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련 韓明璉 (? ~ 1624년 2월 14일)】
「 노비에서 임진왜란 영웅, 반역자가 된 입지전적인물」
임진왜란 당시 천민출신 의병장인 한명련은 황해도 천민출신 의병으로 용감함을 인정받아 군내에서 승진했으며 임진왜란 중 많은 소규모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노년에는 억울한 역모에 휘말려 이괄의 난에 참여하게 되고 반역군의 핵심이 되어 싸우게 되는데 같은 천민출신 의병장인 정충신에게 패하고 부하의 배신으로 이괄과 함께 최후를 맞는다.
천민에서 종 2품 순변사(巡邊使)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임진왜란 시기 그의 행적을 보면 가히 인간흉기가 다름 없을 정도의 무력을 보였다. 생애 항목에서 서술하였듯이 정유재란 시기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한명련의 전공을 권율 등이 조정에 보고한 것이 여러번 등장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크게 출세하고 상관과 임금에게 신임받았다. 하지만, 천민 출신으로서 정치력은 상당히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종료 직후에 오위장에 임명되자마자 신분을 문제삼아 탄핵을 당했고, 선조의 비호로 직위해제는 면했지만 스스로 직위를 내려놓고 북방으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광해군일기 기록에서도 꾸준히 탄핵과 모함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선조와 광해군에게 신뢰받으며 관직이 종 2품에 이르렀다. 이후 인조반정을 통해 왕이 또 다시 바뀌었음에도 신뢰를 받는가 싶었지만, 또 다시 역모 가담으로 고변당하는 처지에 놓이며 일생일대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거기서 그는 정충신처럼 자신의 무죄를 밝히는것이 아니라 반란군에 가담하는 길을 택했고, 결과는 본인이 임진왜란 당시 쌓아올린 찬란한 전공와 명성을 버리고, 반역자가 되어 광주에서 쓸쓸히 죽었으며 이후 연좌제로 가문까지 무너지는 결말을 맞았다. 이로 비추어 볼 때, 무장(武將)으로서의 자질은 아주 뛰어난 사람이지만 정치력의 부족으로 본인의 입지를 보전하지 못했고, 인조반정 이후의 새 체제 내에서 살아남는데 실패하여 혼란한 정국에서 이괄의 난 가담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반역자로 낙인찍혔으니 이는 본인이 신중하지 못했거나, 정치적인 판단력 부족으로 인해 파멸한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의 생애는 조선 후기 전란기의 걸출한 무장이자, 신분의 장벽을 일시적으로나마 넘어선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정치적 역량과 처세 부족, 신분의 한계로 인해 결국 체제 안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몰락한 인물로 평가할수 있다.
한명련은 황해도 문화현 출신의 천민이었다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당시 청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한명련은 주저 없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영남 지방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며 놀라운 용맹을 떨쳤다
한명련의 뛰어난 무예와 지략은 곧 조정의 주목을 받게된다
1594년, 그는 경상 우도의 별장으로 임명되어 진지를 보수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는 중책을 맡게 된다.
이후 한명련은 수많은 전장에서 맹활약하며, 이름을 날렸고 나날이 승승장구했다.
그의 용맹함은 곧 조정에 보고되었고, 선조는 이렇게 물었다.
"팔도에서 싸우고 있는 장수들 중에 공적이 뚜렷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누구인가?"
그러자 대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비록 천민이지만 한명련이 가장 잘 싸운다 하옵니다"
이렇게 한명련은 천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정3품 별장으로 임명되었다.
천민출신이었던 그는 관직을 하사받게 되자,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더욱 엄청난 활약을 펼치게 된다.
한명련은 명장 김덕령과 함께 각각 도원수 권율의 왼팔, 오른팔이 되어 왜군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목숨이 여러 개 있는 듯 죽음 따윈 두려워하지 않으며 수많은 왜군을 베어 넘겼다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 때, 한명련은 다시 한 번 그의 용맹함을 증명한다
그는 공주와 회덕에서 왜적과 맞서 싸웠는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선봉에 서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는 수많은 적병을 닥치는 대로 쓰러뜨리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한명련은 부상을 입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매우 걱정했다.
그리고 선조는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한명련은 어디에 있는가? 칼날에 오른 팔을 부상당하였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중상은 아닌것인가?"
라고 말하고는 실력이 좋은 어의를 보내 확실히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조치했다.
또한 천민이었기 때문에 형편이 좋지 않았던 한명련에게 부족함 없이 급료를 넉넉히 챙겨주었다
이처럼 한명련은 선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전쟁 영웅이었다
무한 신뢰와 확실한 보상을 받은 한명련은 계속해서 공적을 올리면서 전국팔도에 명성을 알렸다.
명나라 제독 마귀 또한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이순신, 권율, 정기룡, 한명련 등이 제일가는 명장이라고 인정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한명련은 종2품 오위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올랐다
천민 출신으로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당시 조선시대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한명련의 급격한 신분상승은 많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켰던 것.
특히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 세력은 한명련을 집중적으로 견제했다.
그들은 틈만나면 천민출신 한명련의 신분을 꼬투리잡아 연일 상소를 올렸다.
결국 한명련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변방으로 떠나게 된다
하지만 운명의 아이러니라고 할까요?
한명련을 견제하던 광해군이 즉위한 후, 오히려 한명련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렇게 한명련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광해군의 신임을 받으며 길주 목사를 거친 후 순변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 영광도 오래가지 못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 하게 된것.
가만히 있다가는 화를 입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한명련은 사직을 요청하며 귀향하기를 원했지만, 인조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명련은 역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그를 압송하던 중, 뜻밖의 인물이 그를 구출한다
바로 북방을 지키던 명장 이괄이었다.
이괄 역시 인조반정 공신이었지만, 자신의 공에 걸맞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아들마저 역모죄로 몰리게 되어 굉장히 입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이렇게 해서 한명련은 이괄의 반란에 가담하게 된다
1624년 1월 22일, 이괄과 한명련은 1만 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교묘하게 관군과의 교전을 피하며 2월 9일, 무혈입성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괄의 난은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이틀 만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명련은 결국 2월 14일에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렇게 임진왜란의 영웅이었던 한명련은 반역자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한편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아버지의 죽음에 큰 원한을 품고 후금으로 망명해버리고 만다.
그는 후에 후금의 장수가 되어 조선 침략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
한윤은 정묘호란 때 후금군의 선봉에 서서 의주성에 잠입해 군기창고를 불태우는 등 조선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그는 조선 사람들에게 '한적'이라 불리며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처럼 한명련 가문의 비극은 다음 세대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영웅에서 반역자로, 그리고 그의 아들은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가 된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한명련은 임진왜란의 발발로 암울했던 전란 시대에 목숨을 받쳐 나라를 지켜냈지만, 전쟁이 끝나자 천민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토사구팽 당하면서 좌천되었다.
그리고 훗날 다시 조정에서 부르자 충성을 다 했지만 인조반정으로 인해 졸지에 또다시 토사구팽 당하며 생을 마감했으니 그의 아들이 조선을 증오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