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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정도전선생 유배지 유적지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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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시 다시면 백동길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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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집(三峯集) 정도전(鄭道傳)생년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몰년1398년(조선 태조 7)자종지(宗之)호삼봉(三峯)본관봉화(奉化)시호문헌(文憲)특기사항이색(李穡)의 문인
三峯集卷之三 奉化鄭道傳著 / 書 / 登羅州東樓。諭父老書。錦南雜題○乙卯
우왕 | 1 | 1375 | 을묘 | 洪武 | 8 | 34 | 원 나라 사신이 국경에 이르자,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간하여 羅州 會津縣에 유배되다. ○ 12월, 「心問」ㆍ「天答」2편을 짓다. |
우왕 | 3 | 1377 | 정사 | 洪武 | 10 | 36 | 7월, 謫所로부터 三峯의 舊居로 돌아오다. |
道傳以言事忤宰相。放來會津縣。縣羅屬也。道過羅。登東樓。徘徊瞻眺。山川之勝。人物之富庶。抑南方一巨鎭也。羅爲州始自國初。且有功。我太祖一三韓。郡國次第平。惟時百濟。恃其險遠。人馬糧穀之強且富。不卽歸命。羅人明識逆順。率先內附。太祖之取百齊。以羅人之力與有多焉。親駕是州。陞之爲牧。按天復癸亥。麗祖攻錦城。錦人擧城歸附。仍改錦城爲羅州。陞牧在顯宗時。 以長南諸州。蓋所以褒之也。惠王躬擐甲胄以先後左右。功多子列。按錦城之役。惠王從太祖討百濟。奮勇先登。功爲第一。 大業以定。丕承厥位。保有民社。有創業之助。有持守之功。血食大廟。爲百世不遷之室。乃眷戀舊邦而廟享焉。按惠王祠在興龍寺。州人祀之。 顯王南巡至此。遂成興復之功。按顯王庚戌。避契丹南巡至州。契丹師退。乃還都。陞爲牧。 賜州八關禮。以比本京。噫。道傳二爲禮部郞。皆兼太常。職掌宗廟朝會之事。今得罪不測。落南而來。違遠京國。雖欲目一覩宗朝。與下執事之末。其可得乎。然予心則未嘗忘也。今在千里外州。獲聞祖功宗德之盛。登樓以望。山川如古。想見當時千乘萬騎頓住於其中。又覩廟貌炳然臨照。得慰孤臣拳拳之懷。何其幸也。嗟夫。羅人田其田宅其宅。安生樂業。將五百年于玆。何莫非祖宗休養生息之恩。亦父老所知也。然是州濱海極邊以遠。所患莫倭寇若也。沿海州郡。或虜或徙。騷然無人。不能守土地修貢賦。版籍所載。生齒所息。財賦所出。皆棄於草木之所蕃。狐兔之所穴。而其人之流散死亡。皆莫之恤。倭故也。而羅介於其中。繁庶如平日。桑麻之富。禾稻被野。其民晝作夜息。怡怡煕煕。以樂其樂。以及行旅登樓。顧望山川原野。極遊覽之娛。人盛物阜。仰聖德而歌遺風。不知行役之勞。遷逐之感也。是州之在四隣殘破蕩析之中。劇寇侵略之內。而安然獨全。如萬丈之陂以障橫流之衝。雖有奔蕩激射。極其怒勢。而其爲陂自若。民恃無恐。豈非祖宗之德入人者深。非若他州之民無恒產無恒心比也。豈非牧守得人。能宣德意。以結民心。使不散也。抑父老之敎有素而民知向義也。吁可嘉矣。然近來倭寇尤橫。其勢日進不衰。父老毋狃已往之無事。勵子弟修器械。謹烽火以保州若縣。不爲國家南顧之憂。道傳雖負罪深重。自今至未死之日。而得優遊暇食。羅人之賜不旣多乎。
삼봉집 제3권 / 서(書) / 나주의 동루에 올라서 부로들에게 효유하는 글 을묘 [登羅州東樓諭父老書 乙卯] 금남잡제(錦南雜題)임.
도전이 언사(言事)로 재상에게 거슬려서 회진현(會津縣)으로 추방되어 왔다. 회진현은 나주(羅州)의 속현(屬縣)이므로 길이 나주를 거치게 되어, 동루(東樓)에 오르게 된 것이다. 배회하며 사방을 바라보니, 산천이 아름답고 인물이 부서(富庶)하매 남방의 일대 거진(巨鎭)이다.
