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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밤엔 두 번 심하게 기침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잘 잤다. 아침 명상시간에 예상치 않은 말이 입에서 나왔다. “이곳에서 한님이 이루시려고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겠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들과 학부모들까지 학생으로 만드는 거국적 운동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든 국민이 제대로 된 교육을 평생 받으며 사는 나라, 그래서 이제까지와 질적으로 다른 세상을 만드는 프로젝트다. 어른들이 세월호가 준 아픈 과제를 어른스럽게 수습 못하고 갈팡질팡 매달려 있을 때 한님은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인천에서 진도까지 다가오는 내일을 바라보며 ‘희망의 길’을 걷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메시지다. 머리 굴리지 말고 손발이면 손발답게 저마다 맡겨진 소임에 충실하면 된다. 어려울 것 없다.…”
효선이 오늘 옮길 짐을 정리하다가 몸에서 기운이 빠지고 이대로 갔다가는 자기가 너무 힘들고 짜증이 날 것 같아서 중단하고 명상 마치고 오는 나를 기다렸단다. 두더지에게 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시내 집으로 입주할 때까지 그냥 관사에 머물겠다고 했다. 흔쾌히 그러시라고 한다. 전 같았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나한테서 그리고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기 뜻을 접고 아버지 뜻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쉬운 일인지 조금 알겠다. 그래도 어려운 쪽보다는 쉬운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느껴지니 오로지 감사할 따름이다. 괜찮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이야 뭐라고 하든 말든 내가 판단하지 않으면 된다.
부활주일. 두더지가 오랜만에 차를 우리며 용화사 예배를 인도한다. 보리밥, 민들레, 신난다, 소리샘, 향아, 반디와 함께 부활절과 달걀을 화제로 이야기 나눔. 부활절 달걀의 시초가 되었다는 중세기 로잘리느 부인 이야기를 들었다. 픽션인지 실화인지는 모르나 아픔과 사랑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전설이다. 아, 아름다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2017. 4. 16)
⎈ 새벽, 꿈에 문장 하나를 만났다. “안으로 더 밝으려면 밖으로 더 환해야 한다.” 직역하면, “밖으로 더 환할 것이 요구된다(required).” 꿈속에서는 문장이 거꾸로 된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깨어나 생각하니 맞다. 그렇다. 안으로 밝다는 건 나와 하느님에 대하여 잘 안다는 얘긴데 그건 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이루는 무엇이 아니라 나에게서 이루어지는 무엇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밖으로 환한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투명하게, 감추거나 속이는 것 없이, 켕기는 짓 하지 않고, 그렇게 살면 된다. 십목소시(十目所視)요 십수소지(十手所指)니 필신기독(必愼其獨)이라, 많은 사람들이 보며 손가락질하고 있으니 반드시 혼자인 때를 삼가라는 옛말이 그래서 있는 거로구나. 여태까지는 그렇게 살지 못했더라도 이제부터 그렇게 살면 되는 거다.
버럭, 흑진주, 이령의 북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오늘이 월요일이구나. 매주 어김없이 와서 우리 가락을 아이들과 함께 익힌다. 참 성실한 사람들이다. 저런 손발들이 있어서 한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뜻을 차근차근 이루시는 거겠지. 종일 비가 내리고 우중충한데 끊임없이 흐르는 콧물을 휴지로 닦으며 ‘천사들과…’ 번역에 집중한다. 이러다가는 아무리 아껴 써도 휴지 한 두루마리 모두 콧물로 적시겠다. (2017. 4. 17)
⎈ 간밤, 혼자서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기침이 심했다. 효선의 말로는 새벽 두 시까지 그랬단다. 다섯 시쯤(?) 여러 줄 문장이 나에 대하여 무슨 설명을 하는데 능동과 피동이 조화롭게 섞이지 않고 한 가지로 (능동인지 피동인지는 기억나지 않음) 통일되어 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 엉뚱하게도 아하, 내 기침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거의 동시에 그럴 리 없다는 느낌이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것도 알았다. 내 속에서 기도가 한 마디 나왔다. (분명 내가 생각해서 한 기도는 아니었다.) “당신에 대한 저의 불신(不信)이, 저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당신의 뜻에 걸림돌로 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도 다녀오고 명상도 다녀오고 그러는데 기침이 전혀 안 나는 건 아니지만 간밤에 나를 힘들게 하던 그 기침과는 질이 다른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천사들과 말하다’ 번역 계속.
