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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 소금길과 중북부능선(220806~07)
▣ 일 시 : 2022년 08월 06일(토)~07일(일)
▣ 코 스 : 자연휴양림-우수청골-주막터-소금쟁이능선-벽소령-삼각고지-중북부능선-영원령(갈월령)-영원사
▣ 인 원 : 산친들과
▣ 날 씨 : 흐리고 맑음
소금이라는 어휘는 농경사회에서 꼭 필요한 '소(牛)'와 '금(金)'처럼 귀하다는 뜻으로 '작은 금' 즉, 소금(小金), 또는 하얀 금, 소금(素金)이라고도 불렸다. 고려 시대 이전의 소금에 대한 기록이 있는 문헌은 많지 않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가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는 태조 때 설치된 도염원(都鹽院)에서 소금 전매제가 시행되었다. 또한 국가가 소금가마솥을 소유하여 소금을 제조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서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소금을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은 자염(煮鹽) 방식이고, 왕실 소유의 전매제가 실행되었다. 염장(鹽場)을 설치하여 관가에서 소금을 구웠다. 처음 천일염을 제조한 것은 1907년이다. 인천시 북구 십정동 소재 주안 염전이 최초의 천일염전이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등 서해안에서 집중적으로 천일염을 만들어냈다. 1955년 이전까지는 정부에서 전매제를 시행하였고, 1961년 염전매법(鹽專賣法)이 폐지되었다. 2008에 염관리법(鹽管理法) 및 식품공전이 개정되면서 그동안 광물로 취급받았던 천일염이 식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編]
소금길 답사는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서 나오는 ‘검각(劒閣)’이 계기가 되었다. 유몽인은 영신암에서 자고 의신사까지 내려오는 험난한 하산길을 촉도의 검각(劒閣)에 비유하였다. 유몽인이 도덕봉을 검각으로 표현한 것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 그 시점에 조봉근씨가 봉산정계 석각을 찾았다. 남원 관아에서 숙성치, 구례 와룡정을 거쳐 화개에서 의신까지 유몽인길 답사를 마친 상태였다. 어떤 길이든 처음 가는 길은 어렵다. 유람록 답사는 다기망양(多岐亡羊)이다. 산길은 학문처럼 갈림길이 많아서 진리를 찾기가 어렵다. 옛길 복원도 그렇다. 수많은 갈림길을 다 가본 후에도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다. 섬진강의 포구 화개, 당취의 본부 의신사, 오리정골 지명과 ‘남원(南原)’이라는 묵서, 벽소령의 봉산정계 석각, 소금쟁이 능선을 연결하고자 여러 차례 답사를 하였다. 이번 답사는 마천면 삼정리 광암동(넘바위골)에서 소금쟁이능선을 거쳐 벽소령을 잇는 여정이다.
注 촉도(蜀道) : 전국시대 秦나라 惠文公이 蜀을 치려고 했으나 길을 알지 못하므로 돌을 깎아 다섯 마리의 소를 만들어서 항문 근처에 금을 넣어 놓고는 이것을 촉도에 갖다 놓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는 돌소가 금똥을 눈다고 하자, 이 소문을 들은 蜀王은 1천여 명의 군사와 5명의 力士를 동원하여 成都로 운반해 갔다. 이 때문에 길이 뚫려 秦나라는 마침내 이 길을 따라 蜀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그러므로 이 길을 金牛道라고도 하였다. 검각(劒閣)은 촉도를 지나는 관문이다.
1. 화개면 삼정(三政)에서 벽소령 소금길(211204~05)
지난해 12월 양일간(211204~05) 화개면 삼정(三政)에서 오리정골을 거쳐 벽소령까지 소금길을 답사하였다. 화개면 대성리 삼정 마을에서 오리정골을 거쳐 벽소령을 잇는 옛길이다. 벽소령에서는 목책을 넘어 소금쟁이 능선 초입 헬기장까지 연결하였다. 오리정골과 소금쟁이 능선의 옛 지명에는 역사와 문화가 남아있다. 그것을 유추하고 발굴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몫이다. 오리정골 바위에 '南原光陰過 甲子六月'과 '庚戌夏 稜城槐亭主人題'라는 흐릿한 묵서가 있는데, 소금길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아마 그 인근에 오리정(五里亭, 오리마다 있는 쉼터) 쉼터가 있었을 것이다. 과연 인력으로 화개에서 마천까지 고도 1350m의 벽소령을 넘어 소금을 운반했을까. 그렇지 않다. 지게가 아닌 당나귀나 노새를 이용했을 것이다. 소금길 곳곳에는 우마가 통행하도록 길을 구축한 흔적이 있다. 소금의 비중은 2.2로 물의 무게보다 두 배나 넘게 무겁다는 사실이다.
