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과 용석
박지일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알게 되었다
세잔과 용석은 호명하는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하나의 인물이었다
나는 세잔을 찾아서 용석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하고 반대로 용석을 찾아서 세잔의 현관문을 두들기기도 했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
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세잔과 용석 몰래 말하려는 바람에 서두가 이렇게 길어졌다
(세잔과 용석은 사실 둘이다)
다시,
세잔의 몸은 기록 없는 전쟁사였다
나는 세잔과 용석을 기록하며 그것을 모르게 되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
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
세잔은 공기의 얼굴 뒤에 숨어있는 프리즘이었다
용석아
네게서 세잔에게로 너희에게서 내게로
전쟁이 유예되고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 내 배후는 화약 냄새가 가득하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접히는
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버려지는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아무도 모르는
나는 누구를 위해 세잔을 기록하나
용석을 기록하나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
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 박지일 시인
- 1992년 창원 출생
<조극래/초보 시인을 위한 현대시 창작> 중
이 시는 하루 쓰고 쉽게 버려지는 일회성 노동자의 아픔과 죽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시를 읽기 위해선 문장을 거꾸로 읽어가야 할 것 같다. 세잔과 용석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도시의 모든 굴뚝에서/세잔과 용석이 솟아난다 수증기처럼 함부로" 이들과 같은 노동자들은 도시의 모든 공장에 존재한다.
"세잔과 용석은 새들의 일회성 날갯짓. 그들은 일이 없어 쉽게 접힌다."세잔과 용석은 수도꼭지를 타고 흐르는 물의 미래, 사용자에 의해서 쉽게 버려진다. "세잔과 용석은 공중의 양쪽 귀에 걸어준 하얀 마스크", 그러나 누구도 그들의 아픔을 모른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애써 모른 체한다.
"용석은 빌딩과 빌딩의 높이를 가늠하는 아이였고/세잔은 빌딩과 빌딩의 틈새를 가늠하는 아이였다. 이 문장으로 떠오르는 이들의 직업은 고층빌딩
유리창 닦기와 택배 배달원이다. 그러나 세잔과 용석의 직업은 확실치 않다. 단지 이들이 얼마나 하찮고 위험한 일을 했는지는 이들이 죽고 나서, 시
적 화자가 이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히고 있다. “세잔은 새총에 장전된 돌멩이였다/세잔은 숲의 모든 나무를 끌어안아 본 재였다/세잔은 공기
의 얼굴 뒤에 숨어 있는 프리즘이었다." 이들은 하루를 살아가는 게 전쟁이었다. 낙오하거나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쳤다. 이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면서 최하층이라는 굴레를 쓴 한 인물이었다.
어찌 보면 세잔은 외국인 불법 노동자의 이름 같기도 하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다. 불법으로 들어왔다. 신고하면 즉시 추방돼야 하는
매우 곤란한 삶이다.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위험하고 더러운 직업에 투입되어 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다. 사장은 불법 노동자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한다. 시시하면 월급이나 노임을 건너뛴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게으름을 부리면 잘라버리거나 신고하겠다고 협박한다. 세잔은 말 못 한다. 이 기록 없는 전쟁에서 세잔은 결국 산화하고 만다.
용석의 일과도 역시 고달프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무거운 짐을 끊임없이 날라야 한다. 조금도 쉴 틈이 없다. 점심을 건너뛰는 일은 다반사다. 자정까지 일해야만 하루가 점등된다. 용석은 택배기사일 수도 있고 오토바이 배달원일 수도 있다. “용석아, 네 얼굴로 탄환이 쏘아진다”에서 볼 수 있듯이, 물
건에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온갖 쌍욕이 쏟아진다.
그러나 이들은 사고나 심장박동 정지로 인하여 세상과 이별하고 만다. 삶이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시적 화자는 이들의 삶을 추적한다. 이들의 몸에
남겨진 기록 없는 전쟁사를 읽는다.
심사평(신용묵. 김행숙. 김현)
- 고유한 호흡, 긴 여운
심사를 맡은 세 사람이 응모작들을 읽기 전에 한 약속 아닌 약속은 지금 한국 시에 부족한, 비어 있는 감각을 채워줄 만한 작품을 눈여겨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그 '감각의 정체'에 관해서는 굳이 합의하지 않았고, 다른 눈(관찰), 코(호흡), 입(언어)을 가진 작품들을 각자의 손에 쥐었으며, (...)
박지일님의 응모작들은 무엇보다 읽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머물렀다. 자신만의 고유한 호흡을 유지한 채 여간해선 서두르지 않았다. 따뜻하고 유려하다가도 일순간 차가워질 줄 알았다. 사유가 과장 없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두 사람을 호명하며 이룩하고 있는 당선작의 기체(氣滯)적인 시 세계는 정물적으로 보이면서도 또한 움직였다. 기록하면서도 함부로 기록하지 않고자 했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매혹이 지금 한국 시에 필요한 감각임에 마침내 합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