“잘 들어라! 죄(sin)는 소멸될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모든 죄의 이름은 ‘더 이상 좋지 않음’(the no longer good)이다. 모든 죄의 이름이 그렇다! 하지만 죄는 ‘아직 좋지 않음’(the not yet good)으로 바뀔 수 있다. 어디에 정량(定量)이 있는가? 어디에 심판이 있는가? 하느님한테만 있다.” (1943. 10. 22, 18번째 대화)
꽤 많은 가래와 콧물을 배출한 하루다. 저것들 모두 딴에는 제 몸을 위한다고 생산된 것들일 텐데 이렇게 뽑아서 내버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혜미원 원장이 전화로 안부를 묻고 약사인 비파는 해당되는 약품을 챙겨서 가져왔다. 그 마음들이 참 고맙다. (2017. 4. 18)
⎈ 7학년 마음공부 마치는 시간에 갑자기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서둘러 정리하고 자리에 누워 한 시간쯤 자고 나니 정신이 맑아져 있다. 그 사이에 이태수 화백 내외가 거실에서 효선과 점심을 같이 한 모양이다. 내가 누워 있으니 소리 안 나게 조용히 먹었겠지. 속으로 미안했다. 이분들은 현재 남한의 최북단(전곡)에서 최남단(순천)까지 한 달에 한 번 아이들 그림 가르치러 오신다. 무슨 이런 소중한 인연들이 다 있단 말인가. (2017. 4. 19)
⎈ 카비르 번역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삼인출판사 홍승권이 전화를 준다. 원고 보낼 테니 독자들한테 15세기 인도 시인 카비르 한 번 소개해보자고 했다. (2017. 4. 20)
⎈ 8, 9학년 마음공부. 사람이 잘못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그것을 숨기거나 남에게 책임을 넘기거나 부인하는 것이 잘못이다. 사람이 자신의 과오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잘 수습하면 그리고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로써 한 걸음 더 성숙해지는 것이다.
‘천사들과…’ 번역. 너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잘 모르더라도 하늘이 주시는 일이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들리는 음성으로, 하늘에 ‘말의 씨’를 심으란다. 그러면 그 말이 많은 열매로 되어 너에게 돌아온단다. 네 존재가 놀라움으로 되기보다 놀라움의 통로로 되기를 바라란다. 귀에 익은 음성들이다.
