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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부산의 살아있는 정신 부산첨사들
1. 서론
2. 부산의 첨사들
1) 부산진 첨사 정발
2) 다대진 첨사 윤흥신
3) 부산첨사들의 공을 기린 이광국 첨사
3. 오늘날의 정신으로 이어지는 부산첨사
5. 결론
1. 서론
부산은 바다와 접해있어 바다로부터 오는 적들의 신발에 소금기도 빠지기 전에 그들과 부딪쳐야하는 곳이다. 그래서 부산은 센 바다의 풍파만큼이나 모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특히임진왜란의 흔적은 사실적이고 강하게 남아있다. 부산의 이러한 상흔들은 오늘날 재조명되면서 오히려 위대한 항거의 역사를 기억하게 한다.
이 지면에서는 임진왜란 때에 오직 부산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과 같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바친 부산첨사들의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소속이나 명분을 따지지 않았던 무사들, 부산첨사들의 담백한 충정과 용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첨사란 조선시대 경상 좌수영 휘하 부산진의 지휘관인 첨절제사의 약칭이다. 조선 전기의 군사 조직은 1466년(세조12)에 완성된 진관체제(鎭管體制)로서 전국 행정단위로서 전국 행정 단위의 ‘읍(邑)’을 동시에 군사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하였다. 그 대소의 크기에 따라서 주진(主鎭)· 거진(巨鎭)으로 구분하고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임무도 겸하게 했다. 진관체제 하의 수군지휘체계는 주진· 거진· 제진의 진관편성에 따라 수군절도사 · 첨절제사 · 만호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첨사란 첨절제사의 준말로 절도사의 관할에 속하는 거진의 한 무관직을 말한다.
절도사의 아래로 병영(兵營)에는 병마첨절제사, 수영에는 수군첨절제사가 있었다. 이들은 종3품관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경상도 다대포와 평안도 만포진에는 정3품 당상관을 임명하였고, 특히 수군으로서 중요한 해안지방의 독진(獨鎭)과 그 진관(鎭管), 육군으로서 평안 함경도지방의 독진과 그 진관에는 수령이 겸하지 않고 전문적인 무관으로서 첨절제사를 두었는데 이 경우에 한하여 첨사라고 약칭하였다.
여기에서 다루고자 한 부산의 첨사는 어떻게 근무하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겠다. 부산진은 조선 초기에는 반도 동남단의 요진으로 동래현에 속했고, 현의 남쪽 8㎞ 남짓한 곳에 경상좌도 수군절제사영이 있었다. 첨절제사진을 부산포에 설치한 것은 배 안에서만 영위하다보니 유사시 후퇴할 공간이 부족하고 원군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각 연변에 성을 쌓아 유사시를 대비하자는 성종 대 조정의 축성론에 기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부산포에도 첨절사진이 설치되어 이때부터 부산첨사가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산은 해양도시로 항상 군사적인 위치에서 매우 중요시 되었다. 이러한 부산에 대한 중요성은 성종 때에 이르러 강조되어 성보의 축조가 계획되고 완성되었다. 그래서 1483년(성종14)에 부산포 첨절제사는 제포 첨절사와 함께 종래 종3품에서 당상관으로 부임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기대와 관심에 부흥이라도 하듯 왜구의 침략에 부산의 첨사였던 정발, 윤흥신첨사의 업적을 살펴보고, 또 세월이 흐른 뒤에 이들의 업적을 찾아서 공을 기리고자 한 이광국 첨사의 행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2. 부산의 첨사들
1) 부산진 첨사 정발(1553~1592)
부산진 첨사인 정발은 지금도 부산의 관문을 지키며 우러르고 있다. 첨사로서 부산역사를 세운 그는 정발장군으로 부산시민의 가슴에 남아있다. 또한 정발은 알려진 다른 첨사와 달리 글에도 능하여 인품과 학식 무관의 기지를 겸비한 것으로 더욱 명성이 높다. 알다시피 첨사는 무관으로 문장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정발은 달랐다. 정발은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말과 웃음이 적어 선비다운 품행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소학의 한 구적인 ‘거처(居處)하면 공경함을 다한다’는 구절에서 큰 깨달음을 얻어 평생동안 그것을 마음에 지니고자 하였다. 이렇듯 글을 좋아한 그는 어린 나이에 서서오경에 통달한 정도였으며, 어머니가 나이가 많아지자 과거에 급제하는 것에 더욱 매진하였다.
드디어 1577년(선조10) 정발은 나이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곧 이어 해남현감에 임명되었다. 그후 정발은 거제현령이 되었다가 다시 조정에 들어와 비변사의 낭관에 임명되었다. 비변사 낭관으로 재직하면서 하루는 대신들이 모여 앉아 정발에게 붓을 잡게 하고 불러주는 것을 쓰게 했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글자라도 거침이 없이 물이 흐르듯 써내려갔다. 그 자리에서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를 칭찬하였다.
