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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예수님은 부활이시요(김SSO)
요한복음 11:25-26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를 가르쳐 말씀하실 때에 나는 부활이다, 생명이다 라는 말씀이 여기 나오고 그리고 11장 6절에는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유태인들 가운데 예수님이 마지막 때 인류가 부활한다고 하는 사실을 안 믿는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을 가르켜서 사두개인이라 부른다.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활을 주신다, 우리가 다 부활해서 심판을 받는다라는 것을 믿었지만 사두개인들은 부활 자체를 믿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고 인간의 말을 섞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했던 무리들이 예수님 당시에도 많이 있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그랬다면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재림이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때에 세상은 어떻게 되는가 교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워지니 오늘날 교회가 점점 쇠퇴해진다. 특히 코로나 이후에는 주일에도 교회에 나오지 않고 기독교 방송에서 나오는 목사님들 설교로 대체하면서도 자신이 주일을 잘 지켰다라고 생각한다.
중요한것은 부활이,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다 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는다, 마지막 날에는 부활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심판 받는다 라는 것을 교리적으로만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우리가 부활의 생먕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로 부활이다 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예수님은 말로만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증명해 주시기 위해 죽은자들을 살려내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 성경에 세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는 마가복음 6장,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은지 얼마 안되서 예수님이 들어가셔서 그의 딸을 일으켜 주신것. 둘째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어서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상여를 매고 나갈때. 셋째, 요한복음 11장, 유명한 나사로의 부활. 죽은지 나흘니 되어서 무덤에 장사를 다 지냈는데 주님께서 마리아의 집에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면 오늘의 본문 말씀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다 말씀하시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고 마르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다짐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자를 살려내신다. 이 세번의 기적의 역사를 보여주시고 그 다음은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지만 다시 살아나게 되실 것을 예언을 하셨다. 이 예언은 성경에 여러차례 나타나는데 마태복음 16장 21절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그 다음에 너희가 정말 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렇게 믿느냐, 믿는다면 이 말씀이 부활과 연결된다. 17장 앞부분에서는 변화산에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될 것이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고 이런 사역을 통해서 인류 구속의 대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다 라는 것을 나누었다. 제자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성령 받고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이런 뜻이구나 라고 깨달았다. 그 때 당시에는 도무지 깨닫지 못했지만 성령께서 오셔서 깨닫게 해주셔서 깨달아지게 되었다. 오늘날도 우리가 성경을 읽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말씀들이 가득하나 성령충만을 받고 나면 성령님이 우리의 지각을 열어주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이 새로워 지고 우리의 삶이 새로워질 수 있도록 해주신다. 이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부활신앙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지만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일어선다,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칠 자가 없고 우리를 무너뜨릴 자가 없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하는것이 바로 이 부활 신앙이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지만 제 3일에 살아나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마태복음 27장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지만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가 있을까. 중요한 것은 첫째는 교리적으로 또는 사건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된다. 이것을 우리가 체험해야 된다. 그냥 입술로만 믿는것이 아니라 이것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있다. 가롯유다가 죽고 새로운 제자를 맛디아를 뽑게 될 때에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정할 때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실 때부터 우리와 항상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한 사람을 택하자고 하였고,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전할 사람이어야 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격이 없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모든 전도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대원칙이다. 우리가 어린아이 때부터 평신도로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우리는 주님과 항상 동행하는 체험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것이 기본적인 전제고 둘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이 되야 한다. 입술로만 믿고 머리로만 믿는것이 아니고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는 체험을 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이런 체험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셔서 저절로 믿어지게 하는 이 역사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감사함이 넘치는 가운데서 주님을 섬길 수 있다.
부활신앙을 가진 생활. 평소에도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늘 체험하고 깨닫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래서 주님으 십자가의 은혜 그리고 부활하신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일하겠다고 하는 확실한 체험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 체험을 전하는 사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 우리를 살리신다,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당신에게 생명을 주신다 이런 놀라운 메세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새 생명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과연 내가 전도자로서 자격이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된 사람은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특별히 어려운 나라보다 오히려 선진국에서 공허함으로 인해 자살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크리스천의 부활 신앙이 필요하다. 우리가 복음을 빨리 전해서 모든 사람들이 형식 적으로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부활신앙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전해야 한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은 살아갈 때에 어려운 일들이 끊임없이 찾아오지만 그런 일로 좌절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더 힘차게 전진해 나간다. 인생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의 신앙은 더 새롭게 비상에 올라갈 수가 있다. 세상을 볼 때에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오히려 이 어려움이 우리를 더 성장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감사하는 자가 되자. 오늘날 하나님은 이 부활 신앙을 가진 자를 찾고 계신다. 어떻게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첫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영이 없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이 없다는 뜻이다.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진 사람이 되야한다. 이 마지막 때에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 부활신앙을 가지고 마귀와 거짓 종교를 따르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따르는 자들이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서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편 1장 1,2절 말씀 그대로 살자.