삼정마을을 출발→설산 습지 초입 마을터에서 오리정골로 진입하여 벽소령 옛길을 따랐다. 벽소령 옛길은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리정골 바위에 묵서로 쓴 남원(南原)이라는 글자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지리산소금길 염두고도(鹽豆古道, 소금과 콩의 물류가 이동하는 옛길, 2020)'를 보고 혹시 남원의 상인들이 소금 길인 오리정골 바위에 묵서를 남긴 것은 아닌지 상상하였다. 오리정골 소금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너덜지대에는 가축이 이동할 수 있도록 돌 포장을 하였다. 이정목도 남아있다. 사면 길은 흙이 흘러내려 길폭이 좁아지기도 하지만 이내 다시 넓어진다. 당시 작전도로공사와 만나는 지점에 이르면 옛길의 흔적이 묻혔다. 옛 벽소령 샘터(뱁실샘)로 오르는 길은 현재 등산로가 아닌 양지쪽으로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샘터(집터 : 표지목 12-14)에서 벽소령까지는 우마길의 원형이 확연하다. 벽소령에서 소금길은 곧바로 구벽소령 헬기장과 소금쟁이 능선으로 이어진다. [지리산의 염두고도(鹽豆古道) 벽소령 소금길(211204~05)]
2. 벽소령 소금길과 봉산정계 석각
또 하나는 벽소령에 있는 봉산정계(封山定界) 금표 석각이다. '벽소령 고지대에 왜 금표석각이 세워졌을까.'하는 의문이다. 필자는 지난해 9월 완폭대 님에게 봉산정계 금표 석각을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 여러 차례 벽소령을 답사하였다. 완폭대 님은 불일폭포의 완폭대(翫瀑䑓)와 수곡골의 은정대(隱井䑓), 구롱길의 방장문(方丈門)을 발견한 분이다. 아는 것이 없어서 전국 금표 석각을 모두 답사한 선과 임병기 님과 김희태 님을 벽소령으로 초대하여 자문을 받았다. 소금길과 봉산정계 금표석각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추정한다. 인구의 증가로 소금의 수요가 증가하자 벽소령에 움막과 소금 창고가 늘어났고, 결국은 나라에서 벽소령 주변의 목재 남벌을 막은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이다.
※ 마천면 삼정리 소재 벽소령의 봉산정계 금표석각 : https://blog.daum.net/lyg4533/16488715
3. 벽소령에서 광암동(넘바구골)까지 소금길(220107)
지난 1월 선과 임병기 님(옛님의 숨결. 그 정취를 찾아) 김희태 님(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과 봉산정계 금표를 답사한 후 소금쟁이 능선으로 하산하였다. 몇 차례 소금쟁이 능선으로 하산한 일은 있지만 소금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한 첫 산행이었다. 소금길은 벽소령 목책을 넘어 헬기장까지 완만하게 이어진다. 과장되지만 길의 넓이는 대략 2m로 우마의 교행이 가능하다. 1971년 작전도로가 완공되기 전까지 벽소령을 왕래한 길이다. 소금쟁이 능선 마지막 급경사길은 근래에 만들어진 길이다. 다음은 당시의 답사 기록이다.
지난해 12월 초 삼정에서 오리정골로 벽소령까지 소금길 일부 구간을 답사하였다. 섬진강을 통해 화개까지 운반된 소금은 육로를 통해 지리산을 넘어 내륙으로 이동한다. 하나는 칠불사에서 화개재를 넘어 남원시 산내면으로 들어오는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안당재를 지나 오리정골에서 벽소령을 넘어 함양군 마천을 연결하는 소금쟁이 능선길이다. 지난 답사에서 벽소령 대피소에서 소금쟁이 능선으로 진입하는 사면 길 초입을 확인하였다. 답사팀은 봉산정계 석각을 확인한 후, 벽소령 대피소 앞 목책을 넘어 소금길로 진입하였다. 무거운 소금을 인력으로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마를 이용하지 않고는 운반할 수 없다. 우마가 이동하려면 토목공사로 길을 구축해야 하고, 우마가 지나간 길은 발굽으로 인해 골이 깊게 파여있다. 그래서 옛길의 흔적이 남아있다. 길의 폭이 약 2m로 완만하게 구벽소령 헬기장으로 이어진다. 능선길의 대부분은 완만하고 길의 폭이 넓으며 간간이 이정목도 남아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지리산 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가는 급경사길은 최근에 만들어진 등산로이다. 완만한 능선 길에서 우수청골로 비스듬히 내려가는 흔적을 보았지만, 마지막 구간의 소금길 전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벽소령 봉산정계 금표 석각과 소금쟁이 능선(220107)]
注 1917년 총독부에서 제작한 오만분지일 조선의 지형도에 광암(廣岩) 옆에 일본어로 '넓은 바구'라고 적혀있다. 본래 한일리조트 자리에 엄청 넓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넘바구골'이라고 하였다. 일본이 지도를 제작하면서 '廣岩(광암)'으로 창지개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넒은 바위는 한일 리조트를 지면서 깨뜨렸다고 한다. 한일리조트자리에 소금길 주막터가 있었다.
