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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로(鄭宗魯, 1738~1816)는 본관이 진양(晉陽), 자는 사앙(士仰), 호는 입재(立齋) 혹은 무적옹(無適翁)
입재집 제42권 / 묘표(墓表) / 한성 우윤 대봉 양공 묘지명 병서〔漢城右尹大峯楊公墓誌銘 並序〕
楊煕止 | 1439 | 1504 | 楊稀枝, 楊海靖 | 中和 | 可行, 楨父 | 大峯 |
대봉(大峯) 양공(楊公)의 휘는 희지(煕止)이고 자는 가행(可行)이다. 벼슬한 초기에 성종께서 명령하여 이름은 희지(稀枝), 자는 정보(楨父)로 바꾸도록 하였으나 뒤에 명을 바꾸어 처음대로 사용하게 하였으니, 대개 오랫동안 사용해 왔기 때문이었다. 양씨는 본래 관서 부자(關西夫子) 양진(楊震)의 후손이다. 고려 시대 충선왕(忠宣王) 때 정승(政丞) 양기(楊起)가 사신의 업무를 받들고 우리나라에 오니, 충선왕이 청주군(淸州君)에 봉하였다. 그분의 아들 양포(楊浦)는 정승(政丞)과 용호상장군(龍虎上將軍)을 지냈으며 당악군(唐嶽君)에 봉해졌는데, 당악은 곧 중화(中和)이니 자손들이 인하여 중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증조부는 원격(元格)으로 내시윤(內侍尹)을 지냈으며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조부는 미(渼)로 형조 판서를 지냈다. 아버지는 맹순(孟淳)으로 군수를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나주 정씨(羅州鄭氏)이니 직장(直長)을 지낸 정시교(鄭是僑)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는데, 증조부부터 어머니까지 증직을 받은 것은 공이 귀해졌기 때문이다. 정통(正統) 기미년(1439, 세종21) 4월 갑진일에 공이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났다. 막 글자를 배울 때 한 번 들으면 바로 기억하였다. 6세에 아이들과 놀 때, 아이 한 명이 홀로 서 있는 나무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옆의 가지가 부러져서 내려올 데가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졌으나, 공은 홀로 가지 않고 허리띠를 풀어 부러진 가지를 묶어 사다리를 만들어 그 아이가 그것을 타고 내려오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독을 돌로 깨트린 일에 비유하였다. 8, 9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 〈등유설(燈油說)〉을 지어서 말하기를 “등(燈)은 비유하자면 임금이고 유(油)는 비유하자면 신하이다. 등은 유로 밝아지게 되고 임금은 신하로 정치를 이루니, 그 이치는 동일하다.”라고 하였다. 매일 이른 아침에 반드시 북쪽을 향해 절하기에 어머니 정부인(貞夫人)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여 “임금이 계시는 곳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찬성(贊成) 이지장(李智長)이 보고서 크게 놀라서 “뒷날에 마땅히 현명한 재상이 되겠다.”라고 말하고는 많은 물건을 선물로 주었는데, 공은 다만 붓 하나와 벼루 하나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양하니, 이공이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을해년(1455, 세조1)에 향시(鄕試) 이장(二塲)에 장원 급제하였다. 인하여 아버지 군수공의 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한 해도 빠뜨림이 없이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8)에 생원과 진사에 모두 합격하였다. 갑신년(1464, 세조10)에 성균관에 유학하니, 명현(名賢)들이 모두 몸을 낮추어 교유하기를 원하였다. 당시 재상이 귀한 존재를 과시하며 공에게 만나기를 요구하니 공이 병을 핑계 대고 끝내 가지 않았다. 을유년(1465, 세조11)에 태학생들과 함께 원각사(圓覺寺)를 개창(改創)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상소하였다. 기축년(1469, 예종1)에 또다시 성균관에 들어갔다. 어떤 무당이 왕비의 명령이라 일컫고 문묘(文廟) 밖에서 기도하였으나 생도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공이 안팽명(安彭命)과 나란히 목소리를 내어 분격하며 내쫓으니, 대비(大妃)가 성을 내었다.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선비의 기상이 이와 같으니, 나의 병이 갑자기 나으려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임진년(1472, 성종3)에 현량책(賢良策)에 장원하였으나, 답안지에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 있어 불합격으로 처리되니 재상들이 그의 기량을 애석하게 여겼다. 갑오년(1474, 성종5) 봄에 문과 병과에 합격하였다. 임금이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기에 훌륭한 인재를 얻은 것을 기뻐하며 즉시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시를 지어 공에게 이름과 자를 하사한 것을 기록하게 하였다가 곧바로 그만두게 하였으니, 곧 이때의 일이다. 특별히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는데, 보촉(寶燭 임금의 촛불)을 뽑아 주고서 그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을미년(1475, 성종6)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 병신년(1476, 성종7) 6월에 문신(文臣) 중 유아(儒雅)한 사람을 뽑아 특별히 장의사(藏義寺)에 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공과 채수(蔡壽), 허침(許琛), 권건(權健), 조위(曺偉), 유호인(兪好仁)이 실제로 그 선발에 뽑혔다. 6명의 문학(文學)과 행검(行檢)은 막상막하였는데, 풍도와 기량(器量)은 공이 더욱 뛰어났다. 정유년(1477, 성종8) 저작(著作)에 승진되고 박사(博士)에 전직되었다.
무술년(1478, 성종9) 4월에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임명되어 총명하고 민첩함으로 일컬어졌다. 일찍이 경연의 자리를 모시고 있을 때 임금이 착건(鑿巾)의 뜻에 대하여 물었는데, 좌우의 신하들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돌아보며 공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박식하고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알고 있으니, 나를 위하여 말해 주게.”라고 하였다. 공이 일어나 사사(辭謝)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예기(禮記)》 〈잡기(雜記)〉편에 나오는 것인데, 대개 대부(大夫) 이상의 사람이 자기 어버이를 위하여 반함(飯含)할 때 사용하는 물건입니다.”라 하고는 인하여 전문(全文)을 외우는데 막힘이 없었다. 또 문묘작헌례(文廟酌獻禮), 반궁양로의(泮宮養老儀), 무후팔진법(武侯八陣法)에 대하여 물었는데, 공이 근거를 끌어와 대답하기를 매우 상세하게 하였다. 임금이 매우 가상하게 여기시고 “옥당(玉堂)의 벼슬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이 사람은 문무(文武)의 온전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평상의 조용(調用)하는 예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이때 간신 임사홍(任士洪)이 임금의 총애를 믿고 나라를 병들게 하였는데,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죄를 하나하나 따졌다. 또 말하기를 “신이 상방(尙方)의 말을 베는 칼을 빌려 임사홍의 머리를 베기를 주운(朱雲)의 고사와 같이 하지 못함은 신의 죄입니다.”라고 하였다. 8월에 임금이 어필로 친히 이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9월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는데,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것으로 외직 군수가 되기를 빌어 사천 현감(泗川縣監)이 되었다. 그곳에서 행한 정치는 평이하고 간서(簡恕)한 것을 위주로 삼았다. 임금이 네 계절마다 지은 바 시문을 초록하여 올리도록 하고서는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령하여 쌀과 비단을 넉넉하게 주어서 그 부모 봉양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기해년(1479, 성종10)에 임금이 공에게 표리(表裏) 일습(一襲)을 하사하여 정치의 업적을 포상하였다. 신축년(1481, 성종12)에 어떤 일로 체직되었다. 계묘년(1483, 성종14) 10월에 외직으로 나가 현풍 현감(玄風縣監)이 되었는데, 흉년을 만났지만 진휼하여 살게 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을사년(1485, 성종16) 정월에 청주 판관(淸州判官)으로 옮겨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어머니 정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정미년(1487, 성종18) 6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었고, 무신년(1488, 성종19) 9월에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임명되었으며, 기유년(1489, 성종20)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고, 경술년(1490, 성종21) 6월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해 9월에 지평(持平)에 임명되자 비로소 부임하였다가 조금 뒤에 정언(正言)으로 전직되었다. 신해년(1491, 성종22) 11월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다. 야인(野人)이 북쪽 변방을 노략질하자 공은 도원수(都元帥) 허종(許琮)을 따라가서 계책을 도운 것이 많았다. 임자년(1492, 성종23) 6월에 장령에 임명되었고 9월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에 임명되었다.
계축년(1493, 성종24) 정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임명되었다. 이때 지평(持平) 김언신(金彥辛)이 한 명의 대신(大臣)을 노기(盧杞)와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하여 논핵하다가 무망죄(誣罔罪)로 친국(親鞫)을 받았지만 큰소리치며 뜻을 굽히지 않자 임금이 매우 성내어 장차 죽이려고 하였다. 공이 차자문을 올려 구원함에 말이 극도로 간절하였는데, 그 말에 “광언(狂言)의 실수 때문에 죽이려고 한다면 한(漢)나라 조정에서 귀신(貴臣)을 배척하고 어전의 난간을 부러뜨린 주운(朱雲)이 어떻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임금의 마음이 이에 풀려 공에게 넉넉한 비답을 내려서 말하기를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거의 간신(諫臣)을 죽일 뻔했다.”라고 하였다. 7월에 홍문관 교리 겸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에 전직되었다. 내전(內殿)으로부터 원각사(圓覺寺)에서 부처에게 기도를 올리는데, 옥당(玉堂)의 관리에게 향을 받들어 배종(陪從)하게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극언하여 말하기를 “불교는 명교(名敎) 밖의 이단(異端)이고 신은 예법(禮法) 가운데 있는 사류(士類)입니다. 사류로서 이단을 받드는 것을 신이 차마 할 바가 아닙니다. 또한 왕량(王良)은 일개 마부였지만, 또한 올바르지 않은 사냥꾼과 나란히 나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하물며 저는 왕량이 하지 않는 것을 하겠으며 게다가 부처에게 공양물을 바침은 또한 사냥꾼과 나란히 나가는 것에 비교할 것이 아님에 있어서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신(大臣)이 오만하다고 논하자 임금이 “이 사람이 전에 태학(太學)에 있을 때 이미 불교를 물리쳤는데, 지금 또 올곧음이 이와 같으니, 하악(河嶽)의 걸출한 기운을 품부받았고 참으로 옥당(玉堂)의 훌륭한 말을 하는 신하라 말할 수 있다. 내가 실로 가상히 여기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이튿날에 특별히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고 이윽고 사인(舍人)으로 승진되었으며, 얼마 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임명되었는데, 공이 진언(進言)한 덕택으로 승진한 것을 혐의스럽게 생각하여 모두 힘써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갑인년(1494, 성종25) 정월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임명되었고, 3월에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에 임명되었다. 6월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어 차자로 군덕(君德)의 요체를 진술하였다. 7월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로 전직되어 왕명을 잘 받들었다. 12월에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성종이 승하하셨다. 인산(因山) 후에 체직을 빌어 고향으로 돌아와 임금을 위하여 소식(素食)하며 3년을 지냈다.
을묘년(1495, 연산군1) 6월에 영암 군수(靈巖郡守)에 임명되었고 8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었으며 11월에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2월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자 이에 부임하였으니, 성종이 돌아가신 지 두 돌이 되는 것을 곡(哭)하기 위해서였다. 정사년(1497, 연산군3) 2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체직을 청하였다. 인하여 조종을 본받을 것[法祖宗], 간쟁을 받아들일 것[納諫爭], 형옥을 긍휼히 여길 것[恤刑獄], 사정을 분별할 것[辨邪正], 궁중을 엄중히 할 것[嚴宮禁], 성악을 줄일 것[減聲樂]의 6조항을 진술하였다. 4월에 충청도 감사(監司)에 임명되어 출척(黜陟)을 공정히 하고 송사를 공평히 처리하여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무오년(1498, 연산군4) 4월에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자 소환의 명령을 받들어 조정으로 돌아왔다. 6월에 군함(軍銜)에 체부(遞付)되었다. 7월에 사화(史禍)가 일어나 당시의 명현들이 귀양 가거나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공은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 9월에 분황(焚黃)의 일로 휴가를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인하여 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고서 오직 서책과 농사 그리고 낚시로 스스로 즐겼다. 기미년(1499, 연산군5) 2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4월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으며 11월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경신년(1500, 연산군6) 2월에 호조 참판으로 임명되어 조정에 달려갔는데, 가는 도중에 대사간으로 전직되었다. 5월에 비가 오지 않음에도 우레와 번개가 치는 재앙이 있는 것으로 인하여 공이 홀로 계사(啓辭)를 초안하여 무오당인(戊午黨人)으로 서북도(西北道)에 안치(安置)된 사람들을 양이(量移)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이것을 자제와 친지들이 좌우에서 번갈아 저지하였지만, 공은 의연한 자세로 요동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런 것으로 죄를 짓는 것은 또한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고는 드디어 계장을 소매에 넣고 가서 올려 윤허를 받았다. 이에 한훤당(寒暄堂) 김 선생(金先生)은 희천(煕川)에서 순천(順天)으로 이배되었고, 박한주(朴漢柱)는 벽동(碧潼)에서 낙안(樂安)으로 이배되었으며, 이수공(李守恭)은 창성(昌城)에서 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고, 조위(曺偉)는 의주(義州)에서 또한 순천(順天)으로 이배되었으며, 그 외에 이배된 사람이 많았다. 9월에 노사신(盧思愼), 유자광(柳子光) 등이 공을 두고 같은 무리와 편당을 짓고 역도들을 보호하였다고 지목하여 극죄(極罪 사형)를 주려고 하였다. 신수근(愼守勤)이 과거에 자기가 먼 곳에 유배 가는 것을 면하도록 구원해 주었던 공에게 고마움을 느껴 임금에게 말하기를 “양모(楊某) 어른은 다른 마음이 없으니, 벼슬을 삭탈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드디어 추방된 것으로 자처하며 장기촌(長鬐村)의 별장에 가서 머물면서 문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 여러 해가 되었다.
