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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당선생 별집 제12권 / 상량문(上樑文) 택풍당(澤風堂)의 상량문은 택풍지(澤風志)에 보임
장단(長湍) 봉잠(鳳岑)의 회헌서원(晦軒書院) 상량문
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 서원의 학풍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제례(祭禮)가 도입되면서부터 고을에서 현인을 향사(享祀)하는 일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양경(兩京)과 가까운 이 그윽한 지역에서도, 고려와 조선에 걸쳐 크게 명성을 떨친 선현(先賢)들을 우러러 받드는 일이 있게 되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덕에 감화된 이 고을이여. 얼마나 높이 솟았는가, 경건함을 바치게 된 이 서원이여.
생각건대, 옛날 회헌(晦軒 안향(安珦)) 부자(夫子)야말로 해동(海東)의 유종(儒宗)이 되고도 남는 분이라 하겠다. 사설(邪說)을 물리치고 편벽된 행동을 막음으로써 기자(箕子)의 나라에 우거진 잡초들을 제거하였고, 학교를 일으키고 선비를 기름으로써 옥 장식 궁전에 역복(棫樸)이 무성하게 자라도록 하였다. 도(道)를 보위(保衛)하기 위해 그토록 힘을 기울였던 것은 일찍부터 도를 들어 알았기 때문이요, 성인(聖人)을 그토록 독실하게 높이 떠받든 것은 성인을 앙모하는 참된 마음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문정(文貞)으로 말하면 죽계(竹溪)의 연원(淵源)을 계승한 분이었으며, 그 뒤에 또 유아(儒雅)한 유항(柳巷)이 잇따라 나오게 되었는데,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충근(忠勤)하고 효우(孝友)했음은 물론, 정치와 문장에 있어서도 각기 적임자로서의 그릇을 인정받았다. 비궁(匪躬)의 절조를 힘쓴 것은 그 정성이 금석(金石)에 비교될 만하였고, 조슬(造膝)의 계책을 진달드린 것 역시 그 지혜가 시초(蓍草)를 능가할 정도였는데, 두 분 모두 사책(史冊)에 높이 드러나는 가운데 그 풍도를 크게 떨치고 있는 바이다.
그리고 고려 말의 어렵고 혼란했던 시기에 출현한 목옹(牧翁)의 걸출한 자태에 대해서야 또다시 말할 것이 있다 하겠는가. 그분의 순수한 충성심과 미쁜 절조는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는 곤륜산(崑崙山)의 봉황을 보는 것과 같았고, 그분의 심오한 학문과 웅대한 문장은 하늘 위의 규벽(奎壁)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격동하는 황하(黃河) 가운데에 우뚝 선 지주산(砥柱山)과 같고, 엄동설한에 변함없이 푸르른 송백(松柏)과 같은 근엄한 자태를 우리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다가 우리 조선의 문운(文運)이 아름답게 빛날 때에 기묘(己卯)의 사류(士類)가 성대하게 일어났으니, 모재(慕齋) 형제가 함께 나옴과 동시에 자암(自菴 김구(金絿))의 사우(師友)가 또한 더불어 출현하였다. 버드나무 가지를 꺾었을 때 진언(進言)한 숙자(叔子)처럼 임금을 바른길로 인도한 것이 또한 많았고, 방백(方伯)으로 나가서 지방을 다스릴 때에는 감당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정사를 펼쳤던 소백(召伯)과 같았다고 모두들 칭송하였다. 격탁양청(激濁揚淸)한 그 절조는 얼음과 눈처럼 순결하였고, 갱금알옥(鏗金戞玉)의 그 문장은 보불(黼黻) 무늬처럼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분들의 경세 제민(經世濟民)하는 경륜이 비록 당시에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빛나는 공적만큼은 후세에 길이 떨쳐지리라 여겨진다. 그러니 어찌 사방 백 리 되는 임단(臨湍 장단(長湍)의 옛 이름)의 지역에서만 여남(汝南) 땅 제현(諸賢)의 풍도를 간직하고 있다 하겠는가. 그러나 이곳은 동쪽으로 광천(廣川)을 쳐다보면 말에서 내려 경의(敬意)를 표하던 언덕이 어제 일처럼 서 있고, 남쪽으로 여악(廬岳)을 바라보면 소를 타고 다니던 골짜기가 아직도 새롭기만 하다. 이 때문에 이곳의 산천이 더욱 신령스러운 빛을 발하고 고을의 풍속이 지금까지 바르게 유지되고 있다 할 것이니, 용문(龍門)의 남은 운치를 지금도 맛볼 수가 있고 녹동(鹿洞)의 유허지를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덕을 높이고 현인을 숭상하는 일이야말로 온 나라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긍지로 여길 줄 아는 바라고 하겠으나, 사당을 세우고 서원을 설립하는 일이야말로 향리인 이곳에서 추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가(朝家)에서도 이 일을 듣고 기뻐하며 한 목소리로 칭찬하는 가운데, 다사(多士)가 자신의 있는 힘을 모두 기울여서 이 일에 종사하기에 이르렀다.
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물이 포근히 감싸고 있으니 그 형세가 음양(陰陽)의 도리에 합치된다 할 것이요, 토질이 단단하고 재목도 훌륭하니 건물을 세우는 규모가 두루 갖추어졌다 할 것이다. 깊고 그윽한 곳에 정적(靜寂)의 기운이 감돌고 보면 밝은 신령들이 안식을 취하기에 충분하고, 이곳에 머물러 노닐면서 공부하면 학업의 발전도 충분히 도모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일을 일컬어서 땅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빛나게 되는 경우라고 할 것이니, 옛날과 지금이 다르게 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으리요. 이에 학도들의 기뻐하는 노랫소리를 채집하여 들보를 올리는 일에 힘을 보태는 찬가를 함께 지어 올리려 한다.
