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정담 10
정태봉 장로
2016.1.14. 오후 7시
군산 수송동 소재 일품아구
‘그리운 고향’
1939년 9월 13일(음력) 거제도 섬마을 시골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 5남 1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 시절에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시절, 살기 힘든 시절, 그리고 그 시절에는 의무교육도 아니고 국민학교도 회비를 내고 다니는 시절이었다. 회비를 못 내어 학교에서 회비 가져오라고 고개 너머 집에까지 쫓겨 오기도 하였다.
어린 그 시절에 마음이 너무 강팍하고 당돌하여 누구의 말도 잘 듣지 않고 강인하게 자랐다. 소꿉장난을 하며 친구들과 놀고 있으면 장난하느라 건드리고 가면 그것을 장난으로 받아주지 않고 시비를 걸어 어른이건 아이이건 간에 왜 가만히 놀고 있는 사람을 건드리고 가냐 하며 끝까지 따라가서 심지어는 그 집에까지 찾아가서 장독이건 어디건 돌멩이질 하여 항아리까지 깨지고 하는 일까지 생길 정도로 부랑을 부리곤 하였다.
동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아이는 기가 너무 세니까 절에라도 가서 불공을 드려야 한다하니 어머니께서 마산 절에 매년 4월 초팔일이면 불공을 드리곤 하였다. 우리 막내 고모님께서는 이 개구쟁이를 어느 형제보다 사랑하여주셔서 울면 업어주고 달래주었다. 그러나 업어주면 등 뒤에서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하여도 이놈 보아라 하면서 달래주었다. 옛날에는 삼베를 짜는 길쌈이 있었다. 그 삼을 삼는 광주리를 엎어버리고 매를 맞다가 도망가기도 하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년 쉬었다가 1953년 8월에 군산으로 올라와 오촌 당숙부님 댁에 아들이 어려서 당숙부님 댁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고향이 너무 그립고 가고 싶어 군산 역에 나가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다가 기차가 떠나려고 기적을 울리면 발걸음을 옮겨 해망동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군산이 낯설고 정이 들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 시내를 지나다 경상도 말씨를 하는 사람이 지나가면 뒤를 따라 가보기도 몇 번을 반복해 보았다. 그러나 당숙부님 숙모님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로 방황하지 않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음을 감사드린다.
5.16 혁명이 나고 군에 입대하여 33개월 20일, 군 생활을 마치고 제대하여 바로 숙부님 댁으로 가 모든 집안일을 맡고 관리까지 시작하게 되었다. 어려움도 많고 서러움도 많았으나 보람 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러 이웃들과 친척들의 요시찰 인물이요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기에 더욱 더 최선을 다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숙과 겸상을 하면 하는 말씀이 “너는 참아야 이기는 것이다”라고 늘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학교 때 3년간 담임하신 선생님도 ‘백인 천인(百忍千忍)’이란 사자성어를 주시면서 “너는 한 번 참고 또 한 번 참아야만 승리하는 것이다” 하시는 말씀이었다.
방학 때 고향에 가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태봉이입니다 하면 몰라보셔서 제가 부랑장이입니다 하면 그때야 알아보시고 “그래 이렇게 얌전한 사람이 되었구나” 하시면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봄이 오면 아직도 고향 뒷산에 진달래꽃이 피고 포근히 안아주는 아름다운 고향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