나주가 주(州)로 된 것은 국초(國初 고려 국초를 이름)였으며, 또 공로가 있었다. 우리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총합할 적에 군국(郡國)이 차례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백제(百濟 후백제를 이름)만이 그 지방이 험원(險遠)하고 인마(人馬)가 강하며 양곡이 많은 것을 믿고서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에 나주 사람들은 역(逆)과 순(順)을 밝게 인식하고서 솔선하여 내부(內附)하였다. 태조가 백제를 취하는 데는 나주 사람들의 힘이 컸으므로 태조는 친히 이 고을에 납시어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안】 천복(天復) 계해년(903)에 고려 태조가 금성(錦城)을 공격하니 금성 사람들은 온 성을 들어 항복했으므로 금성을 나주라고 고쳤다. 목(牧)으로 승격한 것은 고려 현종(顯宗) 때의 일이다.
남쪽 여러 고을을 통솔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포양(褒揚)하는 뜻에서였다.
그때 혜종[惠王]은 몸소 갑주(甲冑)를 입고 태조를 전후 좌우에서 도왔다. 그래서 공로가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많았다.
【안】 금성(錦城)의 싸움에서 혜왕이 태조를 따라 백제를 치는 데 분용하여 먼저 올라 공이 제일이었다.
대업(大業)을 정하고는 왕위를 이어받아 백성과 사직을 차지하였다. 창업(創業)을 도운 일과 지수(持守)의 공로로 태묘(太廟)에서 혈식(血食)을 받는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사당이 되었으나, 이것은 권련(眷戀)한 옛 고을에서 묘향(廟享)을 받게 된 것이다.
【안】 혜왕의 사당이 흥룡사(興龍寺)에 있어 그 고을 사람들이 제사지냈다.
현종[顯王]이 남으로 순행하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흥복(興復)의 공훈을 이루게 되었다.
【안】 현종 경술년(1010)에 글안(契丹)을 피하여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글안의 군사가 물러가니 서울로 돌아와서 나주를 목으로 승격시켰다.
그리하여 나주에 팔관례(八關禮)를 내렸는데, 서울의 의식과 비할 만하였다. 아! 도전이 두 번이나 예부랑(禮部郞)이 되어서 태상(太常)의 직을 겸했었다. 그래서 종묘와 조회(朝會)의 일을 관장하였었는데, 기금 불측한 죄를 짓고 남으로 몰락되어 왔다. 서울을 멀리 떠나 왔으니 비록 눈으로 한 번만이라도 종묘와 하집사(下執事)의 말석이라도 보려 한들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의 마음에는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천리 밖의 고을에 있어 조종(祖宗)의 성대한 공덕을 얻어 듣고 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산천은 옛날과 다름이 없다. 당시에 천병만마[千乘萬騎]가 이 가운데서 주둔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또 사당의 빛나는 모습을 우러러보매, 고신(孤臣)의 못잊어 애타는 가슴을 위로해 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 저 나주 사람들이 그 밭을 갈고 그 집에 살면서 생업을 편안히 즐긴 지가 벌써 5백 년이 되니, 어찌 모두가 조종의 휴양(休養)하고 생식(生息)하는 은혜가 아니랴? 역시 부로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다와 인접하고 있어서 극히 변두리이며 멀다. 그래서 근심되는 것이 왜구(倭寇)보다 더한 것이 없다. 연해(沿海)한 다른 고을들은 혹 포로가 되어 갔거나 혹 이사를 가서, 소연히 사람이 없으므로 토지를 지키고 공부(貢賦)를 바치지 못한다. 그들이 판적(版籍)에 기재된 호적, 사람이 휴식하는 집과 재부(財賦)가 나오는 토지 등을 모두 초목이 번성한 곳이나 여우ㆍ토끼가 사는 굴같이 내버리고 유산(流散)하다가 사망하는 것을 모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은 모두 왜 때문이다. 그런데 나주는 그 속에 끼여 있으면서도 평상시와 같이 번성하여 상마(桑麻)가 풍부하고 벼가 들에 깔렸으며, 백성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화기에 찬 밝은 표정으로 그 삶을 즐긴다. 그리하여 나그네들이 이 누에 올라, 산천과 원야(原野)를 돌아보고는 유람의 즐거움을 한껏 즐기고, 인물이 번성하고 물자가 풍부한 것을 보고는 성덕(聖德)을 우러르며 유풍(遺風)을 노래하는 까닭에 행역(行役)의 고달픔과 귀양살이의 감회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 고을은, 잔파(殘破)하여 유랑하는 이웃 고을들 가운데에 처하여 강포한 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안연히 홀로 온전하게 있는 것은, 마치 만 길 언덕이 거센 물결을 가로막아 서서, 아무리 심한 파도가 출렁이고 부딪쳐도 끄떡없이 서 있는 것과도 같으니 이 백성들이 믿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어찌 조종의 은덕이 사람에게 들어간 것이 깊어서가 아니며, 다른 고을의 백성처럼 항산(恒産)이 없어서 항심(恒心)도 없는 데 비할 바가 아니니 이는 수목(守牧)이 적격자여서, 능히 덕의(德意)를 베풀어 민심을 맺어서 흩어지지 못하게 한 덕이 아니랴? 그리고 부로들이 소양 있게 가르쳐 백성들이 의리로 향할 줄 알아서일 것이다. 아! 가상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요사이 왜구들이 더욱 날뛰어 그 형세가 날로 더하고 쇠하지 아니하니 부로들은 지금까지의 무사했던 것에 젖지 말고, 자제를 격려해서 기계를 수리하고 봉화(烽火)를 삼가고, 그래서 주(州)와 현(縣)을 안보하여 국가에서 남쪽을 걱정함이 없게 하라. 도전이 비록 죄를 진 것이 몹시 중하지만 지금부터 내 생애가 끝날 때까지 편안히 살고 여유 있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나주 사람들의 은혜가 많은 것이 아니겠는가?