들보 동쪽에다 떡을 던지세나 / 抛梁東
한 줄기 맑은 물이 옥 무지개로 둘러쌌네 / 一派澄泓繚玉虹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던 옛 생각이 절로 나니 / 自有浴沂遺想在
봄 깊을 때 봄옷 입고 봄바람 한번 맞으시라 / 春深春服試春風
들보 남쪽에다 떡을 던지세나 / 抛梁南
백 자로 솟은 바위산이 푸른 못 옆에 멈춰 섰네 / 百尺巖阿逗碧潭
고운 해에 다순 바람 조망하기에 적격인데 / 麗日和風宜眺望
어촌의 저잣거리 역시 산안개를 띠었구려 / 漁村水市帶煙嵐
들보 서쪽에다 떡을 던지세나 / 抛梁西
산 너머엔 맑은 강물 강물 위로는 둑길이라 / 山外淸江江上堤
이곳의 진짜 의취 알아보고 싶으시오 / 欲辨此間眞意趣
가을 그늘 말끔히 갠 석양의 저 해를 한번 보소 / 秋陰淨盡夕陽低
들보 북쪽에다 떡을 던지세나 / 抛梁北
눈 속에 솟은 저 봉우리 북두(北斗)를 받쳤구려 / 雪裏危峯撑斗極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아 오를 수가 없나니 / 仰止彌高不可攀
고절(高絶)한 저 기상을 마음에 깨달으시기를 / 巖巖氣像須心得
들보 위쪽에다 떡을 던지세나 / 抛梁上
태사도 그 당시에 천문(天文)을 아뢰었더라오 / 太史當年奏星象
규벽의 남은 빛이 지금까지도 밝은지라 / 奎壁餘輝動至今
사방에서 유자(儒者)들이 뒤질세라 모여드네 / 侁侁紳佩爭環向
들보 아래에다 떡을 던지세나 / 抛梁下
평야 지대 접한 역로(驛路) 활줄처럼 뻗쳤어라 / 官道如絃界平野
임금님 계신 장안 땅 길을 잃을 리 있겠는가 / 日下長安去不迷
왕래하는 이 누구신고 나루터 아는 이들일세 / 往來誰是知津者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 선비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알고 마을 사람들은 선(善)을 행하는 일이 습관으로 굳어졌으면 한다. 그리고 문장과 도덕은 옛 철인을 부여잡고서 함께 귀결(歸結)되도록 해야 할 것이요, 격치(格致)와 성수(誠修) 역시 선현의 가르침을 우러르며 그분들을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래로는 사람의 일을 배우고 위로는 하늘의 이치를 통달해야 할 것이니[下學上達], 그 근원의 샘물은 아무리 퍼내어도 마르지 않을 것이요, 즐거움은 뒤에 하고 근심은 먼저 할 것이니, 소박하게 짚신을 신고 가서 허물이 없게 되도록[素履往而無咎]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향불을 피우면서 공경하는 마음을 바치게 되면 선현들이 흐뭇하게 여겨 가득 채우면서 강림(降臨)할 것이요, 사람들 역시 이 건물을 바라보노라면 감회가 더욱 일어나면서 외경(畏敬)하는 마음이 더욱 솟구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사문(斯文)이 바로 여기에서 떨쳐 일어나게 될 것이니, 우리 유자(儒者)들은 부디 이 점을 명심하여 힘쓸지어다.
[주-D001] 역복(棫樸) : 무성한 백유나무 떨기라는 말로,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인데,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현인(賢人)이 많이 배출되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주-D002] 문정(文貞) : 고려 후기의 학자인 안축(安軸)의 시호(諡號)이다.[주-D003] 죽계(竹溪) : 순흥(順興)의 옛 이름으로, 순흥 안씨인 안향(安珦)을 가리킨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역시 그곳에 위치하여 안향을 향사(享祀)하였는데, 그 이름을 죽계서원이라고도 한다.[주-D004] 유항(柳巷) : 고려 말의 문신인 한수(韓脩)의 호로, 이색(李穡)과도 교분이 깊었다.[주-D005] 비궁(匪躬)의 절조 : 신하가 왕에게 직간(直諫)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건괘(蹇卦) 육이효(六二爻)의, “왕의 신하가 절뚝거리는 것은 자기 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라의 일 때문이다.[王臣蹇蹇 匪躬之故]”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주-D006] 조슬(造膝)의 계책 : 조슬은 무릎을 서로 맞댈 정도로 가까이 대면한다는 말로, 왕과 신하가 서로 속마음을 토로하면서 은밀히 계책을 정하는 것을 뜻한다.[주-D007] 목옹(牧翁) :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가리킨다.[주-D008] 규벽(奎壁) : 28수(宿)에 속하는 규수(奎宿)와 벽수(壁宿)로서,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성좌(星座)로 일컬어져 왔다.[주-D009] 모재(慕齋) 형제 :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이다. 그의 동생은 김정국(金正國)으로 호가 사재(思齋)이다.[주-D010] 버드나무 …… 숙자(叔子) : 숙자는 송유(宋儒)인 정호(程顥)의 동생 정이(程頤)를 가리키는데, 어느 날 강(講)을 마치고 아직 물러나오지 않았을 때, 나이 어린 철종(哲宗)이 무심코 버드나무 가지를 꺾는 것[折柳枝]을 보고는, “바야흐로 봄이 되어 생명을 싹 틔우는 이때에 아무 까닭 없이 꺾어서는 안됩니다.[方春發生 不可無故摧折]”라고 진언한 고사가 전한다. 《宋元學案 卷15 伊川學案》[주-D011] 감당나무 …… 소백(召伯) : 주 무왕(周武王) 때 소공 석(召公奭)이 서백(西伯)이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어느 날 감당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였는데[憩于甘棠之下], 백성들이 이를 기념하여 감당(甘棠)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詩經 召南 甘棠 序》[주-D012] 격탁양청(激濁揚淸) : 탁류를 밀어 내보내고 청류(淸流)를 끌어올린다는 뜻으로, 악을 제거하고 선을 장려하는 것을 말한다.