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재집 제45권 / 행장(行狀) / 손재 남공 행장〔損齋南公行狀〕
공의 휘는 한조(漢朝), 자는 종백(宗伯)이니, 성은 남씨(南氏)이다.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연간에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이 있었는데,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갔다가 태풍(颱風)을 만나 신라(新羅)에 표류하였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그가 남쪽에서 왔기에 남(南)을 성으로 하사하고 영양 백(英陽伯)에 봉하였다. 고려 시대에 군보(君甫)가 공로로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짐에 이르러 자손들이 의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후에 또 은(誾)이 있으니 우리 조선 태조를 도와 개국 공신에 책훈되었으며, 시호는 강무(剛武)이다. 6세를 지나 군수 영(嶸)에 이르러 효성으로 임금에게 알려져 좌참찬(左參贊)에 증직되고 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실제 비로소 함녕(咸寧 함창)에 살았다. 2세 뒤 휘 극로(極老)는 아들 둘이 있었는데, 첫째 후(垕)는 과거 급제하여 관직이 납언(納言)에 이르렀으며 강직(剛直)함으로 이름이 났고, 둘째 지(至)는 일찍 죽어 자식이 없어 납언(納言)의 둘째 아들 진사 휘 도훤(圖翧)을 양자로 들였으니,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조부 휘 정삼(鼎三)과 아버지 휘 필용(必容)은 대대로 은덕(隱德)이 있었다.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 감사(監司) 성구(聲久)의 증손(曾孫)으로, 참봉 경온(景溫)의 따님이다. 현명하고 정숙하며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원릉(元陵) 갑자년(1744, 영조20) 5월 3일 상산(商山 상주) 두릉리(杜陵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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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 제37권 / 갈명(碣銘) / 자족당 남공 묘갈문〔自足堂南公墓碣文〕
공은 휘가 극주(極柱)이고 자가 천경(天擎)이며 성이 남씨(南氏)이다. 남씨는 중국 여남(汝南) 사람 김충(金忠)에서 시작하였으니, 김충은 당(唐)나라의 안렴사(按廉使)로서 일본에 사신 갔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영해(寧海)에 정박하였는데, 신라의 왕(王 경덕왕(景德王))이 그가 남쪽에서 왔다는 것으로써 남씨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바꾸고 영양현(英陽縣)에 봉하였다. 고려 때 휘 군보(君甫)가 있었으니 의령(宜寧)을 관적으로 하였고 관직이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몇 세대를 지나 휘 을번(乙蕃)에 이르렀으니, 을번은 시중(侍中) 벼슬을 하였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경렬(敬烈)이다. 이분이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지고 판상서사(判尙書事)를 지냈으며 시호가 강무(剛武)인 휘 은(誾)을 낳으니, 은은 우리 태조를 도와 개국 원훈(開國元勳)에 책록되었고 태조 묘실[太室]에 배식(配食)되었다. 후세에 좌윤에 증직된 휘 예석(禮錫)에 이르러 비로소 문희(聞喜 경상도 문경)에 거주하였다. 이분이 휘 영(嶸)을 낳으니 호가 고산(孤山)으로, 서애(西厓) 선생이 효행으로 천거함으로써 군수 벼슬을 하였고,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며 제향을 받았다. 이분이 진사 휘 창우(昌宇)를 낳으니, 창우는 돈독한 학문으로 향당의 사표가 되었으며, 곧 공의 고(考)이다. 비(妣)는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니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의 후손 신구(申謳)의 따님으로 숭정(崇禎) 기묘년(1639, 인조17) 7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