정발은 이렇게 경력이 쌓이고, 1592년 정3품 당상관의 품계인 절충장군으로 승진되면서 부산진의 사령관인 부산진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부산진첨사사로 떠나려던 정발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듯 어머니에게 하직하며 눈물로 말하였다. “소자가 벼슬을 구한 것은 본래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이미 임금의 신하가 되었으니 또 마땅히 나라를 위해서 죽을 것입니다. 충효는 두 가지를 온전히 다 할 수 없사오니 원컨대 어머님께서는 소자를 염두에 두지 마옵소서.” 이 말은 들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정발은 일본과의 전운이 점차 짙어가던 때에 부산진에 부임하였기에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는 성곽을 보수하고 방어태세를 갖추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1592년(선조25) 4월 13일 오후 5시경 마침내 왜적이 부산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왜적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조선 침략 선봉 제1군 18,700여명은 700여 척의 병선으로 부산포를 내습하였다. 황령산 봉수대의 긴박한 신호를 통해서 이를 접한 정발은 세척의 전함을 거느리고 급히 바다로 나갔다. 이때 정발은 군민을 지휘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쉬지 않고 성을 돌아다니면서 사기를 북돋웠다. 이때 성안의 군·관·민은 더욱 분발하여 항전하여 삽시간에 성안은 피아의 시체가 쌓여 세 곳의 작은 언덕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얼마 후 성안에 있는 조선군의 화살이 다 떨어졌는데도 힘있게 싸우는 정발에게 한 부장이 다가와서
일단 구원병이 올 때까지 성을 도망쳐서 기다리자고 하였다. 이에 정발은 노발대발하며 “대장부는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 다시 성을 버리자고 말 하는 자는 내게 목을 벨 것이다.”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나는 마땅히 이 성의 귀신이 되리라. 떠나고 싶은 자가 있거든 떠나라.”라고 호통치면서 기진맥진한 군민의 사기를 올렸다. 이러한 정발의 외침을 들은 군사들은 모두 울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힘껏 싸웠다. 이렇게 치열한 접전이 계속되는 속에서 정발은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을 맞고 순절하고 말았다. 정발의 죽음으로 조선군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고 마침내 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정발은 살아서는 용감한 장군, 충직한 공무원인 부산첨사로 위대했다. 또한 죽어서도 그의 이름은 숭고하고 기억되었다. 그와 죽음까지 함께 한 연인과 종을 통해서 인간적인 믿음과 아름다움까지 찾아볼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애향이라는 첩이 있었다. 그녀는 그 당시 18세였는데, 그의 전사 소식을 듣자 달려와 통곡하며 그의 시신 옆에서 그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정발의 종인 용월도 왜적에게 끝까지 대항하며 싸우다 죽었다. 이러한 애향과 용월의 죽음에 대한 의미는 정발이 장군으로서 기개와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인간미를 동시에 갖추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발의 용감한 모습은 일본인들에게도 유명했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시 가장 용감한 장수는 부산의
흑의장군(黑衣將軍)이라고 하였다. 이는 정발이 흑색 전투복을 입고 진두에서 용감하게 싸운 늠름한 기상을 보고 부르게 된 것이다. 정발은 풍채가 준엄하고 정숙하였다. 거기에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독서한 내공의 힘까지 겸비하였으니 그윽한 인품으로 풍겨져사람이 따랐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리더들이 배워야할 영웅의 카리스마인 것이다.
정발이 순절한 이후 부산 사람들은 그의 거룩한 죽음을 기리는 일을 시작하여 1633년(광해군14)에 부산진성의 군사들이 그의 의열을 추모하며 받들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발의 무공이 널리 알려졌다. 그 후 선위사 이민구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에 정발을 함께 배향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였다. 그 청원으로 1624년(인조2)에 송공사는 충렬사로 명칭이 바뀌고 이곳에 정발도 함께 모셔지게 되었다.
2) 다대진 첨사 윤흥신
다대진의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이는 당시 서평포 · 다대포 · 부산포 등이 모두 지금의 부산영역이지만, 다대진은 부산진보다 군사적 비중이 낮고 규모도 작으며 당시로 보아서는 외떨어진 곳이라서 상황을 잘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다대진 첨사였던 윤흥신에 관한 기록도 임진왜란이 끝난 1604년(선조37) 6월 25일에 공포된 선무공신록권(宣武功臣錄券)에 원종 1등 공신으로 올라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의 업적이 이렇게 묻혀버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조실록』에는 다대진 첨사 윤흥신이 순절한 기록을 ‘윤흥신은 왜적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죽었다’고 적고 있고,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다대진 첨사 윤흥신은 힘써 싸우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적고 있다. 그뒤 1764년(영조40) 당시 동래부사 강필 리가 지은 「윤공사절기」에는 다른 글에 씌어진 윤흥신과 관련된 기록을 모두 인용하여 임진왜란 당시 그의 행적을 적었다. 그와 동시에 다대진 첨사였던 윤흥신의 전공이 밝혀지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부산첨사들의 공을 기린 이광국 첨사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용기와 애국심은 본받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귀한 실천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업적을 남긴 이들을 찾아내어 이 영혼을 위로하고 그의 자손을 칭찬하여 국민에게 모범이 되도록 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산의 첨사들은 임진왜란이라는 지옥의 전투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이다. 워낙 치열한 전투였으므로 죽은 자의 시신도 찾기 힘든 상황임을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 부산진에는 첨사가 이유도 없이 죽는 일들을 두고, 세인들은 원혼의 문제와 연관하여 생각하였다. 전해져 오는 설화에는 임진왜란 때 오직 나라를 위해서 죽은 이들의 원혼들이 부산첨사를 통해서 위로받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도 부산진에 첨사가 부임하면 며칠이 지나지 않아 갑자기 죽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성을 자성대로 옮기게 하고 옛 성터의 연못에서 나온 수많은 시신의 뼈들을 모아 자성대 밑에 묻었다. 이후 이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의 꿈에 이정헌이 나타나 부산진을 지키다가 전사하였으나 조정에는 그 공로를 아는 사람이 없어 섭섭해서 호소하려고 부산진첨사의 꿈에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첨사들은 모두 말도 하기 정에 죽었다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이 일이 있고 난 다음 날부터 마을에 유행병이 발생하여 갑자기 하루에 40여 명씩 죽어갔다.
