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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기념특집─ 2000년대 문학의 특성과 그 방향___소설
소통疏通 혹은 소외疏外, 소통 시대의 역설
김효석
1. 소통의 욕망, 불통의 현실
사회의 반영으로서 한 시대의 문학은 삶이 그러하듯 지나온 시절의 흔적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혼융되어 담겨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문학을 조망하기 위해선 이를 몇 개의 기표로 정의하고 구획하기보다는 현 시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는 문학적 징후들의 단면을 짚어보는 것이 훨씬 현실감 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이 글 역시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몇몇 작품들(『이상문학상작품집』, 문학사상/ 『젊은 작가상수상 작품집』, 문학동네/ 『소설이천년대』, 민족문학연구소)을 중심으로 사회적 변화에 따른 작가들의 현실인식을 엿보는데 그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소한 작업 또한 현실반영의 최전선에 자리한 소설이 사회의 고갱이를 진단하고 전망탐색의 정수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현재 소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가는 곧 우리와 우리가 속한 사회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우리는 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 ‘소통’은 요즘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회적 화두라 할 수 있다. 에스엔에스SNS나 트위터 등 인터넷과 무선 전화기의 확산은 소통의 문제를 더욱 사회의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대량 소통을 가능케 한 전자 매체의 눈부신 발전을 등에 업고 정부는 물론, 사회 곳곳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새로운 네트워크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하지만 부풀려진 소통의 이면을 조금만 들춰보면 우리는 불편한 진실을 만나기 어렵지 않다.
주위엔 컴퓨터와 휴대전화에 고개를 묻은 채 트위터나 카카오톡 등을 통해 문자를 주고 받으며 블러그를 업그레이드하고 댓글을 다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트위터와 카카오 스토리 등 에스엔에스SNS엔 경쟁하듯 자기위선의 라이프 스토리들이 자랑스레 올라온다. 익명성으로 무장한 출처 없는 뜬 소문과 무책임한 정보들, 진정성을 잃은 가벼운 대화들이 가상 공간에 어지럽게 떠다닌다.
현대의 물질문명과 매체가 가져온 이러한 비대면성의 확대는 가상공간 속의 가짜 현실과 가짜 소통을 용인하게 만든다. 이 거대하고 새로운 시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적당히 속고 속이며 음험하기까지 한 네트워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하지만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벗어나기엔 너무나 끈끈한 시뮬라크르 안에서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고립은 점점 심화된다.
2. 괴물로 남거나, 유령처럼 사라지다
1997년 아이엠에프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사회의 ‘잃어버린 십년’은 백수, 루저 등 사회적 약자들을 양산했고 젊은이들의 현실인식을 암울하게 만들었다. 젊은 세대의 사회에 대한 냉소는 일찍이 기성세대의 경제적 파탄과 정치적 혼란, 가족의 붕괴 등을 목도한 데서 기인한다. 2000년대 소설 속 주인공들의 무기력증과 허무의식,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은 이와 같은 전 세대의 좌절과 관련 깊다.
김숨은 이처럼 갑갑하고 암울한 현실이 가져온 무기력감을 소설 형식의 차원까지 밀고 나간다. 김숨의 『노란 개를 버리러』(문학동네, 2011)와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2011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공지영 외, 문학사상, 2011)은 출구를 잃고 쳇바퀴처럼 계속되는 일상에 볼모가 되어 버린 현대인의 삶을 의미 없이 반복되는 문장으로 재현하고 있다. “우린 노란 개를 버리러 갈거다”(15쪽) 등의 반복어구, 이상의 「오감도」와 예수와 12제자를 떠올리게 하는 무명의 열두 사람의 등장은 출구도 내일의 기약도 없는 현실을 반영한다. 여기서 “노란 개”의 이미지는 현대 사회가 낳은 “잉여”를 상징하면서 사회체제 내 사람들이 결코 버릴 수 없는 욕망의 기호로 읽힌다. 지겹게 반복되는 구절, “노란 개를 버리러”는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물신에의 요구와 체제 내 순응으로 오랫동안 쌓여진 “피로감”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김미월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2013 제4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3)은 현대인의 피로감과 무기력증을 너무나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식에도 별반 동요하지 않는다. 