 禮謝執侍-終師之世하니라.
智常 이 하루는 조사께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3승법을 말씀하시고
또 최상승을 말씀하셨사오나
제자가 알지 못하겠사오니
원컨대 가르쳐 주시옵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자기 본심을 觀하고
밖으로 법상에 집착하지 말라.
법은 四승이 없으나
사람 마음이 스스로 등급을 가리니
보고 들음에 굴리어 외우는 이것이 소승이요,
법을 깨달아 뜻을 아는 이것이 중간승이며,
법에 의지하며 수행하는 이것이 대승이며,
만법에 다 통하여 만법을 모두 구족했으나
일체에 물들지 않고 모든 법상을 여의어서
하나도 얻은 바가 없음을 이름하여 최상승이라 하니라.
乘이란
바르게 행한다는 뜻이며
입으로 다투는데(말에) 있지 않으니
너는 모름지기 스스로 닦되 나에게 묻지 말라,
어느 때나(항상) 智常은 스스로 같으(自如)니라"
智常이 절하여 사뢰고(계합하였음으로)
조사께서 세상을 마치실 때 까지
곁에서 모시었다.
강설:
석가세존이 들어 교설하신 3승
(성문<양수레>
연각<사슴수레>
보살승<소수레>)
최상승(백우거-일불승)은 차별문이며,
평등문인 본성의 실상을 살피면 이러한 3승이니
최상승이니 하는 것이 없는 것이나
모두 깨쳐 들게 하시기 위한 방편
(수단으로써 假設)인 것이며 본성을 관해 깨달으면
모든 방편설이 실다움이 아닌것이다.
또 사람의 근기를 나누면
보고 들은 방편에 굴림을 당해서
등급(차별상)에 국집하여,
목적이 되는 본성의 실상은 깨달아 보지를 못하고
말만 외우는 것은 소승(근기)이고,
깨달아 뜻을 아는 것이 중(中)승이고,
법(眞理)에 의지해 수행하는 것이 대승이며,
모든 실상의 진리를 통달하여 일체지를 깨쳐
갖게 되어(증득) 상에 끄달려 집착함을 여의고
증득했으되 얻는 바 없음을 얻은 것은
최상승(일불승)이라 하셨으나,
이 드러 보이신 것도 차별문의 방편을 면하지
못함임을 또한 알아서, 알음알이로 외워서 앎으로써
삼으면 知解종자를 면하기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乘이란
바르게 한다(평등문)하셨다.
차별문으로 살피면 승은 올라 탄다는 뜻으로
그 법위에 이른다 하는 뜻이다.
이러한 방편을 국집해서 말로 만 외워 아는 것은
헛된 짓이요 다툼(말에 끄달려 분별함)에 있음이
아니므로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하셨다.
법거량 끝에 절하는 것은
直旨를 계합해 깨달았음에 감사함을 보이는 행이다.
一僧志道는 廣州南海人也이다 請益하되 曰學人이 自出家로
覽涅槃經이 十載有餘이나 未明大意이오니 願和尙께서 垂誨하소서
師曰하시되 汝何處未明인가 曰하되 諸行無常하여 是生滅法이니
生滅滅已하면 寂滅爲樂이라시니 於此疑惑이나이다.
志道스님은 광주 남해사람이다.
법문을 청해 이르기를
"학인이 출가해서 부터
열반경을 봄이 10년이 넘었사오나
대의를 밝히지 못했사오니
원컨대
화상께서 가르침을 주옵소서”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어느 곳을 밝히지 못했는가?"
"모든 현상(行)이 무상하여 바로 나고 죽는 법이니
생하고 멸하여 멸함이 다하면 적멸이 낙이 된다
하시니
이것이 미혹하여 의심되나이다”
강설:
열반경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득한 전생에 수행승으로
설산에 계시면서 대승경전을 구해 보시고자 하실 때
하느님인 석제환인이며
제석천왕이 무서운 나찰의 몸으로 변신해서
수행하고 있는곳에 나투어서 과거 부처님이
설하신 四구 게송 가운데
"諸行無常 是生滅法이니"
라는
두 구절 만을 들려주었다.
즉 "모든 현상이 덧없는 것이니
이 모든 것들은 생했다가는 멸하는 법
(실상의 진리)이니"라는
대목 만 듣게 되신
수도승인 석가세존께서는 환희심이 용솟음쳐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 봐도
아무도 보이지 않자
소리난 쪽을 향해서 "누구의 말씀이요?"
하고 소리쳤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람을 잡아 먹는 나찰귀가 있기에
그 나찰귀 앞으로 나아가
"거룩하신 대사시여!