동물 맘이 도자기로 구운 부엉이와 향초를 선물한다. 낮잠 자는 동안 비파가 새 약을 주고 갔다. 지난 번 것보다 순한 성분이란다. 도자기도 고맙고 약도 고맙지만 그 마음들이 더욱 고맙다. 하긴 뭐 이런 맛에 사람 사는 것 아니겠는가. (2017. 4. 21)
⎈ 목우당 후배라는 젊은 목사가 중단된 집수리 공사를 맡아서 계속하기로 했다. 당장은 하고 있는 공사가 있어서 5월 10일쯤에야 시작할 수 있단다. 이 일로 목우당이 어제 오늘 이틀 동안 목포–순천을 왕복한다. 막힌 것 같지만 실상은 열린 것임을 이렇게 몸으로 배우는 거다. 무엇을 얼마나 했느냐보다 그 일을 통해서 얼마나 하느님과 가까워지느냐가 문제임을 잊지 말자. 하느님과 가까워진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가 내 배꼽과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일꾼과 함께 돈도 필요한 만큼 주시겠단다. (2017. 4. 22)
⎈ 달라이 라마, 리처드 로어 번역. 용화사 예배. 사랑어린 스콜레를 잠시 쉬기로 결정한 데 대하여, 스스로 자기 생의 주인으로 살다가 주인의 손발로 살아가는 역할의 전환이, 개인뿐 아니라 집단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말하자면,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내가 앞장서겠다, 넌 내 뒤를 따라라. 대강 이런 말씀이신 거다. 뭔지 알 수는 없지만 한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어떤 일이 빈틈없이 진행되는 강한 느낌이다. (2017. 4. 23)
⎈ 며칠만인가? 기침 없이 잠에서 깨어난 아침… 이제 가래도 거의 멈추었다. 한 열흘 착실하게 앓으면서, 나오는 기침을 막아보겠다고 강력 반창고로 입을 틀어막는다면 그 사람 상태가 어찌 될까? 법원과 교도소로 유지되는 소위 법치사회라는 게 그런 형국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났다. 기침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 그러면서 동시에 기침의 근본원인을 치료해주는 사회, 이 땅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일까?
저문 해변을 산책한다. 만조(滿潮)라, 온통 물로 그득한 바다. 문득 신라의 냄새를 맡는다. 아니면 가야 사람들의 은은한 발자취. 어디서 꿈결처럼 들리는 웃음소리. …누가 어둠에 묻혀 이리로 걸어온다. 왕산이다. 뭔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라온다. 하지만 내가 먼저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는 않겠다. 고맙다. 든든하다. (2017. 4. 24)
⎈ 삼무곡 자연예술학교 아이들이 현곡 인솔로 배움터에 다니러 왔다. 오후 늦도록 더불어 잘 놀다가 돌아간다. 운동장 가득 물결처럼 출렁이는 아이들 모습이 보기 좋다.
반디 생일이라고 효선이 저녁을 대접하는데 밥값을 반디가 먼저 내버렸다. 그렇다, 사랑 앞에서 돈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다. (2017. 4. 26)
⎈ 리처드 로어를 번역하는데 큰 충격이다. 루가복음 19장의 ‘금화 한 닢 비유’를 이렇게 읽다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자본주의 논리에 세뇌되어 있었는지, 그래서 예수의 이 절박한 비유가 얼마나 거꾸로 읽혔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아픔이면서 통쾌무비다. 어쩐지 이 비유가 늘 꺼림칙했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멸망으로 가는 세속의 넓은 길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 말고는 생명으로 가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옳다, 죽어야 산다. 잃어야 얻는다.
학부모 책읽기 모임에서 지난주에 어린왕자를 마치고 오늘부터 마르코복음을 읽는데, 마르코를 통하여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사람 예수’를 만나보자고 했단다. 속으로, 한님께서 뭘 하시긴 하시나보다 생각하고 가만히 축하한다. 책씻이를 한다며 푸른 솔이 여수 앞바다가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일행을 초대한다. 식당 건물은 많은 돈을 들여 근사해 보이는데 종업원들의 얼굴이 별로 환하지 않다. 그러니 음식도 별로 일수밖에. 아무리 생각해도 돈은 아니다. 돈은 문제도 답도 될 수 없는 물건이다. (2017. 4. 27)
⎈ 아이들 운동회하는 날. 아침 9시에 출발, 연풍으로 간다. 오늘은 거기서 자고 내일 디아코니아자매회 창립 37주년 기념잔치에 참석한다. 몇 년 동안 초대받고서 가지 못한 자리인데 올해는 가게 되나보다.