이같은 밋밋한 종말론은 활력 잃은 허무만이 가득 찬, 현재의 전망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2000년대 소설에 다시금 부각된 ‘아버지 부재’ 모티브는 이러한 갑갑하고 지루한 현실 앞에 좌절한 사람들이 반영된 결과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부재는 그 사라짐이 자의든 타의든, 실종이든 죽음이든, 다음 세대와 남겨진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다. 「달려라 아비」(『달려라 아비』, 창비, 2005)는 경계까지 밀려나 떠도는 아버지로 인해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의 시선을 보여준다. 소설 속 “나”는 아버지가 계속해서 달리고 있다고 상상하는데 “내가 아버지를 계속 뛰게 만드는 이유는, 아버지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 내가 아버지에게 달려가 죽여 버리게 될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26쪽)라고 토로하면서 겉보기와는 달리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처럼 속악한 현실에 정착하지 못한 아버지 세대의 ‘사라짐’은 박성원의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캠핑카를 타고 울란바토르로」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문학동네, 2009) 등의 연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아버지들은 체제 안의 길들여짐을 견디지 못하고 유목민의 삶을 택한다. 하지만 방향성을 잃고 탈주를 꿈꾸는 아버지들의 좌절은 이미 소설 속에 예고된다. “시간의 바깥으로 가는 것은 죽음”(10쪽)이라는 나지막한 전언은 이들의 달리기, 탈주의 끝에 죽음이 길게 드리워져 있음을 암시한다.
박민규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소설 이천년대』, 박민규 외, 민족문학연구소, 생각의 나무, 2007)도 “아버지의 사라짐”을 통해 “나”가 현재 삶의 불모성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때로 새벽의 전철에 지친 몸을 실으면, 그래서 나는 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몸을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밀지 마, 그만 밀라니까.”(34쪽) 이처럼 이 소설엔 약육강식의 사회에 떠밀리듯 몸을 실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들의 비애가 드러난다. 이러한 아버지들, 현대인들을 열차에 밀어 넣으면서 느끼는 “나”(푸쉬맨)의 좌괴감은 아버지의 희생을 강요했던 스스로를 뒤돌아 볼 수 있게 만든다. 결국 사라진 아버지가 한 마리 기린으로 변신하여 도시를 어슬렁거리는 장면은 아버지의 일상 탈주가 환상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임을 확인케 한다. 반면 박민규의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2011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공지영 외, 문학사상, 2011 )는 가정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노력이 오히려 가족 붕괴의 위기를 가져오게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딜도”의 상징성은 현대 사회에 넘쳐나는 성적 방종과 즉물적 인간관계에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져 버린 이 시대 아버지들의 군상을 희화화한다. 만신창이가 되어 쫓겨났음에도 결국 자신이 일하던 신축 아파트 공사장에서 뛰어내리는 소극적 반항밖에 할 수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천운영, 「입김」, 『소설 이천년대』, 2007)나 경제적 타산打算에 의해 딸들에게마저 버림받는 헛똑똑이 0번 아줌마(이명랑의 「까라마조프가의 딸들」, 『소설 이천년대』, 2007)의 모습은 직장은 물론 가정까지 침범한 자본의 위세를 보여준다.
손흥규의 「투명인간」(『2011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11)도 아버지의 ‘사라짐’을 모티브로 가족과 아버지 사이의 단절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버지의 생일날 아버지를 못 본 척한다는 장난으로 시작된 가족 간의 외면은 이들 사이에 쌓여왔던 무관심과 불통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하고 오래된 것이었는지 다시금 확인케 한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아버지가 이제는 정말 안 보여요. 나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 음성을 언제쯤 듣게 될까” “집에 아무도 없어. 식구들이 사라졌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238쪽)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바로 보지 못하는 불통의 장면은 가족 구성원들까지도 “하나씩의 꼭지점처럼” 소외된 가정 붕괴의 현실을 보여준다.