[주-D013] 갱금알옥(鏗金戞玉) : 금석이나 옥돌이 서로 부딪쳐 쟁그랑 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문장의 표현이 비범한 것을 말한다.[주-D014] 여남(汝南) 땅 제현(諸賢) : 중국 여남 출신인 후한(後漢)의 범방(范滂), 진번(陣蕃) 등과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 주돈이(周敦頤) 등의 현인들을 가리킨다.[주-D015] 용문(龍門)의 …… 하겠다 : 선현의 자취가 여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말이다. 용문은 덕망이 높은 현인의 저택을 말하고, 녹동(鹿洞)은 주희(朱熹)가 강학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말한다.[주-D016] 옥 무지개 : 휘감고 도는 물을 표현하는 시어(詩語)이다. 소식(蘇軾)의 시에, “산은 푸른 물결로 솟아오르고, 물은 옥 무지개로 흘러내리네.[山爲翠浪湧 水作玉虹流]”라는 표현이 보인다. 《蘇東坡詩集 卷80 鬱孤臺》[주-D017] 봄 깊을 때 …… 맞으시라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고 자신의 뜻을 말하자, 공자가 찬탄하며 허여했던 고사가 전한다. 《論語 先進》[주-D018] 우러러볼수록 …… 없나니 : 선현(先賢)을 숭상하며 앙모(仰慕)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차할(車舝)에, “높은 뫼를 우러르며 큰길로 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이 나온다.[주-D019] 규벽(奎璧) : 28수(宿)에 속하는 규수(奎宿)와 벽수(壁宿)로서,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이다.[주-D020] 나루터 아는 이들 : 공자를 숭상하는 이들, 즉 유자(儒者)를 가리킨다. 자로(子路)가 공자의 명을 받들고 나루터의 위치를 물었을 때, 숨어 사는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당신의 선생은 나루터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是知津矣]”고 대답한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論語 微子》[주-D021] 격치(格致)와 성수(誠修) :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格物)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수신(修身) 등 팔조목(八條目)을 가리킨다.[주-D022] 아래로는 …… 것이니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나오는 말이다.[주-D023] 즐거움은 …… 것이니 :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한 뒤에야 내가 그 다음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는 말이 나온다.[주-D024] 소박하게 …… 것이다 : 《주역(周易)》 이괘(履卦) 초구(初九)에 나오는 말인데, 소박하고 청백(淸白)한 생활 태도를 강조하는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택당집(澤堂集) 이식(李植)생년1584년(선조 17)몰년1647년(인조 25)자여고(汝固)호택풍당(澤風堂)본관덕수(德水)시호문정(文靖)특기사항조선 중기 문장(文章) 사대가(四大家)의 한 사람
澤堂先生別集卷之十二 / 上樑文 澤風堂上樑文見澤風志 / 長湍鳳岑晦軒書院上樑文
庠序設而山院之學興。俎豆始而鄕賢之祀廣。仰先賢大鳴於二代。伊隩區測近於兩京。美哉薰德之鄕。嵬然揭虔之所。惟昔晦軒夫子。蔚爲海東儒宗。闢邪距詖。薙蓁蕪於箕甸。興學養士。盛棫樸於璧宮。衛道之勤。由於聞道之早。尊聖之篤。本於希聖之誠。若文貞嗣竹溪之淵源。而儒雅有柳巷之繼作。忠勤孝友。自家而推。政術詞華。惟器是適。勵匪躬之操則金石比誠。陳造膝之謀則蓍蔡讓智。俱標方冊。大闡風猷。矧當麗末之荒屯。乃見牧翁之挺特。純忠亮節。矯鳳鸞於崑岡。邃學宏詞。森壁奎於霄漢。屹狂瀾之砥柱。嚴大冬之雪松。逮我鮮文運休明。在己卯士類彬蔚。惟慕齋伯仲之竝出。䀈自菴師友之同時。折柳進規。幾多叔子之啓沃。憩棠布政。咸頌召伯之旬宣。激濁揚淸。氷雪其操。鏗金戛玉。黼黻其文。雖經濟不究於當年。卽聲烈丕振於來世。夫何臨湍百里之地。獨有江南諸賢之風。東瞻廣川。下馬之陵如昨。南望廬岳。騎牛之谷尙新。山川於焉炳靈。風俗猶夫爾雅。龍門之餘韻不昧。鹿洞之頹址可尋。崇德尙賢。自國人皆知矜式。建祠設院。在鄕里尤切追思。朝家樂聞而同聲。多士畢力以將事。山環水抱。面勢協於陰陽。土剛村良。營搆合乎矩度。幽深岑寂。足以妥明靈。游息藏修。足以廣學業。是謂地以人勝。孰云古與今殊。輒採胄子之歡謠。共贊兒郞之善頌。抛梁東。一派澄泓繚玉虹。自有浴沂遺想在。春深春服試春風。抛梁南。百尺岩阿逗碧潭。麗日和風宜眺望。漁村水市帶煙嵐。抛梁西。山外淸江江上堤。欲辨此間眞意趣。秋陰淨盡夕陽低。抛梁北。雪裏危峯撑斗極。仰止彌高不可攀。巖巖氣像須心得。抛梁上。太史當年奏星像。奎壁餘輝動至今。侁侁紳佩爭環向。抛梁下。官道如絃界平野。日下長安去不迷。往來誰是知津者。伏願上樑之後。士知向方。鄕習爲善。文章道德。攀往哲而同歸。格致誠修。仰先訓而爲的。下學上達。眞源酌而不窮。後樂先憂。素履往而無咎。依香火而展敬。降格洋洋。瞻棟宇而增懷。顒昂惕惕。斯文不違是矣。吾黨尙愼旃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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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 제53권 / 기(記) / 임강서원 강당 중수기〔臨江書院講堂重修記〕