(2017. 4. 29)
⎈ 신풍교회 아침 예배에 설교를 하란다. 기림이가 말한다. “아빠, 아무리 그래도 5분 설교는 안 돼. 적어도 10분은 해야지. 너무 짧으면 교인들이 섭섭해 하거든.” 교인들에게 높은 강단에서 내려가고 싶은데 허락하겠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다. 목사가 자기네와 동등한 자리에 서서 설교하는 것이 어색한 모양이다. 망할 놈의 종교전문가들이 오랜 세월 그렇게 세뇌시켜놓았으니 이해는 되지만 내 말이 스스로 어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생기면 허락을 구할 것도 없이 강단에서 내려서볼까? 아서라 말아라, 네가 또 무슨 기회를 노린단 말이냐? 점심을 어느 권사가 대접한다며 이화령 고개 옛날 휴게소였던 식당으로 안내한다. 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20여 년 전, 거창학교 다니는 소리 배웅하러 김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 기사가 눈 때문에 넘지 못하겠다며 차를 돌렸을 때 슬기와 걸어서 넘은 이화령 바로 그 고개다. 고갯마루에서 만난 트럭 뒤 짐칸 바닥에 앉아 눈길을 내려올 때 3개월쯤 계속되던 내 실어증이 나도 모르게 풀렸지. 둘이서 뭐라고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슬기가 깜짝 놀라며 “어? 아빠 방금 말했잖아?” 했고 그제야 나도 묶였던 혀가 풀려서 말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그날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트럭 짐칸에 앉아서 내려오던 바로 그 길을 김 목사의 승용차로 내려온다. 무슨 이유로 관광버스를 놓쳤다는 두 남녀를 뒷자리에 태우고서.
충주에서 오랜만에 슬기 차를 타고 천안 단비교회까지 온다. 서울에서 내려온 효선은 은행나무 알레르기로 콧물에 재채기에 고생이 심하다. 전에 디아코니아 모원 건물로 쓰던 게스트하우스에서 고단한 몸을 자리에 눕힌다. (2017. 4. 30)
⎈ 아침 은석산을 오른다. 팔부능선쯤에 임도가 새로 났고 거기서부터 길이 보이지 않아 중도에 내려왔다. 정상까지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신비스럽고 고마운 은석산 숲길이다. 단비교회에서 디아코니아 37주년 기념예배 설교. 사람이 사람을 섬긴다는 게 무엇인지, 어째서 그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인지를 깨치기 위하여 37년 동안 수고한 데 대하여 고맙고, 그동안 잘한 일도 많고 잘못한 일도 많지만 그로써 우쭐거릴 것도 없고 괜한 죄책감으로 주눅들 것도 없다는 말씀을 전했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무엇을 잘했으면 너희가 잘한 게 아니라 내가 잘한 것이다. 무엇을 잘못했으면 너희가 잘못한 게 아니라 내가 잘못한 것이다.” 옮기면서도 이런 말에 사람들이 과연 동의할까? 싶었다. 점심 먹고 효선이 운전하는 차로 내려와 신난다가 끓인 김칫국으로 저녁 먹다. (2017. 5. 1)
⎈ 하루를 거의 잠으로 보낸다. 이럴 수도 있구나. (2017. 5. 2)
⎈ 부처님 오신 날. 부처가 어느 하루 날을 잡아 세상에 왔다는 이야기 자체가 그의 가르침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 혹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리처드 로어, 천사들과 말하다, 번역 중인데 예쁜 새끼 지네가 달려든다. 수건으로 곱게 싸서 마당에 놓아준다. 고아(孤兒)가 된 아기 지네, 풀숲으로 기어든다. (2017. 5. 3)
⎈ 리처드 로어의 ‘단순함’ 번역을 마친다. 재미있고 신선한 여정이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과장된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이 아니라 순수한 묵상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자아상(像)도 필요치 않게 되지요. 이 말이 지나치게 심원한 말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그렇지 않으니까요. 그것은 진정한 기도를 할 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우리가 침묵 속으로 들어가 세상의 판단에 휘둘리지 않을 때, 남들의 에너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에 더 이상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때, 그때 우리한테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있는 그대로 우리예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광야로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서 더 깊은 곳으로 내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해요. 그때 맛보는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 따라서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화지요.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상으로 받는 평화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다.” 라고 말하는, 자기가 만들었든지 남들이 만들었든지, 그게 바로 자아상(像)이다. 그걸 만들지 말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 묶이거나 속지 말라는 얘기다. 아니, 그것에서 저절로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하라는 얘기다. 아멘이다. (2017. 5. 5)
⎈ 옛 목포의원 자리에 새로 문을 연 아트하우스 오프닝 행사에 다녀왔다. 새로 단장한 건물에 젊은이들 드나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 건물의 주인이던 여(呂) 원장은 거기가 당신 일하던 곳인 줄 처음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과연 인생무상이다.