42. 나는 부활이요
오늘 말씀은 더 좋은 부활에 대한 말씀이다.
성경은 더 좋은 부활에 대하여 세가지로 말한다. 첫째, 악인들은 심판의 부활을 받고 선한 일을 행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을 받는다. 우리는 심판의 부활을 받지 말고 생명의 부활을 받아야 한다. 둘째, 둘째 부활보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죽음 후에 오는 부활만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부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오늘 부활의 승리에 대해서 부활이 우리의 삶에 얼만큼 중요한지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으로만 끝나고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생명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도 아름답게 이루어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를 세가지로 말 할 수 있다. 1) 예수님은 마귀에게 이기셨다.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이다. 마귀와 그리스도의 싸움이다. 2) 예수님은 사망으로부터 이기셨다. 예수님은 사망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믿는자에게는 사망이라는 것이 없다. 물론 육신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은 살아서 하나님과 함께 천국의 낙원에 거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받으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것이다. 부활의 승리는 사망에 대한 승리이다. 3) 죄의 대한 승리이다.
첫번째, 마귀에게 승리한 것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먼저 마귀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요한복음 4장 44절에 예수님께서 유태인들을 책망하실 때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구나. 마귀의 첫째 특징은 욕심이다. 욕심은 끝없이 만족을 모른다. 자기가 가진것에 만족할 줄 모른다. 이 세상의 욕심을 버려야 한다. 둘째,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라고 말씀하셨다. 남을 미워하고 헐뜯고 시기 질투하고 남을 짓밟아 이기려는 마음으로부터 승리해야 한다.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속에 있는 악한 마음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셋째 예수님께서 설명하시길 그의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말할 때마다 거짓을 말하나니 이는 마귀가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하셨다. 뱀은 거짓말을 가지고 하와에게 왔고 하와와 아담은 그 거짓에 넘어가 결국 거짓의 종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거짓을 물리치려면 진리를 가져야 한다. 교회에 다니는 척하고 믿는 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읽고 진리를 사모해야 한다.
둘째. 사망으로부터 이기는 것. 유명한 19세기 덴마크 철학자 키르케고르가 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말하길 절망 때문에 사망에 이른다라고 말하였다. 마귀는 우리게에 절망을 넣어준다. 인간은 조금한 좌절에도 절망이라는 병에 걸리고 나중에는 폐인이 되거나 자살하는 일이 많이 있다. 죽음에 이르는 것은 허무 때문이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죄로부터의 승리이다. 아담이 죄를 지어 사망이 찾아왔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부활뿐이다. 어려움 가운데 강제로 믿음을 저버리게 만드는 박해 속에서도 우리는 꿋꿋하게 이겨나가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자. 지금은 옛날 같은 박해가 없어졌지만 박해가 없어지고 나니 오히려 신앙 생활이 더 게을러지고 신앙을 저버리는 일이 생긴다.
마지막 부활의 첫 열매란.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로 먼저 부활을 하셨다. 고린도전서 15장 23-24 절에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이 그리스도께 붙은 자요, 속한 지요 그리고 가 다음에는 나중이니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셔서 모든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 앞에 돌려드리는 때에 인류의 총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거룩한 사람들 장차 천년 왕국에서 왕 노릇 할 자들이다. 이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아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사람들이고 이분들이 이 땅에 내려와 천국왕국을 이루어 신령의 몸으로 육체를 가진 인간들을 돕고 다스리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을 가르치고 이 세상을 아름다운 지상 낙원으로 만들어 나가는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이 첫 열매인 것이다. 둘째 부활은 천년 왕국이 끝난 다음 마귀가 무저갱에서 올라와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미혹해 하나님께 대적하게 만들 때 예수님이 저들을 다 쳐서 멸하시고 드디어 마귀의 세력을 멸하여 지옥에 던져놓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그 때 드디어 천국이 이루어진다. 마귀와 악인들은 불못에 넣어 심판에 던져지고 나머지 인류는 총 부활을 하게 된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가 다 살아나게 된다. 여기서 양과 염소, 의인과 악인이 갈라지게 된다.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되고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더 기도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지옥으로 향하여 달려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해 내는 거룩한 백성이 되야한다.