우리나라에 서원이 생긴 것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백운동은 바로 회헌(晦軒) 안 문성공(安文成公)이 살던 곳인데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하고 퇴계(退溪) 이 선생이 경영한 곳이다. 내가 옛날에 순흥부(順興府)를 지날 때 서원을 방문하였는데, 원노(院奴)가 검정 유건과 유생의 복장인 청금(靑襟)을 주고 계단 아래에 자리를 깔고 난 뒤에 문을 열어 주었다. 인도한 대로 자리에 이르러 읍하고 몸을 펴니, 원노가 대야를 올리고 조금 물러났고, 나는 물을 부어 손을 씻은 다음 계단을 올라가 정문(正門)을 통해 들어가 향(香) 한 자루를 올리고 협문(夾門)으로 나와서 다시 자리에 이르러 재배(再拜)하고 물러났다. 이것은 모두 이 선생이 헤아려 정한 것이라 하였다. 이때에 도학의 진원(眞源)을 찾아 유풍(遺風)을 사모하여 평생의 큰 소원을 흡족히 풀었으니, 20년이 되었지만 거의 꿈속에서도 잊지 못하였다.
지난번에 윤사문(尹斯文) 세익(世翊)이 편지를 부쳐 이르기를, “지금 장단부(長湍府)의 지경은 실로 문성공(文成公)의 묘소가 있는 곳입니다. 유생들이 뜻을 합하여 임진강(臨津江) 상류에 사당을 세우고 이어서 목은(牧隱) 이 선생,모재(慕齋) 김 선생,사재(思齋) 김 선생을 배향하였으니, 이곳이 이분들의 묘소가 있거나 한때 계시던 곳이어서 모두 선비들이 존경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당이 이루어지자 조정에 청하여 조정에서 임강서원(臨江書院)이란 편액을 내려 주어 포장(褒獎)하였습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장단에 임강서원이 있음을 안 지 거의 100년이나 되었는데 당우(堂宇)가 퇴락함을 면치 못하였기에, 이제 물력을 내어서 새롭게 하되 한결같이 옛 제도대로 하고 옆에 방 하나를 지어서 나의 여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으니, 그대가 기문을 지어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공이 뜻은 간절하고 일은 부지런하니, 사학(斯學)과 사도(斯道)에 도움이 될 것이다. 듣건대, 문성공은 우리나라 유학(儒學)의 비조로서, 그 이전에는 언행(言行)과 풍지(風旨)가 매우 드러난 사람이 없었고 그 뒤로는 사람들이 후학을 흥기하고 고무하는 데 공이 남긴 사업을 깃발로 삼아 따랐다. 그렇다면 문성공은 바로 동방의 공자이고 순흥(順興)은 창평(昌平)이며 장단은 사상(泗上)이니,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것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세 분 선생을 함께 제사한다면 그 도(道)가 더욱 빛나서 일에 유감이 없을 것이다.
무릇 서원은 민간에서 시작되었으면서 공무(公務)와 관계되어, 선비가 서책을 간직하고 학업을 익히는 것을 반드시 이곳에서 한다. 옛날엔 대학(大學)을 두면 반드시 소학(小學)을 두었는데 도성의 서교(西郊)에 있는 것을 우상(虞庠)이라 하니, 주(周)나라 사람은 서학(西學)이라고 일컬었다. 학교가 있으면 또한 반드시 존숭(尊崇)하는 사람이 있으니, 《주례(周禮)》에 “무릇 도(道)가 있는 이와 덕(德)이 있는 이가 죽으면 악조(樂祖)로 삼아 고종(瞽宗)에서 제사 지낸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중앙 학교의 설비는 대략 갖추어졌지만 지방의 상숙(庠塾)은 설립되지 않아서 가르침이 근본이 없고, 학제에 구애되어 추세는 오히려 갈수록 수준이 낮아졌다. 그러므로 뜻있는 선비가 반드시 한적한 곳을 골라서 도를 강학할 장소를 마련하면, 국가가 따라서 권장하고 도와주었으며 마침내 서학의 예를 따라서 선현을 제사하도록 허락하여, 우리 제자들이 그곳에서 즐거이 학문을 기르고 자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옛 법도를 따르고 지금에도 알맞아서 도움되는 바가 실로 많았으니, 서원이 마침내 국중에 성하게 된 이유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길을 향해 나아가네.” 하였는데, 공자가 찬탄하여 말하기를, “시(詩)에서 인(仁)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中道)에 쓰러지더라도 몸이 늙는 것을 잊고서 그에 힘써 날로 부지런히 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하였다. 이것이 학문을 하고 마음을 보존하는 절도이니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이 당에 오르는 사람은 서까래를 우러러보고 궤연을 굽어보며 네 선생의 유열(遺烈)을 흠모하여 스스로 분발한다면 덕을 향상하고 학업을 닦는 방도와 몸가짐을 진중히 하는 의리에 있어서 절로 공부를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서원을 설립하고 선비를 대우하는 본의(本意)이다. 그 훈계와 규정은 퇴계 이 선생이 이미 자세히 지어 놓았다. 혹 잘난 체하며 거들먹거리는 것은 안상(安瑺)에게 준 편지에 말하였고, 활달하여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기절(氣節)을 중시하는 것은 김경언(金慶言)에게 준 편지에 말하였고, 자신이 늘 품고 있는 뜻을 지켜 나가고 학업을 익히며 덕을 함양하고 인(仁)을 완전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것은 심통원(沈通源)에게 준 편지에 말하였다. 이것은 또 백운동서원의 고사(故事)이니, 후인들이 이어받아 진귀한 보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 청컨대, 그와 같이 하여 이로써 게시해 놓아 선비들에게 본보기로 삼도록 한다면, 선한 사람은 분발할 줄 알 것이고 불선한 사람은 경계할 줄 알 것이다. 이것이면 이미 다하였으니, 어찌 감히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겠는가.