창해가 남진야시장에서 점심으로 대접한 고등어구이를 맛있게 먹고 일부가 운전하는 차로 돌아오는데 미안하긴 했지만 오는 길 내내 조수석에서 달게 자버렸다. (2017. 5. 6)
⎈ 며칠 만에 ‘천사들과…’ 번역. 과로로 탈진상태인 릴리에게 천사가 말한다. “너에게 밀알 열 개가 있다. 그 이상은 없다. 너는 그것들을 열 번 나눌 수 있다. 스무 번은 아니다. 네가 밀알 하나를 둘로 쪼개면 그것이 싹을 틔우겠느냐? 아주 조심해서 나누면 그럴 수 있겠느냐? 밀알 한 알에는 낡은 것과 새 것이 들어있다. 그것들은 쪼개질 수 없다. 너의 머리로는 낡은 것과 새 것을 구별 못한다. 네가 새 것이라고 보는 그것이 벌써 낡은 것이다. 나누지 마라, 판단하지 마라. …그냥 심어라! 그러면 새 것이, 씨도 아니고 싹도 아닌 새 것이, 자랄 것이다. 거기 있는 모든 것이 새 것을 위한 거처일 따름이다. 씨로 하여금 손닿지 않은 옹근 전체로 떨어지게 해라! 그래야만 그것이 싹을 틔우고 번식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나를 통해서 싹을 틔우는 새 것을 위한 거처일 따름이다. 그 새 것이 무엇이냐는 묻지 않겠다.
미세먼지가 사흘째 극성이다. 용화사 텃밭 완두콩을 일꾼들이 거두고 있다. 파란 콩알들이 콩깍지 속에서 저희끼리 이제 됐어, 안심이야, 라고 속삭이는 느낌이다. (2017. 5. 7)
⎈ 새벽에 번역하는 꿈을 꾸었다. 글이 제법 길었는데 깨고 나니 거의 다 사라지고 마지막 문장 하나가 그것도 절반쯤 남아있다.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몇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음) 막강(莫强)했지만, 우리보다 자유로운 하느님의 힘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아, 힘의 근원이 자유에 있었구나, 감탄하다가 깨어났다. 세상에! 땅의 온갖 패역을 묻지마로 수용하는 저 하늘의 자유를 어느 힘이 능가할 것인가? 불어오는 폭풍에 말없이 꺾이고 찢어지는 저 나뭇가지의 자유를 어느 바람이 이길 것인가? 자유란 그런 것이다.
효선이 어버이날을 맞아 서울 모친에게로 갔다. 가서 엄마와 함께 하룻밤 자고 오겠단다.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 일인가? 순천에서 우리와 함께 천(天)에 순(順)하며 살자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 사람이 말년을 보내기에 순천만큼 좋은 땅이 어디 있겠는가? (2017. 5. 8)
⎈ 새벽부터 비가 오시는데 마을 늙은이들이 우산 쓰고 학교 교실에 마련된 투표장으로 모여든다. 도무지 그럴 이유가 없는데 괜히 쓸쓸하고 언짢다.