[주-D001] 을묘 : 고려 우왕(禑王) 원년(1375).[주-D002] 혈식(血食) : 혈(血)은 제사에 바치는 희생의 뜻이니, 국전(國典)으로 지내는 제사를 이름. 옛날에 종묘ㆍ향교(鄕校)ㆍ서원(書院) 등에서는 제사를 지내는 데 고기를 삶지 않고 날것으로 올렸으므로 생긴 이름.[주-D003] 백세불천(百世不遷)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神主)는 친진(親盡)이 되어도 매안(埋安)하지 않고 영구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지낸다.[주-D004] 팔관례(八關禮) : 고려 때 중경(中京)과 서경(西京)에서 토속신(土俗神)에게 제사지내던 의식. 태조 초부터 시작되어 성종 때 일시 정파(停罷)하였으나, 현종(顯宗) 때 다시 부활되어 국가적인 중요한 행사로서, 중경에서는 추수 이후 음력 11월에, 서경에서는 10월에 등불을 찬란히 하고 술과 다과(茶果)를 베풀며 가무(歌舞)와 백희(百戲)를 아뢰어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빌었다. 이날에 각 고을 벼슬아치가 글을 올려 하례(賀禮)하고 외국의 상인들이 각기 방물(方物)을 바치고 축하하였다.고려 우왕(禑王) 10년(1384).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도련 (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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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봉집 제2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 나주 동루에 제하다 병진 [題羅州東樓 丙辰]
염장의 땅에서 두 해를 나니 / 二年炎瘴地
천 리라 금성산 강가이로세 / 千里錦江城
나라 떠나니 몸은 부쳐 사는 듯 / 去國身如寄
누를 오르자 눈 잠시 밝아라 / 登樓眼暫明
가는 구름 저물녘에 일어나니 / 征雲向暮起
귀양살이 나그네 이때의 심정 / 謫客此時情
풍경은 장사와 근사하지만 / 風景長沙近
가생이 아니라서 부끄럽다오 / 自慚非賈生
[주-D001] 병진 : 고려 우왕 2년(1376).[주-D002] 가생 : 가의(賈誼)를 말함. 한(漢)나라 낙양(洛陽) 사람. 한문제 때 나이 20세로 박사(博士)가 되었음. 뒤에 주발(周勃)과 관영(灌嬰)의 참소로 쫓겨나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었음. 《史記 卷84》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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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 나주목(羅州牧) / 【누정】
무이루(撫夷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성임(成任)의 시에, “비 개인 뒤 산빛 고운 것이 상심(傷心)되고, 취한 후 봄빛은 얼굴에 가득 뜨누나. 풍경이 아름다우나 내 고장 아니니, 이제부터 고원(故園)에 돌아가 쉴까보다.” 하였다.
동루(東樓) 곧 성의 동문루(東門樓)이다. 목사 김계희(金係熙)가 읍 성을 증축할 때 중수(重修)한 것이다. 옛 터는 성 안에 있다.