그대는 과거세 부처님(깨달으신 분)의
이 게송을
어디서 들었소?" 하니
나찰이
"나는 오랫동안 먹지를 못해
말할 기력이 없노라"
라고 만 할 뿐 물음에 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수도승은
"그대가 먹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나는 산 사람의 더운 고기를 먹어야 한다"
하자
구도 열이 지극한 수도승이었던 세존께서는
"그대가 나머지 구의 게송을 일러주면
내 몸을 공양하겠노라"
하니
"여덟자 2구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겠다는
그대의 말을 믿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말하자
"옹기 그릇을 버리고
칠보를 구한다면
누구나 옹기 그릇을 버리 듯
이 몸뚱이를 버리고
금강신을 얻고자 하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내 말을 증명하실 것이오
하자
"잘 듣고 잘 들으시오,
그대를 위해 일러주겠소"
하고 나서
"生滅滅已하면 寂滅爲樂이니라"
즉 "생멸이 멸하여 다하면
(멸했다는 것까지 다하여)
멸해 고요한 그것이 낙이라" 하였다.
이 게송을
마저 들은 수도승 세존께서
기쁜 마음으로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지자,
다시 제석천으로 몸을 바꾼 나찰이 받아
안아
구해 주고는
"거룩하다"한,
이 게송을 들어 그 대의를 물은 것이다.
師曰하시되 汝作 生疑인가 曰하되 一切衆生이
皆有二身이니 謂色身法身也라 色身無常하여 有生有滅이나
法身有常하여 無知無覺이거늘 經云하시되 生滅滅已하면
寂滅爲樂者라시니 不審이나이다 何身寂滅하면 何身受樂이니까
若色身者라면 色身滅時에 四大分散이 全然是苦이니
苦不可言樂이며 若法身이라면 寂滅하면 卽同草木瓦石이니
誰當受樂이나이까 又法性은 是生滅之體요 五蘊은 是生滅之用이니
一體에 五用이 生滅是常하여 生則從體起用이요
滅則-攝用歸體이나이다 若聽更生이면 卽有情之類라
不斷不滅이며 若不聽更生이면 則永歸寂滅하여 同於無情之物이니
如是則一切諸法이 被涅槃之所禁伏하여 尙不得生이니 何樂之有이니까
조사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어떻게 의심하는가?"
이르기를
"일체 중생이 모두 두 몸이 있으니
육신과
법신이라,
육신은 덧없는 것이어서
남이 있고 죽음(滅)이 있으나
법신은 항상하여 남도없고 깨달음도 없거늘
경에 이르시기를
'나고 죽음 멸하여 마치면
적멸이 낙이된다'고 하셨으니
깨닫지 못하겠나이다.
어떤 몸이 적멸하며
어떤 몸이 낙을 받는 것이옵니까?
만일
육신이라고 하면
육신이 죽(滅)을 때에
네가지 큰 요소가 흩어지는 것이
전연 이것은 괴로움이니
괴로움을 낙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며,
만일
법신이라면(적멸하면)
곧 초목이나 기왓장이나 돌과 같으니
누가 마땅히 낙을 받을수 있는 것이옵니까?
또 법성은 바로 나고 죽는 바탕(體)이고
다섯 가지 쌓임(오온)은
바로 나고 죽는 用이니
한 체에서 다섯 작용이 나고
죽는 이것이 항상하여
나는 것은 체로부터 용을 일으키는 것이요,
죽음은 용을 껴잡아 체로 돌아 가는 것인가 하나이다.
만약
다시 난다면
곧 유정의 무리라 끊어지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을 것이며,
만약
다시 나지 않는다면
곧 영원히 적멸로 돌아가서 무정물과 같을 것이니
이와 같은 즉 일체 모든 법이 열반에 묶이어
오히려 남을 얻지 못할 것이니
무슨 낙이 있겠나이까?"
강설:
志道스님의 소견으로는
"모든 중생은 육신과 법신의 두 몸이 있어서
육신은 항상하지 않아 생사가 있으나
법신은 항상하여 비어서 있음(相)이 없으니
경에 "나고 죽음이 다하여 마치면 적멸이 낙이 된다"고
하셨으니 어느 몸이 적멸하며(육신은 계속 생멸하고
법신은 항상하니까) 또 낙을 받는 몸은 어떤 몸인가?
육신이라면 죽을 때(四大가 멸함) 괴로우니
이것을 낙이라 할수 없고
법신이라면 적멸하여 무기물(초목, 돌 등)과
같을 것이니
낙을 받을 것이 없지 않는가?
또 법성은
생멸의 바탕(체)이요
5온(색, 수, 상, 행, 식)은 생멸하는 作用이니
한 바탕(법신체)에서 5온이 나고
죽음이 항상해서 남이라는 것은
체로 부터의 作用을 일으키는 것이고,
죽음이란 것은 用(나툼)을 거두어
체로 돌아 가는 것이니
다시 나게 되면 유정이 되니
생사윤회를 거듭하므로
끊어지지도 없어짐(寂滅)도 아닐 것이며,
다시 남이 멈춘다면 영원히 멸해서
고요할 뿐인 것이라
무정물 같이 되어 즐거움을 알지 못할테니
열반(定)에 묶여서 나지도 않을 것이니
무슨 낙이 있겠는가?