계해년(1503, 연산군9) 3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괴이한 사건으로 인하여 복직시키도록 특명하였다. 6월에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상소장을 올려 체직되었다. 9월에 황해도 감사(監司)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10) 정월에 한성 우윤(漢城右尹)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은 서울에 있었는데, 2월에 가벼운 병증(病症)이 있다가 드디어 경성의 연방(蓮坊)의 집에서 돌아가셨다. 병이 위독하자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끝내 객지에서 죽어 귀신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고는 붓을 찾아 근체시 한 수를 지어 회포를 말하였다. 또 목구멍 안에서 맴도는 말로 종성(鍾城)에 대하여 연달아 물은 것이 두 번이었으니, 종성은 곧 일두재(一蠧齋) 정 선생(鄭先生)의 유배지인데, 경신년에 양이(量移)할 때 그 명단 중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의 동지와 여러 공들이 초상을 치러 울산(蔚山)의 치소 함월산(含月山) 묘좌(卯坐) 언덕에 반장(返葬)하였다.
부인은 동부 녹사(東部錄事)를 지냈으며 본관이 학성(鶴城)인 이종근(李宗根)의 따님으로 공보다 4년 앞서 죽었다.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문선(聞善)은 현감을 지냈고, 둘째 배선(拜善)은 참봉을 지냈으며, 셋째 계선(繼善)과 넷째 숙선(淑善)은 모두 요절하였다. 장녀는 습독관(習讀官) 조복겸(曺福謙)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충의위(忠義衛) 권효정(權孝貞)에게 시집갔다. 현감 문선은 아들이 없고 딸은 우석산(禹石山)에게 시집갔다. 참봉 배선의 외아들은 한신(漢臣)이고 세 딸은 이복신(李復新), 이원충(李元忠), 조충개(曺忠凱)에게 각각 시집갔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중종 정묘년(1507, 중종2)에 무오사화를 입은 원통한 이들을 추급하여 씻어 주었다. 임금께서 사초를 올리라고 하여 열람하시다가 공의 경신년 계사(啓辭)를 보시고서는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고 현자를 구한 공로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곧고도 온화하며 관대하고도 엄격하였다. 포의로부터 재상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명함을 소매에 꽂고서 권요(權要)들을 찾아간 적이 없었다. 일을 처리하는 데는 우뚝하고 엄중하여 정도를 잡고서 흔들리지 않았다. 공이 안위(安危)의 즈음에 수립한 공로가 대체로 모두 우뚝이 뛰어나 기록할 만한 것이었다. 불교를 물리치고 무당을 배척하였으며 임사홍(任士洪)을 논박하고 김언신(金彦辛)을 구제한 일 같은 것들은 진실로 걸출함이 평범치 않았지만 오히려 성명(聖明)한 임금이 계시는 조정에서 한 일이었다. 무오사화 같은 경우에는 범할 수 없는 형세가 정히 큰 강물이 육지를 내달리고 맹렬한 불길이 들판을 태우는 것과 같아 저 명현(名賢) 정사(正士)들이 물에 표류하고 불에 타서 살갗이 문드러지는 것을 두고 사람들이 모두 뼈에 사무치도록 마음을 아파했지만 감히 구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은 홀로 재이(災異)를 계기로 삼아 죽음을 무릅쓰고 계장을 올려 무도(無道)한 교동주(喬桐主 연산군)를 한마디 말하는 사이에 감동시키고 마음을 돌려서 즉시 양이(量移)해 주는 것을 마치 둥근 것을 굴리듯 쉽게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것은 대개 공이 충량(忠亮)하고 공정(公正)하여 본래부터 이미 평일에 믿음을 받고 있었으며 또 원래부터 임금이 공경히 예절로 대한 까닭이다.
공은 풍도가 상쾌하고 명랑하며 눈썹과 수염이 그림과 같았다. 행동거지가 한아(閒雅)하며 목소리가 맑았다. 조정에 출입함에 좌우에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음이 없었다. 국량은 넓고 컸으나 항상 능함이 없는 것 같이 보였다. 말씀과 논의는 청준(淸峻)하였으나 또한 경솔하게 발하지는 않았다. 재주와 덕망을 겸비하여 명망과 실제가 모두 높았다. 조정에 벼슬한 지 30년 동안 나라에 도가 있든 없든 간에 마음을 다잡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다. 공이 어려서 김동봉(金東峯)이 세조 때를 당하여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발광(發狂)하여 스님이 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명교(名敎 유교) 안에도 절로 즐거운 곳이 있거늘 어찌 이와 같이 하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본래 지키고 있던 마음이 발라서 시중(時中)의 도에 합치되는 것을 이미 알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득력한 성현의 책, 예를 들면 《소학(小學)》ㆍ《논어》와 같은 것을 심한 병환이 아니면 매일 읽으며 그만두지 않았다.
또 한훤당(寒暄堂)과 일두(一蠹) 등의 현자들과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어 학문을 강마하여 도움이 되게 한 것은 그 근본(도덕 수양)을 위하는 까닭이었다. 이 때문에 선배들의 월조평(月朝評)에서 정 선생(鄭先生) 같은 경우는 곧바로 ‘흰 칼날도 밟을 수 있고 작록도 사양할 수가 있다.’라는 것으로 허여하였다. 그 외 남효온(南孝溫), 권경유(權景裕), 표연말(表沿沫), 조지서(趙之瑞) 공(公)들 중에서 혹자는 우뚝하여 대체(大體)를 견지하였다고 칭찬하였고, 혹자는 의리를 결단하는 곳에 의연(毅然)하여 범할 수가 없다고 칭찬하였고, 혹자는 충량(忠亮)한 마음을 온축하고 경륜(經綸)을 간직하고 있으며 이익에 달려감을 두려워하고 정도를 세우는 데 용맹하였다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평은 모두 백대에 전할 만한 것들이다. 그러나 총괄해 보면 성종께서 말씀하신 ‘하악의 걸출한 기운[河嶽間氣]’ 네 글자의 칭찬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대저 하악의 걸출한 기운으로 빼어나게 태어남이 이와 같다면 이것으로 세상에 처신함에 무슨 일이든 무슨 학업이든 우뚝 뛰어나 빛나지 않겠는가. 지금 한훤당 선생과 일두 선생에게 준 편지와 임종할 때 연달아 종성의 소식에 대하여 물은 말을 보면, 곧은 도리를 잡아 흔들리지 않아 평소에 그분들을 잊지 않은 마음이 대개 단심과 같이 빛났다. 천년의 아래에서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하고 격동하여 그만둘 수 없게 만드니, 아 성대하구나. 지난 선조(先朝 정조) 병오년(1786, 정조10)에 고을의 사림들이 공을 위하여 달성(達城)의 오천(梧川)에 사묘(社廟 사당)를 세워 융숭히 보답하였다. 게다가 공의 자손들이 공의 묘지명을 받기 위하여 나에게 한마디 글을 지어 주기를 부탁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 드디어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으로 잇는다.
참되도다 대봉(큰 봉우리)이여 / 允矣大峯
우뚝하기가 태산 같네 / 崒若泰山
이름이 오악에 나열되고 / 名列五嶽
빼어남은 삼한에 드러났네 / 秀著三韓
저 총령을 건너서 / 隔彼蔥嶺
우리 노나라를 진무하였네 / 鎭我魯邦
하물며 저 완구 따위야 / 矧伊宛丘
감히 바람을 일으킬 수 있으랴 / 其風敢揚
맑은 기운 위에 떠 있어 / 淑氣上浮
해와 달에 빛을 더하네 / 日月增華
높은 기세 두루 능가하여 / 峻勢傍凌
귀신 도깨비의 간사함을 물리쳤네 / 鬼魅辟邪
때에 응하여 구름이 일어나 / 應時興雲
임금의 은택이 아래로 젖어들었네 / 天澤下潤
경초는 손상됨이 없이 / 勁草無傷
험악한 곳에서 화를 면하였네 / 惡地有免
달리는 천둥도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 奔霆莫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우러렀네 / 環海皆仰
여기에 묘소가 있으니 / 有宮其幽
공의 혼이 이에 내려오네 / 公魄斯降
뛰어난 기운 흩어지지 않고 / 間氣不散
종고토록 하늘에 뻗으리니 / 終古亘旻
모든 군자들은 / 凡百君子
이 비석을 보라 / 視此刻珉
[주-D001] 관서 부자(關西夫子) 양진(楊震) : 50~124. 자는 백기(伯起)이다. 후한(後漢) 홍농(弘農) 화음(華陰) 사람이다. 경전에 밝아 당시의 선비들이 ‘관서공자양백기(關西孔子楊伯起)’라고 칭하였다. 《後漢書 楊震列傳》[주-D002] 양기(楊起)가 …… 봉하였다 : 양기는 청주 양씨의 시조로 자는 가윤(可尹), 호는 암곡(巖谷),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원나라 사람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중서성 정승(中書省政丞)의 자리에 있을 때,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따라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이후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많은 외교적 공헌을 하여 삼한창국공신(三韓昌國功臣)으로 상당백(上黨伯)에 봉해졌다. 청주(淸州)를 관적으로 하사받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청주로 삼았다.[주-D003] 사마온공(司馬溫公)이 …… 일 : 사마온공은 송(宋)나라의 유명한 정치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다. 그가 어렸을 때 아이들과 같이 놀다가 물이 가득한 큰 물독에 한 아이가 빠지는 것을 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도망치는데, 사마광은 큰 돌을 가져다가 그 독을 깨어서 물이 쏟아지게 하니 그 아이가 살았다 한다. 《宋史 司馬光傳》[주-D004] 이지장(李智長) : 본관은 전의(全義)로 1434년(세종16)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사관(李士寬)의 아들인데, 그의 형제 이의장(李義長), 이예장(李禮長), 이성장(李誠長), 이효장(李孝長), 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주-D005] 원각사(圓覺寺)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 파고다공원 자리에 있었던 사찰이다.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고찰(古刹)이었는데,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다가 후에 폐지되었다. 1464년(세조10)에 중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이때 대종(大鐘)도 함께 만들었다. 1465년(세조11)에 원각사를 세운 내력을 기록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 뒤 폐사되었는데, 터는 현재 파고다공원으로 되어 있으며,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과 보물 제3호인 원각사비가 남아 있다.[주-D006] 안팽명(安彭命) : 1447~1492.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보(德甫)이다. 1468년(세조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72년(성종3)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다.[주-D007] 장의사(藏義寺) : 서울특별시 종로구(鍾路區) 신영동(新營洞)에 있었다. 신라 무열왕(武烈王) 6년(659)에 황산벌에서 백제와 싸우다 전사한 장춘랑(長春郞)과 파벌구(罷伐九)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창건한 절인데, 1506년(연산군12)에 훼철하여 유연(遊宴)하는 장소로 삼았다. ‘藏’은 ‘莊’으로도 쓴다.[주-D008] 채수(蔡壽) : 1449~1515.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나재(懶齋),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1468년(세조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1) 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본의 아니게 여기에 가담, 분의정국 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다.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咸昌)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독서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다.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나재집》이 있다.[주-D009] 허침(許琛) : 1444~1505.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헌지(獻之), 호는 이헌(頤軒),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462년(세조8)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5년(성종6) 문과에 급제해 감찰이 되었다.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으며 성종조의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주-D010] 권건(權健) : 1458~150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숙강(叔强)ㆍ태보(殆甫),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472년(성종3) 진사가 되고, 1476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 《권충민공집(權忠愍公集)》이 있다.[주-D011] 조위(曺偉) : 1454~1503.