○ 정도전의 《유부로서(諭父老書)》에, “도전(道傳)이 회진(會津)으로부터 귀양와서 나주를 지나칠 때 동루에 올라 배회하며 바라보니, 산천의 아름다움과 인물의 번성함이 거의 남방의 한 거진(巨鎭)이었다. 나주가 주(州)가 된 것은 국초부터 비롯되었으니, 우리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할 제, 군(郡)ㆍ국(國)들이 차례로 평정될 때에 오직 후백제가 그 험하고 멂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는데, 나주 사람들은 순(順)과 역(逆)을 밝게 알아 솔선해서 붙었으니,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병합하는데 나주인의 힘이 컸다. 태조가 친히 이 고을에 행차하시어 목(牧)으로 승격시켜 남방 여러 고을의 으뜸으로 삼으니, 이 고을을 포상(褒賞)한 것이었다. 혜종(惠宗)이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과 사직을 잘 보존하여 창업(創業)할때의 도움과 수성(守成)한 공이 있어 종묘에서 백세불천(百世不遷)의 제사를 받으셨으며, 옛 고장을 돌보고 보호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하였다. 현종(顯宗)이 남쪽으로 순수할 제, 이 곳에 이르러 드디어 흥복(興復)의 공을 이루었으므로 나주에 팔관례(八關禮)를 하게 하여 서울과 비등하게 했다.
아, 도전이 남쪽으로 떨어져 와서 서울과 멀어졌으나 조종의 공덕의 갸륵함을 듣고 이 누에 올라 바라보니, 산천은 옛날과 같아 당시의 천승만기(千乘萬騎)가 이 안에 주둔했던 것이 상상된다. 또 혜종의 사당이 찬란하게 있는 것을 보니, 외로운 신하의 간절한 회포를 위로해 준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 나주 사람은 그들의 밭을 갈고 집에 편히 살며 그들의 생업(生業)을 즐긴 것이 어언 5백 년이니, 모두가 조종이 기르고 휴식시킨 은혜아님이 없는 것을 부로(父老)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고을은 바닷가에 있는 먼 극변(極邊)이어서 왜구(倭寇)가 걱정거리이다. 연해(沿海)의 주군(州郡)이 혹은 사로잡히고 혹은 이사가서 소연(騷然)하여 사람이 없는데, 이 고을은 그 가운데에 끼어 있으면서도 번창하기가 거의 평일과 같아서 뽕나무와 삼이 풍부하고 벼가 들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어 즐거움을 누린다. 지나는 나그네가 누에 올라 산천과 들판을 바라보면, 유람하는 즐거움을 실컷 맛볼 수 있다. 백성이 번성하고 물자가 풍성하여 성덕(聖德)을 우러르며 유풍(遺風)을 노래하니, 어찌 조종의 덕이 사람들에게 감화됨이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는 다른 고을 사람의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 한결 같은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어찌 목사가 어진사람이어서 덕의(德意)를 펴서 민심을 단결시켜 흩어지지 않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평소에 부모들의 가르침이 있어 백성들이 의(義)를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상하도다.” 하였다.
