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분위기
정 동 식
아파트 현관문을 여니 거실 입구에 상자 4 개와 배추 몇 포기가 눈에 들어왔다.. 처남이 서울 가는 길에 우리 집을 들린다더니 벌써 놓고 갔나 보다.
열어보니 큰 박스 3개는 고구마, 1박스는 재래종 떫은 감이 들어있었다.
올해 우리 집은 고구마와 홍시로 넘쳐난다.
시골에서 처남이 한 달 간격으로 두 번이나 가져왔기 때문이다. 고구마는 당분간 싹이 움틀 염려는 없으나 감은 한꺼번에 익으면 감당하기 쉽지 않다.
아이스홍시를 만든다 해도 딱히 보관할 공간이 나오지 않아 걱정이 앞선다.
처음에 가져온 감은 홍시가 되자마자 가장 잘 익은 녀석을 골라, 동네 지인 몇 분에게 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 가져온 감(고동 시)은 시커먼 빛깔을 띠고 있어 나눠 먹기도 애매하다. 애써 지은 과일이니 매일 감을 살피
면서 익는 즉시 식탁으로 옮겨 놓고 먹을 작정이다.
고구마는 우여곡절 끝에 우리 가족품에 왔다. 왜냐하면 지난 11월 5일, 고구마를 캐려고 포항까지 갔는데 비가
와서 작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마을에서 가장 늦게 수확을 했다고 한다. 투잡을
하는 처남이 애를 많이 태우다가 겨우 시간을 내어 이웃 남전댁(91세, 장모님 친구)과 둘이서 한 이랑씩 마무리를 했다고 들었다.
고구마는 감에 비해서는 비교적 관리가 쉽지만 그렇다고 너무 늦게 수확을 하면 얼어버리니 제 때 거두는 게
맞지 싶다. 보관할 때도 너무 차면 얼고, 따뜻하면 싹이 난다. 싹이 트면 맛이 없다. 그래서 우리집은 작은 방에
보일러를 끄고 신문지에 싸서 보관한다. 처갓집 고구마는 먹을 정도의 양, 즉 네 개 이랑 정도만 짓는다.
수확도 전문가처럼 트랙터로 하지 않고 호미로 하지만 맛이 부드럽고 달달하다.
작년에 맛본 아내의 친구들이 올해도 몇 박스를 부탁한다는 주문까지 받았다. 가격도 괜찮고 맛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장모님을 포함한 우리 5명의 가족은 모두 고구마를 좋아한다. 특히 장모님과 내가 으뜸이다. 고구마 10개를 구우면 거의 절반은 내가 먹어치운다. 장모님도 고구마를 드리면 상을 물리는 일이 없다. 밥맛이나 입맛이 없더라도 껍질을 돌려가며 능숙한 솜씨로 곧잘 드신다.
나의 고구마 사랑은 어린 시절부터 생겼다. 외할머니댁에 가면 자주 먹는 간식이었다. 가을의 쪄 먹는 고구마,
겨울밤의 생고구마와 군고구마, 춘궁기의 빼떼기, 모두 추억에 남아 있지만 그중에서도 겨울의 군고구마를 잊을 수 없다.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울려 퍼질 때 뜨거운 군고구마를 호호 불며 먹기도 하고, 신문지봉투에 싼 채로
주머니에 넣어 얼은 손을 녹이기도 했다. 요즈음은 예전처럼 거리에서 군고구마 파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다.
나는 작년부터 ‘에어 프라이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의 존재를 알기 전에는 전기밥솥의 찜기능을 이용해서 삶아 먹었다. 그런데 작년 겨울부터 아내가 알려준 프라이어 덕분에 쉽고, 간편하게 군고구마를 만들어 먹고 있다. “아따, 타지도 않게 잘 구웠네!” 장모님의 극찬까지 이어지면 나는 신이 나서 군고구마 명인이 된다. 아내도 먹고 싶을 땐 나에게 주문을 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터득한 비법은 적정한 온도와 시간이다.