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1474년(성종5)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大司成)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 화를 입었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당하였다. 저서로 《두시언해(杜詩諺解)》가 있다.[주-D012] 유호인(兪好仁) : 1445~1494.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기(克己), 호는 뇌계이다. 1462년(세조8)에 생원이 되고, 1474년(성종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490년 《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하여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장수의 창계서원(蒼溪書院)과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13] 착건(鑿巾) : 시신의 얼굴을 덮은 천 가운데에서 입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라 구멍을 뚫는 것을 말하는데, 고대에 대부(大夫) 이상의 상례(喪禮) 때에는 이 구멍을 통해서 반함(飯含)을 하였다. 《예기》 〈잡기 하(雜記下)〉에 “착건하고 반함하는 것을 공양가가 행하였다.[鑿巾以飯, 公羊賈爲之也.]”라고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註)에 “대부 이상은 빈이 반함을 행하였는데, 그때는 착건이 있었다.[大夫以上, 賓爲飯焉, 則有鑿巾.]”라고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대부 이상은 신분이 귀했으므로 빈으로 하여금 직접 반함하게 하였는데, 시신을 빈이 더럽게 여겨서 싫어할까 봐 천으로 시신의 얼굴을 덮고는 입 부분에 구멍을 뚫고 반함을 하여 입에 들이도록 하였다.[大夫以上貴, 故使賓爲其親含, 恐屍爲賓所憎穢, 故設巾覆屍面而當口鑿穿之, 令含得入口也.]”라고 하였다.[주-D014] 임사홍(任士洪) : 1449~1506.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의(而毅)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1466년(세조12) 문과에 급제하였다. 1477년(성종8) 서얼 출신인 유자광(柳子光)과 손을 잡고 악행을 저지르다가 의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연산군 때 사화를 주도해 사림계 인사들에게 막대한 화를 입혔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처형되었다.[주-D015] 상방(尙方)의 …… 고사 : 주운(朱雲)은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 사람이다. 그때 재상 장우(張禹)가 간사한 짓을 하여, 주운이 성제에게 상방검(尙方劒)을 빌려주면 아첨하는 신하 장우를 베겠다고 하자 임금이 노하여 죽이려 하였다. 주운이 어전의 난간을 잡아당기며 간하다가 난간이 부러졌는데, 후에 난간을 바꾸려 함에 임금이 부러진 상태 그대로 보수하게 하여 직간하는 신하의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 《漢書 朱雲傳》[주-D016] 야인(野人) : 옛날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살던 여진족을 말한다.[주-D017] 허종(許琮) : 1434~1494.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종경(宗卿)ㆍ종지(宗之), 호는 상우당(尙友堂),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456년(세조2)에 생원시를 거쳐, 145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491년 여진족 올적합(兀狄哈)이 함길도 방면으로 침입하자, 북정 도원수(北征都元帥)가 되어 이를 격파하고, 이듬해에 우의정에 올랐다. 저서로는 《상우당집》이 있고, 편서로는 《의문정요(醫門精要)》가 있다. 성종조에 청백리로 녹선되었다.[주-D018] 김언신(金彥辛) : 1436~?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1466년(세조12)에 진사에 합격하였다.[주-D019] 노기(盧杞) : 당(唐)나라 활주(滑州) 사람이다. 본래 음험한 성격을 가졌는데 덕종(德宗)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발탁해 중용(重用)하였다. 그런데 권력을 쥐자 정사(政事)를 어지럽혔으므로 신주 사마(新州司馬)로 좌천되었고, 풍주(灃州)로 옮기는 도중에 죽었다. 《新唐書 盧杞列傳》[주-D020] 왕량(王良)은 …… 여겼습니다 : 옛날에 조간자(趙簡子)가 말을 잘 몰기로 소문난 왕량(王良)으로 하여금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인 해(奚)와 함께 수레를 타고 사냥하게 하였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그러자 해가 조간자에게 “왕량은 천하에 보잘것없는 말몰이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량이 다시 말을 몰겠다고 청하여 다시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다. 그러자 해가 다시 조간자에게 복명하기를 “왕량은 천하에 더없이 훌륭한 말몰이꾼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간자가 왕량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해의 수레를 타고 말을 몰게 하니, 왕량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제가 그를 위하여 말 모는 것을 법도대로 하였더니 종일토록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정한 방법으로 말을 몰아 짐승을 만나게 해 주었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았습니다. 저는 소인과 함께 수레 타는 법을 익히지 못하였으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下》[주-D021] 분황(焚黃) : 조선 시대 예식의 하나로, 관직이 추증(追贈)된 경우 조정에서 추증의 사령장(辭令狀)과 누런 종이에 쓴 사령장의 부본(副本)을 수여하면 그 자손은 추증된 사람의 분묘(墳墓)에 이를 보고하고 누런 종이의 부본을 그 자리에서 불태우는 예식이다.[주-D022] 양이(量移) : 섬이나 변방으로 멀리 유배되었던 사람의 죄를 참량(參量)하여 내지로 배소(配所)를 옮기는 것이다.[주-D023] 한훤당(寒暄堂) :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평생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무오사화 때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순천으로 이배되었으나 갑자사화 때 극형에 처해졌다.[주-D024] 박한주(朴漢柱) : 1459~1504.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3년(성종14) 생원시ㆍ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무오사화 때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낙안으로 이배되었으나,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 저서로는 《우졸재집》이 있다.[주-D025]
이수공(李守恭) : 1464~1504.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평(仲平)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6년(성종17) 진사에 오르고, 1488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무오사화 때 종성(鐘城)에 유배되었으며 뒤에 광양으로 이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참살당하였다.
무오사화 때 종성(鐘城)에 유배되었으며 뒤에 광양으로 이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참살당하였다.->이수공(李守恭)은 창성(昌城)에서 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고, *번역문과 각주가 다름, 일치시켜야 함, 각주가 오기한 것.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6일 庚申 6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윤필상 등이 사초 사건 관련자들의 정배지에 대해 논하다 ○傳曰: "流、付處人宜配十五日程途外。" 弼商等書啓: 姜謙 江界爲奴, 表沿沫 慶源, 鄭汝昌 鍾城, 姜景叙 會寧, 李守恭 昌城, |
[주-D026] 노사신(盧思愼) : 1427~1498. 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자반(子胖), 호는 보진재(葆眞齋)ㆍ천은당(天隱堂),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1451년(문종1) 생원시에, 1453년(단종1)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며 1498년 무오사화 때는 윤필상(尹弼商)과 유자광(柳子光) 등이 주동이 되어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를 제거하는 논의에 반대하다가 옥사가 진행되던 중 9월에 병으로 죽었다.[주-D027] 유자광(柳子光) : 1439~1512.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우후(于後)이다. 1498년(연산군4)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을 내세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주도하였다. 그 공으로 숭록무령군(崇祿武靈君)으로 봉해졌다. 그러나 1507년(중종2) 사림들의 탄핵을 받아 평해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주-D028] 신수근(愼守勤) : 1450~1506. 본관은 거창(居昌), 자는 근중(勤仲)ㆍ경지(敬之), 호는 소한당(所閑堂)이다.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이다.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으나, 중종반정에 반대하다가 피살되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시호는 신도(信度)이다.[주-D029] 일두재(一蠧齋) 정 선생(鄭先生) :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무오사화 때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는데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당하였다. 저서로는 《일두집(一蠧集)》이 있다.[주-D030] 둥근 …… 하였다 : 원문은 ‘전환지이(轉圜之易)’이다. 한 고조(漢高祖)가 신하들의 간언을 둥근 것을 굴리듯 쉽게 받아들였다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전한서(前漢書)》 〈매복열전(梅福列傳)〉에 “한 고조는 선한 말을 받아들일 때는 놓치기라도 할 듯하였고 간언을 받아들일 때는 둥근 것을 굴리듯이 하였다.[高祖納善若不及, 從諫若轉圜.]”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에 “전환(轉圜)은 쉽게 따른다는 뜻이다.[轉圜, 言其順易也.]”라고 하였다.[주-D031] 김동봉(金東峯) : 김시습(金時習, 1435~1493)으로,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ㆍ청한자(淸寒子)ㆍ동봉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1455년(세조1)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을 하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산사를 떠나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주-D032] 월조평(月朝評) : 인물평을 말한다. 후한의 평여(平輿) 사람 허소(許劭)가 그 종형 허정(許靖)과 함께 고을의 인물을 핵론(覈論)하기를 좋아하여 매월 그 인물을 바꾸어 평가했던 까닭으로 여남(汝南)의 풍속에 ‘월조평’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주-D033] 남효온(南孝溫) : 1454~1492.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당하였다. 저서로 《추강집(秋江集)》,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주-D034] 권경유(權景裕) : ?~149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요(君饒)ㆍ자범(子汎), 호는 치헌(癡軒)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16) 문과에 급제하였다. 무오사화 때 사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1798년(정조22) 부제학에 증직되었다.[주-D035] 표연말(表沿沫) : 1449~1498.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ㆍ평석(平石)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69년(예종1) 사마 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3) 문과에 급제하였다. 무오사화 때 경원으로 유배 가던 중 객사하였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주-D036] 조지서(趙之瑞) : 1454~1504.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부(百符), 호는 지족정(知足亭)ㆍ충헌(忠軒)이다. 1474년(성종5) 생원시에 장원 합격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갑자사화 때 참살되었다. 