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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3)
사도 바울의 연륜과 그 겸손함
2023년 ○월 ○일 / 고전 15:9, 엡 3:8, 딤전 1:15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를 여러번에 걸쳐 설교하는 것은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는 강조하지만 겸손과 온유에 대하여는 깊이 마음에 되새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은 분명히 가르치셨다.
마 11:28-29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겸손한 크리스천은 최선의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덕목을 가르치면서 사랑을 먼저 언급하지 않고, 겸손을 제일로 꼽았다(롬 12:1-10). 성령의 열매 안에 겸손과 사랑이 함께 들어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겸손과 온유를 통해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것이다.
겸손에 반대되는 것은 교만이다. 교만은 악덕 가운데 제일 근본이 된다. 교만은 악덕의 어미이다. 크리스천의 겸손은 비굴하거나 굽실거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능력과 자신감에서 나온다. 사람은 자기를 겸손히 낮추기보다는 스스로 높임으로써 상대적으로 남을 업신여기기 쉽다. 그래서 이웃 간에 갈등과 미움과 분쟁을 낳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크고 높으신 분이면서 가장 낮아지셨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시고 죽기까지 겸손하셨다.
○○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 몇 년 전 자기사랑에 대하여 어느 목사님과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난다. 교묘하게 또 애매하게 자기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목사님께 ‘사도 바울뿐 아니라 2천 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희생되었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순교자들 또한 영적 거장들이 한결같이 자신에게서 아무런 가치도 찾지 않았고, 죽는 그 날까지 죄악된 자신의 모습과 씨름했으며, 그런 못난 모습들조차도 받아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했다’라고 역설하였다.
한○○ 목사의 글 /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을 들으면서 교육을 받았고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럴지라도 나는 나이가 들수록 거룩한 사람이 되어간다는 느낌보다는, 죄와 욕망과 교만이 나를 더욱 지배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심지어 어떤 때는 ‘나는 세상의 타락한 인간들과 어떤 차이점 / 구별됨이 있을까? 아니면 똑같은 육체(바사르 / 사르크=타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신앙인의 대선배시오. 대선생이신 바울의 고백으로부터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었다.
■ 사도 바울의 자아 인식의 변하는 모습 /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성숙해져가고 신앙이 더 깊어질수록 그리도스도인의 자아 인식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는 사도 바울을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 있다. 회심 전 바울은 얼마나 율법적으로 완벽한 자였으며 얼마나 종교적으로 열심을 낸 사람이었는지 …. 하지만 회심 후에 성결을 추구하는 바울은 자기 자신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또 ‘사도 중에 가작 작은 자’라고, 또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칭했고, 생애 말년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까지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1. 회심 전 바리새인 시절:
갈 1:13-14 / 유대교를 따르던 때 내가 어떤 인간이었던 가는 여러분도 다 알 것입니다. 나는 무자비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뒤쫓아 다니며 그들을 잡아들이고 박해를 일삼았습니다. 14) 그 당시 내 또래의 동족 가운데에는 나를 따를 자가 없을 만큼 나는 아주 열성적인 유대교도였습니다. 그러니 유대교의 규칙을 지켜나가는 데도 얼마나 열성적이었겠습니까? (빌 3:1-11을 참조)
2. 회심 직후:
고전 15:8-10 /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9) 나는 모든 사도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자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인물이니 사도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10) 그나마 오늘의 내가 있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나는 이 자비와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일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the least of the apostles).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 15:9). 고린도전서는 대개 주후 53~56년에 에베소에서 기록하였다. 이때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겸손 정도를 사도들과 비교해서 고백하였다. 사도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특히 과거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였던 것을 고려한다면, 감히 사도라고 칭함 받기를 감당할 수 없다는 표현이다.
3. 회심 후 조금 더 성숙한 사도가 되었을 때:
엡 3:8-9 / 생각해 보십시오. 나야말로 그런 일을 할 만한 자격도 없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가장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내가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보화를 이방인들에게도 나누어 주신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9)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세상을 세운 계획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설명하기 위해 나를 쓰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였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the very least of all saints)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엡 3:8). 에베소서(=옥중서신)는 대략적으로 주후 60~62년에 로마 감옥에서 기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앞의 고린도전서를 기록할 때보다 약 5~6년 후에 이런 고백을 하였다. 이때 바울은 자기의 겸손의 정도를 동료 사도들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비교해서 말할지라도, 더욱 작은 자에 지나지 않은 자신에게 이방인 전도자의 직분을 주셨다고 고백하였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과분한 직분을 받았다는 고백이다.