4. 벽소령 소금길과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220202~06)
지난 2월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조용헌 선생과 4박 5일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벽소령과 도솔암에서 각각 일박을 하고, 선유정, 구시소, 운학정, 청매암, 도솔암 등을 둘러보았다. 선녀와 나무꾼 전설은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중 하나가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다. 도대체 누가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을 만들어 냈을까. 강호 동양학자 조용헌 선생은 '소금쟁이들이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유추한다. 이 구시소에는 석각도 남아있다. 소금길의 주막이 있던 곳이다. 소금쟁이들은 노총각이 많았다고 한다. 농경사회에서 전답이 없으면 죽을 때까지 가난을 달고 산다. 경제력이 없으니 결혼도 할 수 없다. 장가를 들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도 몽달귀신이 된다. 구시소에서 벽소령과 부자바위가 보인다. 벽소령도 부자바위도 이곳에서 이름했을 것이다. 구시소에서 벽소령의 보름달을 바라보고 혈기방장(血氣方壯)한 소금쟁이들이 선녀가 목욕하는 장면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옛날 선녀 몇 사람이 내려와서 목욕하는 움푹 파인 못(槽沼, 구시소)을 살폈다. 한 장부가 있어 이름을 인걸(人傑)이라고 하였는데, 선녀들이 목욕하는 것을 엿보다가 몰래 그중의 아미(阿美) 선녀의 날개옷을 훔쳤다. 선녀는 옷을 찾다가 끝내 옷을 찾지 못하고 인간 세상에서 사람(人傑)과 동거하면서 두 아들을 얻었다. 아들이 이미 장성하여 하루는 달밤에 부부가 즐거워하다가 날개옷을 주었더니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부자(父子)가 벽소령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서 애절하게 울부짖다가 마침내 화석(化石)이 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부자 바위(父子岩)가 이것이다.
昔仙女數人降 監沐浴槽沼也 有一丈夫名曰人傑 竊覸其沐浴 私竊其中阿美仙女羽衣 仙女尋衣 終不得 遂爲世間之人 而與之同居 生於二男 男已長成 一日月夜 夫婦樂樂羽衣給 則乘雲上天遙遠 父子相望而絶叫 竟爲化石 世云所稱父子岩是也)」<선유정기>
소재지 : 함양군 마천면 삼정로 449(휴양림산장 대표 차재권, 010-4531-7637)
행적자 : 홍계희[洪啓禧, 1703년(숙종 29)~1771년(영조 47)] 연대 : 조선 영조 석각시기 : 1744년(영조20년)
[개요]
병렴곡(屛簾谷)은 구시소(槽沼)로 흘러내리는 계류를 가리키는 듯하다. 넓은 반석에 옥구슬이 병풍과 발을 드리운 것처럼 계곡물이 구시소로 흘러내린다는 의미이다. 석각의 내용은 '병렴곡 갑자모춘 담와 홍순보 역당[屛簾谷甲子暮春澹窩洪純甫歷賞 : 병렴곡 갑자(1744)년 늦은 봄 담와 홍순보가 두루 구경하다.]' 14자이다. 담와(澹窩)는 조선 영조 대에 경기도관찰사와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홍계희(洪啓禧, 1703~1771년)의 號이고 순보(純甫)는 그의 字이다. 석각 시기인 갑자모춘(甲子暮春)은 1744년(영조20년) 늦은 봄이다. 석각의 위치는 벽소령에서 소금쟁이 능선을 내려와서 광암동과 하정마을 소금길의 길목인 구시소(槽沼)에 있다. 구시소(槽沼)는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벽소령과 형제봉의 부자암이 정면으로 보인다.