1506년(중종1) 관작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면서 신원(伸寃)되었다. 경남 진주의 신당서원(新塘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37] 전할 만한 : 원문 ‘전신(傳信)’은 확실한 내용을 확실하게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 환공(桓公) 5년에 “봄 정월 갑술 기축에 진후 포가 죽었다.[春正月甲戌己丑, 陳侯鮑卒.]”라고 하였는데, 《곡량전(穀梁傳)》에 “어찌하여 죽은 날짜를 두 개나 기록하였는가. 《춘추》의 원칙을 보면, 사건이 확실한 것은 확실하게 기록하고 의심되는 것은 의심되는 대로 기록해 두기 때문이다.[卒何爲以二日卒之? 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주-D038] 고을의 …… 보답하였다 : 1786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433번지에 이 지역의 사림들이 양희지(楊熙止)를 향사하는 오천서원(梧川書院)을 건립하였다.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인 파령골에 있었다. 1868년(고종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1905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당호를 무릉재(武陵齋)라고 하였다. 1971년 유림총회의 의결로 사당을 신축하여 오천사(梧川祠)라 하고 당호도 오천서원으로 바꾸었다.[주-D039] 총령(蔥嶺) : 천산(天山)과 곤륜(崑崙) 등 산맥이 일어나는 돈황(敦煌) 서쪽 8천 리 지점의 파미르 고원이다.[주-D040] 노나라 : 태산이 노나라에 있음을 말함이나 여기서는 양씨의 원조가 중국에서 건너와 우리나라를 다스린 것을 비유한 것이다.[주-D041] 완구(宛丘) : 진(陳)나라 도읍지의 이름으로, 낮은 언덕이다. 법도가 없어서 방탕하고 혼란한 풍속을 말하니, 연산군의 폭정을 비유한 것이다. 《시경》 〈진풍(陳風) 완구(宛丘)〉에 “그대의 방탕함이여, 완구의 위에서 하는도다.[子之湯兮, 宛丘之上兮.]” 하였다.[주-D042] 경초(勁草) : 굳센 풀이라는 뜻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절의가 변치 않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 수 있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알 수 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는 표현이 나온다. 《舊唐書 蕭瑀列傳》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영옥 송희준 (공역) | 2020
입재집(立齋集) 정종로(鄭宗魯)생년1738년(영조 14)몰년1816년(순조 16)자사앙(士仰)호입재(立齋), 무적옹(無適翁)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이상정(李象靖), 최흥원(崔興遠)의 문인. 남한조(南漢朝)와 교유. 영남 남인의 석학
立齋先生文集卷之四十二 / 墓誌 / 漢城右尹大峯楊公墓誌銘 幷序
大峯楊公諱煕止字可行。釋褐初成廟命改名稀枝字楨父。後更命從初。盖以行之久也。楊氏本關西夫子震之後。高麗忠宣王時。有政丞起奉使來東。王封淸州君。有子浦政丞龍虎上將軍封唐嶽君。唐嶽卽中和。子孫因貫焉。曾祖元格內侍尹贈左承旨。祖渼刑曹判書。考孟淳郡守贈吏曹參判。妣羅州鄭氏。直長是僑女贈貞夫人。皆以公貴也。正統己未四月甲辰公生。幼明悟俊異。甫學字。一聞便記。六歲與羣兒遊。一兒上獨樹。忽傍枝折。無從下。羣兒皆驚散。公獨不去。取其枝解帶作梯。使緣之。聞者比司馬公擊瓮事。八九歲能屬文。作燈油說曰燈譬則君也。油譬則臣也。燈以油生明。君以臣致治。其理一也。每早朝必向北而拜。貞夫人問其故。對曰君所在也。李贊成智長見之大驚曰。異日當爲賢宰相。厚有所贈。公只取筆一硯一。餘悉辭焉。李尤奇之。乙亥魁鄕解二塲。因丁郡守公憂。服闋。連捷無虛歲。壬午兼中生員進士。甲申遊泮宮。諸名勝皆折節願交。有一時相挾貴要見公。公托疾終不往。乙酉同太學諸生䟽論圓覺寺改創之非。己丑又入泮宮。有巫稱內旨禱祀文廟外。諸生莫敢言。公與安公彭命齊聲奮逐之。大妃怒。上聞之蹶然曰士氣如此。吾病頓欲蘇矣。壬辰魁賢良策。以試券有違格不收。諸宰惜其器。甲午春登丙科。上已知其名喜得人。卽引見。御題詩以識賜名與字而旋已之。卽此時事也。特除藝文館檢閱。撤寶燭以歸之。乙未拜承文院正字。丙申六月命選文臣之儒雅者。特賜暇詣藏義寺讀書。於是公及蔡公壽,許公琛,權公健,曹公偉,兪公好仁實膺其選。六人文學行檢。莫相軒輊。而風裁器量。公其尤。丁酉陞著作遷博士。戊戌四月拜弘文館副修撰。以敏給稱。嘗侍經席。上問鑿巾之義。左右莫能對。上顧謂公曰知爾博識强記。試爲我言之。公起而辭謝曰。此出戴禮雜記篇。盖大夫以上爲其親飯含時所用。因誦全文無礙。又問文廟酌獻禮,泮宮養老儀,武侯八陣法。公援據對甚悉。上深加嘉尙曰。玉堂當如是也。此人有文武全才。不可以常調待之。賜綱目廐馬。是時姦臣任士洪怙寵病國。公上箚歷數罪。且曰臣不能借尙方斬馬劒。斷士洪頭如朱雲故事。是臣之罪也。八月上御墨親除吏曹佐郞。九月拜弘文校理。以親老乞郡。出知泗川縣。其治以平易簡恕爲主。上令四時抄進所製詩文。飭本道臣優給米帛。以資其養。己亥賜表裏一襲褒政績。辛丑以事遞。癸卯十月出知玄風縣。値歲饑所賑活甚衆。乙巳正月移拜淸州判官。未幾遭貞夫人喪。丁未六月拜禮曹佐郞。戊申九月拜兵曹正郞。己酉拜司憲府掌令。庚戌六月拜司諫院正言。並辭不赴。九月拜持平。始赴。俄遷正言。辛亥十一月拜成均館司成。有野人寇北邊。公從都元帥許琮贊籌畫居多。壬子六月拜掌令。九月拜侍講院司書。癸丑正月拜弘文館應敎。時持平金彥辛論覈一大臣比盧杞,王安石。以誣罔被親鞫。大言不屈。上怒甚將殺之。公上箚救。辭極剴切。有曰以狂言之失而欲殺之。則漢庭斥貴臣折殿檻之朱雲。何以保首領也。上意乃解。優批答公曰微爾。予幾殺諫臣矣。七月移校理兼侍講院文學。自內殿祈佛圓覺寺。令玉堂陪香。公上䟽極言曰佛名敎外異端。臣禮法中士類。以士類而尊異端。非臣所忍。且王良一御夫耳。亦羞與射者比。况不爲王良者。而供佛又非比射者比乎。大臣以慢蹇論。上曰此人前在太學。已能闢佛。今又伉直如此。可謂稟得河嶽間氣。而眞個玉堂昌言之臣也。予實嘉之。何罪之有。翌日特授議政府檢詳。俄陞舍人。尋拜司諫院司諫。公嫌以言進秩。皆力辭不允。甲寅正月拜司憲府執義。三月拜侍講院弼善。六月拜司諫院獻納。箚陳君德之要。七月授承政院同副承旨。轉右副左副。出納惟允。十二月拜刑曹參議。値成廟昇遐。因山後乞遞還鄕。食素終三年。乙卯六月拜靈巖郡守。八月拜工曹參議。十一月拜安邊府使並不赴。十二月拜左副承旨乃赴。爲哭成廟再朞也。丁巳二月拜大司諫。請遞。仍陳法祖宗。納諫爭。恤刑獄。辨邪正。嚴宮禁。減聲樂六條。四月拜忠淸監司。公黜陟平詞訟。吏畏民安。戊午四月拜都承旨承。召還朝。六月遞付軍銜。七月史禍作。一時名賢竄戮殆盡。公不樂在朝。九月以焚黃乞暇歸。因杜門謝客。惟以書史耕釣自娛。己未二月拜大司憲。四月拜副提學。十一月拜刑曹參判。並不赴。庚申二月以戶曹參判赴朝。在道移大司諫。五月因無雨䨓震之灾。獨草啓辭。請量移戊午黨人之安置西北道者。以爲弭灾之方。子弟親知左右交止之。公毅然不動曰。以此獲罪亦榮矣。遂袖呈獲允。於是寒暄堂金先生自煕川移順天。朴公漢柱自碧潼移樂安。李公守恭自昌城移光陽。曹公偉自義州亦移順天。其餘得移者多。九月盧思愼,柳子光等目公爲黨同護逆。欲致之極罪。有愼守勤者感其嘗賴公救得免於遠竄。言于上曰楊某長者無他心。只令削職。公遂以放逐自處。往留長鬐村庄。不出戶外者歲餘。癸亥三月因陰虹之異。特命復職。六月拜刑曹參判。上章遞。九月拜黃海監司辭不赴。十月拜大司憲。甲子正月拜漢城右尹。時則公在京矣。二月感微恙。遂卒于蓮坊邸舍。臨革歎曰吾卒不免爲逆旅鬼乎。索筆題近體一首道所懷。又作喉中語。運問鍾城者再。鍾城卽一蠧齋鄭先生謫所。而未入於庚申量移中故也。公同志諸公爲治喪返塟於蔚山治含月山負卯原。配東部錄事鶴城李宗根之女。先公四年歿。生四男二女。男長聞善縣監。次拜善參奉。次繼善,淑善皆夭。女長適習讀曹福謙。次適忠義權孝貞。縣監無嗣。女適禹石山。參奉一子漢臣。三女李復新,李元忠,曹忠凱。餘不錄。中廟丁卯。追雪戊午諸寃。上進閱史草。覽公庚申啓辭。嘉其格非救賢之功。特遣官祭之。公天資直而溫寬而栗。自布衣至宰列。未嘗袖刺謁權要。遇事嶷嶷。持正不撓。其所樹立於安危之際者。率皆犖犖可紀。如闢佛斥巫論士洪救金彥辛等事。固俊偉出常。而猶是處聖明朝之爲耳。至若戊午黨錮之禍。其不可犯之勢。正如洪河走陸。烈火燎原。彼名賢正士之漂流焦爛者。人皆痛心刻骨而莫敢救。乃公獨能因灾異冒死以啓。使無道如喬桐主。感回於一言之間。卽爲之量移。若轉圜之易。盖以公忠亮公正。素已見信於平日。而自來敬禮之故也。公風儀爽朗。眉鬚如畫。擧止閒雅。音響淸越。出入殿陛。左右莫不屬目。局量恢廓而常若無能。言議淸峻而亦不輕發。才德兼全。望實俱隆。立朝三十年。不論國有道無道。持心如一日。觀其少嘗見金東峯。當世祖時而不勝忠憤。至於發狂爲僧。謂曰名敎中自有樂地。何乃爾也云爾。則從來所守之正。而合於時中之道。已可知矣。然亦其得力於聖賢書。如小學論語。非甚病逐日讀而不廢。又與寒蠧諸賢爲道義交。講磨資益者。爲其本故耳。用是先輩月朝之評。若鄭先生則直以可蹈白刃辭爵祿許之。其外南公孝溫權公景裕表公沿沫趙公之瑞。或稱其魁偉持大體。或稱其斷義理處毅然不可犯。或稱其蘊忠亮抱經綸。㥘於趨利。勇於扶正。此皆可傳信於百代者。然摠之不越乎 成廟河嶽間氣四字之褒。夫河嶽間氣。挺生如此。則以而處於世。何事何業之不卓絶光明矣乎。今觀其所與寒蠧二先生書及臨絶時連問鍾城之語。則秉直不撓。居常不忘之心。盖炳然如丹。千載之下。尙令人感慨激切而不能已。於乎盛哉。往在先朝丙午。鄕士林爲立社於達城之梧川以崇報之。公子孫又欲誌公墓。屬余爲一言。辭不獲。遂序次如右。繼曰。
允矣大峯。崒若泰山。名列五嶽。秀著三韓。隔彼蔥嶺。鎭我魯邦。矧伊宛丘。其風敢揚。淑氣上浮。日月增華。峻勢傍凌。鬼魅辟邪。應時興雲。天澤下潤。勁草無傷。惡地有免。奔霆莫加。環海皆仰。有宮其幽。公魄斯降。間氣不散。終古亘旻。凡百君子。視此刻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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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蔡濟恭, 1720~1799)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시호는 문숙(文肅)
번암집 제44권 / 신도비(神道碑)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좌부빈객 대봉 양공 신도비명〔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世子左副賓客大峯楊公神道碑銘〕
나라의 융성한 기운이 성종조(成宗朝)의 시대에 절정을 만나 여러 현명한 신하들이 힘써 임금을 보필하였으니, 또한 성대하다 하겠다. 대봉(大峯) 양공(楊公)이 그 사이에서 높이 나래를 펼쳐, 젊어서는 성군이 다스리는 시대의 현신(賢臣)이 되고 늙어서는 혼란한 세상의 완인(完人)이 되었으니, 이 같은 분은 강하고도 큰 기운을 타고난 이가 아니겠는가.
공의 휘는 희지(煕止), 자는 가행(可行)으로 영남(嶺南) 사람이다. 처음 벼슬길에 올랐을 때 성종이 이름은 희지(稀枝), 자는 정보(楨父)로 바꾸도록 명하였다가, 3년 뒤에 초명(初名)이 행해진 지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다시 초명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그 세계(世系)는 관서 부자(關西夫子) 진(震)의 후예인데, 고려 충선왕 때에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기(起)가 원(元)나라 임금의 명을 받아 우리나라로 와서 중화군(中和君)에 봉해지자 자손들이 계속해서 그것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증조(曾祖)는 원격(元格)으로 내시윤(內侍尹)을 지내고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조부는 미(渼)로 형조 판서를 지냈고, 선고는 맹순(孟淳)으로 군수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선비는 증 정부인(貞夫人) 정씨(鄭氏)이니, 관향은 나주(羅州)이고 직장(直長) 정시교(鄭是僑)의 따님이다. 공이 귀한 신분이 된 뒤에 추증이 그 선대에 미쳤다.
정통(正統) 기미년(1439, 세종21)에 공이 태어났다. 일찍부터 총명하여 8, 9세에 〈등유설(燈油說)〉을 지어 “등불은 비유하자면 임금이고 기름은 비유하자면 신하이니, 등불이 기름으로써 빛을 내고 임금이 신하로써 다스림을 이룩하는 것은 그 이치가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새벽마다 일어나 북쪽을 향하여 절하였는데 대부인이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임금이 계신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8)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아울러 입격하였다. 태학(太學)에서 공부할 적에 여러 명류(名流)가 모두 선후배의 항렬 차이를 접고 교유하면서 한목소리로 공의 어짊을 칭찬하였다.
이듬해 조정에서 원각사(圓覺寺)를 수리하자, 공이 주도하여 태학 제생(諸生)의 소를 올려 매우 엄한 비판을 가하였다. 성종(成宗)이 일찍이 편찮을 적에 태비(太妃)가 이를 걱정하여 문묘 바깥으로 무당을 보내 기도와 제사를 올리게 하였는데, 제생은 두려움에 굴복하여 입을 다문 채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였으나, 공은 안공 팽명(安公彭命)과 함께 분연히 무당을 내쫓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니 태비가 이에 분노하였다. 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하기를 “선비의 기상이 이와 같으니, 나의 병이 돌연 몸에서 떠나려 한다.”라고 하였다.
몇 년 뒤에 금오산(金鰲山)에서 독서할 적에 김동봉 시습(金東峯時習)과 만나 열흘간 함께 유숙하며 지냈다. 동봉(東峯)은 날마다 꼭 명수(明水)를 갖추어 예불을 올리고, 예불이 끝나면 곡을 하고, 곡이 끝나면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시를 짓고, 시를 다 짓고 나면 또다시 곡을 하며 그 시고(詩稿)를 불태워 버리곤 하였다. 이에 공이 “명교(名敎) 안에 본래 낙토(樂土)가 있거늘 어찌하여 꼭 이렇게 하는가. 지금 임금께서 명성(明聖)하시니 열경(悅卿)은 나아가 벼슬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자 동봉은 한숨을 쉬고 사양하며 “가행(可行)은 힘쓸지어다. 광인(狂人)이 어찌 벼슬하기에 합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갑오년(1474, 성종5)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에 앞서 상은 공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는데, 과거 급제자가 발표되자 몹시 기뻐하여 편전(便殿)으로 불러 사대(賜對)하는 한편, 어필(御筆)로 시를 지어 “양씨(楊氏) 가문의 재자(才子)이며 옥수(玉樹)의 자질이니, 그 이름을 희지(稀枝)로 바꿈이 합당하리라.”라고 하고는 마침내 이름과 자를 하사하였다. 또 특별히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제수하고는 보촉(寶燭)을 거둘 때까지 밤늦도록 함께 있다가 돌아가도록 하니, 이같이 은혜로운 영광은 세상에 드문 것이었다. 이듬해에 괴원(槐院)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다.