김윤영의 「얼굴 없는 사나이」(『소설 이천년대』, 2007) 또한 이러한 ‘사라짐’이 모티브로 되어 있다. 언제나 한결 같던 선배가 어느 날 사라진 자리엔 근거 없는 뜬소문과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속물 근성의 아내만 남는다. 결국 선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이전의 확신이 흔들리게 되면서 비워진 선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선배일지 모르는─의 서늘한 미소는 이와 같은 사회의 냉정함과 속악함을 간파한 자가 체제 내 순응자에게 던지는 냉소라 할 수 있다. 이는 김경욱의 「빅브라더」(『2011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11)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기도 전에 저질렀다는 죄악을 되새기느라 파랗게 질린 얼굴들 위에서 홀로 씩 웃어” 보이던 형의 미소,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143쪽) 형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상징화되는 대타자의 억압에 조금은 모자란, 바보와 루저의 삶으로 저항한다. 하지만 소설 속 “원죄”는 아버지의 길을 용인하고 목사가 된─새롭게 메워진─ “나”가 토로하듯 세상의 위악성을 알고 있음에도 세상의 시선과 체계 안에 기생하고 있는 체계 속 인간들이 져야 할 문제일지 모른다. 이처럼 거대한 조직 안에서 필요에 의해 쓰이다가 버려지고, 없어지면 메워지는 부속품처럼 전락한 개인의 이야기는 편혜영의 「통조림 공장」(『2011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11)에도 이어진다. 소설 속 주인공의 통조림 집착은 유통기한 없이 의미 없는 삶을 연장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삶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누구도 열어보려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변질되지도 없어지지도 않을 삶, 그의 실종을 수사하는 형사는 물론 가족마저도 그가 살아왔던 삶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장장에게 핍박받던 부하직원 박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다.
이처럼 2000년대 소설 속 ‘사라짐’의 모티브는 속악한 현실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 읽힌다. 반면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2011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집』, 문학동네, 2011)에는 억압된 현대인의 정신적 상흔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나”는 직장 내 소통의 단절로 쌓인 분노를 이해관계가 없는 국밥집 할머니와 소녀를 살해하는 것으로 분출한다. 살인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를 둘러싼 가족의 무관심은 이같은 비이성적 분노의 또다른 원인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난 뭔가다. 셀로판지가 되기엔 너무 두껍고 또 인간이 되기엔 너무 얇은 뭔가다. 그 뭔가가 날 화나게 한다. 주위의 모든 것이 내 분노의 원인이다.”(144쪽)에서 알 수 있듯 소통을 배제한 셀로판지─(물物)─로 살아야만 견딜 수 있는 세상, 그 안에서 소통의 욕망은 좌절되고 그 좌절은 분노로 쌓이게 된다. 결국 환상과 실재가 혼재된 상황에서 나는 가족에게조차 살의를 느낀다. 이 소설에서 백수이면서 나와 동일시되는 누나가 폭식의 “돼지”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다면 황정은의 「묘씨생」(『2011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공지영 외, 문학사상, 2011)은 버려진 고양이의 삶에 현실의 불모성과 현대인의 무기력함을 투영한다. “세상 고양이란 모두 그 정도는 각박하고 허기진 얼굴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얼굴들과 견주어도 그는 유별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건대 그도 같지 않았을까. 이 몸과 같지 않았을까.”(270쪽)에서 드러나듯 상가의 남겨진 음식을 모아 끼니를 해결하는 곡씨 노인과 버려진 고양이의 비정상의 몸은 서로가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무엇보다 “그 놈이 아비하고는 다르게 살아보겠다고 그토록 박차고 나갔건만 실은 보잘것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아들의 인생이라도 별 수 없을 것이다.”(278쪽)라는 곡씨 노인의 독백은 삶의 황폐함이 세대를 이어 계속되리라는 깊은 절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김종욱의 「거리의 마술사」(『2013 제4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3)에도 불통의 사회가 낳은 은둔형 외톨이가 등장한다. 학교 내 벌어진 집단 따돌림과 그로 인해 벌어진 자살 사건을 회고하는 희수의 진술은 흐릿하기만 하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을 괴롭히던 태영을 찌르고 자살을 시도한 남우나 따돌림의 원인을 제공한 또 다른 급우 안나에 대한 반 친구들(세상)의 시선이다. 반 친구들은 외톨이 남우는 물론 반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안나(연예인)에 대해서도 대중매체를 통해 지어진 허상으로 인식할 뿐이다. 일반인(반 친구들)의 입장에선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남우와 안나의 은밀한 교섭은 이러한 바깥 시선에 소외의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연대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회나 체제에 제대로 편입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극단적 소외의식은 소설 속 괴물이나 동물 또는 정신분열자, 은둔형 외톨이 등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이들 소설 속 예외적 인간, 비인간들은 체제 내 인간들에게 불편하고 생경한 경험─이전 「변신」(카프카)의 벌레이나 「유자약전」의 유자(이제하)를 보며 느꼈던─을 하게 함으로써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준다.