登羅州東樓。諭父老書。錦南雜題○乙卯 道傳以言事忤宰相。放來會津縣。縣羅屬也。道過羅。登東樓。徘徊瞻眺。山川之勝。人物之富庶。抑南方一巨鎭也。羅爲州始自國初。且有功。我太祖一三韓。郡國次第平。惟時百濟。恃其險遠。人馬糧穀之強且富。不卽歸命。羅人明識逆順。率先內附。太祖之取百齊。以羅人之力與有多焉。親駕是州。陞之爲牧。按天復癸亥。麗祖攻錦城。錦人擧城歸附。仍改錦城爲羅州。陞牧在顯宗時。 以長南諸州。蓋所以褒之也。惠王躬擐甲胄以先後左右。功多子列。按錦城之役。惠王從太祖討百濟。奮勇先登。功爲第一。 大業以定。丕承厥位。保有民社。有創業之助。有持守之功。血食大廟。爲百世不遷之室。乃眷戀舊邦而廟享焉。按惠王祠在興龍寺。州人祀之。 顯王南巡至此。遂成興復之功。按顯王庚戌。避契丹南巡至州。契丹師退。乃還都。陞爲牧。 賜州八關禮。以比本京。噫。 道傳二爲禮部郞。皆兼太常。職掌宗廟朝會之事。今得罪不測。落南而來。違遠京國。雖欲目一覩宗朝。與下執事之末。其可得乎。然予心則未嘗忘也。今在千里外州。獲聞祖功宗德之盛。登樓以望。山川如古。想見當時千乘萬騎頓住於其中。又覩廟貌炳然臨照。得慰孤臣拳拳之懷。何其幸也。嗟夫。羅人田其田宅其宅。安生樂業。將五百年于玆。何莫非祖宗休養生息之恩。亦父老所知也。然是州濱海極邊以遠。所患莫倭寇若也。沿海州郡。或虜或徙。騷然無人。不能守土地修貢賦。版籍所載。生齒所息。財賦所出。皆棄於草木之所蕃。狐兔之所穴。而其人之流散死亡。皆莫之恤。倭故也。 而羅介於其中。繁庶如平日。桑麻之富。禾稻被野。其民晝作夜息。怡怡煕煕。以樂其樂。以及行旅登樓。顧望山川原野。極遊覽之娛。人盛物阜。仰聖德而歌遺風。不知行役之勞。遷逐之感也。是州之在四隣殘破蕩析之中。劇寇侵略之內。而安然獨全。如萬丈之陂以障橫流之衝。雖有奔蕩激射。極其怒勢。而其爲陂自若。民恃無恐。豈非祖宗之德入人者深。非若他州之民無恒產無恒心比也。豈非牧守得人。能宣德意。以結民心。使不散也。抑父老之敎有素而民知向義也。吁可嘉矣。 然近來倭寇尤橫。其勢日進不衰。父老毋狃已往之無事。勵子弟修器械。謹烽火以保州若縣。不爲國家南顧之憂。道傳雖負罪深重。自今至未死之日。而得優遊暇食。羅人之賜不旣多乎 | 東樓。卽城東門樓。牧使金係煕廣築邑城,遂重新之。舊址在城內。○鄭道傳《諭父老書》:“道傳放來會津,道過羅,登東樓,徘徊瞻眺。山川之勝,人物之富庶,南方一巨鎭也。羅爲州,始自國初。我太祖一三韓,郡國次第平,惟時百濟恃其險遠,不卽歸命。羅人明識逆順,率先內附,太祖之取百濟,羅人之力與有多焉。親駕是州,陞之爲牧,以長南諸州,蓋所以褒之也。惠王丕承厥位,保有民社,有創業之助,有持守之功,血食大廟,爲百世不遷之室,乃眷戀舊邦而廟享焉。顯王南巡至此,遂成興復之功,賜州八關禮以比本京。噫! 道傳落南而來,違遠京國,獲聞祖功宗德之盛,登樓以望,山川如古。想見當時千乘萬騎頓住於其中,又睹廟貌炳然臨照,得慰孤臣拳拳之懷,何其幸也!嗟夫!羅人田其田,宅其宅,安生樂業,將五百年于玆,何莫非祖宗休養生息之恩?亦父老所知也。然是州濱海極邊以遠,所患莫倭寇若也。沿海州郡或虜或徙,騷然無人, 而羅介於其中,繁庶如平日,桑麻之富,禾稻被野。其民晝作夜息,怡怡煕煕以樂其樂。以及行旅登樓,顧望山川原野,極遊覽之娛。人盛物阜,仰聖德而歌遺風,豈非祖宗之德入人者深?非若他州之民無恒産無恒心比也。豈非牧守得人,能宣德意以結民心,使不散也?抑父老之敎有素,而民知向義也。吁!可嘉矣。” |
나주 동루에서 부로들에게 유하는 글 끝에 씀[題羅州東樓諭父老書後]
김종직(金宗直)
뉘라서 종지가기ㆍ설과 같다고 하던가 / 誰謂宗之夔契倫
공연히 평지에서 위태로운 구렁텅이를 파고 있었네 / 崎嶇平地竟阽身
쓸데없이 동문에서 부로에게 일러 주는 것보다 / 謾煩父老東門諭
아무 말 말고 회진에 가만히 있는 것이 어떠리 / 爭似三緘隱會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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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峯集卷之四 奉化鄭道傳著 / 記 / 消災洞記