병신년(1476)에 상이 명하여 나이가 젊은 문신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있는 자를 뽑은 뒤에 휴가를 주어 장의사(藏義寺)로 가서 독서하게 하는 한편 곳간에 곡식을 대 주고 푸줏간에 고기를 대 주도록 하니, 이는 대개 인재를 모아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채공 수(蔡公壽), 허공 침(許公琛), 권공 건(權公健), 조공 위(曺公偉), 유공 호인(兪公好仁) 그리고 공이 실로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공은 이 다섯 사람들과 함께 아침부터 밤까지 학문을 강론하여 3년이 지난 뒤에야 돌아갔다. 그사이에 승정원 주서가 되었으나 직무로 인해 거리낀 적이 없었다.
무술년(1478)에 상이 예문관(藝文館)을 홍문관(弘文館)으로 고치라는 명을 내리고는 맨 먼저 공을 부수찬(副修撰)에 제수하였다. 공은 풍모가 쾌활하고 눈썹과 수염이 그림 같았으며,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목소리가 맑고 빼어나서 경연 자리에 드나들 적마다 주위 사람들이 주목하였고 상 역시 마음을 기울였다. 상이 일찍이 경연신(經筵臣)에게 “착건(鑿巾)은 무슨 뜻인가?”라고 물었는데 여러 유신(儒臣)은 잠자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상이 공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대가 견식이 넓고 들은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나를 위해 말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공이 일어나 사례하고는 이어 아뢰기를 “이는 《예기(禮記)》 〈잡기(雜記)〉에 있는 말로, 대개 대부(大夫) 이상이 그 어버이를 위하여 반함(飯含)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재차 문묘작헌례(文廟酌獻禮), 반궁양로의(泮宮養老儀), 무후팔진법(武侯八陣法) 등에 대해 묻자, 공은 매우 상세하게 근거를 대며 대답하였다. 이에 상이 감탄하며 이르기를 “옥당(玉堂)은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에게 문무(文武)의 재주를 온전히 갖춘 신하가 있으니, 가히 그 쓸 바를 알겠다.”라고 하고는 《강목(綱目)》과 구마(廐馬)를 하사하여 총애하였다.
공은 국량이 크고 넓어서 늘 무능한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떤 일을 만나게 되어서는 우뚝하게 정론을 고수하여 분육(賁育)이라도 능히 빼앗지 못할 지조가 있었다. 이때 임사홍(任士洪)이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력을 휘둘렀는데, 공은 그가 나라에 화를 끼칠 인물임을 알고 상소하기를,
“지금 흙비가 봄부터 여름까지 내려 전하와 대신과 나라 사람들 모두 이를 재앙이라고 하는데 임사홍만 유독 재앙이 아니라고 하니, 이는 조고(趙高)가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것과 양국충(楊國忠)이 장마는 농사에 해가 안 된다고 한 것과 더불어 기망(欺罔)이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신은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을 빌려 간신 사홍의 머리를 자르지 못하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이 어묵(御墨)을 하사하고 이조 좌랑에 제수하였는데, 공은 부모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봉양을 청하여 교리(校理)를 거쳐 사천현(泗川縣)을 맡아 다스리게 되었다. 이에 상이 영남 관찰사에게 명하여 쌀과 비단을 주어 봉양하게 하는 한편 또 공에게 사시(四時)마다 지은 시문을 뽑아서 올리도록 하였다. 몇 년이 지나 상이 표리(表裏)를 하사하니 이는 대개 그 정사의 공적(功績)을 포상(褒賞)한 것이다.
신축년(1481)에 모종의 일로 인하여 체직되었다.
계묘년(1483, 성종14)에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산릉역(山陵役)을 마치고 외직으로 나가 현풍 현감(玄風縣監)이 되었는데, 흉년을 만나 구휼하고 살린 사람의 수가 매우 많았다.
을사년(1485)에 청주 판관(淸州判官)으로 옮기고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널을 붙들고서 애모(哀慕)하는 공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음이 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복제를 마친 뒤에 예조 낭관(禮曹郎官)에 제수되었으나 공은 남은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이에 점필(佔畢), 한훤(寒暄) 두 선생이 번갈아 편지를 보내어 벼슬할 것을 권하니 마침내 억지로 부임하였다. 이윽고 경도사 도사(京都司都事)에 제수되고 병조 정랑,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으로 누차 천직되었다.
신해년(1491)에 야인(野人)이 북쪽 변경에 침입하자 도원수 허종(許琮)이 공을 자벽(自辟)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그 당시 행한 계책은 모두 공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계축년(1493)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되었다. 당시 헌신(憲臣) 김언신(金彦辛)이 대신을 논핵하자 상이 거짓으로 무함한다고 하여 김언신을 국문하였는데, 상의 음성과 기운이 더욱 사나워져 감에도 김언신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상이 매우 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만약 광망(狂妄)한 잘못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하고 나서 또 국문(鞫問)까지 하여 기필코 죽인 뒤에야 끝내고자 하다면, 한(漢)나라의 조정에서 귀신(貴臣)을 논척하고 전함(殿檻)을 부러뜨렸던 주운(朱雲)이 어찌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상의 마음이 비로소 풀려 즉시 김언신을 석방하여 술을 보내 주는 한편, 공의 차자에 답하기를 “그대가 아니었다면 간신(諫臣)을 죽일 뻔하였다.”라고 하고서 역시 술을 보내 주었다.
교리로 자리를 옮기고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관하였다. 마침 내전(內殿)이 원각사(圓覺寺)에서 기불(祈佛)하여 옥서(玉署 홍문관)의 신하로 하여금 배향(陪香)하도록 하고 이부(吏部)로 하여금 공을 차출하여 보내도록 하자, 공이 상소하기를 “불가(佛家)는 명교(名敎) 밖의 이단이고 신은 예법(禮法) 안의 사류(士流)이니, 사류로서 이단을 높이는 일은 신이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왕량(王良)은 일개 마부(馬夫)였음에도 사수(射手)에게 아부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는데, 하물며 왕량이 되지 않는 자는 어떻겠으며, 부처에게 공양하는 일이 또 사수에게 아부하는 일과 비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닌 데야 어떻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비록 내전의 뜻으로 돌리고자 하시지만 그 누가 집에 있으면서 모른다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대신은 이를 거만하다고 논책하였으나 상은 이르기를 “정직하다, 이 사람이여. 전에 이미 무당을 내쫓았다가 이번엔 또 부처를 물리치니, 진실로 옥당의 바른말 하는 선비라 할 만하다. 하악(河嶽)의 간기(間氣)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가상히 여기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어찌 죄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튿날 특별히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하고 곧이어 사인(舍人)으로 승진시키고 얼마 뒤 사간으로 이직시켰는데, 공은 간언한 것 때문에 품계가 오른다 하여 그때마다 모두 힘써 사양하니, 윤공 필상(尹公弼商)이 감탄하며 “임금이 성스러우면 신하는 곧다는 것이 지금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갑인년(1494)에 집의, 필선, 사간, 헌납에 누차 제수되었고,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가 차서에 따라 좌부승지로 승진하고 또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성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는데, 인산(因山)이 끝나자 체직되기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소식(素食)을 먹으면서 삼년상을 마쳤다. 연산주(燕山主)가 영암 군수(靈巖郡守), 공조 참의, 예조 참의, 대사성,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누차 제수하였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다가, 좌부승지로서 성종의 두 번째 기일에 맞추어 비로소 나아갔다. 대사간에 제수되자 상소하여, 조종(祖宗)을 본받고 간쟁을 받아들이며 형옥(刑獄)을 신중히 하고 사정(邪正)을 분별하며 궁금(宮禁)을 엄히 하고 성악(聲樂)을 줄여야 한다는 6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무오년(1498, 연산군4)에 발탁되어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고 도승지, 부총관에 제수되었다. 7월에 사화(史禍)가 일어나 선류(善類)들이 거의 다 죽게 되자, 공은 말미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오직 서사(書史)를 읽고 밭 갈고 낚시하는 일만을 즐겼다. 때로는 혹 달이 뜬 뜰에서 서성이면서 서쪽을 바라보며 크게 탄식을 하여 눈물이 옷깃을 적시기까지 하였다.
기미년(1499)에 대사헌, 부제학,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경신년(1500)에 호조 참판으로서 조정에 나아가는 도중 대사간으로 이직되었다. 당시 비도 내리지 않는데 우레가 울리는 일이 발생하자 공이 직접 소매에서 계사(啓辭)를 꺼내 올려 아뢰기를 “무오년(1498)에 유배시킨 부류들은 선왕께서 일찍이 예우한 자들이자 전하께서 또 재기(才器)에 맞게 부리신 자들이니, 그들을 굶주린 땅에 두고서 스스로 굶어 죽는 지경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 아닌 듯합니다. 모두 내복(內服)으로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신다면 재앙을 가라앉히는 도에 무방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아, 이 당시에 천지가 막혀 태평의 시대가 가고 비색(否塞)의 시대가 와서 이름난 현인과 바른 선비가 나란히 그물과 덫에 걸려들었으니, 《시경》에서 “저기 앉으려는 까마귀를 보니, 뉘 지붕에 가서 앉을런고?”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무오(戊午)’란 두 글자를 말하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죄에 연루되는 화가 순식간에 찾아드는데, 그 누가 능히 고개를 들고 혀를 놀려 목숨을 부지하기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공의 계사(啓辭)는, 그 말은 완곡하고 그 뜻은 슬프고 그 도는 바르고 곧았으니 비록 이것을 일러 “엎어지는 물살 속의 지주(砥柱)”이며 “음이 쌓인 뒤에 생겨나는 하나의 양”이라 한다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도 능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혼주(昏主)가 공을 아껴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공이 평소에 가졌던 순일한 충정이 혼주로 하여금 오히려 그 말이 사심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덕분에 김 선생 굉필(金先生宏弼), 박공 한주(朴公漢柱), 이공 수공(李公守恭), 조공 위(曺公偉) 등이 모두 머나먼 변경에서 내복으로 양이(量移)되었고, 그 외에도 양이된 자들이 많았다. 적신(賊臣) 노사신(盧思愼)과 유자광(柳子光) 등이 공을, 의견을 같이하는 자들과 파당을 짓고 반역의 무리들을 비호한다고 하면서 극죄(極罪)에 해당시키고자 하였는데, 마침 신수근(愼守勤)이 구원하고 해명하는 말을 하여 단지 관직이 삭탈되고 도성 밖으로 내쫓기는 데에 그쳤다.
계해년(1503)에 서용(敍用)되어 형조 참판과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겨울에 대사헌으로서 조정에 나아갔다.
이듬해 갑자년(1504) 1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세자시강원 좌부빈객(世子侍講院左副賓客)을 겸관하였다. 2월 5일에 작은 병이 났는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줄을 스스로 알고 약을 먹지 않았다. 성공 희안(成公希顔), 이공 우(李公堣), 이공 현보(李公賢輔), 권공 발(權公橃) 등이 와서 문병하자 공이 일어나 앉아 옷깃을 정제하고 사운시(四韻詩)를 지었는데, 그 시에,
삼각산은 높고 한수는 둘러져 있는데 / 三角山高漢水圍
하늘 가득 눈이 내려 어지러이 흩날리네 / 漫天雨雪亂霏霏
선산에서 목숨을 마치려 한 이 누구였던가 / 松楸畢命何人是
종사를 부지하려던 이 뜻이 어긋났네 / 宗社扶顚此志違
하니, 말뜻이 강개하여 왕실을 잊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그 이튿날 졸하였는데, 임종하려 할 때에 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는 목소리로 연신 종성(鍾城)에 대해 물었다. 종성은 정 선생 여창(鄭先生汝昌)이 유배되었던 곳인데 경신년(1500)에 내려졌던 양이의 명에 그곳이 포함되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3월에 연방(蓮坊)의 저사(邸舍)에서 울산(蔚山)으로 널을 돌려보내고, 10월에 고을의 북쪽에 있는 함월산(含月山)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중종 2년 정묘년(1507)에 상이 무오년의 원한을 씻어 주고는 공이 경신년에 올린 계사의 말을 뒤미처 보고 한참 동안 가상히 여겨 감탄하였다. 이에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조제(弔祭)를 올리게 하였는데, 이공 현보가 가기를 자청하였다.
