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二
하홍달(河弘達) 묘갈명(墓碣銘) - 최석정(崔錫鼎)
처사(處士) 하공(河公)의 휘는 홍달(弘達)이요 자는 치원(致遠)이다. 그 선조 하진(河珍)이 고려(高麗)에 벼슬하여 사직(司直)이 되었고, 10세(世)를 내려와 진천 부원군(晉川府院君) 하즙(河楫)은 시(諡)가 원정(元正)이다. 이분이 하윤원(河允源)을 낳으니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이요,
이분이 하자종(河自宗)을 낳으니 호는 목옹(木翁)이요 병부 상서(兵部尙書)였는데, 고려 말을 당하여 물러나 생을 마쳤다. 이분의 5자 3서(壻)가 모두 드러난 관원(官員)이었는데, 제3자는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요, 그 아우 하결(河潔)은 대사간(大司諫)이다.
참의(參議) 하금(河襟), 지중추(知中樞) 하여(河礪), 관찰사(觀察使) 하자청(河自淸)을 거쳐 문과(文科) 현령(縣令) 하효문(河效文)에 이르렀는데, 5세조(世祖)가 된다. 고조 하보용(河保溶)은 승훈랑(承訓郞)이요, 증조 하철부(河哲夫)는 참봉(參奉)이며, 조부 하무제(河無際)는 봉직랑(奉直郞)이요,
고(考) 하광국(河光國)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비(妣) 강양 이씨(江陽李氏)는 처사(處士) 이광우(李光友)의 딸로서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이경분(李景芬)의 후손이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어영준(魚永濬)의 외손인데, 규범(閨範)을 매우 갖추었다. 만력(萬曆)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뜻이 높고 엄정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6세에 부상(父喪)을 당했는데 슬퍼함은 성인과 같았다. 좀 자라자 백씨(伯氏)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를 따라 배웠다. 자라서 체구가 뛰어나게 크고 용력(勇力)이 있으며 활 쏘고 말 달리는 일을 익히지 않았으나 능하였다.
늘 붓을 던지려고 하였으나 백씨가 만류하여 그만두었는데 하루만에 묵은 습성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태도를 바꾸어 여러 경서(經書)를 읽었고 몸을 단정히 하였다. 어머니를 섬기되 정성을 다하여 날로 백씨와 좌우에서 즐겁게 모셨는데, 상(喪)을 당하게 되자 지나친 슬픔으로 파리해져 거의 몸을 유지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장제(葬祭)는 반드시 예에 따랐다.
상을 마치자 드디어 과문(科文, 과거를 위한 학문)을 폐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서재(書齋)를 지어 명칭을 ‘모한(慕寒)’이라 하였는데 배우는 자들과 날마다 주공(周公) 공자(孔子)를 강(講)하였고 아래로 정자(程子) 주자(朱子)에까지 이르니 족하리만큼 즐거웠다. 관례(冠禮) 계례(筓禮) 혼례(婚禮)는 주부자(朱夫子)의 가례(家禮)를 따랐고 조행(操行)이 매우 엄정하였으므로 향리에서 공경하였다.
감사(監司)가 행의(行誼)로 조정에 아뢰었고 백헌(白軒) 이 상공(李相公, 이경석(李景奭))도 유행(儒行)으로 추천하여 전조(銓曹)에서 막 유직(儒職)에 임명하려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몰(歿)하였다. 향년은 49세이다. 사우(士友)가 향리에서 서로 조문하였고 복(服)을 입은 자가 수십 인이었다. 고을 서쪽 정개산(鼎蓋山) 남쪽 기슭에 장사지냈다.
공은 약관에 향시(鄕試)에 입격하였다.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분명하였고 글씨는 힘찼으며 천문(天文)ㆍ의약(醫藥)ㆍ병서(兵書)에도 널리 통하였다. 비록 먼 시골에 거처하고 있으나 교류(交遊)하는 바는 한때 이름 있는 인사들이 많았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매우 밝아 궁달(窮達)과 요수(夭壽)를 논하면 곧 증험하였다.
공은 두터운 덕과 아름다운 행실, 높은 재주와 깊은 지식이 있어 세상에 쓰이고 시대의 모범이 될 수 있었는데, 마침내 광채를 감추고 먼 시골에서 생을 마치니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배(配)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대사간 유헌(柳軒)의 6세손이요 처사 유수창(柳壽昌)의 딸이다.
정숙하고 단정하였으며 여공(女工)에 능하였고 문자를 이해하였으므로 집안에서 여사(女士)라 칭하였다. 공보다 2년 뒤에 태어나 공과 같은 해에 몰하니 붙이어 장사지냈다. 아들 하철(河澈)은 힘써 배우고 가정의 가르침을 지켰으며, 딸은 백이장(白而章)과 권약(權鑰)에게 각각 출가하니 모두 사인(士人)이다.