3. 진정한 소통을 꿈꾸며
이처럼 2000년대 소설들은 현대 사회의 가짜 욕망, 가짜 소통의 실체를 들추어내고 그로 인한 현대인의 소외와 불통의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 아이엠에프IMF에 의한 좌절의 경험과 신자유주의 체제의 확산에 익숙해진 한국사회에서 백수나 루저, 유령과 괴물들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 하지만 소설은 이러한 암울한 현실에서도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서 담아내고 있다.
「달려라 아비」(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05)는 현재 사회의 불모성과 불통의 현실에 대한 젊은 작가의 현실극복의지와 삶에 대한 긍정성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다. 소설 속 “나”가 상상 속 아버지에게 선글라스를 선물하는 행위를 단순히 아버지와의 화해로 볼 순 없지만 유목민처럼 떠돌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처지와 심경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미부재의 부자父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달려라 아비」의 연작이라 할 수 있는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또한 결핍의 상처를 특유의 발랄한 상상력과 긍정의 힘으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의 인사」의 “나”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에서 벗어나, “문득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161쪽)며 마음을 다잡는 모습은 전세대의 실패를 딛고 자립적인 “나”로 재탄생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사회적 억압 속에 사그라진 아버지, 이전 세대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물속 골리앗」(『2011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집』, 2011)에도 이어진다. 아파트와 함께 수몰될 위기에 처한 “나”가 골리앗 크레인에 의지해 죽음과 사투하는 모습은 회사의 부당한 조치에 항거하다 타워크레인에서 죽어간 아버지의 모습과 교차된다. 이처럼 사회와 이웃으로부터 고립되는 극한 상황에서 “나”는 그동안 도외시했던 아버지의 고통과 상처, 외로움과 소통하게 된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하늘에 뜬 노란 달을 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반달이었다. 비록 흐릿하긴 했지만 그걸 보니, 엄마, 나무뿌리에 안겨 떠내려간 엄마 생각이 났다.”(46쪽) 결국 홀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와 어머니와의 소통이 가능해지자, “누군가 올거”라는 타인에 대한 희망 또한 살아난다. 이처럼 삶의 고해에서 한번쯤 노란 달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은 누군가를 향한 기다림과 소통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에서 나온다. 사뮤엘 바케트의 ‘고도’처럼 고해苦海에서 그 기다림은 삶을 지속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서 “노란 달”의 이미지는 김숨의 『노란 개를 버리러』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노란 개”와 대조된다. “노란 개”가 출구 없이 지겹게 반복되는 상징계에서 버리고 싶지만 놓을 수 없는 그 무엇이라면 “노란 달”은 삶의 지표에서 언뜻 보이는 실재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지아 또한 소통의 가능성을 가족 관계의 복원으로 풀어내고 있다. 「목욕 가는 날」(『2011 제35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11)은 오랫동안 서먹했던 엄마와 두 자매가 몸을 통해 진정한 소통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나”가 나란히 앉아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장면은 허위로 가득 찬 거짓 소통의 벽을 허물고 맨살의 소통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하지만 소박한 감동을 안겨준다. 이는 냉혹한 현대사회가 불어넣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물질문명 이전의 소통방식을 복원하는 것이 물신과 기계문명의 현시대를 극복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같은 맥락에서 「풍경」(『소설 2000년대』, 2007)의 치매로 고통받는 어머니와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아들, 그리고 이웃집 하우댁이 보여주는 아날로그적 소통과 사랑은 도시의 일방적 소통과 대조된다.