공의 배위(配位)는 학성 이씨(鶴城李氏)로, 동부녹사(東府錄事) 이종근(李宗根)의 따님으로 부덕(婦德)과 선한 행실이 있었는데 공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4남 2녀를 낳으니, 문선(聞善)은 현감이고, 배선(拜善)은 진사로서 음보(蔭補)로 출사하였고, 계선(繼善)과 숙선(淑善)은 모두 요절하였다. 사위는 조복겸(曺福謙)과 권효정(權孝貞)이다.
공이 졸한 지 이미 300년이 흘렀는지라 시문이 산일되어 여향(餘香)이 거의 사라지려 하나, 선배들의 월조평(月朝評)은 또렷하게 남아 있어 여전히 그 실제 모습을 상고해 볼 수 있다. 남공 효온(南公孝溫)은 “우뚝이 서서 대체(大體)를 견지하니 참으로 재보(宰輔)의 그릇이다.”라고 하고, 권공 경유(權公景裕)는 “얼굴은 아녀자 같고 몸은 옷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것같이 보이지만, 의리를 분석할 때는 의연히 범하기가 어렵다.”라고 하고, 일두(一蠧) 정 선생(鄭先生)은 “흰 칼날을 밟고 작록을 사양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양가행(楊可行)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고, 표공 연말(表公沿沫)은 “처자를 맡기고 어린 군주를 보필하게 할 만한 사람이다.”라고 하고, 조공 지서(趙公之瑞)는 “그 언행은 실로 학문하는 사람이고, 사한(詞翰)은 참으로 문장하는 선비이다.”라고 하고, 이공 창신(李公昌臣)은 “충량(忠亮)을 온축하고 경륜을 품어 이익을 좇는 데엔 나약하나 정도(正道)를 지키는 데엔 용감하니, 거의 옛날의 이른바 사군자(士君子)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아부를 좋아하지 않던 분들의 말이므로 족히 이를 통해 공의 실상을 알 수 있는데, 단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공은 집 안에서는 날마다 《논어》와 《소학(小學)》을 읽어 큰 병을 앓지 않으면 이를 그만둔 적이 없었고, 집 밖에서는 일두, 한훤과 함께 도의(道義)로써 교분을 맺었다. 두 선생이 서북 변방으로 귀양을 갈 적에 공은 편지를 보내어 권면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고 의리가 발라서 비록 백대가 지난 이후에도 또한 이를 통해 환난이 닥쳐도 흔들림 없이 정도를 지켰던 사실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공의 내면에 있는 것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살핀 뒤에야 가히 공을 안다고 할 만하니, 나머지 일은 의당 생략한다.
금상 병오년(1786, 정조10)에 사림(士林)이 달성(達城)의 오천(梧川)에 사당(社堂)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듬해 봄 10대손 락(濼)이 천리 먼 곳에서 찾아와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니 그 덕을 높이고 선인을 위하는 것을 모두 기록하지 않을 수 없기에 마침내 명(銘)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관서의 후예가 / 關西令胄
동토에서 드날리니 / 颺于東土
땅은 만 리나 떨어져 있고 / 地去萬里
세월은 수천 년이나 지났네 / 歲後千數
그 도는 마찬가지였으니 / 其道則同
산하의 정기를 타고났네 / 嶽毓河鍾
인성한 임금이 있어 / 有君仁聖
그 운룡이 찬란하였네 / 爛其雲龍
노도를 엄히 물리치니 / 威屛鷺翿
임궁에 향화가 사라졌네 / 香不琳宮
이에 임금이 가상히 여기니 / 王庸嘉乃
곧다는 명성이 사방에 드날렸네 / 直聲四揚
슬프다 무오년에 / 䀌哉戊午
하늘의 살펴 주심이 어두워 / 天視荒荒
올빼미가 조정에 가득하여 / 鴟鴞滿廷
저 난새와 봉황새를 쪼았네 / 啄彼鸞凰
아, 지금 사람들은 / 唉今之人
혀가 있는 것이 마치 묶인 죄수 같았는데 / 有舌如囚
공은 분연히 소장을 지어 / 公奮爲疏
피눈물을 줄줄 흘리니 / 淚血交流
지극한 정성이 통하여 / 至誠則通
혼주가 또한 응답을 하였네 / 昏主亦唯
백대의 환한 빛이 / 百代耿光
정사와 야사에 실려 있네 / 國乘野史
돌아가 성종께 절한다면 / 歸拜成廟
나는 신을 아노라 하리라 / 曰予知臣
우뚝이 높이 선 / 壁立巖巖
함월의 산이여 / 含月之山
공의 묘가 이에 있으니 / 公墓在是
이곳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예를 갖출지어다 / 過者必式
손을 씻고 명을 지으니 / 盥手作銘
나는 내 낯빛이 부끄럽지 않도다 / 我不愧色
[주-D001] 완인(完人) : 혼란한 세상에서 목숨과 절의를 온전하게 지킨 사람을 이르는 말로, 양희지(楊熙止)가 연산군(燕山君)의 실정(失政)을 만나 목숨을 잃지 않고 절의를 지켜 냈으므로 그렇게 칭한 것이다. 이 말은 송(宋)나라 원우(元祐) 연간에 당쟁이 격심했던 와중에서도 홀로 정도를 지키며 끝내 화를 입지 않았던 유안세(劉安世)를 ‘원우 완인(元祐完人)’이라고 칭송한 데서 유래하였다. 《宋史 劉安世列傳》[주-D002] 성종이 …… 명하였다가 : 《대봉집(大峯集)》 권3에 실린 〈행장(行狀)〉에 따르면, 이 명이 내려진 때는 1476년(성종7)이다.[주-D003] 진(震) : 후한(後漢) 사람 양진(楊震, ?~124)을 말한다. 양진은 자가 백기(伯起)로 경서에 밝고 고사에 밝아 당시에 “관서의 공자 양백기(楊伯起)”라고 불렸다. 그의 천거로 벼슬을 얻은 자가 찾아와 감사의 표시로 황금을 내밀자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알 자가 없다고 하는가.[天知, 神知, 我知, 子知, 何謂無知?]”라고 하였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後漢書 楊震列傳》[주-D004] 태학(太學)에서 공부할 적에 : 양희지는 1464년 성균관에 들어가 김승경(金升卿), 정괄(鄭佸), 이숭원(李崇元), 성건(成健) 등과 교유하였다. 《大峯集 卷3 行狀》[주-D005] 안공 팽명(安公彭命) : 안팽명(1447~1492)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보(德甫)이다. 147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로 대간(臺諫)에 주로 재직하면서 직언으로 명성을 떨쳤다.[주-D006] 몇 …… 적에 : 양희지가 33세 되는 1471년의 일이다. 《大峯集 卷3 行狀》[주-D007] 김동봉 시습(金東峯時習) : 김시습(1435~1493)으로,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ㆍ동봉ㆍ청한자(淸寒子)ㆍ벽산(碧山), 법호는 설잠(雪岑), 시호는 청간(淸簡)이다.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는 책을 불살라 승려가 되어 전국을 방랑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지만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여 이곳에서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주-D008] 명교(名敎) …… 하는가 : 진(晉)나라 때 악광(樂廣)이 왕징(王澄), 호무보지(胡毋輔之) 등의 방탕한 행실을 보고 “명교 안에 본래 낙토가 있거늘, 어찌하여 꼭 이렇게 하는가.[名敎內自有樂地, 何必乃爾?]”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김시습이 유교의 가르침과 예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방탕하게 사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명교는 명분에 따라 인륜의 가르침을 펴는 유교(儒敎)를 가리키는 말이다. 《晉書 樂廣列傳》[주-D009] 사대(賜對) : 임금이 신하를 불러서 묻는 말에 대답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주-D010] 옥수(玉樹)의 자질 : 상대방 자제(子弟)의 훌륭한 자질을 칭송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사람 사안(謝安)이 여러 자질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라고 묻자, 그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비유컨대 지란과 옥수가 자기 집 정원에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대답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謝玄列傳》[주-D011] 문묘작헌례(文廟酌獻禮) : 임금이나 세자가 유교의 성현을 모신 문묘(文廟)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는 예식을 말한다.[주-D012] 반궁양로의(泮宮養老儀) :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양로연(養老宴)을 베푸는 의식을 말한다.[주-D013] 무후팔진법(武侯八陣法) : 제갈량(諸葛亮)이 《주역》을 통해 창안하였다고 하는 여덟 종류의 진법으로, 동당(洞當), 중황(中黃), 용등(龍騰), 조비(鳥飛), 호익(虎翼), 연횡(連衡), 절충(折衝), 악기(握機)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小學紺珠 制度類》[주-D014] 강목(綱目)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리킨다.[주-D015] 분육(賁育) : 진 무왕(秦武王) 때의 용사(勇士)였던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병칭이다.[주-D016] 임사홍(任士洪) : 1449~1506.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이의(而毅), 초명은 사의(士毅)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 이합(李㝓)의 사위이다. 1498년(연산군4) 유자광(柳子光)이 무오사화를 일으키자 이에 결탁하여 전횡을 일삼았고 1504년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가 사사된 내막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1506년(중종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처형되었다.[주-D017] 조고(趙高)가 …… 것 : 진(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의 총애로 국정을 전횡하였던 승상 조고가 무소불위한 자신의 권세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이세황제에게 사슴을 말이라고 속여서 바친 일을 말한다. 《史記 李斯列傳》[주-D018] 양국충(楊國忠)이 …… 것 : 753년 당(唐)나라 관중(關中) 지방에 수해가 일어나 당시 황제였던 현종(玄宗)이 이를 걱정하자, 양귀비(楊貴妃)의 6촌 오라비로 권력을 농단했던 양국충이 벼 중에 성한 것을 가져다 보여 주면서 “비가 많이 왔지만 농사에는 무방합니다.”라고 기만한 일을 말한다. 《舊唐書 楊國忠列傳》[주-D019]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을 …… 못하니 : 한 성제(漢成帝) 때의 강직한 신하 주운(朱雲)이 성제에게 “신은 바라건대 상방참마검을 내려 주신다면 간신 한 사람의 목을 잘라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朱雲列傳》 여기서는 간신 임사홍을 처단하지 못하는 처지를 한탄한 것이다.[주-D020] 점필(佔畢) : 김종직(金宗直, 1431~1492)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ㆍ효관(孝盥), 호는 호인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5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정자(正字), 교리, 감찰(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이후 내외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후대에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다.[주-D021] 한훤(寒暄) : 김굉필(金宏弼, 1454~1504)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김종직의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고 일컬었다. 1498년 무오사화에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희천(熙川)에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주-D022] 야인(野人)이 …… 침입하자 : 1491년 여진족 올적합(兀狄哈) 1000여 명이 함경도에 침입하여 조산보(造山保)를 함락하고 군민(軍民)을 살상하고 납치한 일을 말한다. 