하는 그럴사한 생각을 하고 보니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여쭈어 본 것이다.
師曰하시되 汝是釋子로서 何習外道-斷常邪見하여
而議最上乘法인가 據汝所說하면 卽色身外에 別有法身이며
離生滅하여 求於寂滅하며 又推涅槃常樂-言有身受用하니
斯乃執吝生死하는 耽着世樂이니라 汝今當知하라
佛께서 爲一切迷人이 認五蘊和合하여 爲自體相하고 分別一切法하여
爲外塵相하고 好生惡死하여 念念遷流하여 不知夢幻虛假하고
枉受輪廻하며 以常樂涅槃-飜爲苦相하여 終日馳求함에 佛께서
愍此故로 乃示-涅槃眞樂은 刹那에도 無有生相하며 刹那에도
無有滅相이니 更無生滅可滅인 是則寂滅現前이니 當現前時에
亦無現前之量한 乃謂常樂시니라 此樂은 無有受者하며
亦無不受者이니 豈有一體五用之名이며 何況更言하되
涅槃-禁伏諸法하여 令永不生인가 斯乃謗佛毁法이니라
聽吾偈하시고 曰하시되
無上大涅槃이 圓明常寂照이거늘
凡愚謂之死하고 外道執爲斷하며
諸求二乘人은 目以爲無作하나니
盡屬情所計하여 六十二見本으로
妄立虛假名이니 何爲眞實義리오
唯有過量人이라야 通達無取捨하여
以知五蘊法과 及以蘊中我와
外現衆色象과 一一音聲相이
平等如夢幻하여 不起凡聖見하며
不作涅槃解하며 二邊三際斷하여
常應諸根用하나 而不起用想하며
分別一切法해도 不起分別想하나니
劫火燒海底하고 風鼓山相擊해도
眞常寂滅樂이니 涅槃相如是니라
吾今强言說은 令汝捨邪見이니
汝勿隨言解함은 許汝知少分하리라
志道가 聞偈大悟하여 踊躍作禮而退하다
"네가 부처님의 제자로서
어찌 외도의 끊어짐과 항상한다는
삿된 소견을 익혀서
최상승법을 가리려 하는가?
네가 말한 바에 의하면
곧 육신 밖에 따로 법신이 있으며
생멸을 떠나서 적멸을 구하며
또 열반의 항상 즐거움도
몸이 있어서 수용한다 추측하니,
이것은 생사를 집착하고 아끼는
세간의 낙을 탐착하는 것이니라.
너는 이제 마땅히 알라,
부처님이 모든 미혹한 사람들이
다섯 가지(5온)가 같이 합함을 인정하여
자기 몸의 모습으로 삼고,
모든 것을 분별하여 밖으로 헛된 모습을 위하고,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는 싫어하여
생각 생각 바꿔져 흐르니,
꿈이요 환이며
허망한 거짓임을 알지 못하고
비뚤어져 윤회를 받으며 항상하는
열반의 낙을 거꾸로 괴로운 모습으로써 삼아
온종일 달리어 구함에, 부처님께서
이것이 가여우심으로 이에 보이셨으니
열반의 참낙은 찰나에도 나는 상이 있음이 없으며
찰나에도 멸하는 상이 있음이 없으니
다시 생하고 멸할 것을 가히 없게할 것도 없는
이것이 곧 적멸이 드러난(現前) 것이니,
마땅히 현전할 때 또한 현전한다는
헤아림도 없는 이것이 상락이라 하셨느니라.
이 낙은 받는 것도 있음이 없으며
또한 받지 않는다는 것도 없으니
어찌 한몸과 다섯가지 用이라는 이름이 있으며,
어찌 하물며 말하기를 다시 열반이
모든것을 얽매어서 영원히 나지 않게 한다 하겠느냐?
이는 이에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요
헐뜯는 것이니라.
