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프로테스트에서 기원했는데, 이 말은 1529년 2월 21일에 열린 독일 슈파이어국회에서 루터계 제후(諸侯)와 도시들이 황제 카를 5세 등 로마가톨릭 세력의 억압에 항거한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프로테스탄트란 프로테스트 즉 항거한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기존 로마카톨릭의 부패에 항거하여 새로운 깨끗한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는 운동이 종교 개혁운동입니다.
따라서 기존 부패한 교회에 항거하여 만들어진 종파를 모두 합쳐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로는 루터의 루터교, 칼뱅의 개혁파 교회, 로욜라의 예수회 등이 있습니다.
가족주의와 연관해서 본다면
"나는 나의 카티를 프랑스나 베네치아와 바꾸지 않겠다." 결혼생활 6년째에 접어든 루터의 고백이다. 순결과 독신생활의 종교적 금욕주의를 부단히 추구해야 했던 중세의 성직자들한테서는 결코 상상될 수 없는 이 고백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사회적 혁신성을 압축하여 나타내고 있다. 성직자의 결혼과 가정의 의미 부각은 프로테스탄트즘이 낳은 가장 두드러진 사회적 변화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의무화한 중세교회의 부당성을 일차적으로 성경에서 찾았다. 루터는 사도 바울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규정한 성직자의 독처를 강요하는 것은 비성서적 오류라고 지적하였고, 비텐베르크 개혁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결혼을 실천에 옮긴 카를슈타트는 교회를 감독하는 자는 "한 아내의 나면"이 되어야 한다는 <<이모데전서>>3장 2절에 입각하여 성직자의 결혼을 강도 높게 주창하였다. 또 다른 근거는 바로 믿음지상주의이다. 순결의 유지하는 일조을 '행위'와 '준수'는 구원과 전혀 무관하며, 따라서 독신생활의 의무화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자유를 허락한 신이 뜻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성직자의 결혼이 인정된 데에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이해와 목회생활에 대한 현실적 고려도 크게 작용하였다. 성적 욕구는 모든 인간의 자연적 본능이므로 제어되기보다는 결혼을 통해 해소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성직자는 좀더 나은 목회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에 따르면, 독신생활이 대부분의 성직지들에게는 감내할수 없는 생리적 억압이며, 그 결과는 고결한 생활이 아니라 오히려 성적 타락과 위선이다. 카를슈타트는 성직자에게 강요된 독신생활은 인밀한 동거뿐만 아니라 간음, 동성연애, 자위행위를 조장하여 그들을 음란의 나락에 빠뜨린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억압된 성적 욕구는 나아가 성직수행의 큰 걸림돌이 된다. 츠빙글리를 위시한 11명의 스위스 성직자들이 1522년 7월 콘스탄스의 주교에게 제출한 성직자 결혼허가 탄원서는 이를 확연히 예시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는 불타오르는 정욕 때문에 그 동안 많은 흉측한 짓들을 해왔다."고 심경을 토로한 후 "마음을 상하게 할 정도로 자주 그리고 결렬하게 타오르는 욕망의 불길만으로도 결혼의 명백하고 충분한 이유가 된다"면서 제도적 개선의 촉구하였다. 일반인들로부터 "음탕하고 뻔뻔스런 개"로 여겨지는 자신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모순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성직자의 결혼이 허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신생활이 목회활동에 장애가 된다면, 결혼과 가정생활은 다양한 이익을 제공한다. 결혼은 성직자를 육체적 욕망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안정된 목회생활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정을 이루고 있는 평신도들의 고통과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좀더 걸맞는 조언과 교훈을 주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직자 역시 배우자나 자녀와의 사랑을 통하여 이웃사랑의 의미를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에게 결혼과 가정생활은 더 이상 배격의 대상이 아니라 지향의 대상이자 축복이 된 셈이다. 종교개혁가들의 소망과 오랜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게 된다. 1525년 취리히에서 최초로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법령이 제정된 후 신성로마제국과 영국에서도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의 결혼권이 법적으로 승인되었다.
독신과 순결이라는 기존의 미덕이 거부되고 성직자의 결혼이 인정되면서 가정의 일반적 의미와 중요성을 한층 제고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정은 신앙과 삶의 으뜸가는 배움터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가들은 부모들에게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고 그들의 신앙교육과 일반교육에 노력을 경주하라고 독려하였다. 한편 자녀는 부모의 사랑을 통하여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대리 경험하게 되고 부모에 대한 순종과 공경을 통해서 신을 경외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면서 가정생활의 중요성 부각시켰다. 또한 가정은 "사회적 대인관계의 원형"을 가르치는 사회교육의 현장이다. 가정은 그 구성원들에게 질서의식을 고취시키고 협력과 나눔의 덕목을 함양시키는 소중한 울타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정은 육체와 정신을 맑게 해주는 안식처이다. 루터는 "결혼생활 속에서 간음과 음란은 사라지며," 이는 나아가 "건강한 몸과 건전한 의식"을 가져다 주고, 여성은 어린이와 함께 있을 때 "더욱 청결하고 행복해진다."면서 가정의 혜택을 강조하였다.
결혼과 가정의 의미 격상은 하나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속세와의 연루가 배제된 금욕주의적 은둔생활에 주어진 이상적 가치는 소멸하게 된 반면 가족과의 동거동락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허락된 신의 은총으로 인식되게 된다. 점차 가정중심적으로 변모해간 근대인들의 생활양식과 의식구조의 정신적 토대는 프로테스탄티즘 속에서 발아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프로테스탄티즘이 함유한 고도의 사회적 진보성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