[주-D001] 목은(牧隱) 이 선생 : 이색(李穡, 1328~1396)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이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27세에 원나라 전시에 합격하였다. 귀국 후 개혁 정치와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장단(長湍)은 이색이 말년에 유배되어 머물던 곳인데 임강서원(臨江書院)에 이색의 영정을 안치하였다고 한다.[주-D002] 모재(慕齋) 김 선생 :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자 사림파의 지도자로서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불린다.[주-D003] 사재(思齋) 김 선생 :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이다. 본관은 의성,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이다. 김안국의 동생으로 함께 기묘명현이 되었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며 장단(長湍) 지역의 학풍을 권장하였다.[주-D004] 창평(昌平)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창평현(昌平縣)은 공자가 태어난 곳이다. 여기서는 안향의 본관이 순흥(順興)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05] 사상(泗上) : 사상은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강학(講學)하던 곳이다. 여기서는 장단 지역이 안향(安珦)이 활동하던 곳이고 또 그의 묘소가 있으므로 공자가 강학하던 사상에 비긴 것이다.[주-D006] 도성의 …… 일컬었다 : 《예기주소(禮記注疏)》 〈제의(祭義)〉에 “서학을 주나라의 소학이라고 한 것은 우상을 두고 말한 것이다.〔西學周之小學也者 謂虞庠也〕”라고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선현을 제사하여 덕을 높이는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주-D007] 무릇 …… 지낸다 : 《주례》 〈춘관종백 하(春官宗伯下)〉 대사악조(大司樂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악조(樂祖)로 삼는다는 것은 그가 죽으면 악의 시조로 삼아 신으로 여겨 제사한다는 것이다. 고종(瞽宗)은, 고(瞽)가 악인(樂人)이라는 뜻이므로 악인들이 함께 종주(宗主)로 여기는 대상이라는 의미도 있고, 은(殷)나라의 학궁(學宮)이라는 풀이도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서원 내에서 선현을 제사한다는 의미로 쓰였다.[주-D008] 높은 …… 나아가네 : 《시경》 〈거할(車舝)〉에 나오는 구절이다. 모시서(毛詩序)에서는 주(周)나라 대부가 유왕(幽王)을 풍자한 시로, 어진 여인을 얻어 군자에 짝하기를 생각한 시라고 하였는데, 후에는 올바른 도를 경모하여 그에 힘쓰는 것을 의미하는 구절로 많이 인용되었다.[주-D009] 시(詩)에서 …… 것이다 : 《예기》 〈표기(表記)〉에 나오는 말이다. 본문에는 “시에서 인(仁)을 좋아함이 이와 같다.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中道)에 쓰러지더라도 몸이 늙는 것을 잊고 햇수가 부족하다는 것도 모르고 힘써서 날로 부지런히 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라고 하여 한 구절이 더 있다.[주-D010] 안상(安瑺)에게 준 편지 : 안상은 안향의 자손으로, 1556년(명종11) 당시 영천 군수(榮川郡守)를 맡고 있었다. 당시 백운동서원의 유사였던 김중문(金仲文)이 거만하게 굴며 유생들을 멸시하여 다툼이 일어나자, 유생들이 모두 서원을 떠나고 이 일이 확대되어 조정의 추문(推問)이 있기까지 하였다. 이 편지는 김중문을 신임하여 두둔하던 안상에게 김중문을 내치고 유생들을 회유해 불러들일 것을 권유한 내용이다. 《퇴계집》 권12 〈소수서원의 일을 논하여 영천 군수에게 주려던 편지〔擬與榮川守論紹修書院事〕〉에 실려 있다.[주-D011] 김경언(金慶言)에게 준 편지 : 김경언이 1557년 당시 풍기 군수(豐基郡守)를 맡고 있었는데, 서원에 마음 내키는 대로 활달하게 구는 형제와 호기를 부리고 남을 잘 꾸짖는 형제가 있어 다른 선비들이 그를 따른다는 말을 들은 퇴계가 서원의 선비들이 몸가짐을 진중히 하고 관리를 욕보이는 일이 없게 훈육하도록 김경언에게 당부한 내용이다. 《퇴계집》 권12 〈서원의 일을 논하여 풍기 군수에게 주려던 편지〔擬與豐基郡守論書院事〕〉에 실려 있다.[주-D012] 심통원(沈通源)에게 준 편지 : 퇴계가 풍기 군수로 있던 1549년에 당시 관찰사였던 심통원에게 서원의 서적 및 재정적 지원을 청한 편지인데 서원의 유래와 역할 및 기능, 운영 방향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여 서원에 대해 논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편지이다. 《퇴계집》 권9 〈심 방백에게 올리는 편지〔上沈方伯〕〉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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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전집(星湖全集) 이익(李瀷)생년1681년(숙종 7)몰년1763년(영조 39)자자신(子新)호성호(星湖)본관여주(驪州)특기사항근기(近畿) 실학파(實學派)
星湖先生全集卷之五十三 / 記 / 臨江書院講堂重修記
我國之有書院。自白雲洞始。洞卽晦軒安文成公故居也。周愼齋世鵬刱設之。而退溪李先生之所經紀也。瀷昔過順興府。訪至院。
院奴授以墨巾靑襟。設席階下。然後開門。導至席。拱揖平身。進盥少退。沃盥升階。由正門入上香一炷。出自夾門。復至席再拜退。此皆李先生之所商定云。
于斯時也。泝洄眞源。悅慕遺風。恰慰平生大願。廿載歸來。殆夢想不離矣。乃者尹斯文世翊有寄書來云今長湍府界。實文成公墓道在焉。儒紳合志建祠於臨津上游。因以牧隱李先生,慕齋金先生,思齋金先生配食。或其衣冠所藏。杖屨所及。而俱爲土人之思仰也。祠成請于朝。朝賜臨江之額以顯褒之。於是國人知長湍有臨江書院者。殆近百年之久。而堂宇未免頹剝。今也出力剗新。一如舊貫。旁築一室。爲終吾殘年之計。子試爲記。余謂公之志則摯矣。事則勤矣。庶幾於斯學斯道矣。蓋聞文成爲東方儒學之祖。前乎此而有人。言爲風旨。未甚著也。後乎此而有人。興動來學。旆乎其餘緖也。然則文成卽東人之魯夫子。而順興爲昌平。長湍爲泗上。祠以祝之。其可但已哉。而况有三先生爲之餟享。則其道益光。而事無遺憾矣。夫書院者起于閭巷。而關于官政。士之藏書習業。必於是在焉。古者有大學則必有小學。在國之西郊曰虞庠。周人謂之西學。有學亦必有所尊。禮所謂凡有道者。有德者死爲樂祖。祭於瞽宗是也。今之時學校之設略備。而庠塾不立。敎爲無本。學制有拘。趨尙每下。故有志之士。必擇屛閑之地。爲講道之所。國家因以勸相之。遂遵西學之禮。許祀先賢。使吾黨諸子樂育而自適焉。是則倣諸古愜諸今。裨益實多。而書院所以遂盛於國中也。詩云高山仰止。景行行止。夫子贊之曰詩之好仁如此。嚮道而行。中道而廢。忘身之老也。勉焉日有孶孶。斃而後已。此爲爲學存心節度而無餘法也。登斯堂者仰瞻榱桷。俯覽筵几。羹牆乎四先生之遺烈。而有以自奮。則其於進修之方。自重之義。有不能自已者。此則設院待士之本意也。其戒訓程規。退溪李先生旣嘗備著。或倨傲鮮腆則與安瑺書言之。任達尙氣則與金慶言書言之。求志肄業。畜德熟仁。則與沈通源書言之。此又白雲洞故事。而後人受以爲拱璧者也。今請擧以似之。用此標揭。矜式乎多士。善者知厲。不善者知戒。斯已盡之。其敢贅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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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강서원(臨江書院)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22임 | |
안향, 이색, 김안국, 김정국 | |
1650년(효종1년) | |
1694년(숙종20년) | |
미복설 | |