4. 생애 말년
딤전 1:15-17 /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누구나 다 이 사실을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 중에서도 큰 죄인이었습니다. 16) 그런 내게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크나큰 관용으로 감싸주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나 같은 것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7) 영광과 존귀가 하나님께 영원무궁토록 함께 하소서!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며 결코 죽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일한 분입니다. 아멘.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런 고백을 하였다. ‘미쁘다 …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들 중에서 내가 괴수니라(=the worst of all sinners).’(딤전 1:15) 디모데전서는 대략 주후 63년에 기록되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겸손 정도를 동료 사도들도 아니요, 모든 성도들도 아니요, 모든 죄인들과 비교하여 말하고 있다. 그 죄인들 중에서도 가장 악한 자라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떠올리니, 죄인으로서 감당할 길이 없다는 표현이다.
결국은 우리가 아무리 귀중한 직분자라고 해도 하나님 앞에 한평생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로 육체를 벗기(=떠나기) 전까지 결코 죄의 짐을 벗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연륜이 더하여질수록 ‘사도들 중에서, 성도들 중에서, 죄인들 중에서’ 이런 존재에 불과하다고 선언한 대선배, 대선생이신 바울을 더욱 본받고 존경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 바울은 요샛말로 말하면 엘리트이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졌으며, 신분 또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유대 사회에나 로마 사회의 어디에 내놓아도 별로 빠지지 않는다(빌 3:4-6).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투철해서 다른 사람들을 심히 무시했다. 그런 사회에서 바울의 이력을 내놓으면 저들 역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누구도 지키지 못할 자기들만의 율법으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예단하여 거의 죽여 놓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겸손했다. ‘곧 모든 겸손과 … ’.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겸손하게 주를 섬겼다. 바울 사도는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겸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겸손해지기로 작정했다. 빌립보서 2:3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성도들이 왜 겸손해야 할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다(눅 18:13-14). 그래서 우리는 죄인임을 느껴야 한다(눅 18:14). 자기의 죄를 느끼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사람들은(눅 15:17-21) 겸손할 수밖에 없다.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한다(왕상 3:6-14).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은 추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낮아질 수밖에 없다(사 6:1-8).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다(빌 3:4-7).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다. <우리를 고생하게 한다(신 8:3). 그리고 환난이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대하 12:2-12).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했다.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다(신 15:15).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라고 했다(잠 25:6-7).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전 5:2). 큰일을 구하지 말라고 했다(렘 45:5). 스스로 칭찬하지 말아야 한다(잠 27:2).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할 것이라고 했다(미 6:8).>
나의 바람 / 특히 강조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 로마서 7장이며 이 말씀을 설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련다. 그래서 나는 평생에 이 말씀을 품고 살아가련다. 특히 로마서 7:15-25을 보면서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처럼 되고 싶다.
롬 7:15-25 / 나는 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속으로는 올바른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원하지 않는 짓, 내가 미워하는 짓만 저지르고 있습니다. 16) 나는 내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내가 어기고 있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17) 그러면서도 이러는 나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런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은 내 속에 들어 있는 나보다 더 힘이 센 죄입니다. 18) 나는 내 육신 안에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나에게 올바른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되지가 않습니다. 19)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20) 이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죄가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1)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22)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하면서도 23-25) 내 속 깊은 곳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분란을 일으켜 나를 누르고 아직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분이 나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22-26 말씀을 깊이깊이 증거하고 싶다.
갈 5:22-26 /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4)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25) 만일 우리가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면 모든 생활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26) 그렇게 하면 명예와 인기를 얻고자 질투하거나 악한 감정을 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 자신의 분수를 잘 알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의 일화를 소개하면, 아인슈타인은 1950년대 이스라엘의 대통령이 돼 달라는 요청이 담긴 편지를 받는다. 어쩌면 독일 태생으로 유대인인 아버지와 독일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유대 국가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직을 거절한다. 거절한 이유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나는 평생을 물질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 지금까지 행정업무나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일을 해본 경험이 없으므로 그와 같은 고위직을 담당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그래서 오로지 그가 잘할 수 있는 그것에 몸담고자 했을 것이다. 아마 그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무능한 대통령이 됨으로써 수없이 어리석은 일들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이 위대한 과학자로 빛날 수 없었을 것이다.
飮河滿腹(음하만복) : 강물처럼 많이 있는 물을 마신다고 하여도 실제로 마시는 분량은 배를 채울 정도에 지나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자기 분수에 넘지 아니하게 조심하여야 함을 이르는 말로 주제를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결 론
겸손의 확실한 증거 10가지
세상은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고 PR을 잘하는 것이 마치 똑똑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같지만 성경은 그와 반대로 가르치고 있다. 온타리오 토론토의 그레이스펠로우십처치의 담임 목사이자 Cruciform Press의 설립자이기도 한 팀 찰리스가 쓴 ‘겸손의 확실한 증거 10가지’가 기독교 전문 사이트 처치리더스에 실려 소개한다.