《成宗實錄 22年 1月 19日》[주-D023] 당시 …… 논핵하자 : 지평(持平) 김언신이 경연 자리에서 현석규(玄碩圭)를 노기(盧杞)와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하며 소인(小人)이라고 비판한 일을 말한다. 《번암집》을 비롯하여 《대봉집(大峯集)》 권3에 실려 있는 〈행장(行狀)〉, 《입재집(立齋集)》 권42에 실려 있는 〈한성우윤대봉양공묘지명(漢城右尹大峯楊公墓誌銘)〉에는 하나같이 이 일을 1493년 양희지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제수된 뒤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성종실록(成宗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일이 일어난 시기는 1477년 9월 5일이다. 김언신이 현석규를 비판하였다고 한 《성종실록》 8년 9월 5일 기사 이후 그와 관련한 기사가 수차례 인접하여 나오는 점, 현석규의 사망 연도가 1480년이란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1493년 김언신이 대신을 논핵하였다고 한 《번암집》의 기록은 오류인 것으로 판단된다.[주-D024] 차자(箚子) : 《대봉집(大峯集)》 권2에 〈구지평김언신차(捄持平金彥辛箚)〉로 실려 있다.[주-D025] 주운(朱雲) : 서한 성제(西漢成帝) 때의 직신(直臣)으로, 성제 앞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직언하다가 어사(御史)로부터 끌려 내려지자 난간이 부러질 정도로 끝까지 붙잡고 버티며 간쟁하는 강직함을 보였다. 성제는 뒤에 주운의 말이 옳음을 깨닫고 부러진 난간을 그대로 두어 직간하는 신하의 본보기로 삼게 하였다. 《後漢書 朱雲列傳》[주-D026] 왕량(王良)은 …… 부끄러워했는데 : 진(晉)나라 조간자(趙簡子)가 마부 왕량에게 자신의 총신(寵臣) 해(奚)를 수레에 태우고 사냥을 하도록 지시하자, 왕량이, 정당한 방법과 원칙을 무시하기를 원하는 조간자의 뜻에 영합하면서까지 마부 노릇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한 일을 말한다. 맹자의 제자인 진대(陳代)가 맹자에게 잠시 정도(正道)를 굽혀서 제후를 만나 보라고 권유하자 맹자가 왕량의 이 고사를 인용하면서 “마부조차도 사수에게 아부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사수에게 아부하여 산더미처럼 많은 짐승을 잡을 수 있다 해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어떻게 도를 굽혀서 제후를 따르겠는가.[御者且羞與射者比, 比而得禽獸, 雖若丘陵, 弗爲也. 如枉道而從彼何也.]”라고 하였다. 《孟子 藤文公下》[주-D027] 간기(間氣) : 영웅호걸이 세상에 드물게 타고났다는 특별한 기운을 말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황왕부(皇王部) 1 서황왕 상(敍皇王上)〉에 “정기는 황제가 되고 간기는 신하가 되며 궁상은 성(姓)이 되고 빼어난 기운은 사람이 된다.[正氣爲帝, 間氣爲臣, 宮商爲姓, 秀氣爲人.]”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주-D028] 임금이 …… 것 : 한 원제(漢元帝) 때 사람 장맹(張猛)이 한 말로, 이상적인 군신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원제가 종묘에 제사 지내기 위해 누선(樓船)을 타고 종묘에 가려고 하자, 장맹이 이를 말리면서 “신이 듣건대 임금이 성스러우면 신하는 곧다고 하였습니다. 배를 타는 것은 위험하고 다리로 나아가는 것은 안전하니, 성스러운 임금은 위험한 것을 타지 않는 법입니다.[臣聞主聖臣直, 乘船危, 就橋安, 聖主不乘危.]”라고 하였다. 《漢書 薛廣德傳》[주-D029] 7월에 …… 되자 : 1498년에 사초(史草)에 실린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빌미가 되어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勳舊派)가 김종직을 주축으로 하는 사림파(士林派)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화를 입힌 것을 말한다.[주-D030] 내복(內服) : 본래 천자의 직할 지역으로 수도로부터 반경 500리 이내의 땅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경기 지역을 말한다.[주-D031] 비색(否塞) : 천지의 운수가 꽉 막힌 시기를 말한다. 《周易 否卦》[주-D032] 저기 …… 앉을런고 : 주 유왕(周幽王) 때의 한 대부(大夫)가 유왕의 학정(虐政)을 풍자하면서 “서럽구나, 이 나라 망하면, 우리 어디로 가서 먹고 살까? 저기 앉으려는 까마귀를 보니, 뉘 지붕에 가서 앉을런고?[哀我人斯, 于何從祿? 瞻烏爰止, 于誰之屋?]”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유왕의 학정으로 나라를 잃게 된 유민들의 막막한 사정을 빗대어 연산군의 학정을 한탄한 것이다.[주-D033] 엎어지는 …… 지주(砥柱) :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지주산(砥柱山)이란 바위산이 세찬 물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우뚝하게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말하는데, 곧 세류에 휩쓸리지 않는 높은 절조를 칭송한 것이다.[주-D034] 음이 …… 양 : 불행의 시기가 계속되다가 그것이 극에 이르러 다시 행운의 시기가 찾아옴을 말한다. 이 말은 본래 음기(陰氣)가 극에 달한 순음(純陰)의 10월을 지나 11월 동지(冬至)가 되면 양(陽)의 기운이 처음으로 생겨나 복괘(復卦)를 이루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周易 復卦 本義》[주-D035] 선산(先山)에서 …… 이 : 당(唐)나라 한유(韓愈)를 말한다. 한유의 시 〈부강릉도중기증……한림삼학사(赴江陵途中寄贈……翰林三學士)〉에 “깊이 생각하고 벼슬을 그만둔 뒤에, 목숨 다하도록 선산에 의지하고 있으려네.[深思罷官去, 畢命依松楸.]”라는 대목을 두고 한 말이다. 《全唐詩 卷336》[주-D036] 월조평(月朝評) : 인물평을 말한다. 후한 영제(後漢靈帝) 때 여남(汝南) 사람 허소(許劭)가 그 종형(從兄) 허정(許靖)과 함께 매월 1일 향당(鄕黨)의 인물을 품평하였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後漢書 許劭列傳》[주-D037] 관서(關西)의 후예 : 양희지의 선조가 관서 부자(關西夫子)로 불린 양진(楊震)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38] 동토(東土) : 동국(東國), 즉 우리나라를 말한다.[주-D039] 운룡(雲龍) :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남을 뜻한다.[주-D040] 노도(鷺翿) : 백로(白鷺)의 깃으로 만든 일산(日傘)으로, 방탕한 놀이나 삿된 제사를 의미한다. 《시경》 〈진풍(陳風) 완구(宛丘)〉에서 진(陳)나라 유공(幽公)의 방탕한 행실을 풍자하며 “둥둥 질장구를 침이여, 완구의 길에서 하도다.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이 노도를 꽂고 있도다.[坎其擊缶, 宛丘之道. 無冬無夏, 値其鷺翿.]”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주-D041] 임궁(琳宮) : 선궁(仙宮)이나 도관(道觀)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양희지가 성균관 유생 시절 개창을 반대하였던 원각사(圓覺寺)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주-D042] 올빼미가 조정에 가득하여 : 간신이 득세하여 조정에 가득 포진한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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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암집(樊巖集) 채제공(蔡濟恭)생년1720년(숙종 46)몰년1799년(정조 23)자백규(伯規)호번암(樊巖)본관평강(平康)시호문숙(文肅)특기사항오광운(吳光運), 채팽윤(蔡彭胤)에게 수학. 정범조(丁範祖), 이헌경(李獻慶), 안정복(安鼎福) 등과 교유. 청남(淸南)의 거두
樊巖先生集卷之四十四 / 神道碑 /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世子左副賓客大峯楊公神道碑銘
國朝煕運。在宣陵世。恰値亭午。庶明勵翼。亦云盛哉。大峯楊公翺翔其間。少而爲聖代賢臣。老而爲亂世完人若是者。豈非得氣之剛且大者歟。公諱煕止。字可行。嶺南人。初釋褐。成廟改賜名曰稀枝。字曰楨父。越三年。更命從初名以行。其系關西夫子震之後。在麗忠宣王時都僉議政丞起。受元主命來東國。封中和君。子孫仍以爲貫。曾祖曰元格。內侍尹贈都承旨。祖曰渼。刑曹判書。考曰孟淳。郡守贈吏曹參判。妣贈貞夫人鄭氏。籍羅州。直長是僑之女。公旣貴。追爵及其先焉。正統己未。公生。明悟夙詣。八九歲。作燈油說曰。燈譬則君也。油譬則臣也。燈以油而生明。君以臣而致治。其理一也。每晨起。向北而拜。太夫人問其故。對曰。君所在也。壬午。兼中生員進士。遊太學。諸名類皆折輩行與交。交口稱其賢。明年。朝家修圓覺寺。公倡太學諸生䟽。斥之甚嚴。成廟嘗違豫。太妃憂之。遣巫禱祀于文廟外。諸生慴伏噤不敢出言。公與安公彭命。奮然驅逐巫俾不近。太妃怒。上聞之。蹶然而曰。士氣如此。吾病頓欲祛體。後數年。讀書金鰲山。遇金東峯時習留一旬。東峯日必具明水禮佛。禮罷哭。哭罷歌。歌罷詩。詩罷又哭而焚之。公曰。名敎中自有樂地。何必乃爾。今主上明聖。悅卿可以仕矣。東峯歔欷謝曰。可行勉之。狂人豈合仕乎。甲午。闡大科。先是。上聞其名已熟。及坼號喜甚。賜對便殿。御筆題詩曰。才子楊家玉樹姿。其名端合換稀枝。遂賜名與字。特授藝文館檢閱。輟寶燭以歸。恩榮世罕有也。明年。入槐院爲正字。丙申。命揀年少文臣有才學者賜暇。赴藏義寺讀書。廩繼粟庖繼肉。葢所以儲養也。於是蔡公壽,許公琛,權公健,曹公偉,兪公好仁及公實與焉。公與五人者。蚤夜講學。終三年乃歸。間爲承政院注書。未嘗以職務妨也。戊戌。上命改藝文館爲弘文館。首拜公爲副修撰。公風儀爽朗。眉鬚如畫。擧止都雅。聲音淸越。出入經席。左右爲之屬目。上亦傾心焉。上嘗問經筵臣曰。鑿巾何義。諸儒臣默無對。上顧謂公曰。知爾博識多聞。盍爲我言之。公起而謝。仍曰。此在禮記雜記篇。葢大夫以上。爲其親飯含時所用也。又問文廟酌獻禮。泮宮養老儀。武侯八陣法。公援据對甚悉。上歎曰。玉堂固不當如是邪。予有臣才全文武。可以知所用矣。賜綱目廐馬以寵之。公恢弘有局量。常若無能。至遇事。嶷嶷持正論。賁育有不能奪者。時任士洪恃寵用事。公知其禍人國。疏曰。今者雨土。彌春跨夏。殿下與大臣諫官國人。皆曰災也。士洪獨曰非灾。此與趙高之指鹿爲馬。楊國忠之霖不害稼。同一欺罔。臣不能借尙方斬馬劒。斷佞臣士洪頭。此臣之罪也。未幾。御墨除吏曹佐郞。公爲親老乞養。由校理知泗川縣。上命嶺南伯。資米帛以養。又令四時抄所製詩文以進。旣數年。賜表裏。盖褒其政績也。辛丑。以事遞。癸卯。竣貞熹王后山陵役。出知玄風縣。値歲儉。所賑活甚衆。乙巳。移淸州判官。罹太夫人艱。人之見扶櫬哀慕者無不感泣。服旣闋。除禮曹郞。公餘哀未盡。意不欲宦進。佔畢,寒暄二先生。迭發書勸起。遂強以赴。尋拜京都司都事。累遷兵曹正郞,司憲府掌令持平,司諫院正言,成均館司成。辛亥。野人寇北邊。都元帥許琮。辟公從事。籌策悉出於公。癸丑。拜弘文館應敎。時。憲臣金彦辛。論覈大臣。上以誣罔鞫彦辛。聲氣益厲。不少屈。上怒甚欲殺。公箚言若以狂妄之失而旣繫之又鞫之。必欲殺之乃已。則漢廷斥貴臣折殿檻之朱雲。何以保首領也。上意乃解。立釋彦辛。饋以酒。答公箚曰。微爾幾殺諫臣。亦饋以酒。移校理兼講院文學。適內殿祈佛圓覺寺。令玉署臣陪香。吏部差公遣。疏曰佛。名敎外異端。臣。禮法中士類。以士類而尊異端。臣所不忍。王良一御夫耳。且羞與射者比。而况不爲王良者而供佛又非比射者比乎。殿下縱欲歸之內旨。其孰曰在家不知也。大臣以慢蹇論。上曰。直哉若人。前旣逐巫。今又闢佛。眞可謂玉堂昌言之士。河嶽間氣。其在斯歟。嘉之不暇。何可曰罪。明日。特除議政府檢詳。俄陞舍人。尋移司諫。公以以言進秩。皆力辭。尹公弼商歎曰。主聖臣直。非今日之謂歟。甲寅。累除執義,弼善,司諫,獻納。擢拜同副承旨。序陞至左副。又拜刑曹參議。成廟遽賓天矣。因山訖。乞遞還鄕。食素以終三年。燕山主累除靈巖郡守,工禮二曹參議,大司成,安邊府使。並不赴。以左副承旨。趁成廟再朞。始赴拜大司諫。䟽陳法祖宗,納諫諍,恤刑獄,辨邪正,嚴宮禁,減聲樂六條。出爲忠淸道觀察使。戊午。擢授嘉善堦。拜都承旨,副摠管。七月。史禍作。善類殆盡之矣。公乞暇歸。惟書史耕釣是娛。時或步月中庭。西望太息。至泣下霑襟。己未。拜大司憲,副提學,刑曹參判。不赴。庚申。以戶曹參判赴朝。道移大司諫。時。無雨雷震。公袖呈啓辭。有曰。戊午屛裔之類。先王嘗禮遇之矣。殿下又器使之矣。置之饑饉之地。使之自抵餓死。則恐非好生之德。並命量移內服。不害爲弭災之道。嗚呼。當此之時。天地閉塞。泰往否來。名賢正士騈首入罟擭。詩所云瞻烏爰止于誰之屋者。此之謂也。人有說戊午二字。株連之禍不遑旋踵。其孰能仰首掉舌。以乞其全活也哉。公之啓。其辭則婉。其志則悲。其道則正而直。雖謂之頹波砥柱。積陰一陽可也。若是而能全保性命者。非昏主之愛惜公也。公之平日精忠。使昏主尙知其言之非出於私也。於是金先生宏弼,朴公漢柱,李公守恭,曹公偉。並自絶塞移內服。其餘得移者多。賊臣盧思愼柳子光等。以公爲黨同護逆。欲以極罪當。會愼守勤。有救解語。只令削黜而止。癸亥。敍拜刑曹參判,黃海道觀察使。皆不赴。冬。以大司憲赴朝。明年甲子正月。拜漢城右尹。兼世子左副賓客。二月五日。有微恙。自知不能起。藥不進。成公希顔,李公堣,李公賢輔,權公橃來問疾。公起坐整襟。題四韻詩。有曰。三角山高漢水圍。漫天雨雪亂霏霏。松楸畢命何人是。宗社扶顚此志違。辭旨慨惋。不能忘王室如此。翼日卒。將屬纊。奄奄作喉間語。連問鍾城者再。鍾卽鄭先生汝昌所謫居而未入於庚申量移中故也。三月。自蓮坊邸舍。返櫬于蔚山。十月。塟州北含月山酉向之原。中宗二年丁卯。雪戊午冤。追閱公庚申啓語。嘉歎者久。特遣禮官吊祭。李公賢輔自請行。公配鶴城李氏。東府錄事宗根之女。有閨壼善行。先公四年歿。生四男二女。聞善縣監。拜善進士蔭仕。繼善,淑善皆早死。婿曹福謙,權孝貞。公歿已三百年。詩文散逸。餘馥將沫。然先輩月朝之論。歷歷然猶可攷信。南公孝溫曰。磊偉持大體。眞台輔器。權公景裕曰。貌如婦人。身如不勝衣。至義理剖斷。輒毅然難犯。一蠧鄭先生曰。蹈白刃辭爵祿。今之世。惟楊可行一人。表公沿沫曰。可以托妻子。可以輔幼主。趙公之瑞曰。其言行。實學問之人。詞翰。眞文章之士。李公昌臣曰。蘊忠亮抱經綸。㥘於趨利。勇於扶正。殆古所稱士君子。此皆汙不阿好之言也。有足以得公之詳。然猶外也。公入則日讀論語小學。非甚病不廢。出則與一蠧寒暄爲道義交。及二先生謫西北塞貽書相勉。辭懇義正。雖百代之下。亦知其臨患難而守正不撓。此公之在內者然矣。斯可知公。餘宜略也。今上丙午。士林立社於達城之梧川以祭之。明年春。十世孫濼。千里委訪。托濟恭以麗性之銘。其尙德也爲先也。俱不可以不書。乃作銘。銘曰。