‘달라이 라마와 그가 만난 사람들’ 번역. 인도 귀족 출신 노동자 로이가 설립한 맨발대학에서는 문맹(文盲)인 4, 50대 ‘할머니들’을 훈련시켜 태양열 전기 엔지니어로 배출한다. 그러면 그들이 자기 마을에 돌아가서 태양열로 전등을 밝힌다. 로이가 달라이 라마에게 말한다. “유엔의 한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어요. 거기서 내가 말했지요. 우리는 아프간 여성 셋을 인도로 데려왔는데 그들의 비행기 표도 우리가 샀고 그들을 여섯 달 동안 훈련시키는 데 필요한 숙소와 장비도 우리가 마련했어요.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그들은 다섯 마을이 태양 에너지로 전기를 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유엔 관리들에게 물어봤지요. ‘그렇게 하는 데 총비용이 얼마 들었는지 아십니까?’ 대답을 못하더군요. 내가 말했어요. 유엔 자문단이 카불에서 1년 동안 데스크에 앉아 있으면서 쓴 경비와 같은 액수였다고. 그리고 또 말했지요. 유엔 자문단이 7백 명이나 되는데 그들에 의하여 태양열 전기를 쓰게 된 마을이 아직 하나도 없다는 건 좀 이상한 일 아니냐고.” (2017. 5. 9)
⎈ 예상했던 대로, 문 변호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위와의 표차가 크면서도 득표율은 과반에 훨씬 못 미친 것이 당당하게 일하되 겸손히 조심하라는 하늘의 절묘한 명령이라고 언론들은 말하고 있다. 효선은 집수리 공사현장에 새벽부터 나가 있고 나는 7학년 마음공부 마치고서 뉴스 보다가 정신없이 낮잠을 잔다. 오랜만에 바닷길 산책. (2017. 5. 10)
⎈ 새벽에 번역하는 꿈을 꾸다가 웃으며 깨어났다. 서너 줄의 영어 문장인데 중간의 한 문장만, 그것도 옮겨진 한글 문장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대중의 견해에 따라서(according to a mass opinion) 결정된다면 나와 나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그러니까 한 나라의 중대사인 대통령 선거가 ‘소리의 숫자’(빌라도가 예수를 군중에 넘겨주던 때를 언급하면서 루가는 한 마디로 “그들의 소리가 이겼다”고 말한다)로 결정된 어제의 사건이 아직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꿈이 속삭인다. 그래서 조금 웃다가 깨어났다. 괜찮다, 그래도 그것이 개인한테서는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나는 군중 속에서 외로움을 느낄 수 있듯이 군중 속에서 당당히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 내 속에서 버릇처럼 굳어진 다수의 횡포를 근절하자. 그리고 오랜 세월 무시되었던 한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며 살아보자. 하면 된다.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일인데, 그것도 몸으로 몸을 죽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마음을 죽이는 건데, 안 될 이유가 없다.
아침 일찍 공사판에 갔던 효선이 잠시 몸을 씻으러 왔다가 말한다. 마대자루에 부서진 시멘트 조각들을 담는데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말이 자기를 떠나지 않더라고.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서두르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고, 무슨 특별한 일을 한다는 의식도 없이, 일하는 순간순간, 다음 번 일하는 사람한테 짐 될 일만은 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에 말없이 충실한 이것이 부처에게 귀의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나중에 들더란다. 오늘 참 큰 은혜 입었다고, 만사를 그 한 마음으로 하자고, 진심으로 축하. 오, 한님! (2017. 5. 11)
⎈ ‘천사들과 말하다’ 번역. “충분히 자란 어른이 계속 자라면 그것은 비만(肥滿) 또는 종양(腫瘍)이다. …너는 충분히 자란 어른이다. 새로운 것, ‘아이’를 낳아라! ‘너 자신’을 자라게 하려고 하지 마라!” 여기서 천사가 말하는 ‘아이’는 ‘아름다움’이다. 네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 되지 말고 아름다움을 낳는 사람이 되라는, 아름다운 얘기다. (2017. 5. 12)
⎈ 집수리 현장에 다녀오다. 두 목사가 마무리작업에 수고가 많다. 효선도 일꾼 한 몫을 톡톡히 한다. 고단하다면서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출근이다.
