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샤샤샥 스윽 쓰윽 솨악. 느닷없이 귓전을 파고드는, 마치 대나무 숲을 거세게 휘돌아 나가면서 댓잎을 사정없이 흔드는 것처럼 거센 바람 소리에 가까스로 들려던 잠이 확 달아났다. ‘여기 어디에 대나무 숲이 있었나?’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창밖을 살펴보니 아파트 앞마당의 높다란 전나무, 소나무 숲을 사정없이 흔들고 지나는 바람 소리였다. 이미 일기예보에서 폭풍 경고를 스쳐 들은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요즘 거의 뉴스를 접하지 않다 보니 놓치고 있었던 모양이다. 곧 벚꽃이 돌아올 텐데 바람이라니. 그것도 나뭇가지들이 부러져 날아갈 정도의 강풍이라니 갑자기 으스스 때아닌 추위마저 파고든다.
퇴직하기 오래전 학교에서도 이맘때면 많이도 떨었다. 장작을 태우다가 갈탄 난로에서 석유 난로로 진화하던 시기를 거쳐 요즘은 냉난방 겸용에어컨디셔너가 대세를 이룬 지금 생각하면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학교의 예산 여건상 일찌감치 교실에서 난로를 치우거나 아침 등교 시간에 잠깐, 그것도 교장 선생님의 허락이 있어야 겨우 불을 지필 수가 있었다. 매일 아침 실내 온도를 확인하고 난방을 결정했기에 실내 온도 측정을 위한 온도계 설치 장소까지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았었다. 급기야 실내보다 바깥이 더 따스해 잠깐의 쉴 틈만 나면 너도나도 양지바른 벽에 기대어 마치 태양의 신하처럼 다소곳하게 서기를 반복하였다.
설핏 든 첫잠이 깨고도 다시 잠들지 못하고 거센 바람 소리에 섞인 옛 기억이 풍차처럼 머릿속을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반생을 몸담았던 교실을 떠나온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학교는 지역의 특수학교여서 그동안 근무했던 일반 학교와는 달리 마음을 쓰고 책임을 져야 할 부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유치원부터 전공 과정까지 모두 다른 교육과정 운용과 더불어 정규직, 비정규직,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등 매일 수 없이 반복되고 발생 되는 갈등 현상에 매시간 신경을 곤두세우다시피 지내야만 했다.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줄 수는 없었지만, 동분서주 뛰는 수밖에 없었다. 때론 행복한 시간도 있었지만, 이따금 갖가지 장애물이 거센 충격으로 밀려올 때는 그 해답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내 머릿속은 마구 헝클어진 실타래가 되곤 했었다.
그리 모질지도 못하고 숫기 없고 내성적인 성격이 그래도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겪으며 많이 단련되고 단단해진 것 같았는데 마지막 책임자라는 입장에서는 어쭙잖은 사건 앞에서도 내 심장은 덜컥 떨어져 내렸다. 그동안 꼭꼭 숨겨두었던 내 안의 잠재적 불안, 분노, 절망 등이 괴력의 파도가 되어 나에게 밀려왔다. 나날이 겉으로 내색하지 못한 살얼음판이었지만 내 머릿속 편도체들은 점점 그 방어력이 약해져 가는 것을 견디고만 있었다. 이때부터였던가, 불면증이란 놈이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슬그머니 내게 찾아온 것이.
나는 이제껏 불면증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믿으며 살았다. 가끔은 뜬 눈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기도 하지만 ‘잠’이라는 단어가 내 의식을 좌우하지는 않았었다. 불면으로 고생한다는 친구 얘기는 먼 세상 이야기였었다. 곧 노년에 접어들 나이였지만 적당히 활동적이고 긍정적으로 되려고 노력하며 굽 높은 힐도 불편 없이 신고 다녔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던 팬데믹이 오고 모든 삶이 팍팍해졌다. 나는 고치 속 애벌레가 되어갔다. 팽팽히 당겨지던 내 루틴들이 하나씩 깨어지고 다시 세상에 적응하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껏 지켜온 가족 각자의 생활이 다르므로 어느 것 하나도 함께하자 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발걸음을 멈추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마음속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나 살아오는 과정 동안 나를 지키고 이겨내기 위해 내 머릿속 변연계 가장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 놓았던 숱한 감정들이 슬며시 고개를 들며 불과 아몬드만 한 크기의 편도체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동안 잘 견디며 터득해오던 대뇌피질의 이성적 판단이 균형과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덜컥 겁이 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면증이 날 덮쳐오고 있었다. 온몸이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몇 번의 응급실행과 견딜 수 없는 어지럼증, 갑작스럽게 오십견이 찾아오고, 병원 다니기가 일상이다가 결국 경추척수증 수술까지 하고야 말았다. 나쁜 일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지난 1년여간은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내려앉는 시기였다. 젊음의 패기와 체력이 뒤따를 때면 하루, 이틀쯤이야 예사로 잠을 건너뛰고도 여전히 거뜬하였는데 지금은 불면으로 몇 날을 뒤척이며 애를 쓰다가 새벽녘이면 파김치가 되곤 한다.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의 한 단면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잘 쌓아둔 삶의 골짜기들을 헤집어 놓고 나면 온몸의 신경들이 대뇌피질의 통제력을 벗어나 내 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아우성을 치곤 하였다.
얼마 전부터는 가끔 약물의 도움을 받아야 멀리 달아나버린 잠을 불러올 수가 있게 되었다. 나와는 상관없을 줄 알았던 불면의 밤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와 버린 것이다.
가끔 시골 정원에서 가녀린 대가지 사이에 둥지를 트는 산비둘기를 만날 때가 있다. 오늘같이 사정없는 바람에도 꿋꿋이 새끼들을 지켜내고 잘 키워 또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아무리 공중그네를 잘 타는 새들이라 하더라도 무섭게 윙윙대며 가지를 그토록 흔들어대는 바람이 힘겹고 위태롭지 않았을까. 견디기 힘들기는 나와 마찬가지 일 텐데 온 힘을 다해 까치발로 둥지를 지탱하며 새끼를 품고 살아내는 모습이 참으로 대견하다는 생각에 자신을 비춰보기도 한다.
불면의 밤이 오면 이제는 그저 받아들이려고 한다. 나 또한 자연의 일부인 것을 한동안 잊고 지낸듯하다. 때때로 불면으로 지치고 견딜 수 없이 힘들어지면 잘 발달한 의학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내 머릿속 편도체에 켜진 빨간불을 꺼보려고 한다. 자연의 순리대로 다가오면 그대로 마주할 것이다.
햇살이 나머지 옅은 어둠마저 밀어내면서 나를 깨운 바람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열린 창으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가슴 한가득 들이키며 또 하루를 시작해 볼 일이다.
첫댓글 불면은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온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힘내시고 화이팅~
나이가 주는 선물이 달갑지 않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기고 전진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기고 승리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명숙쌤 동병상련을 느낍니다. 자연히 불면이 생기더라구요.그냥 받아드리기로했어요~힘내요
그냥 잠 안오면 안오는대로, 책 읽다가 좀 있으면 스르르 잠 오면 다시 잠자리로 갑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점점 많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