윤성희 「U턴 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소설 이천년대』, 2007)는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애란의 “아비”마냥 이 소설의 “아비” 또한 할아버지로 상징되는 폭압적인 사회에 끼어들지 못하고 기차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 또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기름처럼 부유한다. “나”는 열차로 뛰어든 여자로 인해 지하철 기관사를 그만둔 Q, 자신의 별명이 “유령”이라고 말할 만큼 자존감을 잃은 W, 가출한 여고생과 함께 보물을 찾으러 떠나게 된다. 결국 이들은 보물찾기의 끝에서 자신들의 현재를 보물로 찾으러 간 자리에 묻고 돌아오는데 이러한 우연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보물 찾기는 이들의 연대를 가능케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돈과 능력을 모아 만두가게를 창업하고 성공적으로 사회에 편입하게 된다. 개인들의 소통과 이해가 사회적 소통과 이해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버림으로써 얻게 된 이들의 성공은 시사하는 바 크다. 「매일매일 초승달」(『2011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11) 또한 사회에서 격리된 소매치기 세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간의 소통이 험난한 현실을 극복할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사각지대와 소외층에 대한 작가들의 시선은 최근 급격히 한국 사회에 편입된 북한이탈주민, 다문화가족, 이주노동자 등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황석영의 『바리데기』(창비, 2007)와 강영숙의 『리나』(랜덤 하우스, 2006), 권리의 『왼손잡이 미스터 리』(문학수첩, 2007), 조재진의 『로기완을 만났다』(창비, 2011) 등은 이들 사회적 소외자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불통의 한국 사회를 우회적으로 드러내거나 전지구적 연대 가능성과 소통의 확산을 꾀한다. 이밖에 김재영(『코끼리』, 실천문학사, 2005)은 이주노동자가 지닌 디아스포라로서의 비애와 소외의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한국 사회의 소외층을 소재로 한 소설들의 대거 등장은 한국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새로운 타자들을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주목할 만한 시도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박민규의 「아침의 문」(『2010 제34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10)도 사회의 무관심 속에 소외된 인물을 통해 소통과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나”는 자살 사이트의 리더 JD, 두 명의 소녀들과 함께 자살을 시도하지만 홀로 살아남게 된다. 이들의 자살 동기는 문제되지 않는데 이들이 겪는 삶의 고통은 모두 자신들만의 몫일 뿐이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그것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 성큼, 의자 위로 나는 올라선다”. “나”는 실패한 자살을 완성하고자 옥상으로 향하는데 그 곳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홀로 아기를 낳게 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이곳을 나가려는 자와 그곳을 나오려는 자는 그렇게 서로를 대면”(33쪽)하게 된다. 결국 아기 엄마는 아기를 어쩌지 못하고 옥상에서 도망치고 그 순간 목을 매 자살하려 했던 “나”는 얼떨결에 건너편 건물의 아기를 향해 나아간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는 잠시 아이를 안아본다.” “바닥의 콘크리트보다도 무뚝뚝한 인간이지만, 적어도 콘크리트보다는 따뜻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씨발”(36쪽)이라 중얼거리지만 어느새 ‘“나”는 우는 아기를 어르기 시작한다. “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긴 그렇잖아?”, “하물며 그 인간은 울지 말라고 속삭인다.”와 같은 양방향의 서술전략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사회의 밑바닥까지 밀려난 인간들조차도 인간성 회복과 소통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정용준의 「떠 떠 떠, 떠」(『2011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집』, 2011) 또한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사자와 판다의 탈을 쓴 채 살아가야 하는 소외된 인생을 그려낸다. 말 더듬이와 간질로 인해 사회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나”와 “그녀”의 사랑은 사회적 소외에 대한 동류의식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들 또한 각자의 상처와 내면의 아픔을 다만 짐작만 할 뿐,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이들의 사랑은 위태롭다. “나는 분명 장애가 있지. 타인의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285쪽) 타자에 대한 이와 같은 소통의 불가능성은 이들에게 가면을 쓰고, 말을 버린 채 살아가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그녀의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고 소통하려는 “나”의 열망은 비록 더듬는 말이 될지라도 그동안 닫아놓았던 입을 떼게 만드는 힘이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많은 말을 할 수도 없고 단 한 마디도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겠지만 상관없다. 그녀는 지금 분명 들을 것이다. 나는 말한다. 그녀는 듣는다. 떠, 떠떠, 떠떠, 떠떠떠, 사.랑.해.”(305쪽)
이처럼 타인에게 온전히 다가가는 일이 힘들어진 현대 사회에서 작가들은 유령과 괴물의 가면을 쓰고 지옥과도 같은 불통의 현실을 인정하라는 듯 생경하고 암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소설에서 사회에 대한 냉소와 독설 안에 감추어진 인간성 회복과 소통의 의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불통의 현실은 더욱더 강한 소통의 열망을 불러일으키므로.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작가들은 힘들게 입을 뗀다. 그래도 희.망.은.있.다.
김효석 /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0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현재 남서울대, 순천향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