팀 찰리스는 이 글에서 ‘교만은 최악의 죄악인 반면 겸손은 최고의 미덕이다’라고 했다. 또한, ‘크리스천은 성령으로 인해 교만이 죽고 겸손의 미덕을 갖는 삶으로 변하는 기쁨이 있다’며 성경이 말하는 겸손의 10가지 확실한 증거를 밝히고 있다.
1. 스스로를 낮춘다 / 욥은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며,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기록했다(욥기 22:29). 겸손한 사람은 다윗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편 22:6)고 한 것처럼, 진정한 성찰의 순간에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낮추어 생각한다.
2.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높인다 /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기적인 야망이나 자만심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라’고 말한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과 거기에 더 숨어있는 죄를 보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타락 정도를 잘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장점을 찾으려고 한다. 또한, 자신에게서는 죄의 흔적 하나하나를 찾아 헤매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서는 은혜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쓴다.
3.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한다 / 벌레가 가장 달콤한 열매에서 번식하듯 자만은 자신이 큰일을 해냈다는 생각에서 싹틀 수 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기도도 하지만, 그 다음에는 자신의 틀에 박힌 공부와 연약한 기도에 대해 반성한다. / 자신의 가장 좋은 순간조차도 여전히 죄로 인해 훼손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최선의 노력을 하지만 여전히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덕목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지 않고, 그리스도로 인해 자신감을 갖는다.
4. 상황을 보기보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 / 겸손한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도 원망을 자신의 부족한 영적상태에서 찾으려고 한다. 위선자가 자기의 선함을 자랑하기를 좋아한다면, 겸손한 영혼은 언제나 자신의 악함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 잡힌 바 되어 셋째 하늘까지 다녀온 엄청난 특권을 누린 바울도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외쳤다. 신실한 크리스천은 지식이 성장할수록 자신의 무지와 믿음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한다.
5.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바라본다 / 겸손한 사람은 큰 어려움을 겪을 때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비난하기를 거부한다. 아브라함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 18:25)라고 했으며,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 1:21)며 잘못 진행되는 듯한 일에도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았다.
6.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 겸손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모든 칭찬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리하고 그리스도께만 돌린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영예를 그리스도께 돌리며 주님만 크게 한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영광과 찬양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린다. <주제파악>
7. 적의 비난과 친구의 책망을 감내할 줄 안다 / 겸손한 사람은 죄에 대한 책망을 받아들인다. 죄 많고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너무 높은 자리에 올려놓아 조언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는 사람을 오히려 감사해하고 사랑한다. 솔로몬이 말한 것처럼 -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 - 겸손한 크리스천은 적의 비난과 친구의 책망을 견딜 수 있다.
8. 자신의 업적이 가려지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 겸손한 사람은 그리스도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일부러 질투의 추악한 죄악과 싸우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즐겨 말한다. 겸손한 크리스천은 비록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양보하는 자리까지 간다.
9.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심을 의식한다 / 교만한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고 ‘다고 다고’(잠 30:15)하며 불평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는 자신의 죄에 비해 자신의 상태가 훨씬 나쁘지 않음을 보고 놀라며, 형편과 사정에 상관없이 그의 초점은 작은 거룩함에 있다. 또한, 최악의 경우조차도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상황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10. 낮은 곳에 처할 줄 안다 / 겸손한 사람은 기꺼이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게 시간을 할애하고, 사람들이 꺼리는 일에도 주의를 기울일 줄 안다. 그는 부자의 호화로운 연락을 즐겨하기보다 나사로의 염증을 닦아주는 것을 더 기뻐한다. 또한, 자신이 너무 고귀하고 너무 거룩하여서 어떤 일에는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기꺼이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라’(롬 12:16)고 강조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겸손은 초자연적인 영적 요소를 위한 부가적인 선택이 아니다. 모든 성도가 일상에서 생활 가운데 실천하는 것이다. 겸손하게 성화되기를 원하는가? 위의 10가지에 자신을 비추어 스스로를 솔직히 평가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며 기도하자.
딤후 2:20-21 / 부잣집에는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만이 아니라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그릇도 있어서 값비싼 그릇은 손님을 접대하는 데 쓰이고 값싼 그릇은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데 쓰입니다. 21) 만일 그대가 죄를 멀리한다면 순금으로 만든 그릇, 곧 집안에서 가장 비싼 그릇이 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장 고귀한 목적을 위해서 그대를 사용하실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4)>에서는 (주제파악하는 성도가 되렵니다)의 총결론으로 주제파악을 정확히 잘하였던 세례 요한에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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