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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슥 10:1-7)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처참하게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과 황폐화된 도시와 허물어진 성벽을 보고, 절망하였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 스가랴 선지자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물질적인 재건보다 먼저 영적인 재건이었고, 스가랴는 바로 그 영적 재건을 위해 부름을 받은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무너진 현실을 보지 않고, 회복될 미래를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하게 다가올 미래를 예언한 선지자가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기억과 회복을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가장 어두운 밤에 가장 밝은 별을 보여준 새벽의 선지자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고통과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느꼈던 절망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었다고 탄식했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과 눈물, 그리고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한순간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처한 환경이 아무리 비참해 보여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환경보다 언제나 크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수첩에 기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 한 방울도 병에 담아 두십니다.
잊혀진 자녀란 하나님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1절 말씀입니다.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이스라엘에서 봄비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함의 증표였습니다. 비가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땅을 기억하신다는 신호였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비”가 아니라, “때”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봄비가 올 때에”
“봄비가 올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봄이면 당연히 봄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봄비가 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봄비의 계절을 정하셨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비를 당연하게 받으려 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비가 올 때가 되었으니 오겠거니 하는 영적 타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를 내려보내실 때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봄비가 올 때에, 비를 구하지 않는 자는 비가 오는 날 지붕 아래 앉아서 목마르다고 탄식하는 어리석은 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때를 놓치지 않는 영적 민감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더욱 담대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고 해서 기도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속 때문에 더 기도해야 합니다. 구름이 떴을 때 비를 구해야 하며, 은혜의 문이 열렸을 때, 우리는 그 은혜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영적 은혜의 창은 영원히 열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듣지 않으면, 그 음성은 점점 멀어집니다. 은혜의 계절에 무감각한 자는, 추수 때가 지난 후에야, 낫을 드는 농부와 같습니다. 은혜는 자동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은혜는 구하는 자에게 집중적으로 임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영적 비극은 은혜의 단비가 내려오지 않는데도, 목마름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문제에 무관심한 것은 죽어가는 사람이 치료를 거절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 아버지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를 잊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비가 올 때가 되었으니 비를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에 빠진 이들은 폭풍의 신 바알이 비를 준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공식적으로 섬기면서도 집 한 구석에 몰래 세워두던 우상이었습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배교가 아니라, 은밀한 이중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삶의 실제적인 문제에서는 다른 것에 의존하던 이중적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쉬기까지 쉼을 얻지 못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주님 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결코 평안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진리를 알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것에서 쉼을 찾으려 합니다. 이것이 바로 드라빔의 유혹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붙잡고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현대의 드라빔은 무엇입니까? 재물일 수 있고, 인맥일 수 있고, 건강일 수 있고, 자녀의 성공일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의지할 때, 그것은 드라빔이 됩니다. 현대인의 우상은 신전에 모셔져 있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우상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훨씬 더 교묘합니다.
2절 후반부를 보면,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목자 없는 양의 비극이 바로 우상을 따르는 삶의 결과입니다. 목자 없이 유리하는 양의 이미지는 구약 전체에서 반복되는 비극의 이미지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길 잃음이 아니라, 방향 자체를 잃어버린 영적 방황입니다.
우상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것마저 빼앗아 갑니다.
드라빔에게 줄 것은 있어도, 드라빔에게 받을 것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절의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라는 말에서 “구름”은 비를 동반한 강한 폭풍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만이 비를 내릴 수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신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붙잡고, 비를 내려 달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비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 부족한 것을 드라빔이나 복술자를 통하여 얻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드라빔이나 복술자는 그들에게 허탄한 것을 말하고, 거짓 꿈을 말할 뿐입니다. 결코 그것을 그들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연계의 비를 주관하시는 분이 은혜의 비를 주관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늘 문을 여는 열쇠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우상에게 구하는 것은 깨진 웅덩이에 물을 긷는 것이지만, 여호와께 구하는 것은 마르지 않는 샘 근원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비를 구하면, 하나님은 겨우 목만 축이는 “이슬” 정도가 아니라, 밭의 모든 채소를 적시는 “소낙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소낙비”는 “쏟아붓는 큰 비”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니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넉넉함으로 채우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포이트(잉크나 물약 따위를 빨아올려 다른 곳으로 옮기는 데 쓰이는, 고무주머니가 달린 유리관)로 은혜를 적시는 분이 아니라, 하늘 수문을 활짝 여시는 분이십니다.
말라기 3:10절을 보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는 말씀이 있는데, “쏟아붓겠다”라고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차고 넘칩니다. 메마르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지금이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목마른 이들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근거는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또한, 이 구절에서 주목할 것은 “유다 족속”과 “요셉 족속”이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입니다.