關西令胄。颺于東土。地去萬里。歲後千數。其道則同。嶽毓河鍾。有君仁聖。爛其雲龍。威屛鷺翿。香不琳宮。王庸嘉乃。直聲四揚。䀌哉戊午。天視荒荒。鴟鴞滿廷。啄彼鸞凰。唉今之人。有舌如囚。公奮爲疏。淚血交流。至誠則通。昏主亦唯。百代耿光。國乘野史。歸拜成廟。曰予知臣。壁立巖巖。含月之山。公墓在是。過者必式。盥手作銘。我不愧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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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6일 庚申 6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윤필상 등이 사초 사건 관련자들의 정배지에 대해 논하다
○傳曰: "流、付處人宜配十五日程途外。" 弼商等書啓:
姜謙 江界爲奴, 表沿沫 慶源, 鄭汝昌 鍾城, 姜景叙 會寧, 李守恭 昌城, 鄭希良 義州, 洪瀚 慶興, 任熙載 鏡城, 摠 穩城, 柳廷秀 理山, 李惟淸 朔州, 閔壽福 龜城, 李宗準 富寧, 朴漢柱 碧潼, 辛服義 渭原, 成重淹 麟山, 朴權 吉城, 孫元老 明川, 李昌胤 龍川, 崔溥 端川, 李冑 珍島, 金宏弼 熙川, 李黿 宣川, 安彭壽 鐵山, 趙珩 北靑, 李宜茂魚川。
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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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6일 庚申 4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윤필상 등이 사초 사건 관련자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등의 죄목을 논하여 서계하다
○尹弼商等共議書啓:
金馹孫、權五福、權景𥙿大逆, 凌遲處死。 李穆、許磐、姜謙亂言切害, 斬, 籍沒。 表沿沫、鄭汝昌、洪瀚、茂豐副正 摠亂言, 姜景叙、李守恭、鄭希良、鄭承祖知亂言不告, 竝決杖一百、流三千里, 烽燧軍庭爐干定役。 李宗準、崔溥、李黿、康伯珍、李冑、金宏弼、朴漢柱、任熙載、李繼孟、姜渾朋黨, 決杖八十、遠方付處。 尹孝孫、金詮罷職, 成重淹決杖八十、遠方付處, 李宜茂決杖六十、徒一年, 柳順汀未鞫, 韓訓在逃。
仍請臺諫等亦以朋黨論之。 子光啓: "姜謙初聞許磐之言, 及馹孫開端, 乃答云: ‘吾亦曾聞權氏操行果高。’ 則與磐罪, 恐有間也。" 思愼啓: "宗直作詩文以譏議, 其情切害。 論以大逆, 允爲便當。 馹孫等只讃宗直詩文, 恐與宗直不當同科也。 此事當傳後世, 不可容易斷之。 論以亂言切害何如? 雖如此, 亦當籍沒家産。" 弼商啓: "申從濩、李陸今雖已死, 竝治其罪何如?" 傳曰: "誅馹孫等也, 其令百官往見。 近日慶尙道及堤川等處地震, 是爲此輩而然也。 古人以地震爲人君失德之致, 然此變予疑此輩所致也。 儒生或居館, 或在四學, 但觀古書, 不知朝章, 相與謗訕朝政, 安有如此之風? 此輩雖有文學, 所爲如此, 反不如無學之人。 有罪者當坐其罪, 其以此意, 更問于宣城府院君。 武靈所言姜謙事, 果有可矜, 其罪宜輕於磐。 其餘自有律文, 唯李冑當加一等。 尹孝孫有罔言, 當罷職。 李克墩則欲啓久矣, 魚世謙亦當罷職乎? 其議啓。 陸及從濩宜治罪。 此大事也, 予欲告于宗廟, 頒赦中外, 於卿等意何如?" 弼商等啓: "告廟、頒赦甚當。 陸、從濩追奪告身何如?" 思愼啓: "馹孫等非自作詩文, 只讃宗直, 則其罪宜輕, 故敢啓之。" 傳曰: "從濩等事, 依所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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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9일 계해 1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사초 사건에 연루된 강백진의 공초 내용
○癸亥/康伯珍供: "宗直, 異姓三寸叔, 自少受業。" 命決杖八十, 定州付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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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37권, 연산 6년 5월 7일 庚申 2번째기사 1500년 명 홍치(弘治) 13년
평안도에 귀양 보내었던 사람들을 옮기다
평안도에 나누어 귀양보냈던 사람들 중, 조위(曹偉)·김굉필(金宏弼)을 순천(順天)에, 이수공(李守恭)을 광양(光陽)에, 정희량(鄭希良)을 김해(金海)에, 정승조(鄭承祖)를 영광(靈光)에, 이원(李黿)을 나주(羅州)에, 박한주(朴漢柱)를 낙안(樂安)에, 강백침(康伯琛)을 보성(寶城)에, 성중엄(成仲淹)을 하동(河東)에 이배(移配)하였다. 이극균(李克均)이 ‘본도가 흉년들어 굶주리는데,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신 및 수령(守令)들의 구휼을 받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도내가 더욱 피폐하다.’ 하여 계이(啓移)한 것이다.
○移配平安道分配人曺偉、金宏弼于順天, 李守恭于光陽, 鄭希良于金海, 鄭承祖于靈光, 李黿于羅州, 朴漢柱于樂安, 康伯琛于寶城, 成仲淹于河東。 李克均以本道飢荒, 分配人等皆賴奉使及守令周恤。 因此, 道益疲弊啓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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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침(康伯琛)을 보성(寶城)에, ->강백진(康伯珍)
*점필재 김종직의 생질 문인 강백진이 무오사화에 창성에 귀양가고 경신년양이정책에 남방으로 양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康伯琛은 어디에도 없는 인명이니 실록원문이 오자라고 보아야 한다.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 7월 29일 계해 1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사초 사건에 연루된 강백진의 공초 내용
○癸亥/康伯珍供: "宗直, 異姓三寸叔, 自少受業。" 命決杖八十, 定州付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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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8월 5일 壬子 2번째기사 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경연에서 잘못 아뢴 강징 등을 형신하게 하다
정승에게 전교하기를,
"강징(姜澂)이 경연(經筵)에서, 연굴사(演窟寺)와 복세암(福世菴)은 옮겨 배치할 수 없다고 아뢰었으니 형신(刑訊)하라. 이수공(李守恭)은 뇌진(雷震)을 재변(災變)이라 하였으니, 비록 그 몸이 죽었지만 그 아비와 아들을 모두 가두어 형신하라. 김인후(金麟厚)는 경연에서 성준(成俊)과 서로 다투었는데, 준(俊)이 인후(麟厚)를 강포하다 지적하였으니, 그때 함께 들은 사람에게 물어 보아 아뢰라."
하니, 정승들이 아뢰기를,
"인후(麟厚)의 일을 상고해 보니, 어전이 아니라 빈청(賓廳)에서 단지 준(俊)과 서로 다투었던 것으로, 그때 함께 들은 사람은 상고해 보아도 증거가 없습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전일 경연에서 《당고종기(唐高宗紀)》의 선제(先帝) 후궁(後宮)에 대한 일을 강할 때에, 박안성(朴安性)이 아뢰기를 ‘이것은 옛날 제왕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였는데, 신하가 임금 앞에서 군상(君上)의 잘못을 의논할 수 없는 것이니, 다시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왕이 성종(成宗)의 숙의(淑儀) 남씨(南氏)와 간음하고 추문이 밖에 퍼질듯 하므로 이런 전교를 내린 것이다."
하였다.
○傳于政丞曰: "姜澂於經筵, 啓演窟、福世庵, 不可移排, 其刑訊。 李守恭指雷震爲災變, 身雖已死, 其父及子弟, 竝囚刑訊。 金麟厚於經筵, 與成俊相詰, 俊指麟厚爲强暴, 其時參聽人考啓。" 政丞等啓, "考麟厚事, 則非御前, 乃於賓廳, 獨與俊相詰, 其時參聽人, 考之無據。" 傳曰: "前於經筵, 講至《唐高宗紀》先帝後宮事, 朴安性啓, ‘此古命帝王所無之事。’ 臣子於君前, 不可論君上之失, 更考啓。" 人言, "王烝成宗淑儀南氏, 恐醜聲聞外, 故有是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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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伯珍 | 14?? | 1504 | 信川 | 子韞 |
[문과] 성종(成宗) 8년(147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3[探花]위(03/33)
강백진(康伯珍) 자온(子鞰) 무명재(無名齋) 미상(未詳) 1477 신천(信川) 미상(未詳)
강백진(康伯珍) 자온(子鞰) 무명재(無名齋) 미상(未詳) 1472 신천(信川) 선산(善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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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중진(康仲珍) | 1459 | 1520 | 신천(信川) | 자도(子鞱), 자도(子韜) | 강척(康惕) |
[문과] 연산군(燕山君) 1년(149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3[探花]위(03/33)
강중진(康仲珍) 자도(子韜) 임경당(臨鏡堂) 기묘(己卯) 1495 37 신천(信川) 선산(善山)
강중진(康仲珍) 자도(子鞱) 임경당(臨鏡堂) 기묘(己卯) 1480 22 신천(信川) 선산(善山)
강중진(康仲珍) 자도(子鞱) 임경당(臨鏡堂) 기묘(己卯) 1480 22 신천(信川) 선산(善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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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헌집(睡軒集) 권오복(權五福)생년1467년(세조 13)몰년1498년(연산군 4)자향지(嚮之)호수헌(睡軒)본관예천(醴泉)특기사항김종직(金宗直)의 문인. 김일손(金馹孫)ㆍ강혼(姜渾) 등과 교유
睡軒集卷之二 / [詩] / 奉賀子韜丈 康伯珍
聯璧難兄復難弟。探花仙桂兩回芳。頻年辦此榮親宴。光動金烏萬丈蒼。
自天雨露花如錦。一府榮觀嘖嘖聲。誰換新來催作戲。座間欠一大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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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賀子韜丈 康伯珍->康仲珍
*子韜는 康仲珍의 字이다. 康伯珍의 자는 子韞이다. 원문교감필요함. 본문 座間欠一大先生의 대선생은 점필재를 가리키니 점필재 별세후 강중진이 문과급제함.
嶺南人物考 卷十一 / 善山 / 康伯珍、仲珍
康伯珍字子韞, 信川人。 成宗壬辰生員, 丁酉文科, 官至司諫。 燕山戊午杖流, 甲子被禍。
康仲珍字子韜。 伯珍之弟。 成宗庚子, 生員兩試。 燕山乙卯文科, 官至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