道傳賃居消災洞黃延家。洞卽羅屬部曲。居平之地。有寺曰消災。故以爲名。環洞皆山也。而其北東則重巒疊嶺。形勢相屬。西南諸峯。低小可以眺望。又其南。原野平衍。樹林煙火。茅茨十餘戶。乃會津縣也。其名山水。曰錦城山。端重奇偉。以據乎東北。羅之鎭也。曰月出山。淸秀突兀。以阻乎東南。靈巖郡界也。曰錦江。由羅東南流。過會津縣南。西入海。洞距海數十里。其山嵐海瘴之氣。中人肌膚。病作無時。然朝夕晦明。氣象萬千。亦可翫也。洞中無異草木。唯黃茅脩竹。間於松枏。人家門戶藩籬。往往以竹代木。其蕭灑淸寒之狀。使遠人亦樂而安之也。居人淳朴無外慕。力田爲業。延其尤也。家善釀。延又喜飮。每酒熟。必先觴予。客至。未嘗不置酒。日久益恭。有金成吉者頗識字。其弟天能談笑。亦皆善飮。兄弟同居。有徐安吉者老爲僧曰安心。高鼻長面。容儀詭怪。凡方言俚話。鄕井閭巷之事。無不記。有金千富者曹松者。其飮亦成吉,延之流也。日從予遊。每得時土物。必持酒漿而來。盡歡乃去。予寒一裘暑一葛。早寢晏起。興居無拘。飮食惟意。與二三學者。講論之餘。夤緣溪磵。登降巖谷。倦則休。樂則行。其遇佳處。徘徊瞻眺。嘯詠忘歸。或逢田父野老。班荊而坐。相勞問如故。一日登後岡以望。愛其西偏稍平夷。下臨廣野。遂命僕剔去椔翳。構屋二間。不翦茅。不削木。築土爲階。編荻爲籬。事簡而功約。而 一本無而字 洞人皆來助之。不數日告成。
扁曰草舍。
因居之。噫。杜子美在成都。構草堂以居。僅閱歲而已。而草堂之名傳千載。予之居草舍幾時。予去之後。草舍爲風雨所漂壞而已耶。野火所延爇。朽爲土壤而已耶。抑有聞於後歟。無歟。皆未之知也。但予以狂疏戇直。見棄於時。放謫在遠。洞人遇我甚厚如此。豈哀其窮而收之歟。抑長生遠地。不聞時議。不知予之有罪歟。要皆厚之至也。予且愧且感。因記其本末以致意焉。
삼봉집 제4권 / 기(記) / 소재동기(消災洞記)
도전(道傳)이 소재동(消災洞) 황연(黃延)의 집에 세들어 살았다. 그 동리는 바로 나주(羅州)에 속한 부곡(部曲)인 거평(居平) 땅으로, 소재사(消災寺)란 절이 있어 동리 이름을 삼은 것이다. 동리는 주위가 모두 산인데 그 북동쪽에는 중첩된 봉우리와 고개들이 서로 잇달았으며, 서남쪽에는 여러 봉우리가 낮고 작아서 멀리 바라볼 만하다. 또 그 남쪽은 들판이 평평하고 숲 속에 연기가 나는 초가 10여 호가 있으니, 이는 바로 회진현(會津縣)이다.
이곳의 유명한 산수로는 첫째가 금성산(錦城山)인데, 단정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동북쪽에 웅거하고 있으니 이는 곧 나주의 주산[鎭山]이며, 둘째가 월출산(月出山)인데, 청수하게 우뚝 솟아 동남쪽을 막고 있으니 이는 영암군(靈巖郡)과의 경계이며, 셋째가 금강(錦江)인데, 나주의 동남쪽을 경유하여 회진현을 지나 남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동리에서 바다까지는 거리가 수십 리다. 그 산의 아지랑이[嵐]와 바다의 장기[瘴]가 사람의 살에 침입하면 병이 때없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아침 저녁 어둡고 밝을 적에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화하니 역시 구경할 만하다.
동리에는 다른 초목이 없고 누런 띠[茅]와 긴 대[竹]만이 소나무ㆍ느티나무의 사이에 있으며, 민가의 문과 울타리는 이따금 대나무를 목재 대신으로 썼는데, 그 시원하고 맑은 모습이 먼 데서 온 사람을 즐거이 살게 만든다.
그리고 동리 사람들은 순박하고 허영심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기를 업으로 삼는데, 그 중에서도 황연은 더욱 그러했다. 그의 집에서는 술을 잘 빚고 황연이 또 술마시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술이 익으면 반드시 나를 먼저 청하여 함께 마시었다. 손이 오면 언제나 술을 내어 대접하는데 날이 오랠수록 더욱 공손했다.
또 김성길(金成吉)이란 자가 있어 약간의 글자를 알았고, 그 아우 천(天)도 담소(談笑)를 잘했는데 모두가 술을 잘 마셨으며, 형제가 한집에 살았다. 또 서안길(徐安吉)이란 자가 있어 늙어 중이 되어서 안심(安心)이라 불렀는데, 코가 높고 얼굴이 길며 용모와 행동이 괴이했으며, 모든 사투리ㆍ속담, 여항(閭巷)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또 김천부(金千富)ㆍ조송(曹松)이란 자가 있는데, 그들도 술을 마시는 것이 김성길ㆍ황연과 비슷했다. 날마다 나를 찾아와 놀고, 매 철마다 토산물을 얻게 되면 반드시 술과 음료수를 가지고 와서 한껏 즐기고서 돌아갔다.