유다는 남왕국을, 요셉은 북왕국을 대표합니다. 분열되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함께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일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흩어진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포함합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존 번연은 자신의 감옥 생활을 회상하며, “나는 어떤 날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하나님은 나를 놓지 않으셨다. 내가 그분을 잊었을 때도, 그분은 나를 잊지 않으셨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이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깨끗하게 지우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단지 덮어두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었던 것처럼 회복시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단순한 원상복구가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욥기서의 끝을 보면, 욥이 받은 것은 처음 잃어버린 것의 두 배였습니다. 하나님은 인색한 분이 아니시라 풍성하게 쏟아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고통을 삶을 살았던 어떤 성도는 “그리스도는 내가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 가장 가까이 계셨습니다. 내가 그분을 향해 팔을 뻗을 힘조차 없었을 때, 그분이 먼저 내 손을 잡으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꺾지 않으시고, 오히려 은혜의 단비로 절망에 빠진 우리를 다시 세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단비, 축복의 단비를 하나님께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이 마지막 선언이 이 구절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근거는 우리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계에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선언은 출애굽기 3: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 기도의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들으리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아주 먼 미래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은혜의 단비가 필요한 때입니다.
간신히 목만 축이는 이슬이 아니라 축복의 단비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늘이 닫혀 있다고 느껴질 때, 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은혜의 비가 내린 후의 결과는 아주 놀랍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들의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로 말미암아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여기서 “에브라임이 용사 같이 된다”라는 말은 비굴하게 살던 자가 당당하게 일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은혜를 받은 성도는 더 이상 두려움의 포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낙비를 맞은 자는 척박한 땅에서도 뿌리를 내리는 나무와 같습니다.
여기서 “즐거움”은 단순한 감정적 흥분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안개와 같으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영혼의 골수에 사무치는 생명수와 같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약속하지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고통을 약속하시지만, 기쁨을 주십니다. 이 역설 속에 복음의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기쁨은 시련이 클수록 더 깊어집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양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 안에 계신 주님이 그어떤 것들보다 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기쁨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자손들에게 흘러갑니다.
“그들의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부모가 은혜의 소낙비를 맞으면, 자녀는 그 축복의 강물에서 수영하게 됩니다.
우리가 씨앗을 뿌리면, 먼훗날 우리의 자녀가 그 열매를 따 먹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지금 은혜의 단비를 내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씨앗을 뿌린 후, 단비가 내리면 머지 않는 날,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물은 하늘로 증발하여 응결된 후, 비가 되어, 다시 땅으로 내려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이며, 하나님의 응답은 땅으로 내려오는 소낙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사람 이엠 바운즈는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놓는 것이다. 소낙비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빗물받이를 준비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영적 호흡입니다. 인간이 산소 없이 살 수 없듯,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시는 것은, 구함의 과정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영혼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말라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빈 그릇을 채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가득 찼다고 착각하는 그릇에는 아무것도 부을 수가 없습니다. 영적 빈곤을 인정하는 자가 영적 부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 힘으로 농사지으려던 교만의 삽을 내려놓고, 봄비 때에 비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안 계시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해결책을 찾기 전에, 먼저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서 왔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오늘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 비를 달라고 구하는 자는, 내일 하나님의 소낙비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낙비를 이미 준비하시고, 우리가 비를 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봄비가 올 때에, 비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 보좌에 상달되어, 우리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메마른 심령 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소낙비가 쏟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그동안 우리 마음속에 드라빔과 같은 우상을 세워두고, 허무한 복술자의 말을 쫓으며, 세상의 안락함과 성공이 우리 인생의 가뭄을 해결해 줄 것이라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영적 무관심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지금 우리의 심령은 메말라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밭은 주님의 은혜 없이는 한 줌의 알곡도 맺을 수 없는 황무지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은혜의 소낙비를 내려 주옵소서.
기도가 식어버린 우리에게 다시 뜨거운 간구의 심령을 주옵소서. 메마른 기도의 줄기가 다시 살아나게 하시고, 시들어가는 사명의 잎사귀가 생기를 얻게 하옵소서.
우리를 견고케 하시고, 흩어졌던 마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며, 무엇보다 우리 속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성령의 단비로 인해 우리 한마음교회가 아름다운 영적 정원이 되게 하시고, 우리 자녀들이 그 기쁨을 보고 함께 춤추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구름을 일게 하시고, 봄비를 내려주시며, 소낙비로 우리를 흠뻑 적셔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때를 따라 은혜의 소낙비를 풍성하게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