이 상황을 보고 꿈을 꾼 노인이 이상하게 여겨 당시의 동래부사 홍명한을 찾아가 꿈이야기를 하였다. 홍명한 즉시 이정헌의 공로를 조정에 알려 좌승지의 관직을 내리게 하고 직접 이곳에 와서
제사를 크게 지내니, 그 후로는 무사하였다고 한다.
1766년(영조42)당시의 부산 첨사 이광국은 임진왜란 때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고자 함에 뜻을 다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의 부산 진성 옛터에 정발과 함께 전투에 나선 군사와 백성들을 위한 제단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정공단이다. 정공단은 부산시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10호로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있다. 또한 부산첨사 이광국은 임진왜란 때 외적을 맞아 항전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이정헌을 이곳에 모셨다. 부산첨사의 노력으로 이정헌은 공로를 인정받아 정공단 서쪽의 별단에 모셔졌다. 부산첨사의 노력 끝에 묻혀질 뻔한 이정헌의 의로운 죽음은 기리 남아서 국민의 등불이 되었다.
3. 오늘날의 정신으로 이어지는 부산첨사
첨사는 빼어난 직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전문적인 무관이다. 맡겨진 지역을 지켜며 전시에는 생사를 불문하고 성을 사수해야 하는 외로운 무관이다. 특히나 부산의 첨사들은 임진왜란 때에 바다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살기가 시퍼런 왜군들을 처음으로 맞아서 결투를 벌여야 했다. 사실 왜구와 맞서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고 기억 된 이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대표였다. 그런데 각 진마다 의롭고 용감한 첨사들의 희생적인 활약이 있었기에 송상현의 업적도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산 진첨사 정발의 학자적인 인품과 무관으로서의 카리스마는 오늘날의 우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이러한 문무를 겸비한 카리스마는 적군에게도 통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일본군에게 부산은 관문이다. 일본군은 바다를 표류하며 노략질과 싸움을 일삼은 자들로 전쟁에 강했다. 이렇게 거칠고 잔인한 침략자들에게도 정발 장군의 카리스마는 미치었다. 정발은 그들의 난잡한 지휘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품격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산 첨사 정발을 오늘날의 나약한 정신과 활동하지 않는 리더들을 비추어 볼 가치가 있다. 리더란 구구절절하게 길게 말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하고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다. 또한 자신이 택한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어떤 일이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이다. 이 자세는 주위의 동료나 부하들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발의 풍채와 인품에 적국의 장졸들도 벌벌 떨게 하였던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국민에게 명예를 가지지만 적국에도 떨치는 자이다. 첨사 정발을 오늘날의 삶으로 초대하여 생각해 보자. 당장 피해버리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독자적인 노력으로 안 된다고 포기하여 아예 시도도 못해본 일들도 많다. 지금 당신 앞에 놓인 그 어떤 일이 임진왜란 때에 길목이었던 부산을 지켜야 했던 부산첨사들보다 더 긴박하고 절실하겠는가.
4. 결론
우리네 삶이 피폐함은 혼자서만 잘 살아보려고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부산의 자성대, 좌천동의 정공단, 부산역의 정발장군 동상들은 이를 잘 입증해 보이고 있다. 그들은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서 혼자 살아남은 것을 포기했다. 혼자서 사는 삶은 그 삶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지만, 모두를 위해서 사는 삶은 영원한 등불로 남는다.
앞에서 서술한 부산의 첨사들은 중앙으로 침입하려는 왜군들의 길목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바쳤다. 첨사라는 화려하지도 그다지 명예롭지도 않은 직책이지만 그 직분에 최선을 다했다.
오늘날 그들이 남긴 의미를 정리하자면,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하게 지켜야할 가치는 함께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광국 첨사가 200여 년 전에 안타깝게 죽은 첨사들의 업적을 찾아준 것처럼 타인의 공로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할 줄 아는 정신이다.
끝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부산을 지킨 첨사들의 담백한 무사정신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원혼이 되어 떠돌지언정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 의미를 되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