나는 겨울에 갖옷 한 벌, 여름에 갈옷[葛] 한 벌로써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기거 동작에 구속되지 않았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었다. 그리하여 그 두세 학자들과 강론하다가는 개울을 따라 산골짜기를 오르내리는데, 피곤하면 휴식하고 흥이 나면 걷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나면 이리저리 구경하며 휘파람을 불고 시를 읊느라고 돌아갈 줄 몰랐다. 어떤 때는 농사꾼 또는 시골 늙은이를 만나, 싸리포기를 깔고 앉아서 서로 위로하기를 옛 친구처럼 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뒷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다가, 그 서쪽 한 곳이 좀 평평하고 그 아래로 넓은 들이 펼쳐 있는 것이 좋아 드디어 종에게 명하여 묵은 숲을 베어내고 띳집 두 칸을 지었는데, 풀을 가지런히 하지도 않고 나무를 깎지도 않은 채 흙을 쌓아 뜰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드니, 일이 간략하고 힘이 적게 드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어서 며칠이 못되어 완성되었다. 그래서 편액을 초사(草舍)라 하고 곧 거처했다.
아! 두자미(杜子美)는 성도(成都)에 있을 적에 초당(草堂)을 짓고 산 것이 겨우 한 해를 지냈을 뿐인데, 초당의 이름은 천년을 전한다. 내가 이 초사에서 얼마나 살 것인지, 내가 이곳을 떠나간 뒤에 이 초사가 비바람을 맞아 무너지고 말 것인지, 들불에 타거나 썩어 흙덩이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후세에 알려질지, 알려지지 않을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찬찬하지 못하고 너무 고지식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아 귀양살이로 멀리 와 있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나 대접하기를 이렇듯 두텁게 하니, 어쩌면 그 궁한 것을 불쌍하게 여겨서 거두어 주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당시의 의논을 듣지 못하여 내가 죄 있는 자인 줄 몰라서인가? 아무튼 모두 후대가 지극하였다. 내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이 되므로 그 시말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하는 것이다.
[주-D001] 두자미(杜子美)는 성도(成都)에 있을 적에 초당 : 두보(杜甫)가 촉(蜀)의 성도(成都)에 있을 적에 살던 집. 두보의 연보(年譜)에 의하면, “건원(乾元) 2년(759)에 촉에 들어갔는데 성도윤(成都尹) 배면(裵冕)이 두보를 위하여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지어 살게 했다.” 했음. 또 《노학암필기(老學庵筆記)》에는, “두보가 성도에 두 초당을 두었는데, 하나는 만리교(萬里橋) 서쪽에 있고, 하나는 완화계 북쪽에 있었다.” 했음.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도련 (역) | 1977
거평부곡(居平部曲) 회진현(會津縣)에 있는데, 주에서 서쪽으로 30리이다.
기언 제58권 산고속집 / 문장(文章) / 소학삼체(騷學三體) 서(序)
선생은 사(詞)와 부(賦)로 저명하였으며, 나주(羅州) 거평(居平) 사람이다. 어려서 많은 책을 읽었는데, 문장을 지으면 그 글이 풍부하고 깊이가 있으며, 시원스럽고 폭이 넓으며, 빼어나고 억양이 있었다. 특히 풍자를 잘하였는데, 굴원(屈原)의 문장에 근본하고, 양자운(揚子雲 양웅(揚雄)), 사마상여, 한유, 유종원의 문장을 참고하여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만력(萬曆) 연간에 국자시(國子試)에 응시해서 〈옥모편(玉貌篇)〉을 지어 올려 장원으로 뽑혔기 때문에 정옥모(鄭玉貌)라고 불렸고, 이로 인해 이름이 온 나라에 알려졌다. 그러나 성품이 고고하고 올곧아 남에게 굽히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정유재란 때 남쪽 지방이 적에게 함락되자 호서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여러 의병들과 합세해서 적을 토벌하였다. 이때 실권을 쥔 자와 뜻이 맞지 않아 그가 선생을 가두고 기필코 죽이려고 하였는데 주선해 준 사람이 있어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계속해서 선생을 배척하여 뜻을 펴지 못하였다. 서울에서 머물 때에 제자들이 날로 모여들어 문 밖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다. 강학하는 것이 모두 공자의 가르침을 벗어나지 않았고, 총산선생(蔥山先生)이라고 불렸다.