43.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요한복음 1:1-3, 14
예수님의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태초에 로고스가 (헬라어) 있었다. 로고스는 중요하게 크게 세가지 뜻이 있다. 첫째, 로고스는 우주와 자연만물의 이치이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이 정확하게 돌아가는 현상을 보았다. 우주만물은 저절로 무질서 없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있게 돌아가는 원리가 있다. 우리 인생에도 이치가 분명히 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 예수님을 설명할 때에 예수님이 로고스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셔서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나셔 이 우주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라고 선포하였다.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시작한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시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한다.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은 예수님이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예수님은 일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육신을 입고서 오셨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깨달알아야 한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내안에 거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 영이 바로 성령이시다. 오늘날 세상은 타락하여 율법고 지키지 않고 말씀도 연구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어두운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타락으로 인해 세상에 가난이 찾아오고, 온갖 범죄, 동성애 등 많은 죄가 생겨나고 있다. 경제의 어려움 그리고 전쟁의 위협이 일어나고 있다.
둘째 인생의 이치이다. 우리 인생은 동물이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아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를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 인생의 길을 배우지 않으면 타락이다. 모든 학문보다 중요한것은 인생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바르게 배워야 한다.
셋째, 로고스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말이다. 이성없는 말이 헬라어로 알 로고스라고 한다. 이성이 없이 옳고 그른것을 분별할 수 없다. 양심으로 선과악을 구분한다. 사람이 선과 악, 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성과 양심으로 분별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옳은 이성과 양심으로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과 양심을 살려내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 주셔야한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선한 양심이 살아나 하나님을 찾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져가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그대로 전하는 목사님들을 찾기가 어렵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인간의 이성, 양심을 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여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화게 되는 것이다.
44. 아브라함의 자손
창세기 15장 5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바깥으로 부르셔서 하늘의 별을 세어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창세기 12장에 처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나안으로 보내시면서 큰 복을 내려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창세기 13장에서 땅을 보여주면서 네 자손이 저 티끌과 같이 될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5장에서는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 약속 하신다. 이 약속이 무슨 말씀인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13장과 15장에서 하나님이 티끌과 별과 같이 자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이 자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손이라는 단어가 복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길 네 자손이라고 말할때 여러사람을 가리켜 자손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고 한다. 곧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서 혼선이 오는 것이다. 영어 성경을 보면 단수라는 단어라는 것이 확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한국성경을 읽고 자손이라는 단어를 보면 자손들이라고 복수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자손이라는 단어는 모두 단수가 아니다. 15장 다음에 나타나는 자손이라는 단어는 복수이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손이 창세기 15 장에 나오는 자손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자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실한 성도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이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신약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자손이라는 단어를 볼 때 복수로 사용되는지 단수로 사용되는지 봐야 한다. 바닷가의 모래알 이라는 말과 땅의 티끌이라는 단어 등 모든 자손이라는 말을 종합 해서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을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육신의 자손과 영적인 자손이다. 육신의 자손은 티끌과 모래알과 같이 많은 자손들이다. 실제로 하갈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 자손들과 이삭의 자손들이 있다. 성경에서는 이스마엘과 후처가 낳은 자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삭으로 말미암은 자손만이 하나님의 자손이다. 이삭은 약속을 따라서 낳은 자고 성령을 따라서 난 자다. 마지막 때에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땅 위에 티끌과 같이 많은 자손이 아니고 바닷가의 모래알 같은 자손이 아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가리키며 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라고 칭찬 하셨고 나다나엘을 만나실 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고다 하고 칭찬하셨다. 우리가 말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하지 말고 예수님이 인정해 주시는 참된 자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약속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가득 품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고 외우며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 나가며 하나님의 참된 자손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이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는가,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귀중한 질문이다. 우리는 이삭처럼 약속을 따라서 난 자가 돼야 되고, 성령을 따라서 난 자가 돼야 된다. 약속을 따라서 난 자는 그의 속에 약속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있으면 약속을 따라서 난 사람이다. 시편 1편 말씀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한다. 주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은 약속을 따라 난 자들이다. 약속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자녀가 되어 마지막 때에 성령이 충만한 자가 되어 마귀의 권세을 이기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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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러시아에서 자라고 남편따라 한국으로 유학생 가족으로 와서 잠깐 살다가
다시 러시아로 가서 사역을 하는 사모가 이렇게 한국 말로 잘 써서 보내서 놀랍고 감동이 됩니다.
앞으로 부모님의 뒤를 이어 큰 사역자가 될 것을 믿고
신실하고 충성된 주의 종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