원래 장단군에 속해있었으나 수복지 행정구역 변경으로 연천군에 소속되었다. 고랑포리에서 민통선 통제 초소를 지나 260m 정도가면 우측으로 소로가 나온다 그 소로를 따라 250m 정도 가면 도로 우측으로 완만한 경사면에 있는 임강서원지에 이르게 된다. 현재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고, 서원의 초석이나 석재들은 확인되지 않으며 와편이 산재해 있을 뿐이다. 민통선 지역으로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은 지역이다. 임강서원은 인조 때 창건된 鳳岑書院을 모태로 하여 1650년(효종 1)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임강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694년(숙종 20)에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毁撤되었다. 『長湍誌』의 기록에 따르면 사우와 강당 등의 부속건물로 구성되었다고 전하며 安裕(1243~1306)를 主享으로 하여 李穡(1328~1396)과 金安國(1478~1543), 金正國(1485~1541) 등의 3인을 配享하였다고 한다. 서울 근교에서 가장 많은 유생을 배출한 서원으로 유명하다. | ||
1) 안향(安珦)1243년(고종 30)∼1306년(충렬왕 32). 고려시대의 명신(名臣)‧학자.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자였으므로, 이를 피하여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회헌(晦軒)인데, 이는 그가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1) 가계 밀직부사 안부(安孚)의 아들로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의 죽계(竹溪) 상평리(上坪里)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2) 관직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校書郞)이 되고, 이어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의 난 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1272년 감찰어사가 되었다. 강화탈출로 인하여 그는 새삼 원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민풍(民風)을 쇄신시키려 노력하였고,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郞)‧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고려는 충렬왕대에 와서는원나라의 완전한 속국이 되어 관제도 고쳤을 뿐만 아니라, 원나라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을 고려에 두었는데, 1289년 2월에 그는 이 정동행성의 원외랑(員外郞)을 제수받았다. 얼마 뒤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이 되고, 또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3) 주자학 수입 같은해 11월에 왕과 공주(원나라 공주로서 당시 고려의 왕후)를 호종하고,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가지고 이듬해 돌아왔으며, 3월에 부지밀직사사가 되었다. 1294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에 출진하였고, 이어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같은해 12월에 지밀직사사, 다시 이듬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옮기고,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12월 집 뒤에 정사(精舍)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의하여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를 세우니, 그가 바로 충선왕인데, 즉위하자 관제를 개혁하여 그는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동경유수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兼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같은해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갔다. 바로 이해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었는데, 이듬해 수국사가 되고, 이어 1300년 광정대부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오르고, 얼마 뒤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4) 유교적 제도정비 1303년 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어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제자(諸子)‧사서(史書)‧주자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식으로 인재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같은해 12월에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郞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이듬해 5월에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박사(博士)를 두어 그 출납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육영재단과 성격이 같은 것으로서 당시에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그리고 같은해 6월에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해에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하였다. 1306년 9월 12일 64세로 죽었다. 왕이 장지(葬地)를 장단 대덕산에 내렸다. (5) 화상 제작과 서원배향 1318년(충숙왕 5) 왕이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궁중의 원나라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화상은 이것을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이듬해 문묘에 배향되었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이듬해 8월에는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그곳에 세웠는데,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43년(인조 21) 장단의 유생들이 봉잠산(鳳岑山) 아래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것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이다. 이 두 서원과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에 제향되었다. (6) 업적 당시 원나라에서의 주자학의 보편화와 주자서의 유포 등에 따른 영향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왕래하여 그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또 직접 주자서를 베껴오고, 주자학의 국내보급을 위하여 섬학전을 설치하는 등 제반 노력을 경주하였다. 