게송으로 들으라" 하시고 이르시되
위없는 대열반이
(더 이상 없는 대 해탈이)
뚜렷이 밝아 항상 비치거늘
(소소영령하여 항상 일체를 비치거늘)
어리석은 범부는 죽는다 이르고
(어리석은 중생은 죽는다고 말하고)
외도는 단멸을 집착하며
(삿된 무리는 끊어져 없음(단멸공)을 고집하고)
소승(二乘)으로 구하는 사람은
(소승으로 닦는 이들은)
하는 것 없음으로써 목적을 삼나니
(我空에 머물(定)러 낙을 삼기를 국집하니)
모두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에 속하여
(모두가 분별 계교로써)
62가지 소견의 근본으로
(있음 없음에 치우친 외도의 소견으로)
망령되이 헛된 이름을 세우나니
(헛된 소견의 거짓 세운 이름이니)
어찌 진실한 뜻이리오
(어찌 실다운 진리리오)
오직 헤아림을 초월한 사람이라야
(오직 분별심을 여읜 이라야)
5온을 아는 법과 더불어
(색, 수, 상, 행, 식인 실상의 진리와)
5온 가운데의 나와
(5온 가운데 내라고 하는 것과)
밖으로 나타나는 모든 물질의 像과
(모든 물상(萬有: 名)과)
낱낱의 말 소리들이
(갖가지 말 소리(聲)들이)
평등하여 꿈이요 환과 같아
(평등(空)하여 허깨비같이 유명무실하여)
범부다 성인이다는 소견이 나지 않으며
(범부니 성현이니하는 분별도 내지 않고)
열반이란 견해도 짓지 않으며
(열반이란 분별도 하지 않으며)
양변과 삼제가 끊어져
(有, 無와 과거, 미래, 현재니 하는 것도 없어)
항상 모든 근기에 따라 쓰나
(항상 모든 인연따라 작용하나)
쓴다는 생각도 나지 않으며
(쓴다는 생각도 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분별해도
(온갖 것을 잘 살펴 알아도)
분별하는 생각이 나지 않나니
(분별심이 나지 않으니)
겁화가 일어나 바다가 마르고
(우주가 괴멸하는 큰 불로 바다가 마르고)
바람이 불어서 산이 서로 부딪쳐도
(태풍에 산끼리 서로 부딪칠지라도)
참되고 항상하는 적멸의 낙이니
(실답고 항상하는 고요한 낙이니)
열반의 상이 이와 같으니라
(열반의 모습이 이와같은 것이니라)
내가 이제 힘써 말로 설한 것은
(이렇게 강조해서 말로써 일러줌은)
너로 하여금 사견을 버리게 함이니
(네가 삿된소견(변견)을 버리게 함이니)
네가 말을 따라 알려함이 없으면
(말에 만 쫓지 않고 말 밖의 도리를 알면)
조금 알았다 허락하리라.
(깨달았음을 인정하노라)
志道 가 게송을 듣고 크게 깨쳐서
뛰어 오를 듯이(기뻐하며) 절하고 물러갔다.
강설:
62見이란
5(온) X 4(항상, 무상, 항상하기도 무상하기도,
항상한 것도 무상한 것도 아닌) = 20소견, +
5(온) X 4(끝이 있다, 없다, 있기도 없기도 하다,
끝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 20소견, +
5(온) X 4(내세가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있기도 없기도 한) = 20소견, +
2(몸, 정신) = 2소견으로
62斷,常의 삿된 외도의 소견을 이르는 것이다.
소승인
(양수레-혼자 오름)
성문은
무명(중생 근본 번뇌:생사의 근원)이
생하고 멸하는것을 보며 四성제
(고집멸도)로 닦고,
연각은
무명이 멸하는 것만 보고 무명이 일어나는 것은
보지 않으며 12연기법으로 닦아 적멸을
홀로 증득(독각)하는 것이다.
志道스님이 이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에 치우친
소견으로 적멸이 낙이라는 뜻을 모르는 것이다.
이 양변의 소견을 여의어야만 참으로 항상하는
낙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정각을 이루면
(즉 부처님) 생하고 멸하는 것을 보되
생멸로 보지 않고, 생멸이 없는 대승의 果를 보는 것이니
대승불(일승불)의
일체평등(眞空)한 열반적멸이니
따라서 모든 것은 항상한 것(상견)
空無(단견)한 것의 양 변견인 치우친 소견을
모두 여윈(가운데 없는) 중도에 머물며,
일체를 여의되 여의지 않고
생멸 가운데 생멸하지 않으며,
색신은 나고 죽으나 참 생명인 자성은 절
대 영원한 존재로 현상계에 상즉하되
생멸을 받지 않은 적멸의 낙인 것이다.
열반
가운데는 구함도, 취하고 버릴 것도,
얻을 것도, 증명할것 까지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한 물건도 없어 갓없이 둥글고
묘하고 깨끗한 것이 본래 마음(자성)으로
일체를 밝게 바르게 살핌으로 밝다 하며,
시작도 끝도 없어 항상하며,
산란하지 않아 고요한 것이며,
신령하여 미혹하지 않아 밝게 비춰 보는 것이다.
삿된 견해 가운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定에만 국집하는 것이
제일 큰 삿된 소견(邪見)인 것이니,
아무 공덕(사유)도 짓지 않고
공에 빠져서 열반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무기공에 떨어져 급기야는
무기력해져 다시 구제할 수 없는 두터운
무명으로 쌓여 떨어지게(轉落) 되기 때문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