창해, 모레 스승의 날에는 못 온다면서 미리 화분 하나 들고 다녀간다. (2017. 5. 13)
⎈ 용화사 예배에 오늘은 순천시내, 광주, 전주, 나주에서 약속 없이 방안 그들먹하게 사람들이 모였다. 이런저런 화제로 이야기도 풍성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초점은 그분께로! 이를 놓치지 않으려 속으로 자주 돌아본다. 그것이 저절로 되어야 하는 건데…
예배 마치고 바람빛 주택 신축공사 현장 다녀옴. 차분하게 정리되는 모양이 보기에 좋다.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한 사람들의 손길이 느껴지면서 괜히 흐뭇하다. (2017. 5. 14)
⎈ 새벽, 타라 브라크의 글을 옮기다가 또 눈시울을 적신다. 이런 얘기다.
―한 여인이 크리스마스에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여행을 하게 되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두 살배기 아들이 자기 의자를 빙글 돌리더니 건너편에 있는 누군가를 큰소리로 불렀다. “아찌!” 아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때 묻은 옷에 머리가 엉클어진 노숙자 차림의 중년 사내였다. 그가 아이를 마주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오냐, 꼬마야! 어, 그래! …햐, 그놈. 귀엽게도 생겼네.”
여인과 남편이 일그러진 시선을 교환하였다. 식당의 다른 손님들도 눈썹을 찡그리며 아이와 사내를 흘낏거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불편한 분위기는 가시지 않았다. 노숙자 차림의 사내가 온 식당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계속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어이, 꼬마 신사! …너, 까까중 할 줄 아니? …너 말이야, 너 가위바위보 할 수 있어?” 그녀와 남편은 당황스러웠다. 일곱 살배기 큰아들도 저 아저씨가 왜 저렇게 큰소리로 말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의자에서 돌려 앉히려고 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아찌’한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식구들이 식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남편은 서둘러 계산하고 큰아들을 차로 데리고 갔다. 여자가 두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고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면서 조심스럽게 사내 앞을 통과하여 식당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원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아이가 두 팔을 치켜들고는 노숙자 차림의 사내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안아달라는 몸짓을 했던 것이다. 동시에 여자는 남자의 눈빛에서 괜찮으면 아이를 안아볼 수 있게 해달라는 마음을 읽었다.
미처 뭐라고 대답할 사이도 없었다. 아이가 자기 몸을 허공에 던지듯이 낯선 사내 품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아이가 남자 어깨 위에 제 머리를 얹으며 안길 때 사내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맑은 눈물이 맺히는 것을 그녀는 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아이를 어르며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제발, 이 아이를 사랑으로 잘 돌봐주시오.”
그러고는 마치 자기 가슴의 일부를 떼어주기라도 하듯이 아이를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돌려주는데, 그 입에서 이런 말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부인,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오늘 당신은 나에게 아주 소중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어요.”
그녀는 입속으로 대꾸를 얼버무리며 아이를 안고 서둘러 식당 문을 나섰다. 그녀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입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 하느님, 오, 하느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수원 루터교회 윤병상 목사 일행 다녀감. 다음 주에 교회를 사임하고 강원도 양구 어머니 계신 집으로 퇴거한단다. 축하해주었다. 함께 집수리 현장에 가서 일꾼들 점심 대접하고 나를 학교에 데려다 준 다음 바로 귀로에 오른다. 고마운 사람들. 두고 간 꽃다발이 뿜어내는 은은한 향기가 방 안 그득 흐르고 있다.
오늘 하루 인터넷에 접속하지 말라고 해서 뉴스도 보지 못했다. 무슨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단다. 악성 바이러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사람들은 왜 그러는 걸까? 그러면 돈이라도 생기는 걸까? 모르겠다. 아무튼 괜히 그러는 건 아닐 텐데, 자기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그건 아마 모를 거다. (2017.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