한번은 그가원나라에 들어가 그곳의 문묘에 참배할 때에, 그곳의 학관(學官)이 “동국(東國)에도 성묘(聖廟: 文廟)가 있소?” 하고 묻자 그는 “우리나라도 중국과 똑같은 성묘가 있소.” 하고 답하였다 하며, 또 그들과 문답하는 가운데 그가 주자학에 밝은 것을 안 그곳의 학관들이 ‘동방의 주자’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하여진다. 주자학이 성행한 당시 남송(南宋)의 사정이 원나라라는 이민족의 침입 앞에 민족적 저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고 있었던 때라면, 당시 고려 후기의 시대상황 역시 이와 비슷하게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을 때였다. 이러한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의한 명분주의의 정신, 그리고 불교보다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修養論) 등의 특성을 지닌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이상을 그는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 하였다. 그가 당시 고려의 시대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하고 고려의 위기를 구하려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제반 교육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2) 이색(李穡)1328년(충숙왕 15)∼1396년(태조 5).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조부는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이며, 부친은 찬성사 이곡(李穀)이다. 외조부는 함창김씨(咸昌金氏) 김택(金澤)이고, 처부는 권중달(權仲達)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문인이다. (1) 출사 및 관직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진사가 되고, 1348년(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년(충정왕 3)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사관편수관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郞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郞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郞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하여 1등공신이 되었다. 그뒤 좌승선‧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보문각과 예문관의 대제학 및 판개성부사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년(우왕 1) 우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하였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2) 고려말 창왕옹립과 유배 1389년(공양왕 1)위화도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을 옹립, 즉위하게 하고, 판문하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李成桂)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일파가 세력을 잡게 되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초(彝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으나 수재(水災)로 함창에 안치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하여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관련하여 금주(衿州)로 추방되었다가 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년(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3) 사상과 학문 그는 원‧명교체기에 있어서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말 신유학의 수용과 척불론의 대두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王建) 때의 중흥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의 폐단시정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여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에 의하여 불교폐단 방지를 이루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여부로 판단하는 인간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인 유교역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을 하며, 저서에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3) 김안국(金安國)1478년(성종 9)∼1543년(중종 38). 조선시대 문신‧학자.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본관은 의성(義城). 참봉 김연(金連)의 아들이며, 김정국(金正國)의 형이다. 조광조(趙光祖)‧기준(奇遵) 등과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至治主義) 사림파의 선도자가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생진과에 합격, 1503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었으며, 이어 박사‧부수찬‧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7년(중종 2)에는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지평‧장령‧예조참의‧대사간‧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어 각 향교에 《소학》을 권하고, 《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정속언해(正俗諺解)》 등의 언해서와 《벽온방(薜瘟方)》‧《창진방(瘡疹方)》등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1519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죽음을 당할 때, 겨우 화를 면하고 파직되어 경기도 이천에 내려가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1532년에 다시 등용되어 예조판서‧대사헌‧병조판서‧좌참찬‧대제학‧찬성‧판중추부사‧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하였으며, 1541년 병조판서 때에 천문‧역법‧병법 등에 관한 서적의 구입을 상소하고, 물이끼〔水苔〕와 닥〔楮〕을 화합시켜 태지(苔紙)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하였다. 