벽소령 가는 길에 삼정리(三丁里) 즉, 양정(陽丁), 음정(陰丁), 하정(下丁) 마을이 있다. 삼정을 토박이 말로 정장(丁莊)이, 또는 정쟁이라고 한다. 인부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실제로 삼정리가 벽소령에 짐을 올리는 인부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마천면사편찬위원회 문호성 회장님) 소금길은 벽소령에서 소금쟁이 능선을 지나 광암동(넘바위골)에서 하정마을로 이어진다. 지리산 벽소령 작전도로는 1969년 1207 건설공병단이 공사를 착공하여 1971년 11월 30일 3년 만에 완공하였다. 지금은 공사 차량이 가끔 작전도로를 이용한다. 이제 소금길은 완전히 잊혀졌고 소금쟁이 능선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부자암이 있는 형제봉의 유래는 화개면 대성리 의신마을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의신마을에 사는 형제가 약초를 캐러 갔다가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다음날 마을 사람들이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형제가 형제봉에서 죽었다는 전설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완폭대님) 완폭대님은 85년~92년까지 벽소령에서 음료수 장사를 하였던 조봉문(1959년생) 씨 7형제 중 여섯째이다. 칠선봉의 정기를 듬뿍 받은 의신 마을 조씨 7형제가 음정 마을 사람들을 조용히 내려보내고 벽소령을 접수한 것이다. 벽소령에서 봉산정계 금표를 확인하고 목책을 넘어 소금길로 접어들었다. 길의 폭은 약 2m로 우마가 교행 할 수 있는 2차선 도로이다. 소금길은 구벽소령 헬기장에서 소금쟁이 능선으로 완만하게 이어진다.
하정마을로 내려와서 선유정과 구시소를 둘러보았다. 구시소 직전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인걸이 숨어서 선녀가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본 바위이다. 집주인 말에 따르면 홍수가 나면 물이 집으로 달려들지 못하게 하는 복 바위라고 하였다. 옆에 제단이 있는데 합천에 계신 스님이 11월이 되면 1년에 한 번씩 제를 지내러 온다고 한다. 구시소에서 올려다보면 형제봉의 부자 바위가 정면으로 보인다. 동행한 조용헌 박사의 말을 빌리면 형제봉은 백학이 나는 형상이라고 한다.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 1521~1591) 선생의 매헌집에 "남쪽은 청학동이요 북쪽은 백학동이다."라는 문구가 문득 떠올랐다.
「운학정은 매촌 정복현선생의 휴게지소로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으니 백두산 일맥이 남단으로 뻗어내려 와 지리산에서 우뚝 솟아났으니 남쪽은 청학동이요 북쪽은 백학동이다. 산수가 수려하고 경치가 절경이라. 고로 선생이 이곳에 살 만한 땅을 가려서 정사를 지어 도와 예를 강론하니 고장 사람들이 이곳을 영남의 추로지향이라고 일컬었다.
雲鶴亭 梅村公鄭先生休憩之所 在於慶南咸陽郡馬川面 白頭山一脈 蔓延於南端 聳出智異山 南則靑鶴洞 北則白鶴洞 山水秀麗 景致絶勝故 先生 卜築精舍於此 講論道禮 鄕人 稱之嶠南鄒魯也」<매촌집>
注 南則靑鶴洞 北則白鶴洞 : 옛말에 '雙磎靑鶴實相白鶴'이라는 말이 있다. 鄒魯之鄕(추로지향) :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고향이란 뜻으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말함.
5. 광암동(廣岩洞, 넘바구골)에서 벽소령 소금길
입추를 하루 앞두고 소금길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기 위해 답사에 나섰다. 영원사에 차량을 두 대 갖다 놓고, 음정 마을에서 지리산 자연 휴양림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번 답사는 구롱 길과 초령 길을 함께 개척한 분들이다. 인공위성지도와 오룩스 맵, 지적도까지 활용한다. 수의학을 전공하신 曺교수님은 산길에서 '人畜不二(인축불이)'를 강조한다. 험한 산길에서 사람의 힘으로 화물을 운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려면 '인간과 가축의 동반(人畜同伴)'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두 발 달린 사람보다 네 발 가축의 동선은 길다. 청이당터에서 하봉 옛길의 초입을 보면 가축의 길임을 금방 간파할 수 있다. 길 옆에 샘도 있어야 한다.