굴원의 글은 원망하면서도 그리워하고, 양자운과 사마상여의 글은 사치스러우면서 아름답고, 반고(班固)의 글은 까다롭고, 한퇴지(韓退之)의 글은 평탄하고, 유자후(柳子厚)의 글은 각박한데, 이는 초나라의 글은 각박하고, 한나라의 글은 화려하고, 당나라의 글은 고문을 변경하여 배율(排律)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제가의 문체를 집대성하여 《소학삼체》를 지었는데 총 32편이다. 선생이 평소 여러 글을 지으면서 매번 먼 옛날을 염두에 두고서 자신의 뜻을 드러냈다. 그 저술하는 문체는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여 빼어나고 심오함이 절조(絶調)를 이루었다. 양송천(梁松川 양응정(梁應鼎))이 일찍이 칭찬하기를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드문 음조(音調)이다.” 하였다.
선생의 성은 정씨(鄭氏)이고, 휘는 언옹(彦𧦱)이고, 자는 우용보(宇容父)이다. 선대는 백제 탕정(湯井) 사람이다. 선생이 74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자손이 없고, 분묘는 서호(西湖)에 있다.
신유년(1681, 숙종7) 7월 18일에 90세 된 제자 석호노인(石戶老人)은 서(序)한다.
[주-D001] 거평(居平) : 나주목(羅州牧) 회진현(會津縣)에 있던 부곡(部曲)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5 全羅道 羅州牧》
ⓒ 한국고전번역원 | 홍기은 (역) | 2007
大東地志 卷五 / 忠淸道 / 溫陽 / 沿革
本百濟湯井。 新羅文武王十一年, 陞湯井州, 置摠管, 稱湯井停。 景德王十六年, 降爲湯井郡, 領縣: 陰峯, 祈梁, 平澤。 隷熊州。 高麗太祖二十三年改溫水。 顯宗九年, 屬天安郡。 明宗二年置監務。 本朝太宗十四年, 合於新昌, 改號溫昌, 十六年析置溫水縣監。 世宗二十四年, 幸溫泉, 陞溫陽郡。
나주문화답사 -정도전 유배지 소재동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
이곳에서 원대한 계획 구상…“순박함에 감명”
2018. 03.26(월) 10:26 |
소재동은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 나주정씨 문산자락에 위치한 한적한 산골이다. 뒷산은 백룡산(白龍)이요, 앞산은 칠두봉으로 칠봉산(七峯山)이다. 서쪽에는 문평으로 넘어가는 대오개라는 고개가 있다. 삼봉 선생이 거처한 집터 위에는 현재 나주정씨 정자신의 묘가 있으며 선생의 집터는 500년 전 정자신의 아들인 정식장군이 부친의 묘 옆에다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던 곳이다.
정식 장군은 조선 세조 때 궁궐에 불이 났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세조를 구해낸 인물로 병조참판에 오른 인물이다. 현재는 대나무밭으로 변하였으나 십여년 전만 해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회진현 거평부곡에 속한 이 소재동(消災洞)에서 유배를 살았던 정도전은 포은 정몽주와 쌍벽을 이루는 고려 말의 경세가로 중국대륙의 신흥강국 명나라를 가까이 하여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친원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유배를 오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이상을 펼칠 원대한 계획을 구상하였으며 소재동 사람들의 순박한 삶에서 크게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그의 문집에서 밝히고 있다.
다시민속보존회가 2001년 5월에는 소재동비라는 기념비를 세워 정도전의 후손인 봉화정씨 문중인들과 함께 제막식을 갖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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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일고 제1권 / 시(詩) / 금성의 동루(東樓)에서 백문서를 전송하다. 錦城東樓 追送白文瑞
함께 논 게 오늘까지 몇 날이런가 / 同遊今幾日
네 번이나 강 달이 둥그러졌네 / 四見江月彎
강 달은 다정스런 생각 많아서 / 江月多情思
이별하는 사람 얼굴 내리비추네 / 照人離別顔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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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룡(白見龍, 1543~1622), 자는 문서(文瑞), 호는 성헌(惺軒)이다. 고려의 정당문학(政堂文學) 백문보(白文寶)의 후손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조목(趙穆), 김성일(金誠一), 유성룡(柳成龍) 등과 학문 교유(交遊)가 있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영해(寧海)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방위하였으며, 난이 끝난 후 벼슬을 바라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전심하였다. 1609년(광해군1) 67세에 비로소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운산서원(雲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성헌집(惺軒集)》이 있다. 백인국의 4종제이며 행장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