사대부출신 관료로서 성리학적 이념에 의한 통치의 강화에 힘썼으며, 중국문화를 수용, 이해하기 위한 노력에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으로도 명성이 있었으며 대제학으로 죽은 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여주의 기천서원(沂川書院)과 이천의 설봉서원(雪峰書院) 및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모재집》‧《모재가훈(慕齋家訓)》‧《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 있고,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성리대전언해(性理大典諺解)》‧《농서언해》‧《잠서언해》‧《여씨향약언해》‧《정속언해》‧《벽온방》‧《창진방》 등이 있다. 4) 김정국(金正國)1485년(성종 16)∼1541년(중종 36).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부친은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김연(金璉)이며, 모친은 양천허씨(陽川許氏)로 군수 허지(許芝)의 딸이며, 김안국(金安國)의 동생이다.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향(趙有享)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년(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이조정랑‧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37년에 복직, 다음해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수십조에 달하는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그뒤 병조참의‧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성리학과 역사‧의학 등에 밝았다. 문인으로는 정지운(鄭之雲) 등이 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용강(龍岡)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을 비롯하여,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역대수수승통입도(歷代授受承統立圖)》‧《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기묘당적(己卯黨籍)》‧《사재척언(思齋摭言)》‧《경민편(警民篇)》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 ||
임강서원지만 남아있슴(*민통선지역) | ||
임강서원 중수문 我國之有書院。自白雲洞始。洞卽晦軒安文成公故居也。周愼齋世鵬刱設之。而退溪李先生之所經紀也。瀷昔過順興府。訪至院。院奴授以墨巾靑襟。設席階下。然後開門。導至席。拱揖平身。進盥少退。沃盥升階。由正門入上香一炷。出自夾門。復至席再拜退。此皆李先生之所商定云。于斯時也。泝洄眞源。悅慕遺風。恰慰平生大願。廿載歸來。殆夢想不離矣。乃者尹斯文世翊有寄書來云今長湍府界。實文成公墓道在焉。儒紳合志建祠於臨津上游。因以牧隱李先生,慕齋金先生,思齋金先生配食。或其衣冠所藏。杖屨所及。而俱爲土人之思仰也。祠成請于朝。朝賜臨江之額以顯褒之。於是國人知長湍有臨江書院者。殆近百年之久。而堂宇未免頹剝。今也出力剗新。一如舊貫。旁築一室。爲終吾殘年之計。子試爲記。余謂公之志則摯矣。事則勤矣。庶幾於斯學斯道矣。蓋聞文成爲東方儒學之祖。前乎此而有人。言爲風旨。未甚著也。後乎此而有人。興動來學。旆乎其餘緖也。然則文成卽東人之魯夫子。而順興爲昌平。長湍爲泗上。祠以祝之。其可但已哉。而况有三先生爲之餟享。則其道益光。而事無遺憾矣。夫書院者起于閭巷。而關于官政。士之藏書習業。必於是在焉。古者有大學則必有小學。在國之西郊曰虞庠。周人謂之西學。有學亦必有所尊。禮所謂凡有道者。有德者死爲樂祖。祭於瞽宗是也。今之時學校之設略備。而庠塾不立。敎爲無本。學制有拘。趨尙每下。故有志之士。必擇屛閑之地。爲講道之所。國家因以勸相之。遂遵西學之禮。許祀先賢。使吾黨諸子樂育而自適焉。是則倣諸古愜諸今。裨益實多。而書院所以遂盛於國中也。詩云高山仰止。景行行止。夫子贊之曰詩之好仁如此。嚮道而行。中道而廢。忘身之老也。勉焉日有孶孶。斃而後已。此爲爲學存心節度而無餘法也。登斯堂者仰瞻榱桷。俯覽筵几。羹牆乎四先生之遺烈。而有以自奮。則其於進修之方。自重之義。有不能自已者。此則設院待士之本意也。其戒訓程規。退溪李先生旣嘗備著。或倨傲鮮腆則與安瑺書言之。任達尙氣則與金慶言書言之。求志肄業。畜德熟仁。則與沈通源書言之。此又白雲洞故事。而後人受以爲拱璧者也。今請擧以似之。用此標揭。矜式乎多士。善者知厲。不善者知戒。斯已盡之。其敢贅焉。 5선생(五先生)을 봉안할 때에 세대와 나이 차이에 따라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의당 고해 주신 말씀대로 해야 할 듯합니다. 묘우(廟宇)가 이미 완성된 뒤에는 즉시 위판(位版)을 봉안하려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곳에다 이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한 중이라서 물력(物力)이 매우 결핍되어 강당(講堂)과 재사(齋舍)를 모두 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봉안하기 하루 전에 위판을 써서 묘신문(廟神門)의 윗계단 처마 아래에 임시로 모셔 두었다가 다음날 새벽에 정위(正位)로 들여 봉안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강당을 만들지 못했으면 차일(遮日)과 병장(屛帳)을 뜰에 설치하고 위판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한데 어떻습니까? 당중(堂中)에 상(牀)을 설치하고 작헌(酌獻)할 때에 향합(香盒) 하나, 향로(香爐) 하나로 각위(各位) 앞에 옮겨 가면서 분향(焚香)을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이를 제자리[故處]에 그대로 두고 한 번만 분향을 해야겠습니까? 촉대(燭臺) 한 쌍은 5위(五位) 전체의 동쪽과 서쪽에 나누어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찍이 태학(太學)의 5성위(五聖位)를 보니, 위마다 향로ㆍ향합을 따로 놓았고 촉대도 위마다 각각 설치하였었습니다. 이곳의 사론(士論) 가운데 혹자는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도 함께 향사해야 한다 하고, 혹자는 5선생의 도통서원(道統書院)에 다시 다른 분에 대한 논의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하니, 두 가지 설이 어떻습니까? 의논하는 자는 또 퇴계 선생(退溪先生)을 아울러 향사하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가장 좋기는 하나, 다만 저쪽 사람들이 첩설(疊設 한 사람을 여러 서원에 향사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지금 이 일을 저지하려 하고 있으니, 혹 이 일 때문에 시끄러운 단서가 일어나서 끝내 일을 그르치는 지경에 이를까 염려됩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체가 중대한 것을 어찌 감히 나의 사견으로 가부를 말하겠습니까. 만일 퇴계 선생을 모시려면 정암 선생(靜菴先生)도 의당 아울러 향사해야 합니다. 대체로 석담(石潭)ㆍ죽림(竹林) 두 서원의 고사가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영남 사람들의 논의가 첩설을 난처하게 여기다고 하니, 남쪽 열읍(列邑)에서 퇴계 선생을 모신 곳이 과연 많다면 비록 이 서원에 아울러 향사하지 않더라도 첨앙(瞻仰)할 곳이 없는 게 걱정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오직 다사(多士)들이 상의하여 처리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중봉 선생의 유적은 귀향(貴鄕)에 있지 않으니, 비록 아울러 향사하지 않더라도 흠 있는 일이 안 될 듯도 싶습니다. 이 또한 다시 상의하여 처리하기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