지리산 자연휴양림에서 직원들에게 제지를 당하였으나 '마천면지'의 운을 떼니 도촌마을 박홍규(마천면 자치위원장) 님이 앞으로 나서서 '수고한다.'라고 하시며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우수청골에 주막터가 있었다.'라는 말씀도 하신다. 지금 말로 하면 주막 겸 물류센터이다. 이곳 주막집 딸이 상당히 미인였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해져 온다. 이 주막터에서 비리내(飛離奶)골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가 있는데, 길이 상당히 완만하다. 소금길은 주막터에서 비리내(飛離奶)골을 거쳐 광암동(廣岩洞, 넘바구골)으로 이어진다. 주막터의 위치는 우수청골 초입에서 400m 지점에 있다. 주막터가 4거리인 셈이다. 집터와 창고와 마구간의 흔적이 있다. 물가에 돌확이 있는데 측면에 '大'의 각자가 있다. '大'자 석각은 지리산 국립공원 내에서 네 번째 발견이다. 계곡을 건너 길은 소금쟁이 능선으로 비스듬하게 이어진다. 오르는 길에 샘터도 두 곳이나 확인하였다. 샘터에는 사기그릇 파편도 있다.
상의가 완전히 젖은 것도 모자라 온몸이 땀에 젖었다. 버들피리님이 '소금길이라 계곡물이 짜다.'라고 하면서 농(弄)을 건넸다. 지독한 염천(炎天)의 산행이다. 소금쟁이 능선에 접어들었다. 산죽이 없으면 능선길은 완만한 길이다. 벽소령 헬기장으로 나와 배낭을 내려놓고 한참이나 쉬었다. 다음 답사지는 제산(霽山) 박도사 수행터이다. 지난 2월 김천 부항면에서 제산(霽山) 선생 8대 제자 중 한 분인 난곡(蘭谷) 차예산(車禮山) 선생에게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 선생이 벽소령에서 29세에서 31세까지 2년간 공부를 하셨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전도로가 나기 전에는 능선 상에 길이 있었고 수행터는 길에서 약간 남쪽으로 비켜나 있다. 지금은 작전도로에서 아주 가깝다. 벽소령에서 선비샘 방향 약 500m 지점 돌로 담장을 쌓은 곳이 초입이다. 온돌의 흔적과 사철 마르지 않는 샘이 있고 거대한 석굴이 있다. 뒤로는 거대한 암괴가 수직 우뚝 솟아있다. 직감적으로 이곳이 제산(霽山) 선생 수행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6. 벽소령 소금길 퍼즐을 맞추고
지난해 벽소령에 있는 봉산 정계 석각 발견이 소금길 답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소금쟁이 능선도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전북 남원의 김용근(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님이 발굴한 '지리산 염두고도(鹽豆古道)'도 도움이 되었다. 인체 장기 중 가장 염분 함유비율이 높은 곳이 심장이라고 한다. 심장을 염(鹽)통이라 하는 것도 혈액에 염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념(藥鹽)이라는 말에 '소금 염(鹽)'자를 쓰는 것도 소금 없이는 음식을 소화시키기 힘들다. 소금은 사람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필수품이다. 벽소령은 화개에서 마천을, 바다와 내륙을 잇는 주요 통로였다. 소금과 운봉의 콩만이 이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다의 각종 해산물과 함양의 특산물인 약초와 한지(韓紙)·옻칠·곶감도 유통되었을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마천의 지명도 예사롭지 않다. 고대로부터 벽소령을 사이에 두고 내륙과 바다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 마천에 물류센터 마방(馬房)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풍수지리로 마촌(馬村)과 마천(馬川), 외마(外馬)·내마(內馬)의 도마(都馬)의 지명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중북부 능선 영원령에서 영원사로 내려섰다. 1497년 남효온의 지리산일과에 나오는 초료조재와 상·중·하무주암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끝.
▼ 우수청골 주막터
▼ 벽소령 제산(霽山) 선생 수행터
첫댓글 도솔산인님!
이번 코스대로 지리산 벽소령 소금길 (염두고도 ) 답사산행을 무사히 마침심을 축하드립니다
산행기의 글이 장문이라 시간날때 천천히 읽어봐야 겠습니다 ㅡㅎ
늘 열정적인 지리역사 답사 산행에 큰 박수 보냅니다
이번 양일간의 소금길 답사 산행 산인님 / 함께하신님 수고 많아습니다~^-^
深大하고도
激情적인 인문기행을 이어가고 계심서
先踏者로서의 오롯한 모습을
이번 후기에서도 어김없이 대하게 됨을
무한한 영광과
깊은 감사함을 表합니다,
도솔산인 선생님!
함께하신 산친님들께도
염천시하에
버거운 여정을 보냈다고 여기는 입장에서
큰 박수와
하염없는 응원을 보냅니다~^^
오리정골과 소금쟁이능선을 지나는 소금길
앞당재~의신~바른재~오공능선을 넘나들든 의병들,
유몽인 선생은 영신사~검각~의신,
남효온 선생은 영신사~벽소령~의신...
얽히고 설킨 산길에서 지나온 역사를 되짚어 보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