지금까지 이토록 편하게 맛있는 군고구마를 즐긴 적이 없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노르스름한 속에 입맞춤하면
혀에 살살 녹는다. 샤베트도 아니고 부드러운 빵도 아닌 것이 썰렁한 겨울밤을 따끈하게 만든다. 이젠 겨울이
오더라도 군고구마 찾아 삼만리를 헤맬 필요가 없다. 지하철역 주변이나 버스정류장을 기웃거릴 필요도 없다.
특허 발명가 덕분에 참 편한 세상이 왔다.
가족의 식성이 비슷하거나 같은 것도 참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가 식구는 모두 회를 무진장 좋아하고 가리는 음식이 없는데, 성서에 사는 이서방은 고기 사랑 파이다.
구워 먹는 고기는 다 잘 먹지만, 회는 거의 먹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날 것을 먹지 못한다고 보는 게 나을 듯하다. 처가의 가족들은 매년 장모님 생신인 11월에 1박 2일, 9남매 전체가 여행을 떠난다. 평균 4 끼 정도의 식사를 하는데, 가족의 식성을 고려해서 메뉴를 고른다.. 그래서 4번의 식사 중 절반은 가급적 고기를 먹거나, 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고기반찬이 나오는 식당을 예약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도, 여행스케듈을 짜는 사람도 다소 부담을 느끼지만 그래도 가족이니 호불호를 존중하여 배려를 하려고 한다.
나의 가족으로 무대를 옮겨 보면, 부모는 다 고인이 되셨고 이제 우리 7남매만 남았다. 다행히 부모앞에 먼저 보낸 형제자매는 없으니 그래도 감사할 일이다. 나는 고 1때 부터 객지 생활을 하는 바람에 형제자매와는 깊은 교류를 갖지 못했다. 가족은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갈등이 있어도 조금만 노력하면 술술 풀릴 존재 같은데 막상 대화를 해보면 거리감이 느껴질 때가 많다. 성인이 되면서 이념, 종교, 정치, 등등에서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창회 뿐 아니라 가족 간에서도 정치와 종교 얘기는 안 하는 것이 좋은데, 간혹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까 싶어 염려할 때도 있다.
일부 정통파 아닌 종교를 믿는 가족들이 단톡방을 홍보장소로 활용하기도 한다. 침묵의 공간을 잘도 파고든다. 한 두번 잔소리하다가 이젠 그대로 두는 편이다. 핏대를 세워가며 못하게 하는 것보다 무대응으로 대처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늘 가슴에 두고 있는 말이 있다. 가족간에도 최소한의 홀로서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건강을 지키지 못하거나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홀로서기가 어렵다. 자연스레 가족과도 멀어지게 된다.
가족이 사는 집에서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즐거움과 분함의 감정이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는 일이 많다.
어떤 경우에는 가족에게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상처를 주기도 한다. 가족이니까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여과
없이 투박한 말을 내뱉어서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가정의 분위기는 한 사람의 주도적 역할로만 이루어지기 어렵다.
누구 한 사람의 희생만을 기대해도 안 된다.
가족이 밖에서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면 가장 따뜻한 말로 반기고, 새로운 에너지가 샘솟도록 도와주어야
바람직하다. 이러한 노력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구성원 모두가 서로서로 주고받아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
며칠 전에 조카결혼식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구미조카와 의도적으로 많은 대화를 하려고 했다. 목회활동을
하는 조카의 작은 외삼촌은 인도네시아에서 활동을 한다고 한다.
나는 그 분을 만난 적이 있어 폭풍 칭찬을 했더니 조카는 어린 시절 생각했던 가족의 분위기를 들려주었다.
“큰 아버지, 제가 어릴 때 느낀건데요, 울산 외가의 분위기는 밝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친가에 오면 말이 없고 무거운 분위기라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 몰랐어요.” 했다. 나는 조카의 그 말을 인정은 하면서도 상황을 설명하고 싶었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건 할아버지께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랬을 거야. 내가 중학교 2학년이고, 네 아빠와 고모들은 더 어렸으니
마음의 상처가 크지 않았을까?”라고. 구미조카는 2대에 걸쳐 S 전자에 다니고 있다.
내가 말한 할아버지의 교통사고에 대해 조카가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두 가족의 분위기가 어떤 의미로든 조카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22.11.25)
첫댓글 직계가족 보다 방계가족 이야기를 주로 다루 셨군요. 글이 조금 긴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다듬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