손자 5인은 하덕망(河德望)ㆍ하덕윤(河德潤)ㆍ하덕유(河德裕)ㆍ하덕건(河德建)ㆍ하덕원(河德元)이요 손녀는 3인이다. (공의 사위) 백씨는 1남 2녀요 권씨는 2남 1녀이다. 공의 자제 하철이 천리(千里)에 서찰을 보내 나의 글로 명(銘)을 하기를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하씨(河氏)의 선조는 고려에서 드러났도다. 우뚝한 원정공(元正公)은 공훈이 새겨졌고, 병부 상서는 현명하여 용기 있게 물러날 수 있었네. 문효공(文孝公)의 아우는 대사간(大司諫)이 그 직책이라. 시랑공(侍郞公)과 관찰사공(觀察使公)은 관면(冠冕)이 대를 이었도다.
조금 부진(不振)은 있으나 이에 덕에 여유가 있구려. 아! 처사(處士, 하홍달을 지칭함)는 타고 난 재능이 특출하였는데, 호기와 슬기로움 숨기고 말이 법도에 맞았다네. 이에 백씨(伯氏)에게 미쳐 형제의 강론(講論)은 깊었다오. 집안을 다스림에는 몸을 복되게 하였고, 움직이면 예법(禮法)에 맞았다오.
골짜기에 난초 있으나 그 향기 막지 못했으므로, 유직(儒職)이 비었다 하여 우러러보고 표본으로 삼았도다. 어찌 쌓음은 두터운데 베풀음은 그다지 인색한가? 밭 갈고 개간하였으니 뒤에 먹을 수 있다네. 진양(晋陽)의 서쪽은 산은 굽어 돌고 물은 쌓이는데, 내 그 무덤에 명(銘)을 쓰노니 영원토록 빗돌 부스러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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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河弘達 墓碣銘[崔錫鼎]
處士河公, 諱弘達, 字致遠。 其先有諱珍, 仕高麗爲司直, 十世而至晉川府院君楫諡元正, 生允源, 晉山府院君, 生自宗, 號木翁, 兵部尙書。 當麗季, 退以終。 五子三壻皆顯官, 第三, 文孝公演: 其弟諱潔, 大司諫。 歷參議襟、知中樞礪、觀察自淸, 至文科縣令效文, 是爲五世祖。 高祖保溶, 承訓郞: 曾祖哲夫, 參奉: 祖無際, 奉直郞: 考光國, 隱德不仕。 妣江陽李氏, 處士光友之女, 尙書左僕射景芬之後, 司憲府執義魚泳濬之外孫也。
壼則甚備, 以萬曆癸卯生公。
幼踔厲不凡, 六歲丁外憂, 致哀若成人。 稍長, 從伯氏謙齊學。 及長, 儀幹魁碩有勇力, 射御不習而能, 常欲投筆, 伯氏挽止之, 一日痛掃除舊習, 折節讀諸經書, 加以斂飭。 事母夫人, 誠孝備至, 日與伯氏娛侍左右。 及遭艱, 毁瘠幾滅性。 葬祭必以禮。
外除, 遂廢擧, 專意學問, 築齋曰慕寒, 與學子日講說周公、孔子, 下逮洛、閩, 其樂囂囂。 冠笄昏從朱夫子《家禮》, 操履甚嚴, 鄕黨敬之。 方伯以行誼聞于朝, 白軒李相公亦薦儒行, 銓曹方處以儒職, 而公遽歿, 享年四十九。 士友相弔於鄕, 爲之服者數十人。 葬于州西鼎蓋山南麓。
公弱冠, 高捷鄕解。 爲文簡而明, 書法遒健, 星算、醫藥、兵流, 亦所旁通。 雖處遐僻, 所與遊, 多一時名行士。 鑑識甚明, 論人窮達夭壽輒驗。 公有敦德懿行、茂才深識, 若可以需世範時者, 卒之遁光鏟彩, 夭閼於窮鄕, 豈非命歟?
配全州柳氏, 大司諫軒之六世孫, 處士壽昌之女。 靜肅端敏, 善女工、解文字, 宗黨稱女士。 後公二歲生, 與公同年歿, 祔葬。 男曰澈, 力學守庭訓: 女適白而章、權鑰, 俱士人。 孫男五人: 德望、德潤、德裕、德建、德元。 女三人。 白氏一男二女。 權氏二男一女。 公之胤澈, 千里貽書, 徵余文爲銘。 銘曰:
河氏之先, 著于勝國。 嶷然元正, 勳伐載勒。 兵部斤斤, 勇退自克。 文孝之弟, 大諫其職。 侍郞、觀察, 纓冕代奕。 旣稍弗振, 迺嬴于德。 猗嗟處士, 受材挺特。 刮毫韜英, 言就繩墨。 爰洎伯子, 篪壎講頤。 處家禔身, 蠢迪禮則。 中谷有蘭, 其馨罔襞。 謂虛儒班, 佇瞻矜式。
胡蘊之厚, 而施孔嗇? 旣耕旣菑, 于後可食。 晉陽之西, 山紆水積。 我銘其藏, 永世靡泐。 <끝>